|
출처: 두 날개로 부흥하는 목양제일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jesuslove
참된 해방과 자유 로마서6장20-23 2018.8.12. 해방73주년
오늘주일은 73주년 광복절 8.15해방 기념주일입니다.
일본은 한반도보다도 먼저 기독교가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자는 일본에 극소수에 불과할 만큼 적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얼마나 철저히 기독교를 박해했는지 북한 공산당과 똑같이 했기 때문에 북한에도 교회가 없는 것이며 일본에도 기독교 인구가 늘지 못했습니다. 지금 북한에 교회가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없다는 사상을 관철화시킨 정치입니다. 다 죽여 버렸기 때문에 없는 것입니다. 1882년 한국인 이수정이라는 사람이 일본에 갔다가 일본 사람에게 전도를 받고 거기서 세례를 받았는데 이것이 한국인 최초의 세례자입니다. 일본 나가사키에 가시면 순교 선교 기념관이 마련되어 있는데 바로 그곳에서만 일본 기독교인 20만 명이 순교 당해 죽었습니다. 한국보다 순교자가 10배도 더 많습니다. 더군다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순교 성지가 일본에 있는데 험악한 산골짜기입니다. 그곳에서는 나가사키보다 더 많은 숫자가 다 순교당해 죽었습니다. 아주 씨를 말려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이 다 죽는 바람에 기독교가 번성할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1883년 4월에 일본 시바 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이수정은 이러한 진리를 한반도에도 전해야 되겠다 생각해서 일본 교회 지도자들의 협조와 그 당시 개화파 김옥균의 도움을 입어서 미국으로 두 번에 걸쳐 편지를 보냈습니다. “조선 땅에도 선교사를 파송해 주어서 기독교를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기초가 되어 이루어진 것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이 땅에 오게 된 것입니다. 일본과 북한 공산당이 기독교 박해만 하지 않았다면 아시아가 일찌감치 유럽 서구 사회같이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참으로 다행스럽게 한반도의 남한은 일본과 북한의 그 틈바구니에서 이렇게 기독교 국가가 된 것입니다. 구한말 당시 고종황제를 독살하려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서 고종 황제 말년에는 선교사들이 만들어주는 음식만 드셨습니다. 다른 사람은 절대 못 믿겠다고 했습니다. 결국 고종황제는 지금도 풀리지 않는 의문의 죽음을 별안간 당해서 장사지내지 않았습니까? 고종황제, 이승만 대통령이 기독교에는 절대 공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지금도 세상과 인류의 주인이 되시고 역사의 주관자가 되신다고 고백해야 법이 공정하게 만들어지고 실행되고 사회 질서가 바로 서고 정의의 기준이 서며 평화가 정착되고 잘 먹고 잘 살고 살맛나는 세상이 되고 두려움은 물러가고 안정이 오고 심판이 축복으로 변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상과 하나님이 없다 하는 사상의 차이가 우리 주변에 현실적으로 어떤 결과를 초래했습니까? 독일이 통일된 이후에 동독과 서독의 차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신문을 통해서 얼마든지 정보를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독일 사람들은 세계가 인정하듯이 근면, 성실, 절약으로 머리가 우수하고 한때는 세계를 위협했고 더구나 이 신학의 발전은 독일 유학 간 사람이라야 알아줄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인정을 받았습니다. 제가 그 시절 서독에 가니까 너무나도 부러웠습니다. 길거리에 벤츠, BMW가 즐비하게 있었습니다. 택시를 잡으면 벤츠가 와서 섰습니다. ‘와! 서독은 서독이구나! 국민들이 축구 구경과 음악회에 몰려다니면서 행복하게 살고….’ 동독에 가보니까 자동차들이 마치 경운기 같이 털털 거리고 돌아다닙니다. 그렇게 부지런한 민족이 게으르기 한이 없고 먹는 음식이 너무나 초라해서 여행객들이 “동독은 배고파서 못살겠다.” 먹을 만한 음식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동독 사람들의 소원은 “어떻게 해서든지 서독에 가서 일자리를 얻는 것이다.” 독일은 통일 이후 지금 가장 어려운 문제가 경제 운영이 맞지 않습니다. 동독의 한 교회 주변은 우리 일행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동안 동독의 국민들은 얼마나 게으르게 살았는가?” 서독사람 한 사람이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열 사람도 못해낸다고 합니다. 이데올로기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같은 땅에서, 같은 역사 안에, 같은 사람이 살고 있는데 무엇이 그렇게 큰 차이를 가져오게 했습니까? 이게 바로 사상이라는 것입니다. 이데올로기가 그렇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사회주의 40년에 동독은 그 꼴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다른 것이 들어가면 그 꼴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 없는 40년 만에 세상이 그렇게 뒤바뀌었습니다. 