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 제가 나라는 말을 들을 때, 왜 저는 그 지식에 만족해하지 않습니까? 왜 저는 계속해서 생각의 영역으로 잘못 들어섭니까?
라: 아함브리티에 붙어있는 이원적인duplicitous 타당성의 느낌이 있습니다. 이것이 당신의 문제의 원인입니다. 그것은 좋은 결과가 나오기 이전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자아의 “세계관”이라고 칭해질 수 있습니다.
그것과 아함브리티의 관계는 뇌와 심장의 관계와 같습니다. 심장이 없으면, 뇌에 산소 공급
이 없을 것이고 몸의 생존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불수의적인 근육의 활동을 조절하는 뇌의 그
부분의 작용이 없으면, 심장은 수축과 확장이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
하면 그것의 기능을 추진하는 신경 전기 자극을 이용할 수 없고, 마찬가지로 몸의 지속적인 생존이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를 죽이는 것은 다른 것도 죽입니다. 그것들 중 어느 하나를 죽이는 것은 몸을 소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죽입니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관을 죽이는 것은 아함브릿티를 죽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둘 중 어느 하나를
죽이는 것은 자아를 완전히 파괴합니다. 완전히 복종한 박타는 그렇게 함으로써 “나”가 그 자
신에 대해 갖는 어떤 중요성도 파괴합니다. 이렇게 그는 세계관을 뿌리 뽑습니다. 갸나사다카
(지식의 구도자)는 계속해서 “나”를 찾으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아함브리티를 뿌리 뽑습니다. 이 설명은 분석적 목적을 위해서만이라는 것을 알아두십시오.
당신에게 두 가지 유사한 접근법을 설명하기 위해 나는 이 지적 분기점을 만들었습니다. 카
멜레온이 주변 환경의 색에 따라 색을 바꾸지만 사실은 같은 카멜레온인 것처럼, 실제로 세계
관과 아함브리티는 자아의 두 개의 다른 그림자 또는 측면입니다. 아함브리티는 “나” 생각입
니다. 세계관은 이 “나” 생각을 똑같이 허구적인 대상 또는 “환경”과 연관시킴으로써 그것의 분명하고, 환영적이고, 개별적인 존재를 합법화하는 지적 틀입니다.
이것은 “나” 생각이 그런 연관성이 없으면 남아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나”를
죽이는 것은 지성 또는 연상이 자동적으로 끝나게 해주고, 지성 또는 연상의 습관을 끝내는 것은 자동적으로 “나”를 죽입니다. 그러므로 “나”와 그것의 객관화 또는 연상의 성향은 동일한 것이 되지만, 그것의 파괴는 개인의 마음의 기질에 따라 어느 쪽으로든 이행될 수 있습니다.
만약 확신하지 못한다면 (웃으면서) 두 갈래 공격을 시작하십시오!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를
침공했을 때, 알렉산더가 가장 강적이었다고 말하는 펀잡의 황제 푸루쇼타마 왕은 다른 모든
전술들이 실패해서 그에게 이런 식으로 패배했습니다. 악어의 두 개의 턱 사이에 탈출구는 없
습니다. 자아가 활기 넘치고 다루기 힘든 것처럼 보이고, 그 자신을 복종하는 것을 거부할 때
마다 비차라로 그것에 맞서십시오.
당신이 비차라를 하기에는 마음이 너무 괴롭고 약화되었다고 느낄 때면 복종하십시오! 한쪽
은 섬멸전이고, 다른 쪽은 소모전입니다. 그것은 전쟁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하지만 기억하십
시오. 당신의 몸이 세상의 활동에 관여하고 있을 동안, 이 모든 것을! “모든 것은 환영이다. 모든 것이 꿈이라면 왜 나는 노력을 해야 하는가?”라고 말하면서 아자타(아무 것도 창조되지 않았다) 아드바이타를 당신의 의무를 의도적으로 피하기 위한 변명거리로 사용하지 마십시오.
헌: 네, 그것이 제가 묻고 싶었던 것입니다! 슈리 바가반께서는 묘하게 통찰력 있는 정확성으
로 제 마음을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