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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 차장의 일기 몇 절
나 도 향
11月 15日 雲
……동대문에서 신용산을 향해 아침 첫차를 가지고 떠난 것이 오늘 일의 시작이었다.
전차가 동구 앞에서 정거를 하려니까 처음으로 승객 두 명이 탔다. 그들은 모두 양복을 입은 신사들인데 몇 달 동안 차장에 익은 눈으로 봐서, 그들이 어제저녁 밤새도록 명월관에서 질탕이 놀다가 술이 취해 그대로 그 자리에서 쓰러져 자다 나오는 것을 짐작케 하였다. 새벽이라 날이 몹시 선선할 뿐 아니라 서릿기운 섞인 찬바람이 불어서 ‘추로리’ 끝을 붙잡을 적마다 고드름을 만지는 것처럼 저리게 찬 기운이 장갑 낀 손에 스며드는 듯하다. 그들은 얼굴에 앙괭이를, 그리고 무슨 부끄러운 곳을 지나가는 사람 모양으로 모자로 눈까지 눌러 쓰고 외투로 코까지 싼 후에 두 어깨는 삐죽 올라섰다. 아직 다 밝지는 않고 먼동이 터오므로 서쪽 하늘과 동쪽 하늘 두 사이 한복판을 두고서 광명과 암흑이 은연히 양색이 졌다. 그러나 눈 오려는 날처럼 북쪽 하늘에는 회색 구름이 북악산 위를 답답하게 막아놓았다. 운전수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넓은 길을 규정 외의 마력을 내서 전차를 달려갔다. 전차는 탑동 고원 앞 정류장에 와서 섰다. 먼 곳에서는 홰를 치며 우는 닭의 소리가 새벽 서릿바람을 타고서 들려온다. 그러자 어떠한 여자 하나가 내가 서 있는 바로 차장대 층계 위에 어여쁜 발을 올려놓는 것이 보였다. 아직 탈 사람이 별로히 없으리라고 지레 짐작에 신호를 하였다가 그것을 보고서 다시 정지하라는 신호를 하였다. 한 다리가 승강단 위에 병아리 모양으로 깡충 올라오더니 계란같이 옹크린 여자가 툭 튀어올라와서 내 앞을 지나는데, 머리는 어디서 어떻게 부시댁이를 쳤는지 아무렇게나 흩어진 것을 아무렇게나 쪽지고, 본래부터 난잡하게 놀려고 차리고 나섰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옥양목 저고리에 무슨 치마인지 수수하게 차렸는데 손에는 비단으로 만든 지갑을 들었다. 그리고 그가 내 옆을 지날 때 일본 여자들이 차에 탈 적이나 기생들이 차에 오를 적에 나의 코에 맞히는 분 냄새와 향수 냄새 같은 향긋한 냄새가 찬바람에 섞이더니 나의 코에 스쳤다.
그 여자는 차 안으로 들어가더니 그 안에 앉아 있는 양복입은 청년들의 눈을 피하려 함인지 또는 내외를 하려는 것처럼 맨 앞에 가서 앞만 보고 앉아 있었다. 두 젊은 사람은 어제 저녁에 기생 데리고 놀던 흥이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았는지, 그 여자를 보더니 한 사람이 팔꿈치로 옆의 사람을 특 치면서 눈을 꿈적 하였다. 그러니까 그 사람도 알았다는 듯이 고객 를 끄덕끄덕하며 그 여자만 보고 있었다.
나도 호기심이 일어나서 그 여자 가까이 가서 얼굴이나 똑똑히 보리라 하고 뒤로 돌려메었던 가방을 앞으로 돌려서 전차표와 가위를 양 손에 갈라쥐고 차 안으로 들어갔다. 우선 두 젊은이에게 표를 찍어주고서 그 여자 앞에 가서 손을 내밀려 하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달려들어 이것이 웬일이요? 할 만큼 놀랐다. 그리고 그의 머리에 꽃힌 금비녀로부터 발에 신은 비단신까지 모조
리 다시 한 번 훑어보았다.
