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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너 파울 루벤스(1577-1640년 )
평화와 전쟁
평화는 부의 신인 플루토스에게 먹이기 위해 가슴에서 우유를 짜내고 사티로스가 전경에 있는 아이들에게 평화의 열매가 넘쳐나는 풍요의 뿔을 제공한다.
왼쪽의 두 여성은 평화의 혜택 중 하나인 번영과 예술을 상징한다
오른쪽에는 갑옷을 입은 지혜와 예술의 여신 미네르바가 전쟁의 신 마르스와 분노를 상징하는 분노의 알렉토를 몰아내고 있다.
하늘에서는 날개 달린 팬토가가 불과 파괴를 뿜어냅니다.
외교관이자 예술가인 루벤스는 영국과 스페인사이의 평화조약을 협상하기 위해 런던에 있었을 때 찰스 1세에게 이 그림을 선물했다고 한다
어찌 어찌 흘러서 결국 200년 전에 트라팔가 광장에 문을 연 영국 네셔설겔러리에 기증되었고,
여기에는 13~19세기 까지의 명화 2만3천 점을 보유하면서 그 중 3분의2가 기증된 작품이다.
그래서 그런지 입장료도 무료다
루벤스 작품
삼손과 데릴라
구약성서를 아무리 몰라도 삼손과 데릴라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아는 영화이야기.
이에 대한 루벤스의 그림은 긴장감과 강력함이 있다
삼손은 나실인의 서약으로 머리를 자르는 것을 금했고 그 대가로 하느님은 그에게 큰 힘을 주었다.
데릴라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뇌물을 받아 삼손을 유혹하고 잠든 삼손의 머리를 잘라 군인들이 약해진 영웅을 붙잡을 수 있도록 한다.
극적인 조명은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에 대한 루벤스의 인식을 보여준다
엔써니 반 다이크(1599-1461)
찰스 1세의 승마 초상화
찰스 1세는 1632년에 반 다이크를 그의 궁정화가로 임명.
장엄한 초상화에서 왕은 금 사슬에 가터 훈장 휘장을 착용하고 지휘관의 지휘봉을 쥐고 있다
초상화야 뭐 요즘 연애인 가수들 얼굴 수정보다 더 보정이 쉬우니까 그렇다 치고,
여기서 찰스 1세(1600-1649년)에 관한 이야기를 좀 하자
그는 공식적으로 잉글랜드 , 아일랜드, 스코틀렌드의 국왕이다
엘리자베스 1세로 끝난 튜더 왕조 이후 스튜어트 왕조인 스코들랜드의 제임스 6세( 비운의 스코들랜드 여왕의 유일한 자식으로 지난 번 소개를 했다. ) 의 차남인데, 1603년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왕위를 계승하여 제임스 1세가 된 뒤 런던으로 이주.
1612년 웨일스 공이었던 형 헨리 프레데릭이 사망하자 저절로 왕위계승권자가 되었다.
스페인의 마리아 안나와 혼담이 오갔으나 1623년 직접 스페인을 방문하여 8개월간 머물며 진행된 협상 끝에 결국 결렬되었다. ( 유럽 왕가의 결혼은 모두 정략 결혼이긴 하지만 협상 보다 인물도 봤겠고,
일단 합스부르크 혈통들이니 우리가 다 아는 근친결혼으로 인한 합죽이 턱 -유전병 계통이었을 것이니 결혼 할 맛 안났겠지 )
그러고는 1625년 즉위 직후 프랑스의 앙리에트 마리와 결혼한다.
즉위 첫 해부터 찰스 1세는 군주의 특권과 권위에 빠져 의회를 구슬리고 다독거리는 협조는 없고,
왕권을 제약하려는 잉글랜드 의회와 갈등만 빚기 시작한다.
그는 왕권신수설을 주장 ----- 의회의 간섭없이 전제군주로 통치하고자 하였고,
반대로 의회는 동의 없는 징세 등의 행위를 폭정으로 인식하고 반대의 기치를 든다.