최고의 불행한 사상이 하나님 없다는 사상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북한의 김정은이 국민의 대단한 인기를 얻어서 위대한 지도자가 될 방법이 있습니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했던 일과 반대로 하면 됩니다. 하나님 없다 하는 사상을 하나님 계시다는 사상으로 바꿔서 실행하면 됩니다. 어떤 젊은이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오늘이라도 당장 신앙의 자유를 선언하고 이 땅에 선교사를 받아들이겠다고 누구든지 오라고 하고, 신앙 경제를 도입해 보십시오. 김일성이나 김정일이 했던 정반대로 하면 됩니다. 김정은은 젊은 사람이 세계적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기억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1945년 2차 대전이 끝날 때 맥아더 사령관이 동경에 갔을 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일본 국민들이 맥아더를 열렬하게 환영하러 길에 나오는 것입니다. 점령국 사령관이 피점령국가의 국민들에게 환영받은 역사가 없습니다. 그런데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일본 국민들이 맥아더를 환영했습니다. 일본의 천황도 맥아도 장군에게 만나달라고 면회 신청했습니다. 그때 맥아더 장군은 유명한 말을 종교적으로 했습니다. “I'm a human being. 나는 인간이오. 당신은 신이라고 말하는데 인간인 내가 어떻게 신을 만날 수 있겠소? 만약 당신이 세계를 향해서 방송으로 나는 신이 아니라고 한다면 내가 만나겠소.” 그래서 그 방송하고 만났지 않습니까? “그리고 앞으로는 2천명 이상의 선교사를 이 땅에 받아들이시오.”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일본에 선교사의 문이 열린 것입니다. 공산 국가의 첫 번째 사상이 뭔지 아십니까? “하나님 없다”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 없애버렸습니다. 8․15 광복의 숨은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없다” 하는 자의 패망이요 “하나님은 계시다” 하는 자의 승리입니다.
저의 생각에 영적으로 우리나라는 특별한 하나님의 영적 축복이 있는 나라와 국민이라고 확신합니다. 우선 창조주 하나님을 호칭하는 언어가 우리나라 같이 잘된 나라가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 유일신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천지에 한분이신 유일신이다.” 이 표현이 언어적으로 너무 잘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여기 일본어 전공하신 분 많이 계실 것입니다. 일본에 가서 하나님 믿으라고 해보십시오. “우리 집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자기들이 만들어놓은 우상을 표현하는 그 언어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표현하는 언어가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는데 우리 집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니 말을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도 임금도 하나님도 무당신도 다 똑같이 부르니 혼란이 옵니다. 유일신 하나님 개념이 없습니다. 우리나라 하나님은 아주 유일신 사상이 뚜렷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큰 축복입니다. “세상의 모든 역사는 절대 하나님이 절대 계시다.” 그 믿음에 기초해서 내 삶도 국가도 형성되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 하는 국민과 나라는 없어집니다.
우리나라 애국가는 찬송가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찬송가는 찬미가라고 해서 15곡으로 되어 있습니다. 15곡 중에 3곡이 나라와 임금에 관계된 가사로 되어 있습니다. 찬송가 1장이 그 당시 쓰던 사투리 발음으로 “우리 황상 폐하 천지 일월 같이 만수무강 산 높고 물 고운 우리대한제국 하나님 도우사 독립부강” 이것이 찬송가 1절입니다. 15곡 중에 14장이 지금 우리가 부르는 애국가 가사입니다. 이름 없는 신앙이 이름을 밝힐 수 없는 핍박 시대에 나라를 생각하며 지은 찬송가를 지금 우리가 애국가로 부르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곡조를 만들 사람도 없어서 스코틀랜드의 민요인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을 거기에 붙여서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찬송가 생각 안 나십니까?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이 곡입니다. 그러다가 1930년대에 와서 안익태 씨가 지금 곡을 작곡했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더불어 애국가로 선정되었습니다. 그래서 작사자 미상입니다. 찬송가라고 밝히지 않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시작은 찬송가로부터!” 이게 얼마나 큰 영적 축복입니까?