어떻든 표를 찍으려 하니까 자기 지갑에서 돈을 꺼내는 데 일 원짜리인지 오 원짜리인지 두 서너 장 들어 있는 중에서 한 장을 선선히 내 놓더니,
“의주통이요. ”
하고 저는 나를 잊어버렸는지 태연하게 앉아 있다. 의주통 바꾸어타는 표 한 장을 주고나서 나는 다시 차장대로 나와 섰을 때, 벌써 전차는 청년회관 앞을 지내어 종로 정류장까지 왔다. 그 여자는 거기서 내리더니 저쪽으로 가버리었다. 나는 또다시 남대문을 향하여 돌아가는 전차의 ‘추로리’를 바로잡으려고 창으로 고개를 내밀었을 때 하늘은 중탁하게 덮히었던 암흑이 점점 뽀얗게 거두어지며 동쪽에는 제법 붉은 빛이 돌고, 깜박깜박하는 별들이 체로 치는 것처럼 굵은 놈만 남고 잔놈들은 없어진다.
나는 공연히 신기한 생각이 들어서 못견디었다. 그래서 혼자 해결할 수 없는 무슨 수수께끼를 풀려는 사람처럼 고개만 기웃하고 있었다. 나는 지나간 생각을 다시 끄집어내었으니, 그것은 다음과 같다.
*
한 달 전, 바로 한 달 전에 역시 전차를 몰고서 배우개 정류장에 정거를 하였다. 오후 한시 가량이나 되었는데 차안에 승객이라고는 동대문 경찰서 형사 비슷한 사람 하나와 일본 여자 둘과 또 조선 시골 사람 같은 이가 있을 뿐인데 맨 나중으로 들어온 여자가 있었다.
손에다가는 약병과 약봉지를 들었고, 입은 것은 때가 지지리 끼고 자락이 갈갈이 찢어진 데다가 얼굴은 며칠이나 세수를 하지 않았는지 새까맣게 걸었는데, 발은 벗은 채 짚세기 하나만 신었다. 나이는 열 아홉이라면 조금 노성한 편이요, 스물이라면 어디인지 어린 티가 보일 정도다. 속눈썹이 기름한데 정채있게 도는 눈이라든지, 보리퉁한 뺨과 둥그스름한 턱, 날카롭지도 않고 넙적하지도 않은 웬만한 코라든지, 어디로 보든지 밉지 않은 여자이기는 하지만 주제꼴이 볼성사나워서 좋은 인상이 없었다. 우리의 항상 하는 예투로,
“표 찍으시오.”
하고 손을 내미니까 어리둥절하며 사방을 홰홰 내젓는데, 다시 전차가 달아나자 그는 어쩔줄을 모르고 옆엣사람 얼굴 한 번 쳐다보고 밖을 한 번 내다보고 앉지도 못하고 서지도 못하고 쩔쩔매는 것을 보아하니, 시골서 갓 올라왔거나 당초에 전차 한 번 타보지도 못한 위인인 것을 알았다. 우리는 항상 그러한 사람이 전차에 오르면 성가시럽다. 왜그런고 하니 으레 바꾸어타야 할 곳에서 바꾸어타지를 않고, 내릴 때를 지내놓고 내려서는 귀찮게 굴기는 우리네 차장에게만이 아니라, 세상에 저밖에 약은 사람이 없는 것처럼 가끔 전차표 오전을 떼먹으려고 엉터리없는 바꿔타는 표를 어디서 얻어가지고는 와서는 속여먹으려고 하기가 일쑤다. 그래서 그런 사람만 만나면 공연히 화증이 나서 목소리가 부락부락 해진다.
“어디까지 가시우? 표 내시우! 표요.”
하니까 그는 나를 쳐다보더니,
“네?”
하고 물끄러미 있다.
“네가 무엇이요, 표 내라니까.”
하니까 그는 손에 들었던 종이조각을 내밀었다. 종이조각을 받아 들고 보니까,
‘명치정 인사 소개소 ’라고 연필로 써 있다.
“이게 무엇이요?”
하고 소리를 꽥 질러 말하니까 그는,
“이리로 가요, 여기가 어디예요? 여기 가서 내려주세요.
하고 도리어 물어보며 간청을 한다.
“몰라요. 돈 내요!”
돈이라는 소리에 무슨 짐작을 하였던지,
“없어요.”