게다가 프랑스의 공주를 왕비로 맞은 뒤 로마가톨릭을 옹호한다는 평이 돌면서 개신교 교도들의 반감이 커졌는데 특히 장로제를 기반으로 하는 잉글랜드 청교도와 스코틀랜드 언약도(한 마디로 교회와 국가관계를 조명하자면, 교회는 주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워지는 것으로 세속의 왕이 지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장로교의 원천은 미국이 아니고 스코틀랜드 )의 반발이 컸다.
찰스 1세는 공식적으로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으로서 성공회의 고교회( 여기서 성공회의 개념을 나는 대충 카돌릭과 개신교의 중간 쯤으로 인식하였다) 운동을 지지하였으나,
30년 전쟁(1618-1648년, 한창 불이 붙은 시기)이 벌어지는 유럽 대륙의 개신교 군대에 대한 지원이 미온적이었기 때문에 개신교도들은 종교개혁에 대한 찰스 1세의 본심을 의심하였는데 성공회 자체도 구교에 대한 개혁의 일원이니까.
장로제를 채택한 스코틀랜드 교회에게 성공회의 관례와 주교제를 강요하려는 시도는 주교전쟁으로 이어졌고 스스로의 몰락을 불러오는 단초가 되기도 하였다.
1642년 찰스 1세와 의회의 갈등은 결국 잉글랜드 내전으로 폭발한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의회는 원두당을 결성, 왕당파인 기사당 군대와 전투 시작.
오랜 평화로 전쟁의 전자도 모르는 잉글랜드 군인의 상태었고 복장도 비숫해 어느 넘이 내편이고 누가 적인지도 분간이 어려운 전쟁으로 중구난방이었다고 한다.
바쁘게 찍느나고 신발도 찍혔다
( 우리나라 국립묘지격인 웨스트 민스터 사원의 무덤군에서 찍은 올리버 크롬웰의 무덤인데 왕에 준하는 예우 속에서 묻혔지만 찰스 2세가 아버지의 목을 자른 그를 여기서 파묘하고 부관참시 후 시체 난장판을 벌리고 그의 해골은 이리저리 떠돌다 부관참시 400년 뒤인 1960년에 그의 청교도들이 세운 켐브리지대학의 일원인 시드니 서섹스 교회에 묻혔다)
개전 초기,
전쟁의 향방을 알기 어려웠지만 1645년 의회군이 신형군을 결성한 뒤 전세가 기울어 찰스 1세는 옥스포드에서 퇴각하여 북쪽으로 도망을 치게 되는 결과.
그는 그나마 스튜어트가에 온정적이었던 스코틀랜드 군대에 항복하여 다행으로 여겼지만,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의회 사이의 오랜 협상 끝에 런던의 장기의회로 넘겨졌다.
찰스 1세는 의회의 입헌군주제 요구를 끝까지 거부하다가 1647년 11월 잠시 탈출하였으나 다시 붙잡혀 아일오브와이트에 투옥되는 결과를 맞는다
그 사이 스코틀랜드 언약도가 왕당파로 돌아서며 다시 내전이 벌어졌지만 잉글랜드의 신형군은 1648년 말까지 잉글랜드 내의 봉기를 진압하며 내전을 종결지었다.
결국 의회파는 찰스 1세를 반역죄로 기소하여 1649년 1월 처형하는데,
찰스 2세는 아비가 목이 떨어지는 장면을 눈으로 지켜보기도 하면서 프랑스로 도망에 성공.
이렇게 찰스1세가 처형되기 까지 의회파의 수장이,
나중에 로마의 영구 집정관에 비유되는 호국경에 오른 올리버 크롬웰이다.
이후 의회는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인 잉글랜드 연방을 수립하였다.
잉글랜드 연방은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의 사망후 급속히 구심력을 잃었고 1660년 찰스 1세의 아들 찰스2세가 국왕으로 즉위하여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나중에 찰스1세는 잉글랜드 종교개혁이후 잉글랜드 성공회에 의하여 시성된 유일한 국왕이다.)
올리버 크롬웰의 종교를 빙자한 권력욕과 찰스 1세의 무능의 합작으로 잉글랜드의 많은 왕들 중에 유일하게
권좌에 있으며 목이 잘린 사례.
그런데 이 크롬웰이란 자의 잔악상의 예를 보면,
아일랜드 반란군 진압작전에 죽어나간 아일랜드인이 당시 인구의 1/4 정도였든 20~30만이었다고 한다
그 때 가장 잔인했든 사건이 드로이다 공성전인데 성을 포위한 뒤 함락이 되자 같은 개신교 까지 포함해 남녀노소 2,000명을 대부분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이다.
