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두 얼굴] 행동하지 않는 지성 - 장 폴 사르트르(3)
따라서 사르트르는 레지스탕스를 위해 중요한 일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 그는 유대인들을 구하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고 글 한 자도 쓰지 않았다. 그는 냉정하게 자신의 경력을 홍보하는 데에만 매진했다. 그는 주로 카페에서 희곡과 철학 에세이, 소설을 미친 듯이 썼다. 얼마 안 있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쟁 제르맹 데 프레[파리 6구에 있는 번화가]와 사르트르가 맺은 관계는 처음에는 꽤나 우연하게 시작되었다. 사르트르의 적극적 행동주의 원칙을 포괄적으로 제시한 가장 중요한 철학 서적 <존재와 무>는 혹독하게 추웠던 1942-1943년 겨울에 쓰였다. 생 제르맹 거리의 플로르 카페의 주인 부발은 난방용 석탄과 담배를 확보하는 재주가 비상했다. 사르트르는 어찌어찌 해서 손에 넣은 밝은 오렌지색으로 염색된, 보기 흉하고 어울리지는 않지만 따뜻한 인조 모피 코트 차림으로 매일 그곳에서 글을 썼다. 그는 밀크 티 한 잔을 주문하고 잉크병과 펜을 올려 놓은 다음, 4시간 동안 쉬지 않고 글을 휘갈겼다. 종이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않는 그는 “잉크에 젖은 작은 모피 공”이었다. 그를 그렇게 묘사한 시몬 드 보부아르는 그가 722페이지에 달하는 책에 “음란한 문구들”을 삽입해서 생기를 불어넣었다고 썼다.
어떤 문장은 “보편적인 구멍들을 다뤘고, 다른 문장은 항문과 이탈리아식 섹스에 초점을 맞췄다.” 이 책은 1943년 6월에 출판됐다. 책의 성공은 서서히 이뤄졌지만(제일 중요한 리뷰 몇몇은 1945년까지도 출판되지 않았다), 성공에 대한 확신은 계속 쌓여 갔다. 그렇지만 사르트르가 유명 인사로 스스로 우뚝 선 것은 무대를 통해서였다. <존재와 무>가 출판된 달에 막을 올린 희곡 <파리>는 처음에는 표가 거의 팔리지 않았다. 그런데 연극이 관심을 끌면서 사르트르의 치솟는 명성은 더욱 확고해졌다. 얼마 안 있어 파테영화사는 사르트르에게 시나리오를 써 달라고 요청했고(훌륭한 <수사위를 던져졌다>를 포함한) 시나리오 3편을 쓴 사르트르는 처음으로 큰 돈을 벌었다. 그는 참신하고 영향력 있는 평론지 <프랑스 문학>(1943)의 창간에 관여했고, 이듬해 봄에는 앙드레 말로와 폴 엘뤼아르와 함께 플레아아드 상의 심사 위원으로 선임됐는데, 이것은 그가 문학계의 파워 브로커가 됐음을 보여 주는 확실한 징조였다. 비에 콜롱비에 극장에서 희곡 <출구 없음>이 막을 올린 1944년 5월 27일은 이런 시점이었다. 나중에 지옥으로 가는 대기실로 밝혀지는 응접실에서 세 사람이 만나는 내용을 담은 이 훌륭한 작품은 두 개의 차원에서 작동한다. 이 작품은 첫 번째 차원에서는 “지옥은 타인들이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캐릭터들에게 대해 논평한다. 다른 차원은 <존재와 무>를 대중화 시킨 것으로, 하이데거를 과격하게 해석한 버전이다. 하이데거를 프랑스식으로 윤기 나게 해석한 결과물이자 시대적 상황과 관련이 있는 이 희곡은 은밀한 저항과 적극적 행동주의의 메시지를 제시하고 있다. 독일인의 사상을 받아들여 적절한 시기에 유행 상품으로 만들어 내는 것은 프랑스인이 항상 두드러진 재능을 보여 주었던 일이다. 희곡은 비평에서나 흥행에서나 대성공을 거뒀고, “생 제르맹 데 프레의 전성기를 연 문화적 사건”으로 곧잘 묘사됐다.