하고 자기 손을 들여다본 후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이다가 그래도 할 말이 있다는 듯이,
“그런 게 아니라요, 제가 시골서 올라온 지가 한 달이나 되는데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어서 동막 어느 집에서 고용살이를 하다가 몸에 병이 나서 병원에 다녀오는데 이것을 써주며 그리로 가면 된다고 해서 그리로 가요.”
모든 일은 다 알았다. 총독부 의원 무료 치료실에 갔다가 의사나 병원에 있는 사람이 정상을 가련히 생각하고 인사 상담소를 가르쳐 준 것일 게다. 갓 서울로 올라와서 돈도 없이 차를 탄 것도 사실인데, 어떻든 그때에 나의 마음에서는 알 수 없는 동정심이 나는 동시 마음이 약한 나는 그를 다시 전차에서 내려쫓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어찌하면 좋을까? 그대로 태우자니 규칙위반이요, 그렇다고 내려쫓을 수는 없는데, 하는 생각을 하며 차장대에 내려섰다가 전차가 황금정 (黃金町)에 왔을 때, 나는 다시 그 앞에 가서 바꾸어타는 표 한 장을 찍어주며;
“왜 돈두 없이 전차를 탔소?”
하고 한 번 딱 일러서 법을 가르친 후,
“자― 이것을 가지고 요다음 정거하거던 내리우. 이것도 특별히 당신을 생각하여 주는 것이요. 나는 이것 한 장 당신 준 것이 탄로되면 벌어먹지도 못하고 벌금 물고 그러는 법이요. 그런 줄이나 알아두시우.”
하니까 그는 고맙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 하였다.
*
오늘 아침에 만난 여자가 바로 그 여자다. 한 달 전에 오전이 없어서 나에게 은혜를 입던 그 여자가 오늘은 말쑥한 모양꾼이다. 내가 언제든지 여자로 타고나는 것, 그것이 무한한 보배라고 생각을 하였더니 딴은 그 생각이 들어맞았다. 여자는 마음 한번 쓰는 데 당장에 백만장자의 아내가 될 수 있고, 추파를 한 번 보내는 데 여러 남자의 끔찍한 사랑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한 달이라는 세월이 그리 길다고 하지 못할 것인데, 한 달 전에 총독부 무료 병실에 가서 구차한 말을 하며 병을 봐 달라 하고, 또 나와 같은 차장에게까지 은혜를 입던 여자가 오늘엔 어디로 보든지 똑 딴 여염집 부인과 같다. 우리 같은 사람은 갗은 박대와 모든 수고를 맛볼 대로 맛보며 근근히 번다 해야 한 달에 단돈 몇 십 원을 벌지 못하며, 우리가 참으로 성공을 해보려면 아까운 젊은 시대를 무참히 간난신고 중에 보내고도 될지 말지 한 일이다.
하루 종일 차장대에 섰기도 하며 또는 승객의 표를 찢어주기도 하는 동안에 나로서는 말할 수 없고, 내가 나이 스물 한 살이 되도록 느껴보지 못한 감정 이 내 몸 전체에 스며드는 듯하였다. 아직까지 나의 젊은 피는 비린내가 난다. 그 피가 작열을 하지 못하였으며 순화하고 정화하지 못하였다. 나의 피를 그 무엇에다 사르거나 체질하거나 하여 ‘엑기스’가 되게 하지 못한, 말하자면 아직 진국으로 있는 그것이다. 나는 웬일인지 오늘 그 여자를 본 후로는 나의 가슴 속에 있는 피가 한 귀퉁이에서부터 타오르기를 시작하여 석쇠 위에 염통을 져며놓고 그것을 들여다보는 듯이지지 ―― 타는 속에서도 무슨 새 생명이 불 위에 떨어져 그 불을 더 일으키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그 여자는 의주통으로 향하여 가버리었다. 그 여자가 의주통으로 갔다고 언제든지 의주통 방면에 풀로 붙인 듯이 있을 것은 아니겠지마는, 내가 전차를 몰아 그곳을 갈 때나 올 때나 또는 옆으로 지날 때, 그를 생각하고 언제든지 그 쪽을 향하여 보았다.