이 사건의 이야기는 소설, 영화로 알려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도 등장한다.
신의 율법을 이용한 인간의 잔혹함이 잘 들어나는 영국의 역사 조각이기도 하다
지금도 아일랜드에서는 올리버 크롬웰 하면 치를 떨 정도로 격분한다.
그의 통치 10년의 과정에서,
의회를 배경으로 권력을 잡은 올리버 크롬웰은 종신 호국경에 오르고 군사독재를 시작으로 백성들을 또 다른 방법으로 괴롭힌다.
오직 신의 율법으로만 청교도가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
선민사상을 내세우는 것 까지는 좋았지만 성경에 나오는 원리주의에 빠져 근검절약으로 술은 말할 거 없고,
비싼 음식도 먹지말고 화려한 의상도 입지말고 노래도 하지말고 유흥도 하지말고 오직 주 예수의 가르침대로만 깨끗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니,
오늘 날 영국의 요리가 유럽에서 제일 맛없는 요리로 취급되는 것이 올리버 크롬웰의 독선적이고 인간의 본능을 멎어버리게 하는 개조의 시간들 덕이었다.
물론 공적도 있다
영국 민주주의 발전의 시초는 1215년 존왕 시대의 마그나 카르타( 대헌장) 제정이었지만 그의 행적도 입헌군주제의 기틀을 딲는 부분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고 해군을 육성하는 등의 공로도 있다.
그가 죽자 국민들은 이미 청교도의 율법에 의한 통치와 통제에는 질려버렸다.
이후 다시 왕정으로 회귀되고 프랑스로 도망가 있든 찰스 2세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에 자연히 크롬웰 세력은 자연몰락의 길로 가게 되고,
그의 아버지 찰스 1세의 처형 12주기인 16641년에는,
크롬웰 세력을 증오하며 복수심을 키우든 찰스 2세는 무덤을 파고(위의 사진 두 장) 시체를 분해 해버리는데 머리를 베고 몸통을 4조각 내어 시가지에 걸어 놓아버린다.
그의 생전의 엄격한 통치에 만정이 떨어지는 군중은 시신에 욕설을 하고 침을 밷고 돌을 던지는 등의 화풀이를 했으며 그의 추종자들 중에 찰스 1세의 처형에 가담했든 26명을 교수형에 처하고 어쩔 수 없이 떠밀려서 아버지의 사형에 찬성했든 정치적 인사는 면책하거나 가벼운 형벌로 끝냈다.
이로써 17세기 영국의 십여년의 공화정은 권선징악 같이 시원스런 이야기도 담고 있다.
계속해서 네셔널 겔러리 미술관 회화들인데,
소개하는 그림들은 대부분 유명세가 있는 것들 위주로 올린다
조지 스텁스( 1724-1806년)
휘슬재킷,
말 그림이라도 예사로운 말이 아니다.
이 화가는 가업을 특이하게 계승했다.
10대까지는 가죽 직공이던 아버지를 따라 무두질을 했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이후 동물 해부에 몰두한 결과 최고의 동물 전문 화가가 되는데 그의 그림 덕에 영국인들이 처음으로 캥거루를 보게 됐다고도 하고,
그의 이름을 반석위에 올려놓으며 가장 유명한 작품이 바로 이 ‘휘슬재킷’의 초상화다.
사람도 평생 자기 초상화 한 점을 갖기 힘들던 시절에 실물 크기의 초상화를 보유한 이 말의 정체가 궁금하다.(실제 그림은 말 실물 크기로 그려져서 엄청 크다)
당시 '휘슬재킷'의 주인은 영국 총리를 역임했던 정치인이자 당대 최고의 부자이며, 정치를 빼고는 경마에만 열중했던 로킹엄 후작이었다.
'휘슬재킷'은 유럽에서도 손꼽히게 큰 그의 저택 마당에 풀어 키우던 200여 마리의 말 중 하나로, 현재 경주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서러브레드종(種)의 조상인 고돌핀 아라비안의 손자다.
