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탄의 도시
이보다 더 행복한 국가는 없습니다.
모든 것을 신의 선물로 장식했습니다.
모든 평화와 전쟁을 통제하여. 금과 사람과 선박이 풍부하고 신에 대한 복종이 충만합니다.
어떤 국가도 여기에 견줄 수는 없습니다.
베네치아 대사의 보고, 1523년
하늘이 동로마 제국을 버렸는지는 모르지만 콘스탄티노플을 버리지는 않았다. 1453년 5월 29일 화요일 오스만 술탄 메메드2세는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했다. 그는 먼저 하기야 소피아에 가서 경건하게 말에서 내려 먼지 한줌을 머리 위에 뿌리고는 이 성당을 모스크로 개조하라고 명령했다. 전통적으로 한 도시를 정복한 군대는 3일 동안 약탈을 허용했지만 메메트 2세는 하루가 지나자 더 이상의 파괴를 금지시켰다. 그때 불과 그는 21세에 불과했다.
정복은 이스탄불을 탄생시켰다(하지만 국내외에서 널리 쓰인 공식 명칭은 1932년까지도 콘스탄티노플이었다). 이 도시는 다민족 제국의 수도가 되어 활기가 넘쳤고 인구도 늘어났다. 그리스인은 돌아오라는 권유를 받았으며, 메메드는 유럽을 정복해 얻은 포로들을 이곳에 정착시켰다. 정복전에 참가했던 병사들과 신하들에게 시내의 대지와 건물들을 주었는데, 그 중에는 거포를 만든 우르반도 있었다. 메메트는 제국 각지로 사자를 보내 자발적인 이주를 유도했지만 생각대로 되지는 않았다.
스페인에서 추방된 유대인 수천 명과 그라나다의 아랍인도 그곳으로 이주했다. 그들은 모스크를 짓거나 교회를 모스크로 개조했고, 그 곳을 중심으로 무슬림 콘스탄티노플이 형성되었다. 이슬람이 6할, 나머지가 4할이라는 인구 구조는 놀랍게도 20세기 초반까지 유지되었다.
모든 인구를 대상으로 밀레트 제도를 시행했다. 즉 누구나 공동체를 이루고 자치를 누릴 수 있었으며, 범죄자의 경우만 오스만 당국에 보고하면 되었다.
1454년 1월 1일 메메트 2세는 정교회 수사로 서방 교회의 게오르기오스 스콜라리오스를 총대주교로 임명했다. 술탄의 칙령에는 "누구도 그를 괴롭히거나 방해해서는 안 된다.“ 고 명시되어 있다. 당시 총대주교는 사도 교회를 받았으나 나중에 현재 페네르 지구에 있는 게오르기오스 교회로 옮겼다. 아르메니아 총대주교, 랍비들의 장인 모세스 캅살리와도 마찬가지로 약정을 맺었다. 예전에 준자치를 누리던 갈라타의 제노바 지구는 도시가 정복되고 이틀이 지나 술탄에게 항복했다. 성벽 대부분이 파괴되고 유명한 망루도 몇 미터 쯤 깎였지만, 그래도 주민은 상당한 수준의 자치를 누렸고 통상과 여행을 할 수 있는 권리, 재산권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비 무슬림 신민에 대한 오스만 정책은 이후 수세기 동안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1463년 사도 교회를 허물고 메메트 2세의 모스크 파티흐 카미가 들어섰다. 이 첫 번째 대규모 모스크의 돔과 미나레트는 이후 도시의 인상적인 스카이라인을 만들었다. 이 모스크와 부속 건물은 단순한 기도용 건물이 아니라 이슬람 도시의 핵심이었다. 파티흐카미는 여덟 개의 마드라스(종교학교),순례자 숙소, 공용 주방, 대상 숙소, 초등학교, 도서관, 하맘(목욕탕), 시장, 묘지를 갖추었다.
시장의 규모는 콘스탄티노플을 오가는 상선단의 규모가 상당 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상점 280개, 공방 32개, 창고 네 개를 보유한 시장에서 얻은 수입은 다른 시설을 유지하는 데 사용했다. 도시의 각 지구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이는 사람들의 기부금도 큰 몫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