11月 17日 睛
나는 어제 하루를 논 후에 오늘은 야근을 하게 되었다. 오늘은 동대문서 청 량리를 향하여 떠나게 되었다. 오후 여덟시나 되어 날이 몹시 추워졌다. 바람도 몹시 불기를 시작하여 먼지가 안개처럼 저쪽 먼 곳으로부터 몰아온다. 여름이나 봄가을에는 장 안의 풍류 남아 쳐놓고 내 손에 전차표를 찍어보지 않은 사람이 별로이 없을 것이요, 내 손 빌지 않고 차타지 않은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일요일은 일요일이지마는 나뭇잎은 어느덧 환란이 들어서 시름없이 떨어지고 수척한 나무들이 하늘을 뚫을 듯이 우뚝우뚝 솟았는데, 갈가마귀떼들이 보금자리로 돌아간지도 얼마 되지 않고 다만 시골의 나무장수와 소몰잇군들의,
“어디어! 이놈의 소”
하는 소리가 들릴 뿐이다. 탑골승방 · 영도사 또는 청량사 들어가는 어구는 웬일인지 전보다 더욱 쓸쓸해보인다.
우리 차는 다시 동대문에 갔다놓았다. 나가 추로리를 돌려대고 다시 차 안에 올라서서 차 떠날 준비를 하려 할 때, 차 안을 들여다보니까 그저께 새벽에 만났던 여자가 그 안에 앉아 있다. 나는 반갑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놀랍기도 하여 한참이나 물끄러미 건너다보고 있었다. 가슴 속에서 타기를 그쳤던 그 피가 다시 한꺼번에 활짝 타오르기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속으로는,
‘얘 ! 이거 자주 만난다! ’
하는 생각이 나면서 웬일인지 차디차게 식은 땀이 뒷잔등이에 솟아오르는 것 을 깨달았다.˙
전차가 떠나기를 시작한 후 전차표를 받으러 속으로 들어갈 때에, 나는 또다시 그에게 그의 손으로 주는 차표를 받을 생각을 하니까 웬일 인지 공연히 마음이 두근두근하여지는 것이 온몸이 확확 달은 듯하였다. 두어 사람의 표를 쩍어준 뒤에 나는 그 여자 앞에 가서 손을 내밀었다. 그때 나의 생각은 관습적으로 나의 손올 내밀며는 으레 전과 같이 지갑을 열어서 그 속으로부터 돈을 끄집어내려니 하였었다. 그러면 내 손으로 찍어서 내 손으로 주는 전차표를 그 여자는 가지고 앉아 있다가 그것을 다시 운전수에게 주고 내리려니 하였다. 그러나 그 여자는 나의 손 내미는 것은 본체만체 하였다. 도리어 성난 사람처럼 암상스러운 얼굴로 딴 곳만 보고 앉았다.
“표 찍으시오.”
하고 나는 그에게 주의하기를 재촉하였으나, 그는 역시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다가 나를 한번 흘끔 쳐다보는 게 어쩐지 거만한 듯 하였다. 그러더니 다시 저쪽 두어 사람이나 격하여 앉아 있는 사람 하나를 고개를 기우사고 건너다보았다. 그러니까 그 앉아 있는 사람이 잊어버렸던 것을 깨달은 것처럼 잠깐 놀라는 듯한 표정을 하더니 주머니에서 돈지갑을 꺼내며,
“여기 있소!”
하여 금테 안경 너머로 꺼먼 눈동자를 흘기며 나를 불렀다.
“이게 웬 것이냐?”
하는 놀라운 생각이 나며 하는 수 없이 그 남자 편으로 가려하나 그 여자를 다른 사람처럼 그대로 본체만체 홱 돌아설 수는 없었다. 나는 다시 한 번 그 여자를 훑어본 후 그 남자 ― 금테 안경 쓰고 웃수염을 까뭇까뭇하게 기르고, 두 눈 가장자리가 푸루뚱하고 콧날이 오똑한 삼십이 넘을락말락한 사람으로, 얼핏 보며는 미두 시장이 아니면 천냥만냥패 같은 사람 ― 에게로 가니까 그는 자랑스러운 듯이 지갑 속에서 일원짜리 한 장을 꺼내어 할인 승차권 하나를 사더니 석 장만 찍으라 하였다. 나는 석 장 찍으라는 소리에 그 옆에 앉아 있는 양복 얌전하게 입고 얼굴이 대리석으로 깎은 듯한 「기시리아(그리이스)」 타입의 청년이 같이 가는 남자인 것을 알게 되었다.