하지만 '휘슬재킷'은 화려한 족보에 비해 경주마로서나 종마로서 기록이 특출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이토록 기념비적인 초상화의 주인공이 된 건,
그림을 보건대 그의 우아한 외모와 자유분방하고도 고귀한 성격 덕분이었을 것이다.
뒤 발목에 하얀 띠를 두른 ‘휘슬재킷’은 기름진 갈색 몸통에 부드러운 크림색 갈기를 날리며,
앞발을 들어 달리다 말고 우리를 쳐다본다.
주인도, 마구도, 안장도 없이, 온 세상에 홀로 남은 듯 무한한 배경에 선 ‘휘슬재킷’은 아름답고 자유롭고 고고할 뿐이다.
스텁스는 이전까지 왕과 귀족의 권세를 드높이기 위한 받침대처럼 존재했던 흔한 말 그림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한 마리의 말,
‘휘슬재킷’을 보여준다.
조셉 말로드 윌리엄 터너(1775-1851)
비, 증기 및 속도
런던에서 이발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왕립미술관에서 수련한 뒤 잠깐 사이에 정회원으로 올라갔다. 여러 곳의 풍습과 풍경을 주로 그렸으며 특히 빛의 묘사에서 획기적인 표현을 남긴 화가이다.
그리고 말년은 쓸쓸하게 혼자 죽어간다.
어차피 누구 대동하는게 죽음 아니니까.
19세기 산업혁명과 더불어 열에너지가 운동에너지로 변하고 증기열차가 레일을 날아다니는 시절에 윌리엄 터너는 비오는 날 기차를 타고 가다가 창밖에 쏟아지는 비를 보지만 창안에는 별다는 느낌이 없다.
그러다가 호기심 많은 이 작가는 창문을 열고 머리를 내밀어 10여분을 비를 맞고 그 시각과 차가운 느낌을 간직하면서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비, 증기, 그리고 속도와 같은 것들은 사실 그림으로 표현하기 어렵다.
그러나 터너는 자신이 개발한 구도와 기법을 활용해 비에 젖은 대기, 기관차가 내뿜는 증기, 속도감을 완벽하게 하나로 결합하여 표현하였다.
하늘과 땅을 가르는 경계선을 없애고, 철도는 대각선 방향으로 표현하고,
관객이 기차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을 선택하여 그림을 그렸다.
또 연료인 석탄이 타는 연실 (煙室)과 증기를 내뿜는 굴뚝을 강조하는 반면, 기차 앞부분을 제외한 나머지는 비를 머금은 흐릿한 대기 속으로 스며들게 표현했는데,
임파스토 기법이라고 해서 물감을 막 그냥 있는데로 찍어발랐다.
기차 앞에는 토끼가 숨을 곳을 찾느나고 달려나가고 있는데 토끼의 의미를 보는 사람마다
여러가지 의미를 부여한다.
정작 작가는 이에 대해 한 마디 말을 붙이지 않았다.
시인의 흉내인지.
역시 터너 작품이다
강풍 속의 네델란드 보트
폭풍우가 치는 날씨에 네델란드 보트가 충돌 경로에 던져진 상황으로 표현되는데,
어두운 구름은 위험한 분위기를 증폭시키고 있다.
네델란드의 브리지워터 공작이 17세기 바다 풍경을 동반하는 작품으로 의뢰한 그림
윌리엄 터너
칼레 부두
여행자들로 붐비는 영국 칼레에서 우편배가 착륙을 시도하면서 프랑스 어선과의 충돌을 간신히 피하는 광경.
터너가 1802년 첫 해외 여행 중 칼레에서 폭풍우를 당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린 작품
클로드 모네 (1840-1926년)
수련, 지는 해
프랑스 인상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며 인상파의 창시자이며 개척자.
생동감 넘치고 인상적인 작품으로 유명.
자연, 풍경, 정원들, 수련과 지베르니의 일본식 다리를 그린 일련의 그림들을 묘사했다.
폐암으로 86살로 사망.
그림 많이 아는 사람들에 의하면 실상은 모네와 더불어 초기 인상파 화가의 두 거두의 한 명인 마네를 더 선호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지베르니에서 모네가 나무를 한 그루 그리면 그 나무가 보기 싫어 동네 사람들이 다음 날 베어버렸다고 할 만큼 미움을 삿단다.
