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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하나님을 경외하라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다
① 전도서는,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1)한 “전도자”로 시작이 됩니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이 누구인가? “솔로몬”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이라 하지 않고 자신을 “전도자”라 하는 의도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전도자로 세우신 데는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기이한 섭리하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3:11절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始終)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라고 진술하고 있는데,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창 50:20)은 ㉮다윗의 타락이라는 악을 들어서,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한, “칭의 교리”를 계시하셨고, ㉯솔로몬의 타락이라는 악을 통해서는,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1: 14)한, 하나님을 떠난 삶의 무가치함을 진술하게 하여,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12:13)한, 사람의 본분(本分)을 전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솔로몬은 자신을 왕이라 하지 않고 7번이나 “전도자라”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권세, 명예, 부귀와 쾌락” 등을 다 누리다가 헛됨을 경험한 솔로몬을 전도자로 세우셔서 “전도서”(傳道書)를 기록하게 하시어 전도의 지침서를 기록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의도를 깨달았기에 왕이라는 솔로몬은 감추고 자신을, “전도자”(傳道者)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② 이는 마치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사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셔서,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딤전 1:13, 16) 하심과 같은 섭리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서는 솔로몬의 만년(晩年)의 저작으로 여겨집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지혜”만 주신 것이 아니라, 구하지 않은 “부귀와 영화”까지 심히 많이 주셨습니다. 솔로몬에게 “부와 영광”을 주신 하나님은 그가 타락할 것을 모르셨단 말인가? “지혜”를 허락하신 하나님은 솔로몬의 “타락”도 허용(許容)을 하신 셈입니다. 솔로몬에게 타락했던 뼈아픈 경험이 없었다면 불신자들이 추구하는, “인생관, 가치관, 심리상태” 등을 적나라하게 꿰뚫어보고 진술하는 “전도서”는 기록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③ 이런 맥락에서 예표의 인물인 솔로몬과, 실체(實體)이신 그리스도 간에는 유사성(類似性)과 상이(相異)성이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성전을 건축한 것, ㉯지혜가 충만하여 그 소문을 만방에 떨친 것, ㉰인간의 밑바닥까지 낮아진 것” 등은 유사성이라 할 것인데 이점을,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罪)는 없으시니라”(히 4:15)합니다. 그렇습니다. 솔로몬은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시궁창까지 타락하여 인생의 고락을 경험했지만, 우리 전도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말구유에 나시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신”(히 4:15, 빌 2:8) 분이십니다. 주님은 우리 죄를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의 연약을 동정하셨으나, 솔로몬은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인생의 허무를 체험을 했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④ 그러므로 전도서의 구조(構造)를 보면 “전도자”라는 말이 첫 장(1:1, 2, 12)과, 마지막 장(12: 8, 9, 10)에 각각 3번 씩 집중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는 무엇을 말해주느냐 하면, ㉮첫 장은 전도서를 통해서 말씀하려는 명제(命題)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1:2)하고 문제를 말하고, ㉯마지막 장(12장)에서는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12:13)하고 해답을 제시합니다. 그러면 ㉰그 중간(中間)의 내용들은 무엇인가? 독자들을 마지막 결론으로 인도하기 위한 자신의 경험과 깨달음 등을 진술하는 내용입니다. 이점을 간과하게 되면 본문을 상고할 때,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3:21)하는 등의 진술들을 대하게 될 때 당황하게 됩니다.
⑤ 이런 맥락에서 전도서에는 “해 아래”라는 말이 29회, “헛되다”는 말을 39회나 강조함으로 열쇠(Key word)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해 아래”라는 말은 자연인, 즉 육에 속한 자의 삶을 가리키는 표현이고, “헛되다”는 말은 허무주의자(虛無主義者)의 독백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삶의 무의미, 무가치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어찌하여 불신자들의 삶을 “해 아래”라고 묘사하고 있는가? 이에 빛을 비춰주는 말씀이 로마서에 네 번 등장하는 “아래”(Under)입니다. “아래”란 하나님 우리를 보실 때에 무엇을 통해서 보시는가를 나타내는 묘사인데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법 아래, 죄 아래, 심판 아래”(롬 3:9, 19, 6:14), 즉 전도서의 표현대로 하면 “해 아래” 살아가는 자라는 뜻입니다.