사르트르는 <출구 없음>으로 유명해졌다. <출구 없음>의 성공은 사상을 투영하는 데 무대의 위력을 따라올 매체는 없다는 것을 잘 보여 주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사르트르를 세계적으로 유명한, 실상은 악명 높은 대스타로 만들어 준 것은 대중 강연이라는 구식 포럼이었다. 연극 개막 후 1년 내에 프랑스는 평화를 되찾았다. 모두가 특히 젊은이들이 잃어버린 문화적 시절을 탐욕스럽게 되찾으려 들면서, 전후의 진실이라는 불로초를 찾아다녔다. 공산주의자들과 신생 가톨릭 사회민주주의자(MRP)들은 캠퍼스의 주도권을 놓고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사르트르는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자신의 철학을 활용했다. 그가 내놓은 대안은 교회도 아니고 당도 아니었다. 인간 개개인이 행위와 용기의 길을 따라가리고 선택할 경우, 각자는 자신들의 영혼의 절대적 주인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도덕적인 개인주의 철학이었다. 이것은 전체주의의 악몽을 겪은 사람들에게 던지는 자유의 메시지엿다. 자신의 재능을 이미 입증한 사르트르는 1944년 가을에 생 자크 거리에서 했던 “소설의 사회적 기술”이라는 성공적인 강연 시리즈로 권력을 끌어모았다. 당시, 그는 자신의 관념의 일부를 넌지시 내비쳤다. 1년 후, 해방된 프랑스는 지적인 자극을 열망하고 있었다. 사르트르는 1945년 10월 29일 장 구종 가 8번지의 상트로홀에서 공개 강연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실존주의”라는 단어는 그가 만든 것이 아니다. 그 단어는 언론이 만들어 낸 단어인 듯하다. 8월이 되기 전에 단어에 대한 정의를 내려달라는 요청을 받은 사르트르는 대답했다. “실존주의? 그게 뭔지 모르겠소. 내 철학은 존재의 철학이오.” 미디어가 만들어 낸 용어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사르트르는 강연의 제목을 결정했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빅토르 위고가 단언했듯, 제철을 만난 사상처럼 강력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르트르의 전성기는 두 갈래 다른 길에서 다가왔다. 그는 자유에 굶주리고 자유를 고대하던 사람들에게 자유를 설파했다. 그러나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자유는 아니었다.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했다. “실존주의는 인간을 그의 행위를 통해 규정한다…..실존주의는 인간에게 희망은 행위 속에만 있으며, 인간을 살아 있도록 만들어주는 유일한 것이 행위라고 말한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삶에 헌신하고, 그를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끌어낸다. 그 이미지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 사르트르는 1945년의 새로운 유럽인들은 새롭고 실존주의적인 개인들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유도 없이 고독하다. 내가 인간은 숙명적으로 자유롭다고 말한 것은 이것을 뜻한다.” 사르트르의 새롭고 실존주의적인 자유는 현실에 환멸을 느낀 세대에게는 무척 매력적이었다. 그 세대는 예외 없이 외롭고 금욕적이고 고결했으며, 폭력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약간은 공격적이었고, 반엘리트주의였으며 대중적이었다. 누구나, 그중에서도 특히 젊은이는 실존주의자가 될 수 있었다.
둘째로, 사르트르는 주기적으로 변하는 지적인 유행의 대형 혁명 중 하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사이, 드레퓌스 사건과 플랑드르 참호의 학살을 둘러싼 지나치게 이론적이기만 한 기나긴 실전에 염증을 느낀 프랑스 인텔리겐치아는 현실에 초연하다는 것을 미덕으로 삼으며 자랐다. 그런 분위기를 확립한 사람은 줄리앙 방다였다. 방다의 대성공작 <지식인의 반역>(1927)은 강령이나 당, 대의에 “헌신”하는 것을 피하라고, 추상적인 원칙들에만 집중하고 정치적 각축장에 들어가지 말라고 지식인들을 훈계했다. 사르트르는 방다의 경고를 귀담아들은 많은 사람 중 하나였다. 1941년까지 사르트르처럼 참여하지 않은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 사르트르는 열기구 풍선으로 대기를 시험했을 때처럼, 색다른 바람을 감지했다. 그와 친구들은 사르트르를 편집장으로 한 새로운 평론지 <현대>를 창간했다. 사르트르의 선언적 논설이 담긴 창간호는 9월에 나왔다. 문인들이 현실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은 불가피한 시대적 요구였다.