원래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자유롭게 살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유로웠고, 인간관계에서 자유로웠으며, 자연 만물에 메이지 않고 살았습니다.
에덴동산은 인간이 자유하며 살 수 있는 세계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자유를 잃었습니다.
죄의 종이 되었고 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죄에게 결박을 당했습니다. 그때부터 인간은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자유로운 관계가 끝났습니다. 부부간에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제 인간은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자유를 잃어버린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죄의 노예가 되어버린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는데 이 구원은 죄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유를 상실한 인간을 원래대로 회복시켜주기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구원 받는다"는 말과 "자유를 얻는다"는 말은 같은 뜻입니다. 자유라는 말은 "풀어준다", "해방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묶인 모든 결박들로부터 자유를 누리도록 풀어주는 것이 구원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죄의 결박으로부터 풀려서 자유인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자유인이 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영성으로 하나님과 자유로운 관계, 천지만물의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자유는 최고의 행복이며 최대의 영광이 됩니다.
자유로운 존재는 창조의 형상입니다. 오늘 잃어버린 자유를 회복하는 것이 바로 구원이고 이 구원을 노래하는 것이 찬송입니다.
자유인의 찬양, 자유인의 행복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것이 축제요, 예배입니다. 인간은 자유를 누리는 만큼 행복을 얻습니다. 자유가 없는 사람에게는 행복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이 돈을 벌어도 돈으로부터 자유를 누릴 수 있다면 행복할 수 있습니다. 권세를 얻거나, 명예를 얻거나, 세상에서 그 어떤 것을 얻든지 그것을 얻고도 자유로울 수 있다면 그것이 복이고, 그것에 매이면 복이 되지 못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라고 했습니다. "쉰다"는 말은 자유롭다는 말입니다. 마음에 근심이 있으면 쉬지 못합니다. 근심은 우리 마음을 결박시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쉼과 평화를 얻을 때 자유인이 됩니다.
1.인간이 누릴 자유
육체적인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육체적으로 병이 없어야 합니다. 병들면 자유가 없습니다. 건강해야 합니다. 또 우리의 몸이 결박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감옥에 들어간다든지, 묶임을 당하면 자유가 없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도 자유가 없습니다. 또 너무 많이 먹어도 자유가 없습니다. 적당히 먹어야 자유가 있습니다. 옷을 입는 것도 몸에 편한 옷을 입어야지 값비싼 옷을 사 입으면 여러 가지로 불편하여 자유가 제한됩니다. 우리가 먹어서 자유로운 것이 있고, 먹어서 부자유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2.정신적으로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마음에 근심이 있으면 자유가 없습니다. 마음에 평화를 항상 지녀야 합니다. 우리는 바르게 배워야 합니다. 잘못 배우면 그것이 고통이 됩니다. 아는 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아는 것이 도리어 근심을 주는 때도 있습니다. 인간의 자유 가운데 내적인 자유와 외적인 자유가 있습니다. 외적인 자유는 투쟁으로 얻습니다. 육체적인 자유, 정신적인 자유는 투쟁으로 얻습니다. 그러나 내적인 자유는 자기와의 싸움에서 얻습니다. 자기와 싸워서 이기는 자는 영적인 자유를 누립니다. 영적인 자유만이 참 자유입니다.