⑥ 그러므로 2장 이하에 전도자가 타락했던 당시를 진술하는 말이 나오는데, “내가 내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을 지혜로 다스리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내가 어떻게 하여야 천하의 인생들이 그들의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어떤 것이 선한 일인지를 알아볼 때까지 내 어리석음을 꼭 붙잡아 둘까 하여,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3-10), 즉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모든 것을 마음껏 누려보았다합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이 무엇인가?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2:11)합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만족(滿足)이 없는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3:11) 때문이라 합니다. 영혼의 갈증은 세상적인 것으로는 채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⑦ 그러므로 전도서를 대할 때에 통찰력이 필요하게 되는데 ㉮전도자 자신의 현재의 신앙고백과, ㉯타락했을 당시의 심리상태, 즉 불신자들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는 점을 구분(區分)을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만일 이를 분별하지 않으면 전도자를 정신분열증 환자로 만들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3:21)라고 말하다가,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12:7)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⑧ 이런 맥락에서 전도서에는 “헛되다”는 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경외”도 7번(3:14, 5:7, 7:18, 8:12, 12, 8:13, 12:13)이나 등장하는데 5절로 된 찬송가 가사처럼 하나님을 경외(敬畏)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 첫째 소절의 결론은 3:14절인데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그 위에 더 할 수도 없고 그것에서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들이 그의 앞에서 경외(敬畏)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합니다.
㉡ 둘째 소절의 결론은 5:7절인데, “꿈이 많으면 헛된 일들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敬畏)할지니라”.
㉢ 셋째 소절의 결론은 7:18절인데,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敬畏)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 넷째 소절의 결론은 8:12-13절에 나타나는데, “내가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敬畏)하여 그를 경외하는 자들은 잘 될 것이요,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 하고 경고합니다.
㉤ 그리고 마지막 소절에서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敬畏)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12:13) 하는 총 결론에 이르는 것입니다.
⑨ 아직 해답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고, ㉯하나님 경외가 누구의 무엇을 통해서 가능해지는 것인지를 말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하나님 경외”를 교훈적인 관점으로 접근을 하는데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는 설 자리가 없고 십자가는 필요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전도서에서 그리스도를 어떻게 만날 수가 있는가? 숨은 그림과 같은 3가지 요점(要點)을 주목해야만합니다. 첫째는,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7:29)한 타락(墮落)했다는 점이요, 두 번째 요점은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5;1)한 “제물”(祭物) 곧 대속제물과, 세 번째 요점은 ㉰“다 한 목자가 주신 바이니라”(12:11)한 “한 목자”(牧者), 즉 제물을 드려 줄 제사장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⑩ 이에 확고하기 위해서 전도서와 잠언서의 특성을 깨닫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잠언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잠 1:7)고 “여호와”라 한 반면 전도서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12:13) 하고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다른가? “하나님”은 창조와 결부되는 호칭이고 “여호와”는 구속과 결부되는 칭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권면하는 잠언에는 여호와라는 언급이 88번이나 등장하는 반면 전도의 성격을 띤 전도서에는 45번이나 “하나님”으로 부를 뿐 “여호와”라는 호칭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불신자들은 하나님이라 부를 수는 있어도 구속(救贖)과 결부되는 “여호와”하고는 상관이 없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전도서가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12:13)한 “전도”(傳道)의 글임을 나타냅니다. 이점이 “창조자를 기억하라, 심판하시리라”(12:1, 14)한 권면에도 나타납니다.
⑪ 그리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해서는 “화목제물과, 이를 드려줄 중보자”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도서가 말씀하는 하나님 경외의 의미는 분명해지는데,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한 그리스도의 속량을 믿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제사장, 서기관, 장로, 바리새인들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한 책망을 받았는가? 예배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인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아닙니다. “화목제물과 이를 드려줄 중보자”를 배척했기 때문입니다.
⑫ 전도자는 마지막에 이르러 해답(解答)을 제시하고 있는데 자신이 증언한 말이, “진리(眞理)의 말씀이요, 다 한 목자(牧者)의 주신 바이니라”(12:10, 11)합니다. “진리, 한 목자”는 누구인가?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이라 해도 구속사라는 맥락으로는 임마누엘 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요 목자”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서도 초등교사가 되어 “해 아래서”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은 헛된 삶을 추구하고 있는 자들에게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0:14, 14:6)한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여 참 목자를 만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⑬ 전도서는 유대인들이 초막절에 낭독했다고 합니다. 이는 인생여정이 초막에 머물다가 떠나는 행인과 나그네와 같은 삶임을 일깨워주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저도서는 하나님 경외(敬畏)로 끝을 맺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한 “심판”(審判)으로 끝맺고 있습니다. “구원과 심판”은 동전 앞뒤와도 같아서 전도자는 이 둘을 함께 말해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시행착오를 교훈으로 삼을 수 있는 두 번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일방통행(一方通行)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전도서는 해 아래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온갖 것을 다 소유하고 경험해본 한 전도자의 뼈아픈 충고(忠告)를 통해서 읽는 이와 듣는 자로 하여금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을 당하지 않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또 다른 구원초청(招請)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