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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화해·희망
-2003 해외민주인사초청 한마당에 다녀와서
은호기 <미국·시사평론>
한국에서 온 초청장
2003년 5월 21일, 한국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로부터 한 통의 등기편지를 받았다. 영문으로 쓰여진 편지는 매우 정중했다.
"한국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선생님부부를 2003년 해외민주인사초청 한마당에 초청코자합니다. 저희는 한국민주화를 위한 선생님의 활동을 감사한 마음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의 평화와 인권, 그리고 민주화를 위한 헌신적인 활동은 한국민주운동사에 확실하게 인식될 것입니다. 왕복 항공료와 숙식비, 대회참가에 드는 비용 일체를 기념사업회에서 부담하겠아오니 초청을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대강 이런 내용이다. 일정은 9월 22일부터 27일까지 일 주일간. 해외민주인사 한마당을 시작으로 청와대 방문, 옛 안기부 터, 서대문독립공원(옛 서대문형무소), 도라산 역, 판문점 등 현장방문, 광주5·18국립묘지 참배, 각종 초청만찬회 등 일정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이 초청장을 읽어 내려가는데 문뜩 김상돈 선생님, 임창영 선생님의 생전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어서 수많은 선배님들, 동지들의 모습도 떠올랐다. 이 분들의 공을 내가 가로채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한편, 역사의 현실에 맞서 그때마다 온몸으로 투쟁해온 선혈 가운데 아직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분들이 적지 않은 우리 민족사를 되새겨 볼 때, 송구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기뻤다. 옳고 떳떳한 삶과 행동이라는 믿음과는 달리 늘 따갑고 차가운 눈초리를 나라 안팎에서 받아왔는데, 이제는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는 감격도 없지 않았다.
그리고 미국에서 외롭게 혼례를 치른 우리 부부가 30 여년 만에 처음으로 부부동반으로 한국에 가게 되었다는 개인적인 기쁨도 보태어졌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Korea Democracy Foundation)
우리를 초청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독립운동과 함께 한국현대사의 두 가지 정신적 기둥 가운데 하나인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국가적으로 계승·발전시켜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를 토대로 2001년 6월 28일 국회에서 통과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에 의해 설립된 특수공법인이다. 이 법에 따라 설립비용과 사업예산 일체를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지원 받고 있다.
2002년 1월에 공식으로 출범한 기념사업회는 민주화운동역사정리 사업, 민주화운동의 정신계승 사업, 민주발전지원 사업 등을 주요사업으로 하고 있는데, 특히 민주화운동사 정리사업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식민사관과 냉전사관에 발목이 잡혀 제대로 역사를 정리할 수 없었던 한계에 대한 반성일 터다. 조직 안에 연구소와 사료관을 두어 민주운동사 정리사업을 전담케 하고 있다. 지난 8월, 미국에서 창립된 미주민족운동100년사 편찬위원회와는 이 면에서 목적을 같이하고 있어 앞으로 서로의 협조가 기대된다.
뿐만 아니다.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통하여 각 분야의 민주·통일운동단체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연대함으로써 현실적 책무에도 충실하고 있다. 특히 김용태 이사, 조성우 이사의 남북화해 사업에 대한 열정은 매우 고무적이었다. 민주화운동기념관 건립도 각계의 호응을 받아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그리고 공법인의 지위를 활용, 막힌 문제를 정부와 협의하여 하나씩 하나씩 풀어나가고 있다. 이번 송두율 교수의 입국이 좋은 예다.
이사장은 민주화운동의 원로이신 박형규 목사가 맡고 있으며, 이사로는 성유보, 함세웅, 이해동, 김용태(상임), 라병식(상임), 조성우 등 우리들에게도 낯설지 않은 운동권 인사들이다. 50여 명의 상근자들도 모두 운동권 출신으로 포부와 열성이 대단해 보였다.
해외민주인사초청 프로그램은 기념사업회가 창립된 작년에 바로 시작되었으며, 오글(George Ogle) 목사, 시노트(Jim Sinnott) 신부, 하비(Pharis Harvey) 목사, 로광욱 박사, 지창보 박사, 김영철 목사 등 70여 명의 해외민주인사가 초청되었었다.