3.영적인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영적 자유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누리는 자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입니다. 영적인 자유만이 참 자유요,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자유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란 물론 주님 자신을 말합니다. 진리란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말합니다. 복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모든 참된 행복은 진리와 더불어 있고 모든 참된 기쁨도 진리와 더불어 있다. 진리가 떠나는 날 행복도 기쁨도 우리 곁을 떠난다."(잠바타) 사람이 진리를 알지 못하고 무지에서 종노릇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무지로 말미암아 오는 병, 잘못된 악습과 미신으로 종이 되어 있으면서도 그것을 모르고 끌려가고 있는 인간들이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해 주시는 진리 즉 복음을 알아야 하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유를 누리고 살아야 합니다. 그 진리 그 복음이 우리를 종에서 자유케 하고 멸망에서 구원해주시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우리가 구원받는 가장 중요한 진리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내 제자요 너희는 자유를 얻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자유가 바로 영적인 자유입니다. 진리로 자유케 되는 자유가 바로 진정한 자유입니다. 진리를 떠난 것은 자유가 아니고 방종입니다. 물고기가 자유로워지려고 물에서 나와 버리면 그때는 자유를 얻는 것이 아니라 죽습니다. 물속에 있는 것이 불편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물속에 있는 고기만이 끝까지 자기에게 주어진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아이가 부모님 간섭이 싫다고 자유를 얻기 위해 가출을 하면 이 아이는 죄악에 매이고, 방탕에 매여서 결국 타락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의 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 말씀을 떠나 궤도를 벗어났습니다. 인간은 그때부터 제정신이 아닙니다. 마귀에게 매이고, 죄악에 매이고, 정욕에 매여서 제정신을 가지고 살수가 없게 됩니다. 성경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고 확실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 안에만 진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진리만이 우리를 자유케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창조주가 천지를 창조하실 때 새를 만드셨고 새에게 날개를 달아주신 것은 자유를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새들이 날개를 펼쳐 움직이는 순간 창공을 날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걸어 다니라고 날개를 붙여준 것이 아니고, 뛰어 다니라고 날개를 붙여준 것도 아닙니다. 날아다니도록 날개를 붙여준 것입니다. 새는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자유롭게 다닙니다. 날개 때문입니다.
4.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최고의 축복입니다.
자유에는 외적인 자유가 있고 내적인 자유가 있습니다. 외적인 자유는 다른 사람과 싸워 이겨서 얻는 것입니다. 외부로부터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적인 자유는 자기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결박시키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결박시킵니다. 내 마음이 괴롭습니다. 탄식합니다. 원한에 사무칩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5.사랑으로 얻는 자유
진리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우리는 예수의 사랑으로만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고 네 원수를 사랑하라" 남을 미워하고서는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남에게 손해를 입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미운 사람이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어서 그 미운 사람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나도 미운 사람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미운 사람에게 매이게 됩니다. 손해보고 미워하면 이중 패배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미움을 받아도 사랑하고, 욕을 먹어도 사랑하고, 핍박을 받으면서도 사랑하는 일이 있어야 비로소 자유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곳에 자유가 있고 미워하면 죄의 노예가 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잃어버리는 것이 많습니다. 그것 때문에 마음이 상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소망을 잃지 않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늘나라 소망을 가진 자는 자유할 수가 있습니다.
8.15 해방 73주년을 맞으며 이스라엘 해방을 기억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사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그 첫째는 사백년간의 애굽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많은 기적을 나타내며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습니다. 그들은 감격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렸습니다.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출15:13) 주께서! 은혜로! 주의 힘으로!-오직 그들이 구원 받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광야에 사흘 길을 채 못가서 그 은혜와 감격은 잊어버리고 물이 없다고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정치적 해방은 받았으나 정신과 영적인 삶의 해방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차라리 애굽에 있었다면’하고 애굽을 동경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광야 사십년 이란 세월을 통하여 참된 해방의 역사를 이끌어 가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 진정한 영적해방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다윗왕국 이후 솔로몬 제위후 이스라엘은 분열 되었습니다.
나라는 힘을 잃고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남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 기간이 칠십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파사제국이 바벨론을 점령하면서 이스라엘은 해방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은 파사의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하셔서 예루살렘으로 귀향케 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이렇게 회고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시126:1-2) 이게 웬 갑작스런 해방인가? 꿈인가 생시인가 할 정도로 그들은 감격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예루살렘 성을 회복하고 성전을 되찾는 것, 그래서 희생 제사를 드리는 것은 그들 삶의 중심을 세우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해방의 감격과 기쁨을 잊어버리고 성전 짓는 것도 중단하고 자신들의 삶만을 추구하며 삶속에서 참 된 해방의 기쁨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노예생활이 너무나도 힘들었을 겁니다. 억압 받고 고달픈 자유롭지 못한 삶이 싫었을 겁니다. 그래서 이젠 전쟁도 없이 평안히 배부르고 잘 먹고 잘 살수만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 겁니다. 괜히 이간질 하는 사마리아 같은 주변 국가들에게 미움 받다 또 다시 포로 생활하게 될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그들은 그 거룩한 사역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의 두 해방의 역사에서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불순종과 죄로 말미암아 삶의 고통이 왔다는 것과
2) 그 고통에서의 해방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요, 사랑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3)그러한 해방의 감격과 기쁨을 쉽게 잊어버리고 원망과 불평의 역사를 만들어 갔다는 사실입니다.