작가는 자신의 시대에서 일정한 위치를 점한다. 단어 하나하나는 메아리를 낳는다. 각각의 침묵도 마찬가지다. 나는 파리 코뮌의 뒤를 이은 탄압의 책임이 플로베르와 (에드몽) 공쿠르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탄압을 막기 위한 글을 한 줄도 쓰기 않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들이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칼라스의 재판은 볼테르가 상관할 일이었는가? 드레퓌스의 유죄 선고는 졸라가 상관할 일이었는가?
이것이 강연의 배경이었다. 그해 가을, 파리는 문화적으로 굉장히 긴장된 상태였다. 사르트르가 강연을 하기 사흘 전, 샹젤리제 극장에서 <유랑극단 배우>와 <랑데부> 등 신작 발레 2편이 개막할 때 해프닝이 있었다. 극장을 가득 메운 상류층 관객들이 피카소가 그린 현수막을 향해 야유를 보낸 것이다. 사르트르의 강연은 그리 널리 홍보되지는 않았다. ‘리베라시옹>, <르 피가로>, <르 몽드>와 <콩바>에 작은 광고가 두어 차례 실렸을 뿐이지만 입소문이 엄청나게 났다 .사르트르가 8시 30분에 강연장 인근에 도착했을 때, 군중으 ㄴ강연장 바깥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군중이 내는 소음에 놀란 사르트르가 공산당이 시위를 일으킨 것은 아닐까 두려워할 정도였다. 사람들은 강연장 안으로 들어가려고 미친 듯이 기를 썼고, 강연장 안이 꽉 차고 난 후에는 유명 인사만이 입장을 허락받았다. 사르트르의 친구들은 사르트르를 강연장에 들여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강연장 안에서 여자들은 혼절했고, 의자들은 부서져 나갔다. 강연은 예정보다 한 시간 늦게야 시작됐다. 사르트르의 강연은 학술적인 전문 철학 용어들로 이뤄졌다. 그렇지만 당시 시국에서 사르트르가 한 강연은 전후 최초, 최대의 미디어 이벤트였다. 우연히 줄리앙 방다 역시 그날 밤 강연을 했는데, 그 강연장은 텅 빈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르트르는 놀랄 정도로 지면을 장식했다. 신문 용지 부족에 시달리던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신문들이 사르트르의 강연 원고를 수천 단어씩 게재했다. 그가 한 얘기, 그리고 얘기한 방식 모두가 열정적인 비난의 대상이 됐다. 가톨릭 일간지 <라 크르와>는 실존주의를 “18세기 합리주의나 19세기 질증주의보다 더 심각한 위험”이라고 불렀다. 공산주의 일간지 <뤼마니테>도 사르트르를 사회의 적이라고 부르면서 비난 대열에 합류했다. 사르트르의 저작 전체는 바티칸의 금서 목록에 올랐고, 스탈린의 문화 통제 위원 알렉산더 파다예프는 사르트르를 “타자기를 가진 자칼, 만념필을 가진 하이에나”라고 불렀다. 사르트르는 전문가들의 맹렬한 질투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브레히트를 혐오했던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사르트ㄹ를 그보다 더 혐오했다.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사르트르를 “철학계의 사기꾼이자 야바위꾼”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모든 공격은 사르트르를 더욱 위대한 인물로 만드는 데 일조했을 뿐이었다. 사르트르는 이제 그보다 앞선 수많은 지도적 지식인처럼 자기 홍보 분야의 전문가였다. 그가 직접 하지 않으려 한 일들은 추종자들이 대신 했다. <삼디 수아>는 악의적인 논평을 내놨다. “우리는 바넘[19세기에 뛰어난 홍보로 유명해진 미국의 흥행사]의 시대 이후로는 홍보 활동이 올린 이런 개가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사르트르 현상이 도덕적으로 공격을 받으면 받을수록, 사르트르의 인기는 더욱 높아져갔다. <현대> 11월 호는 프랑스가 전쟁에 패배하면서 혼란에 빠진 나라라고 지적했다. 프랑스에 남은 것이라고는 문학과 패션 산업뿐이었다. 실존주의는 프랑스인에게 위험을 주고, 퇴폐의 시대를 살아가는 프랑스인의 개성을 유지시키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사르트르를 추종하는 것은 애국적인 행위가 됐다. 그의 강연 내용을 대강 확충해서 찍은 책은 한 달 사이에 50만 권이 팔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