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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 무기고를 털다
증언자:최인영(남)
생년월일 : 1963 1. 5(당시 나이 17세)
직 업:용접공(현재 용접공)
조사일시 1989.5
개요
5월 39일부터 23일까지 광주 전역을 돌아다니며 시위5월 21일 점심 무렵 남평 무기고를 습격하여 총을 가져오기도 했다.
용접공 생활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께서 병환으로 돌아가셨다. 아버님은 문짝 만드는 일을 하셨는데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재혼을 하셨다. 그해부터 동생과 나는 외할머니 집에서 살았다.
외할머니 댁은 조금은 부유한 편이어서 중학교까지 마치고 용접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조그마한 공업사에 들어가 용접기술을 익히면서 한 달에 겨우 3만원 정도를 받고 생활했다. 동생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운전을 배워 화물차를 운전했다.
1980년 당시 나는 계림동 외할머니 집에서 기거하며 '성진공업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공업사 사장이 심상우(국회의원으로 재직하던 중 아응산 사태로 사망)와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주로 관공서 일을 맡아서 하는 편이었다.
그 무렵에는 광주시청내에 있는 무기고 문에 경보장치를 설치하는 일을 했다.
5월 16일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대학생들이 시위하는 광경을 보았다. 나도 횃불시위를 하는 대학생들의 틈에 끼여들고 싶었지만 일을 하느라 더럽혀진 작업복 차림으로는 창피해서 도저히 참여할 수가 얼었다.
5월 18일에는 새벽 1시경까지 일을 했는데 시청 직원들이 승용차로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산장 입구에 다다랐을때 헌병 한 명이 승용차를 세웠다. 차를 세운 이유는 통행금지 시간을 위반했다는 것이었다.
시청 직원들은 헌병에게 신분증을 보여주고 사정 이야기를 했으나 막무가내였다. 오랜 시간 승강이를 벌인 끝에 통과가 되었지만 그날 이후 시청 일은 쉬었다.
집중사격을 받고
5월 19일부터 공수부대의 만행을 소문으로만 듣고 집에 눌러 앉아 있자니 궁금하여 그냥 있을 수가 얼었다.
그래서 20일 낮에는 친구들과 함께 시내에 나갔다. 계림동 오거리에서 농장다리를 거쳐금남로 부근까지 걸어나갔다.
금남로 곳곳에서는 학생들과 공수부대들이 대치하고 있었으며 사람들 로 가득 차 있었다. 충장로의 곳곳에는 공수부대원들이 7,5명씩 무리를 지어 지키고 서 있었다.
1백여 명도 넘어 보이는 시위대들은 국민은행 부근에서 도청 앞의 공수부대들을 향해 돌을 던지며 시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수백 명의 사람들 틈에 끼여 공수부대를 향해 공사장 부근에 굴러다
니는 돌을 집어던졌다. 공수부대원들은 돌을 던지며 시위하는 사람들에게 최루탄을 쏘아댔다. 시위대는 어디서 소방차를 끌고 왔는지 최루탄이 터지면 곧바로 그 소방차로 물을 뿌렸다.
저녁 무렴 도청 분수대 조금 못 미친 곳에서 택시 20여대가 불에 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뒤 MBC방송국 쪽에서 연기가 심하게 나는 것을 보고 모두들 몰려갔다.
나도 사람들을 따라 그쪽으로 가보았다. MBC방송국은 불길에 쉽싸여 타고 있었고, MBC방송국 옆 건물에 위치한 전자제품 가게에서는 MBC방송국에서 옮겨 붙는 불길 때문에 물건들을 밖으로 꺼내느라 야단법석이었다.
공수부대원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MBC방송국 앞도로를 가득 메운 시위대와 구경꾼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가끔쌕 시위대의 구호 소리가 뒤섞여 쏟아졌다.
'계엄해제하라!' '김대중을 석방하라.!' 내가 한동안 구경을 하면서 있을 때 주위 사람들이 시위대 버스에 올라타자고 했다. 집에서 함께 온 친구와 시내에서 시위하던 중 만난 친구들 3명과 버스에 올라탔다.