4) 자기중심적인 삶을 위해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포기한 채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을 잊어 버리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쉽게 하나님의 사랑을 져버릴 수가 있습니까?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라”(엡2:8-9)우리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사랑으로 구원 받았음을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해방의 기쁨과 감격을 잊어버리고 살아왔다면 우리에게도 제2의 참된 해방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참된 해방과 자유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참된 해방은 그 아픔과 그 해방의 기쁨을 잊지 않는 삶인 것입니다. 그 은혜와 사랑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육신은 자유를 얻었으나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산다면, 마음의 성전을 짓기보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힘쓰기보다 자신의 삶을 앞세운다면, 참된 영적 해방과 자유를 맛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유월절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재앙이 건너갔으므로 그날을 기념하여 그 구원하심을 잊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이 지키는 유월절은 무엇입니까? 바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이었던가? 예수님이 내 죄 때문에 저렇게 고통당하시고 죽으셨단 말인가 ? 또한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내 죄가 저 십자가위에서 해결되었구나, 나의 영적인 해방이 저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졌구나를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유월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쉽게 잘 잊어버리는 민족’이란 말을 듣습니다. 이스라엘에 가면 히틀러의 나치 정권 때 학살 당한 육백만 유대인들을 기억하는 기념관이 있다고 합니다. 그 기념관 이름이 ‘야드바심’즉 ‘기억’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져 있다고 합니다.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 마라” 그 아픔의 날들을 후손대대로 잊지 않는 민족이 되어 오늘날 세계를 이끄는 뛰어난 민족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상처가 영광이 되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고통입니다. 아픔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로 하나님께 오늘 저와 여러분이 참된 해방을 가져다줬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로, 참된 해방과 자유는 삶속에서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해방된 자가 여전히 그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진정한 해방은 아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여전히 죄에 매여 있고 마귀에게 붙잡힌 인생을 산다면 어찌 진정 해방된 자의 삶을 산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 20절 말씀에 "전에는 죄의 종이 되어 부끄러운 일을 했었으나 이제는 죄에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그 영생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 때 참된 해방을 받은 자일 것입니다.
세 번째로, 참된 해방과 자유는 그리스도를 섬길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재앙을 내릴 때마다 자기의 행복 된 삶만을 위해 자유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출 8:1,20,9:1,9:13,10:3)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자유롭고 평안하고 행복한 곳을 찾아 보금자리를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언제나 하나님 앞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참된 해방과 자유는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의 손안에 달려 있습니다. 어느 날 창문 열고 손으로 흩으시면 자유도 행복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가 누리는 자유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진리와 의와 사랑을 선택하고, 선과 은혜의 길로 가고, 순종의 노예가 되는 데에 있습니다. 양심이 지시하는 길로 갈 때에 비로소 내가 자유할 수 있고, 내 영이 자유할 때에 내 몸도, 내 정신도, 내 이성도 밝게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중국 춘추전국 시대에 공무제라고 하는 노나라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신부라는 고을의 원님으로 있었는데 어느 날 불현듯 이웃 제 나라가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왔습니다. 공무제는 모든 고을 백성들을 서둘러 성안으로 모이게 하고 성문을 닫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마침 보리를 추수할 때인지라, 성 밖 들판에는 보리가 누렇게 익어 있었습니다. 