같이 초청 받은 외국형제들
올해로 두 번째인 2003년 해외민주인사초청 한마당에 초청되어 참석한 인사는 모두 46명. 일본, 홍콩, 독일, 불란서, 캐나다, 미국 등 세계 여러 곳에서 온 분들로서 이들 가운데 스물 다섯 분이 외국형제들이었다. 미국의 패터슨(Patricia Patterson), 매티우(Gene Mattews 마태진), 포이트라스(Edward Poitras 박대인), 배징거(Jean Basinger), 라이스(Suzanne Rice), 죤스(Linda Jones), 모리스(Frances Morris), 오버톤(Joyce Overton), 마도나(Randy Madona), 불란서의 길레모(Alexandre Guillemz), 독일의 힌스페테(Juergen Hinzpeter), 쉬바이처(Dorothea Schweizer), 캐나다의 니낸(Ambattu Ninan), 일본의 오까모도 도모아끼(岡本知明), 아리모도 아끼히로(有元章博), 다께나카 마사오(竹中正夫), 마에지마 무네토시(前島宗甫) 등이다.
해외동포로서는 미국의 선우학원 박사, 문동환 목사, 임순만 목사, 안중식 목사, 리형호 전도사, 이행우 선생, 그리고 은호기, 독일에서 송두율 교수, 홍콩의 안재웅 목사, 일본의 서용달 교수, 임철 교수, 이청일 목사, 양기홍 선생 등이었다. 대부분 부부가 같이 왔기 때문에 실제 인원은 절반 정도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외국형제들의 공은 평가받아 마땅하다. 암울하고 무서웠던 저 70년대, 80년대에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에 뜻을 같이 했던 용기와 사랑. 실제로 이들의 노력은 대단했다. 이분들의 공로를 기리고, 이분들을 우리의 뜻에 계속 동참시키는 계기를 마련해준다는 것, 정말 뜻 있는 일이다. 기념사업회의 마음 씀에 가슴 뿌듯하다. 우리네 해외동포들이야 이렇든 저렇든 어찌 조국을 잊을 수 있겠는가? 떠나온 조국을 숙명처럼 짊어지고 사는 우리이기에 설사 서운한 대접을 받는다 한들 어떠하랴.
그리고 미국의 선우학원 박사, 일본의 정경모 선생, 독일의 송두율 교수의 입국을 위해 이사장님을 비롯 임원들이 직접 현지를 방문, 노력을 아끼지 않았음을 기억하고 싶다. 비록 정경모 선생님은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송 교수를 이곳 서울에서 만날 줄이야. 나 역시 1997년에야 한국입국금지조치가 풀렸던 터였다. 진즉 한국에 들어와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 유럽운동권의 중심이었던 이종수 교수(KBS 이사장)와의 만남도 뜻밖이었다. 모두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하여 대륙을 넘나들던 열정들이었다. 덧없이 흘러간 세월을 머리에 흠뻑 안고 다시 만났다.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
우리 부부는 9월 22일 오후에 숙소인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 도착하였다. 배정된 방에 들어 짐을 풀었다. 커튼을 들치고 밖을 내다보았다. 울창한 숲, 골짜기를 타고 흐르는 물소리가 여전했다. 그때가 생각났다.
나는 1990년 7월 26일부터 28일까지 이곳에서 묵은 적이 있다. 남과 북, 해외가 공동으로 추진했던 범민족대회 예비회담을 이곳에서 갖기로 했었다. 독일의 이종현, 일본의 양동민, 강종헌, 김정부, 미국의 노길남, 은호기 등 6명이 해외대표단을 구성, 단장의 일을 맡았었다. 그러나 우려했던 대로 남한정부가 북한대표단의 입국을 허용치 않아 회담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우리 해외대표단은 아카데미하우스에 갇혀있다 올 수밖에 없었다. 아, 그때의 참담했던 심정. 떠난 지 처음으로 조국 땅을 밟았으나 회담은 고사하고 친척 한 분 만나지 못하고 떠나오는 발길엔 비애보다도 분노만 채였다. 차라리 해외대표단의 입국도 거절했어야 했다. 노태우 정권의 간교함.