차표를 다 찍어주고 차장대에 나와 섰을 때에 웬일인지 그 차표 내주던 남자가 밉고 또는 더럽고 질투성스러워 못견디었다.
전차가 영도사 들어가는 어구에 정거를 하자 그들은 거기서 내렸다. 이것을 보고서 나는 의심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 차표를 사던 남자가 나의 눈으로 보기에 어째 부랑성을 띤 듯하였고, 또는 그 눈이나 입 가장자리가 몹시 음탕하여 보였으며, 그가 그 여자를 데리고 음부탕자가 비교적 많이 오는 한적한 절로 들어가는 것이, 장차 무슨 음탕한 사실이 그 속에서 생길 듯하여 공연히 그 남자가 미운 동시에 끌려가는 그 여자에게 동정이 갔다. 전차 차장의 직업이 그리 귀하지도 못한 것을 나는 안다. 비교적 얕은 지위에 있어서 어떠한 계급을 물론하고 날마다 그들을 만나게 되는 동시에 이와 같이 수상스런 사람들을 많이 보지마는, 이러한 수상스러운 남녀를 볼 적이면 공연히 욕도하고 싶고 그들을 잠깐이라도 몹시 괴롭게 하고 싶은 생각이 나는데, 이번에 본 이 여자로 말하면 처음에 그와 같이 남루한 의복에다가 또 한 푼 없이 나에게 전차표를 얻어가던 자로서 오늘 와서 나를 대하는 태도가 몹시 거만하고, 또는 작은 은혜나마 은혜를 모르는 것이 가증한 생각이 들기는 들면서도 웬일인지 나의 가슴 가운데 있는 정서를 살살 풀리게 하는 듯하였다. 그래서 그들을 떼어 보낼 때 나의 마음은 또다시 섭섭하였다
12月 15日 睛
오늘 일기는 따뜻한 일기다. 그런데 어저께 나는 우리 동관들에게서 이상한 소문을 하나 들었다. 내가 맨 처음 어느 날 새벽에 파고다공원 정류장에서 만나던 때와 같이 그 여자가 역시 새벽마다 전차를 타고서 의주통으로 향하여 간다는 말을 들었다. 그 모습과 또는 행동이 여러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나의 기억으로 내 머리 속에 그려놓은 꼇이 꼭꼭 들어맞은 까닭에 그 여자로 인정할 수가 있었다. 나는 이 말을 듣고서 일종의 호기심이 생기어서 나의 당번도 아닌데 남이 가지고 가는 새벽 첫차를 같이 탔다. 그러고서는 전차가 파고다공원 앞에 정거를 할 때에 나는 얼핏 바깥을 내다보았다. 혹시 내가 탄 전차와 상치나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있어서 많은 요행을 기대하는 생각으로 그 여자를 만나보려 할 때 과연 그 여자가 전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여자 뿐만 아니라 그 옆에는 어떠한 남자 하나가 그 여자의 어깨에 자기 어깨가 닿을 만큼 붙어서서 무슨 이야기인지 정답게 하는 것을 보았다.
전차에 오르는 여자는 그 전에 몸을 차리던 것과 판이하여 졌다. 전에는 머리를 쪽지고 신을 신었더니, 지금 와서는 양머리에 구두를 신었다. 그리고 전에 볼 적에는 몰랐더니 지금에 이 여자를 보고 전에 그 여자를 생각하니까 전에 있던 시골티와 어색한 것이 모두 없어지고 도리어 무엇엔지 시달려서 손때가 쪼르르 흐르는 듯하였다. 날이 추우니까 몸에다가는 망토를 입었는데, 쥐었다 펴기도 하고 꼼지락꼼지락 하는 손가락에는 한 달 전에 없던 금반지가 전등불에 비치어 붉은 빛을 반짝반짝 반사한다. 그는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여러 번 만나는 것이 신기하다는 듯이 익숙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 남자도 전차를 탔다. 그 남자라고 하는 사람은 한 달 전에 영도사를 나갈 적에 같이 가던 그 양복 입은 젊은 사람이었다. 영도사를 나갈 적에는 이 젊은 사람이 뒤떨어져서 홀로 비섯비싯 쫓아가는 것을 보았는데 오늘은 자기가 이 여자를 독차지 하고서 승자의 자랑스러운 모양을 나타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귀찮아서 죽을 뻔하였어?”