만일에 성안으로 피해 들어간다면 제 나라 사람들이 이것을 다 약탈해갈 것입니다. 사람들은 공무제에게 말했습니다. "무조건 성안으로 피할 것이 아니라, 고을 백성들로 하여 금 내 것 남의 것 가릴 것 없이 보리를 추수해서 각각 가지라고 해버립시다. 그러면 너도 나도 달려들어서 재빨리 추수할 것입니다. 1년 동안 수고한 것이 아깝지 않습니까? 적에게 내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공무제는 안된다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결국은 그냥 성안으로 들어가 굳게 성문을 닫았고, 제나라 군사들이 그 많은 곡식을 거두어 가버렸습니다. 이 사실이 온 나라에 알려져서 공무제는 급기야 재판에 서게 됩니다. 임금님은 공무제에게 묻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적에게 이로운 일을 하였느냐? 차라리 그 곡식을 불질러버리든지 할 것이지!" 그는 정중하게 말합니다. "제가 한순간 적에게 이롭게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상황이 어렵다고 해서 백성들로 하여금 마음대로 거두어 먹으라고 한다면, 그들이 앞으로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아마도 피땀 흘려 살 생각은 안하고, 남의 것은 공짜로 아무 때에나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어쩌다 이렇게 불로소득을 한 것 때문에 비상시에는 아무 것이나 가져도 된다, 남의 것이라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못된 마음을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10년이 걸려도 고칠 수가 없습니다." 임금님은 공무제의 그 깊은 뜻을 헤아리고는 그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고 합니다. 여러분, 잠시 물질도 얻고, 잠시 다른 무엇도 얻고 합니다. 더욱이 우리는 전쟁이라고 하는 비상시국을 지내오면서 횡재하는 사람도 많이 보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도 많이 보았습니다. 정치적 혼란을 치르는 동안에 엉뚱한 사람이 부자 되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무너진 도덕성은 수십 년이 가도 고칠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렇습니다. 나가서 머리에 띠 두르고, 소리지르고, 데모다 파업이다 하면 당장에 뭐가 되거든요. 이것처럼 쉽게 되는 것이 없습니다. 이런 버릇을 들여놓으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폭력을 통해서 이익을 얻는 이런 사회제도 안에서는 이 세대가 참으로 자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의에게 종으로 드리라'--스스로 의의 노예가 되고, 의의 종이 될 때에 비로소 불의에서 자유할 수 있고, 죄에서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라도 이민족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진실하게 진리데로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데로 살아야 소망이있습니다.
1789년 봄 반란자들이 뉴질랜드 동쪽 6천 킬로 떨어진 작은 섬 피트케언에 정착하였습니다. 그들을 감독하던 블라이제독의 가혹한 대우에 분노한 반란자들은 제독과 추종자들을 배 한척에 태워 망망대해로 강제로 보내버렸습니다. 블라이제독은 무사히 고국에 돌아가 바운티호의 반란을 정부에 고하였습니다. 섬에 정착한 반란자들은 타히티 여자들을 아내로 삼고 일꾼을 모집하여 안정된 사회를 이룰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폭력, 간음, 알코올 중독의 소굴로 만들어 무법천지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10년이 지나자 질병과 폭력으로 많은 반란자들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딱 한 명 알렉산더 스미스만 그런 방탕한 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고 섬 주민을 교화하고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게 하였습니다. 1808년 피트케언 섬을 발견한 영국해군은 질서와 예의가 가득한 사회모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섬 전체가 완전히 변해 있었습니다. 이런 결과로 마침내 스미스는 사면이 되었습니다. 19세기 피트케언은 ‘경건’과 동일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은 사람을 변화하게 하고, 복을 받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합니다.
이 나라와 민족도 하나님 안에서 해방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스림을 받는 나라가 될 때 참된 해방과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은혜를 잊지 않고 그리스도를 섬김으로 말미암아 그 긍휼하심 안에서 참된 해방과 자유를 누리시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남북 통일의 축복을 받는 이민족이 될지어다 질병 가난 구습에서 진리로 자유케될지어다.
기도 「 하나님 아버지! 대한민국의 역사를 저희들은 영적으로 계산하고 해석합니다. 이 나라가 아무 힘도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우방 국가들의 힘을 빌려 이렇게 민족 해방과 독립을 가져올 수 있는 축복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과거에 지켜주신 하나님의 역사의 손길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 나라와 국민을 지켜 마침내 이 작은 한반도에서 비치는 진리의 빛이 온 세상에 구원을 비춰줄 수 있는 나라가 됨을 감사드립니다. 우리 모두가 그러한 믿음의 역사성을 가지고 이 나라를 지켜나가며 신앙을 지켜나가는 주님의 백성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