삽시간에 모여든 10여 대의 시위대 버스로 MBC방송국 앞에서 출발하여 노동청을 지나 조선대학교앞으로 질주했다. 버스마다 시위대 30 ∼ 40명씩 타고 있었다. 내가 탄 버스는 선두에서 달리고 있었다. 조선대학교 정문 쪽으로 들어서자 학교 앞에서 지키고 있던 공수부대들이 총을 사정없이 쏘아대며 새까맣게 몰려왔다. 주위가 캄캄했으므로 우리는 처음에는 공수부대 원들을 정확히 보지 못했 다. 차 앞에서 난데없이 시커먼 물체들이 달려들었다.
뒤늦게 그들이 공수부대원임을 안 운전기사는 겁에 질려 차를 돌리려고 했지만 뒤따라오는 차량들 때문에 쉽게돌릴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자 질서정연하게 줄을 지어 달리던 시위대차들은 서로 부딪치는 등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결국 차는 앞으로 나갈 수밖이 없는 상황이었다. 운전기사는 그대로 차를 밀고 나갔다. 총알은 무수히 쏟아져 버스에 박혔고 모두들 총알을 피하기 위해 머리를 버스 바닥에 바싹 대고 엎드려 있었다. 운전기사는 재빨리 차를 좌회전하여 법원 부근까지 왔다. 산수 오거리쫌 왔을때에야 우리 차가 무사히 빠져 나왔음을 알고 모두들 안심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우리 차에 타고 있던 사람 중 2명이 부상을 당해 신음하고 있었다. 한 명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으며,다른 한 명은 관통된 한쪽 귀에서 피가 계속 쏟아졌다.
우리는 빨리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했지만 또다시 조선대학교 앞을 지나갈 수는 없었다. 누군가 광주역 쪽으로 돌아가자는 말에 동의하여 운전수는 광주역을 향해 내달렸다.
새벽 1시에 임박한 시간이었다. 버스가 광주역 로터리를 돌 즈음 광주역을 지키고 있던 공수부대원들이 총을 쏘아댔다. 우리는 또다시 혼줄나게 도망을 쳐야 했다.
광주역에서 집중사격을 받고 모두들 혼이 나간 상태여서 어떻게 온지도 모르게 전남대병원 앞에도착했다. 사람들이 부상당해 쓰러져 있는 청년을 둘러메고 병원으로 갔다. 나는 귀를 다친 청년을부축해 전남대병원 입구로 갔다.
병원은 수많은 부상자들로 북적거렸고 의사와 간호원은 왔다갔다 경황이 없어 보였다. 마침 의사 한 명이 전남대병원 입구 쪽으로 걸어나오고 있어서 나는 부상자를 의사에게 인계하고 나왔다.
나는 집으로 가기 위하여 걷고 있었다. 시간은 새벽이었지만 낮과 똑같이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다. 그들 역시 나처럼 시위를 하며 돌아다닌 사람들이었다. 길을 걷다가 사람들을 만나면 그동안 일어난 일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주로 자신의 목격담을 전함으로써 공수부대들의 만행을 폭로하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내뱉는 것이었다. 일부 젊은 사람들은 상스러운 욕과 함께 끝까지싸워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여자들 유방을 대검으로 도려냈다. "
"임산부 배를 갈랐다. "
등의 끔찍한 이야기들도 했다. 나는 사람들 틈에 끼여 이야기도 하고 가끔 졸기도 하면서 날이 샐때까지 돌아다녔다. 이때부터 나는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시위대들과 몰려다니면서 아무 곳에서나 잠을 잤다.
남평 무기고를 털다
5월 21일 아침이 되자 나는 현재의 충금지하상가 부근을 걸어갔다. 아침부터 모여든 시민들로 금남로 일대는 발디딜 틈이 없었다. 충금지하상가 부근에는 전투경찰이 타고 다니던 버스와 트럭들이 시위대 틈에 있었다. 오전에는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꺼내 왔다는 군용차들도 보였다.