그 여자는 아양이라면 아양, 응석이라면 응석이라고 할만한 말소리로 그 남자에게 대하여 이런 말을 하고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왜 진작 오실 일이지 시간이 지나도록 오시지를 않으셨소? 어떻게 기다렸는지 모르는데…….”
남자는 차안에서 그런 말을 하며는 딴 사람이 들으니 아무 말도 않는 것이 좋다는 듯이 그 말대답은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 눈치를 챈 여자는 입을 다물더니 무안한 듯이 고개를 돌이키고 전차가 정거할 정류장의 붉은 등만 기다리는 듯이 내다보고 있다.
차가 종로에 와 서자 그 두 사람은 일어서 내렸다. 나는 오늘 생각한 바가 있음으로 그들을 따라서 내렸다. 나는 그들이 재판소 앞 정류장을 향하여 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혹시 그들에게 의심을 사지나 않을까 하여 멀찍이 서서 뒤를 따랐다. 그들이 사면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기회로 생각하고서 서로 손목을 잡는 것을 나는 보고서 나의 온몸이 불덩어리 같아지고 내가 창피한 생각이 났다.
재판소 앞에 가더니 그들은 멈칫하고 섰다. 그리고 무엇이라 무엇이라 하더니 다시 그들은 재판소 옆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이번에는 가까이 쫓아가보리라 하고서 뒤를 바짝 쫓으매 그들은 내가 따라가는 줄도 모르고서 이야기를 정답게 하면서 갔다.
“오늘 제가요! 그이더러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해버렸지요. 그러니까 껄껄 웃으면서 알았다 알았다 하며 얼핏 승낙을 하던데요.”
“무엇을 알았다고?”
“당신하고 이렇게 된 것을 말이요.”
“눈치야 챘겠지!”
“그렇지만 그이는 남의 생각은 조금도 해주지를 않아요. 같이 살려며는 같이 살 도리를 차려준다든지, 그렇지 않으며는 같이 살 도리를 차려준다든지, 그렇지 않으면 할 수 없으니 너와 나와 깨끗하게 갈라서자고 한다든지, 무슨 말은 없고 그저 질질 끌면서 오늘 낼 오늘 낼 하기만 하니 어떻게 그런 사람을 바라고 살아요? 날마다 밤중이면 사람을 끌어다가 새벽이며는 보내면서 한 번 바래다주기를 하나요.”
남자는 아무 말이 없다가,
“우리 집에 가서 몸이나 좀 녹여가지고 가자…….”
“너무 늦으면 어떻게 해요?”
“무얼 집에 가면 또 무엇을 해? 할 것도 없으면서…….”
“할 거야 별로히 없지마는, 너무 자주 가면 딴 방 손님 들이라도 이상히 알지 않겠어요?”
“괜찮아! 누군지 아나?”
“왜 몰라요, 눈치를 채지요.”
이렇게 말을 하는 동안에 어느덧 어떠한 여관 앞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그 여관문 개구멍으로 손을 넣어 고리를 벗기더니 두 사람은 종적을 감추어버렸다. 나는 다시 어찌할 수가 없었다. 앞길을 탁 막아논 것 같이 멀거니 서 있기만 하였다. 그 여관 속에는 반드시 무슨 수상한 일이 있을 것을 알았으나 그것을 알 길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멍멍이 돌아올 때 그 집 담모퉁이를 돌아서려니까, 불이 환하게 비치는 들창 속에서 남자와 여자의 지껄이는 소리가 들리며 미닫이를 닫는 소리가 들리었다. 나는 옳지! 이 방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귀를 기울여 듣고 있었다. 조금은 아무 말이 없어서 공연히 나의 가슴이 아슬아슬하여 졌다. 그러더니 옷이 몸뚱이에서 미끄러져 벗어지는 소리가 연하게 들리더니 기침 소리 두어 번이 나며 전기불이 확 꺼지었다. 나는 모든 것이 더러웠다. 내 가슴 속에서 부드럽고 따뜻하게 타던 모든 것이 그대로 꺼져버렸다. 옆에 있는 개천에 침을 두어 번 뱉고서 큰 길로 돌아섰다.
〈1924년〉
2016년 12월 21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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