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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대전 사람들은 대청호를 이웃마을 마실가듯 간다.
주말이면 호반길을 드라이브를 하거나 대청호 오백리길을 걷기도 하고 호수풍광이 수려한 곳에서 식사하거나 전망좋은 카페에서 차를 마시러 길을 나선다.
대전과 청주(원래는 대덕구와 청원군)의 앞글자를 따서 이름을 붙인 대청호는 시민들의 추억이 담긴 곳이다. 어느 곳을 가도 과거를 회상(回想)할 수 있다.
1980년 대청댐이 완공되면서 조성된 인공호수는 내륙이 바다라고 할만큼 넓다. 대전·청주 뿐 아니라 옥천과 보은등 4개 시·군을 넘나드는 대청호는 우리나라에서 세번째로 큰 호수다.
80년대 초반 헬기를 타고 가던 전두환 전대통령은 하늘에서 내려다본 대청호에 반했다. 그래서 그의 지시로 대통령 별장 청남대가 터를 잡을 만큼 호수와 산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풍경은 이 곳을 관광명소로 만들었다.
대청호를 따라 조성된 드라이브코스가 80km, 호수주변 마을, 산길, 임도, 옛길등 '대청호 오백리길'은 21구간 200km에 달한다. 이런 대청호가 청주·대전과 인접해 있다보니 마음만 내키면 아무때나 찾아갈 수 있다.
휴일 점심먹고 대청호반으로 산책에 나섰다.
오랫만에 옥천군 군북면에 있는 수생식물학습원(이하 식물원)을 걷고 싶었다.
중세유럽풍 고색창연한 건물들과 특색있는 연못, 호수에 접한 아름다운 산책길은 일상의 피로에 지친 마음을 정화시킬 듯 했다. 고속도로를 마다하고 일부러 마을과 산길로 이어진 국도를 달렸다.
회남면에서 부터 해발고도 200~300m에서 바라보는 호수의 빼어난 풍경이 돋보이는 굽이굽이 이어진 길은 언제가도 일품이다. 봄이면 벚꽃이 터널을 이룰터였다.
미세먼지 때문에 다소 흐릿하긴 했지만 맑은 하늘엔 구름이 양떼처럼 흩어졌고 어디선가 훈풍(薰風)이 얼굴을 스쳤다. 이런 날 식물원을 걷는다면 눈이 호강할 것이다.
청주에서 식물원이 있는 옥천 방아실 마을까지는 50분 정도 걸렸지만 차창밖 풍경만 봐도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식물원은 얄굳게 문이 굳게 잠겨있었다. 주차장에 들어서는 순간 '급실망'했다. 입구 앞엔 코로나19 때문에 임시로 폐쇄했다는 플랭카드가 걸려있었다.
들어갈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냥 돌아가기가 아쉬웠다. 그래서 짧긴 하지만 주변 산책로를 걸었다. 강태공들이 자리잡고 있는 호숫가는 경치가 예사롭지 않았다. 은빛 윤슬 반짝이는 호수가 단박에 마음을 사로잡았다.
멀리 식물원쪽을 바라보니 호수너머 언덕에 유럽식 古城(을 연상시키는)이 수면위에 드리웠다. 라인강변이 이럴까. 생경하고 독특한 풍경이었다.
뭍으로 올라온 하늘색 나룻배 옆에는 젊은 부부가 낚시 삼매경에 빠져있었다. 이 곳에서 발길을 돌려 식물원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올드트리'로 향했다.
대청호에 접한 레스토랑(뿌리깊은 나무)과 카페(올드트리)는 프로방스 지방의 시골농가처럼 세월의 두께가 켜켜히 쌓여 낡고 이국적이며 운치가 있었다.
이 곳을 찾은 것은 예전에 국립수목원이 국내 100대 명소로 꼽은 산책로가 있기 때문이다. 카페에서 직접 로스팅한 원두로 내린 따뜻한 더치커피를 마시기 전에 호숫가 산책로를 걸었다.
봄에는 화려한 꽃으로 치장하게될 나무는 겨우내 헐벗고 앙상했지만 그 사이로 햇살과 호수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북쪽으로 길게 이어진 대청호 지류는 삭풍(朔風)때문인지 수생식물학습원을 감싼 잔잔하게 출렁이는 호수와 달리 아직도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호수쪽으로 깊숙히 내려가니 찬바람이 불면서 조릿대 군락과 갈대숲이 심하게 흔들렸다. 호숫가에 서서 잠시 바람을 맞으며 풍경을 감상했다. 조만간 봄이 올지라도 이 곳 호수는 겨울을 완강하게 붙잡고 있을것 같았다.
나무들이 잔뜩 움추리고 있는 산책로를 한바퀴 돌고 카페 '올드트리'로 향했다.
7년만에 들어선 카페 분위기는 커피향이 더 진해진 것만 빼면 더 어둡고 '올드'해졌지만 손님은 더 늘었다.
엔티크 탁자가 단정히 자리잡은 카페 한가운데의 장작으로 때는 재래식 난로는 뜨겁게 열기를 뿜고 있었고 한 귀퉁이에는 원두가 담긴 자루가 잔뜩 쌓여있었다.
추천커피 2잔과 둥글고 길쭉한 호밀빵 한개로 구성된 1만7천원짜리 세트메뉴를 주문했다. 머그잔이 아닌 받침이 있는 찻잔에 나온 커피는 신선했고 빵은 씹을수록 감칠맛이 있었다.
아늑하고 훈훈한 곳을 떠나기 싫었지만 겨울해는 아직 짧았다. 저물기 전에 떠나야 한다. 청주로 돌아오는 길에 보이는 서쪽 하늘에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