시위대들은 일반 시내버스와 트럭 등의 비해 시위대차량이 육중한 군용차량으로 바뀌자 사기충천해 있었다. 이를 지켜보는 시민들의 눈빛도 달라 보였다. 정오쯤 되자 점점 불어나는 시민들과 차들로 금남로는 가득가득 메워져 있었다. 바로 그때 시민군차가 도청을 향해 들어가고 있었다. 공수부대들을 향해 무섭게 달려든 청년은 머리에 횐 띠를 동여매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장갑차 위에 우뚝 서 있었다.
나와 친구들은 금남로 사거리에 모여 있었다. 장갑차가 동구청 부근까지 가자 갑자기 총성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순식간에 시민들은 흩어져 도망갔다. 나도 친구들과 도망을 갔다.
한참 후 부분부분 모여 있던 시민들과 청년들은 공수들의 무차별 난사에 위협을 느끼고 총을 들어야 한다고 했다. 친구들과 나는 화니백화점 부근에 있던 가스차에 올라탔다. 일부는 가스차 맨 위에 올라타 걸터앉기도 했다. 15명 정도의 젊은 청년들이 차에 올라타고 보니 총알이고 최루탄이고 전부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 역시 돌과 화염병만으로는 완전무장한 공수들에 게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장을 위해서는 총이 필요하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결국 우리는 운전면허증을 소지한 친구가 운전을 하기로 했다. 차가 출발했다. 무기고를 습격해야 한다고 사전에 의논하지는 않았지만 모두들 그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으므로 차가 가는 대로 아무 말 없이 따랐다.
내가 탄 가스차는 다른 차와는 달리 차 윗부분에 문이 달려 있었다. 차가 한참을 달린 뒤 차문으로 고개를 내밀어 밖의 상황을 살폈다. 차는 이미 남평지서에 당도했다. 점심시간이 지난 후였다.
남평지서는 예상외로 텅 비어 있었다. 경찰들이 겁을 먹고 도망가 버린 것 같았다. 우리를 본 남평 주민들은 무기고를 열 수 있도록 도끼를 갖다주기 도 했다. 경찰서 건물 뒤에 무기고라 씌어진창고가 있었다. 우리는 도끼로 무기·고 문을 열고 가지런하게 세워진 카빈총 20여정과 탄알 박스 7,8개를 들고 나왔다. 카빈총 사이에는 Ml 몇 정이 끼여 있고 수류탄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이곳에서 주로 '전두환은 물러가라', '전두환을 찢어죽이자'는 구호를 외쳤는데, 나는 전두환이 누구인지는 몰랐지만 나름대로 '광주사태'비극을 일으킨 장본인일 것이라고 단정지으며 목청껏외쳤다.
특공대 작전
오후 3, 4시경 충금지하상가 사거리로 의기양양하게 돌아온 우리는 시위대의 환영을 받았다.
그 무렵 무기를 든 시민군은 우리가 처음인 것 같았다. 총을 든 사람 중에는 총을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어려 보이는 학생들한테서 총을 빼앗아 친구들에게 주었으나 친구들은 총을 다를지 모른다고 받지 않았다. 시위대들은 서로 총을 가져가려고 했으나 몇 정 되지 않았으므로 총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만 분배되었다.