배고프고 종일 일만하는 시골 사람들에게 그림만 그리고 꽃 밭만 가꾸는 그를 좋아 할 리는 없긴 하지
(지베르니에 직접 가서 많이 찍어 왔으니 그 때 또 보자)
조르주 쇠라 (1859-1891년)
아스니에르에서의 물놀이
프랑스 인상주의(인상주의 해석 별거 없더라. 그냥 느끼고 받는 빛의 인상 그 자체로 간단히 생각하자) 화가.
탈인상주의 시대라고도 한다
19세기 후반 파리의 도시 재개발로 인해 하층민들의 거주지역과 공장은 철거가 되고 그곳에는 커다란 건물이 들어왔다. 그렇게 하층민들은 반강제적으로 파리의 북쪽으로 이사를 가게 됐고 재개발로 화려해진 도시는 순식간에 부유층들의 거주지로 변신했다.
도시의 재개발로 교통은 발달이 되고 이제 부유층들은 부담스럽지 않게 교외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됐다.
작품 속에 보이는 아름다운 곳은 프랑스 그랑자트 섬 맞은편에 위치한 교외지역이다.
이곳은 파리를 떠난 하층민들이 주로 살던 동네로 부유층들에게는 여가공간으로 유명했다. 작품 속에는 여유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부유층도 하층민들도 아닌 소시민들이라고 한다.
쇠라는 이 작품을 그릴 때 작품 속에 하층민들을 등장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쇠라는 당시 노동차 계층을 부상하고 있던 소시민 계층으로 대체했다. 작품 속에는 소시민 계층과 노동자 계층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리고자 했던 쇠라의 철학이 담겨있다.
이 작품은 1884년 부터 2년의 시간을 들여 완성한 것으로 그의 포인트리리즘 기법에서 최상의 결과물 중 하나다.
배경의 대부분이 점들의 모양으로 그려진 것이 특징이며 소묘법의 시작이라고 한다.
그림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빛과 그림자의 표현.
현재도 그의 대담한 시도와 고고한 예술적 성취로 세계적으로 각광 받고 있는 작품 중 하나로 평가
반 고흐( 1853 ~ 1890년 )
해바라기
네덜란드의 화가
그림 이야기를 하면서 이 화가 처럼 많은 소재를 다양하게 달고 다니는 화가는 더 없더라.
이제 이 불운의 천재 화가 이야기는 진부한 이야기가 돼 버렸다
왜냐면 모두가 다 아는 이야기꺼리기 때문이다.
그냥 간단히 이 작품에만 국한해서 네셔널겔러리 측 설명에 관해 말하건데,
고흐는 노란색을 희망과 우정과 연관을 시켰다.
그는 아를에 있는 자신의 집을 장식하기 위해 그린 네 장의 해바라기 켄버스가 감사를 상징하는 아이디어를 표현한다고 말했다.
친구인 폴 고갱의 도착을 기대하면서 손님 침실에 이 그림을 걸어 놓은 것이 특히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한다.
토기 바닥 위에 심플한 노란색 의자가 놓여 있어서,
파란색 문, 벽과 대조를 이룬다.
작가의 담배, 파이프가 의자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고,
뒤에는 상자 밖으로 싹이 트고 있는 양파가 살짝 보인다.
반 고흐는 자신의 직접적이고 솔직한 성격을 표현하기 위해 일상적인 사물의 단순한 구성을 의미하며 표현한다.
네셔널겔러리를 마치고 돌아가며 왕실 기마병들 연병장과 기마대 박물관 앞을 지나고
다우닝가 10번지 수상관저
2차 대전때 처칠이 전쟁을 치르며 사용했든 지하벙커,
여섯시 까지 입장인데 내가 도착한 시각이 여섯시 3분이었고,
입장 불가다.
간신히 흑인 근무자를 달래서 입구 위에서 사진만 찍고 가는 것으로 허락.
이로써 런던 첫날 관광의 빡빡한 일정을 다 마치고 숙소로 돌아갑니다.
갑자기 여러가지 잡다한 일로 시간을 많이 뺏기게 되었네요
기다리는 친구도 있을터인데 미안합니다
올리는 횟수를 부득히 조정하게 돼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