나 역시 총을 만져보지는 않았지만 나이가 좀 들어보였던지 쉽게 한 정을 내주었다. 우리가 남평지서에서 가져온 20정 정도의 총과 탄창이 시위대 청년들에게 고루 분배되잔 자체조직이 생겼다. 소위 특공대라 불리는 15명 정도의 청년들은 작전을 세우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제 오늘 무기도 없이 무장한 공수부대와의 접전에서 무수히 희생만 당했기 때문에 무기를 든 이상 이제는 기필코 공수부대를 물리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특공대 15명 정도가 무기를 들긴 했지만 무장한 공수부대와 정면대결을 하기에는 무리일 것이라 판단했다. 결국 우리는 도청 앞까지의 정면돌파는 피하고 각자 흩어져서 도청 앞으로 진격해 들어가 각개격파를 하기로 했다. 나는 혼자서 가톨릭센터 뒷골목을 거쳐 도청을 향해 나아가기로 했다. 동구청 부근까지 왔을 때 도청 앞 공수들과 시민군의 접전상황이 보이지 않아 몹시 궁금했다. 상황을 살피려고 동구청 옆 골목으로 걸어나왔다. 총을 앞으로 겨냥한 자세로 고개를 쑥 내밀고 금남로를 내다보았다. 마침 내가 서 있던 동구청 바로 정면에서 공사 중인 건물이 눈에 띄었다. 그곳에서 공수부대들과 대치하여 싸우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뛰어가려고 했다. 그 순간 귀 가까이에서 '탕' 하는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나를 향해 사격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멍해지면서 기절을 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잠시 후 정신이 들었다. 통증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수 없었다. 무조건 도망을 가야 한다는 긴박감 때문에 아픔을 느낄 시간적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목과 어깨 사이를 스친 층상
몸을 가눌 수가 없어 겨우겨우 기어서 동구청 골목을 빠져 나왔다. 적당히 몸을 숨기며 정신없이 가고 있는데 중앙국민학교 후문 근방에서 사람들이 보였다. 시민들을 보자 '이제 살았다'는 안도감에 시민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나를 본 시민들 표정이 갑자기 굳어져버렸다. "아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저 피 좀 봐."
시민들의 말을 듣고 그 총탄에 내가 맞은 것을 알았다. 나는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몇 사람이 부축하여 인근 박00외과로 나를 데리고 갔다. 나는 대강 웅급치료만 하고 링게르를 꽃고 있었다. 박원장은 부상자가 너무 많아 약이 바닥이 났다고 하소연하더니 갑자기 엉엉 울면서 말했다. "공수부대들이 느닷없이 병원에 들어와 중환자실부터 뒤져서 환자들을 모두 죽여버리겠다
고 협박을 했어요 내 자식에게도 심하게 해 눈을 다쳤어요."
나는 박원장이 말하는 자식이 자기 아들을 두고 하는 말인지 아니면 자기 아들 또래의 다른 부상자를 두고 하는 말인지 정확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원장은 북받쳐 오르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계속해서 횡설수설하며 하소연했다.
나는 원장의 말을 듣고 조금 풀렸던 긴장이 다시 신경질적으로 날카릅게 섰다. 순간 나는 꽂아놓은 링게르를 빼버리고 도망치듯 병원을 나왔다. 목과 오른쪽 어깨 사이를 앞에서 뒤로 스치고 나간 총알의 상처는 길지 알고 다만 피를 조금 흘렀기 때문에 반창고로 응급치료만 해둔 상태였다. 다른 부상자 한명이 나를 뒤 따라나왔다. 병원을 벗어나 거리로 나오니 조금 전 웅성거리던 시민들은 온데 간데 없고 콩볶는 듯한 총소리만 들려왔다. 텅빈 거리에 둘이 서 있자니 요란스런 총소리에 긴장감만 더해 갔고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무 곳으로나 눈메 보이는 골목으로 들어가 맨끝 집의 대문을 힘껏 두들겼다. 아무리 두들겨도 안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대문을 발로 찼다. 얼마 후 여자 한 명이 나와서 문을 열어주었다. 집안으로 들어가보니 10여 명의 여자들과 젊은 청년 한 명이 있었다. 아마도 요정 인 듯했다. 젊은 청년은 나와 함께 온 또 한 명의 부상자를 지하실로 숨겨주었다. 그때까지도 우리는 총을 들고 놓지 않았다. 그런데 그 젊은 청년은 우리를 지하실로 안내하고 난뒤 총을 달라고 했다.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 총을 가져간 것이었다. 안약에 공수들에게 잡히더라도 총을 소지하지 않았을 때가 휠씬 위험이 덜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우리 역시 순순히 응했다. 그 청년은 친절하게도 라면을 끓여주며 허기진 배를 채우라고 했다. 우리 두 사람은 라면을 맛있게 먹었다.
일시적으로 붙여놓은 반창고 치료가 효과가 없었던지 총알이 스치고 간 목 부분의 상처에서 피가 계속 흘렀다.
이를 본 청년은 약을 발라주고 러닝셔츠를 찢어 상처부위를 단단히 동여매주었다. 하지만 그 집 사람들의 친절에도 불구하고 공포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마침내 나는 그곳에서 나가기로 마음먹고 지하실을 박차고 나왔다. 연달아 가정집 담을 펄쩍펄쩍 뛰어넘었다. 부상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뛰어넘을 수 있었다. 어둠이 깔린 거리로 나와보니 원각사 앞 도로변이었다. 시내는 비교적 한산하고 시민군의 차량이 중앙로를 지나다닐 뿐이었다.
시민군의 차를 보자 조금 전의 공포는 언제 그랬냐 싶게 사라져버렸다. 나는 다시 차에 올라탔다.
한참 동안 차를 타고 돌아다니다 보니 대부분의 시위대들은 총을 소지하고 있었다. 순간 나는 총을 두고 온 것이 생각났다. 총을 찾으러 가기로 마음먹고 차에서 내린 뒤기억을 더듬어 겨우 집을 찾았다. 그 청년은 조심스럽게 총을 내주었다. "방금 전에 함께 있었던 부상자도 이미 총을 찾아갔습니다. " 그 말을 듣고 나는 다시 총을 메고 도로로 걸어나와 시민군들이 타고 다니는 차를 세워 올라탔다. 광주에 있는 주유소는 가는 곳마다 무조건 차를 몰고 들어가 기름을 넣어도 누구 하나 말리지 않았고 주인들은 오히려 가득가득 넣어주었다.
21일밤은 함께 차를 타고 다니던 시민군 6명과 황금동 술집에서 잠을 잤다.
군복 입은 시체
다음날 아침에는 걸어서 황금동에서 광주공원으로 갔다. 광주공원에는 커다란 광주리에 밥이 쌓여 있었다. 3일간 잠 한숨 제대로 자지 못하고 밥도 배부르게 먹어보지 못한 터 라 정신없이 먹어댔다.
바로 그때 젊은 청년 2명이 군복 입은 사람의 다리를 질질 끌면서 걸어왔다. 자세히 보니 군인으로 보이는 그 사람은 총에 목이 관통되었고 이미 죽어 있었다. 그 광경을 보자 밥이 넘어가지 알았다. 나는 광주공원에서 빠져나와 시민회관을 지나 걸어갔다. 농촌진흥원 부를 상무대 쪽에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다. 그곳을 시민들 10여 명이 지키고 있었다. 그중에는 외국 기자로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시민군들은 외국 기자 한 명을 붙잡고 카메라를 빼앗았다. 시민군들은 외국 기자의 카메라에 자신들이 찍히면 잡혀가기 때문이라고 윽박 질렀다. 그것을 보고 있던 나는 시민군들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만류하여 외국 기자의 카메라를 건네주고 돌려보냈다.
그리고는 한전 부근으로 갔다. 지프차를 탄 젊은 청년이 수류탄 2개를 손헤 들고 권총을 찬 채 죽으러 간다고 했다. 나는 그 청년에게 말했다.
"수류탄 한 개만 주시오" "줄 수 없소 함께 타고 갑시다. 거기 바리케이드 너머에는 군인들이 있쇼 나는 기어이 적의 저지선을 돌파하겠소" 그 사람은 3명의 젊은 청년들과 차를 몰고 달렸다. 그곳에서 빠져나와 지나가는 차를 타고 공원 부근 친구집으로 가서 잠을 잤다.
사격연습
5월 23일 오후 친구집에서 나와 차를 탔다. 시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도청 부근에 이르러 차에서 내렸다. 도청 앞에는 분수대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엄청나게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트럭, 버스, 지프차 등에 번호를 쓰며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도청 정문 앞에서 어린아이들이 총을 갖고 있는 것을 보고 위험하다고 생각되어 총을 빼앗았다.
바로 그때 지프차 한 대가 교도소를 습격하러 가기로 했다면서 차에 타라고 했다. 차에는 '전두환이 찢어죽이자!'라고 씌어져 있었다. 지프차,버스,트럭 등이 준비되고 시민군 1백여 명이 모여들었다.
나도 그들 사이에 끼여 차에 올라탔다.
여러 대의 차량들이 교도소를 향해 가던 중 서방 부근을 지날 무렵이었다. 내가 탄 차는 운전사가 차를. 약간 돌려서 몰고 갔다. 직진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도망가기 쉽게 차를 돌린 것이었다.
차가 동신전문대 앞에 왔을 때 몇몇 시민군들은 사격연습을 하기 위해 동신전문대로 간다고 했다.
중학생으로 보이는 학생과 아저씨 7, 8명이 차에서 내렸다. 나도 그들을 따라 차에서 얼른 내렸다.
우리는 동신전문대 운동장으로 갔다. 우리는 제각기 카빈을 들고 축구 골대를 향해 쏘았다. 나는 처음으로 총을 쏘아보았기 때문에 신기하기도 하고 무서움도 일었다. 날이 어두워져 나는 동신전문대에서 나와 계림등 집으로 돌아왔다. 할머니는 총을 들고 있는 나를 보고는 깜짝 놀라면서 빨리 총을 갖다주고 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집을 나와 농장다리 부근에서 지나가는 차를 세워 총을 건네주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나에게 할머니는 상처부위를 치료해 주시며 일러주셨다.
"데모를 하는 사람은 순전히 깡패들밖에 없단다. 학생들 은 모두 빠져나갔어-"
나는 그 말을 듣고 무척 충격을 받았다. 이제껏 데모를 한 사람들 대부분이 대학생들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5월 24일 이후로는 집에서만 지내면서 치료를 하고 밖에는 나가지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 뒤 동네에서는 무조건 한 명씩 잡아간다는 소문이 들렸다. 동네에서 제일 말생을 부렸던 사람을 통장이 적어서 을렸다고 했다.
우리 동네에서는 당연히 내 이름이 을랐다. 할머니는 걱정이 되어 통장한테 찾아갔다. 할머니는 동네 터줏대감이었으므로 통장과 이야기를 하여 일이 쉽게 풀렸으나 그래도 불안하여 공원부근 친구집에서 숨어 지냈다.
며칠 뒤에 잠잠해진 것 같아 다시 집에 들어가 직장엘 나갔다. 그 후 결혼을 하여 양동시장에서 식당을 운영했다. 원래는 이모가 식당을 경영했는데 그 식당에서 내가 1년간 주방일을 한 경험이 있어서 인수받은 것이다. 빛을 얻어 시작하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벅찼는데 점점 더 어려워져 1년 6개월 정도 운영하다가 그만두고 다시 용접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용접일도 겨울에는'일감이 없고 일이 있을 때도 한 달 중 노는 날이 많고 임금이 일당으로 계산되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
1988년 부상자 신고기간에 나는 사실 신고를 하지 않으려고 했다. 만약에 잘못되면 영창신세를 질 같은 두려움이 앞섰기 때문이다. 이모가 시청으로 전화문의를 하여 신고를 해도 된다는 확인을 하고 추가신고 마지막 날 접수를 했다.
9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러서 5·18에 대한 특별한 감정은 많이 사그라졌다. 가끔씩 전두환이 불쌍하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5 · 18이 진상규명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현 대통령이 물러나지 않는 한 결코 1980년 5 · 18의 진상규명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조사·정리 안은정)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 감사 합니다.
사랑과 행복이 함께하는 점심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