그때 회담장소인 아카데미하우스에는 운동권 인사들로 붐볐다. 지도부가 온통 이곳으로 옮겨진 듯 했다. 노태우 정권이 7·7선언을 한 직후여서 막힌 상황을 뚫고 나갈 수 있다는 가능성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덩달아 안기부요원들도 득실거렸다. 보통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운동권인사 한 분이 신문사 기자와 실랑이를 벌이는 것도 보았다. 그 기자가 안기부 앞잡이었던 모양이다. '앞잡이와 빨갱이'. 얼마나 우리를 괴롭혔던 말이었으며, 실체였던가. 아픈 기억이다.
그리고 범민족대회를 성사시키기 위해서 감옥을 마다하지 않으면서까지 애를 썼던 분들, 신창균 선생님, 박순경 선생님, 김희선 여장부, 이해학 목사님, 조성우 동지, 김희택 동지 등. 그 뒤 많은 분들이 범민련 조직과정에서 일어난 갈등으로 범민련운동을 떠난 일도 씁쓸한 기억으로 남는다. 제1차 범민족대회를 주도했던 필자도 그 뒤 벌어진 일들로 범민련운동을 그만 두었지만.
씁쓸한 그때의 기억과는 달리 이번에는 아카데미하우스가 전혀 다른 의미로 나를 반겼다.
해외민주인사 한마당의 한계
2003년 해외민주인사 초청프로그램은 '해외민주인사 한마당'으로 시작되었다.
해외민주인사들이한자리에모여각자의경험을나누고, 앞으로의일을토론해보는일이야말로가장뜻있는일이며, 이번행사에서중요한대목일터였다. 그러나금방한계를느낄수있었다. 한마디로, '기독교인들의민주화운동'에그치고있다는느낌을떨쳐버릴수가없었다. 그럴까? 물론한국에서는막힌상황을뚫고나가는데학생들과기독교인들의용기와공로가컸다. 미국에서도기독교인들의역할을지나칠수없다. 그러나극히적은숫자였다. 대부분의교회(99.9%라해도좋을성싶다.)와교인들은한국의헌법기구임을내세우는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평통)와더불어민주화운동과통일운동을가로막아왔다는사실, 또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런 예도 있다. 해외동포가 처음으로 북과 대화를 갖게 되었다. 이른바 『북과 해외동포기독자간의 대화』(비엔나, 1981. 11.)다. 어렵게 만들어진 기회였다. 그러나 미국에서 참가할 목사가 한 분도 없었다. 신학대학교 교수 강위조 '목사'가 징발된(?) 경위이다.
이러한 한계에 대하여,
" 이번이 두 번째이니까 차차 제대로 되지 않겠어요?"
언제나 넉넉한 조성우 이사의 대답이었다.
해외운동. 국내운동권과의 관계 속에서 고민도 많았다. 국내운동권의 안전을 위해서 제발 자제해달라는 질타성 주문과 함께 국내운동의 한계를 해외에서 뚫고 나가달라는 적극적인 주문. 이에 곁들여 해외운동의 국내종속이냐, 독자적이어야 하느냐를 놓고 밤을 세워 토론하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다.
옛 서대문형무소와 옛 안기부 터
흔히 현저동 101번지로 불리던 서대문형무소는 일제침략의 역사와 함께 하는 치욕스런 곳이었다. 일제가 자주독립정신의 상징인 독립문 바로 옆에 구태여 형무소를 진 까닭을 알만 하다. 이곳에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투옥되어 고문을 받고 옥사하거나 사형을 당하였다.
해방 후에는, 부끄럽게도 반독재·민주화운동인사, 통일운동인사들이 남 아닌 동족에 의해 이곳에 갇히어 고생을 하고, 처형을 당하기도 했다. 분단의 족쇄를 풀고, 분단에서 비롯되는 문제들을 풀려는 노력이 그렇게 단죄되었으니, 이는 필경 일제의 식민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결과였을 터였다.
뒤늦게나마 1992년, 형무소를 없애고 이곳을 독립공원으로 만들었으며, 형무소 건물을 그대로 보존,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내용을 바꾸었다.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서 사실(史實)에 근거하여 훌륭하게 꾸며놓았다. 총독부 건물 철거와 더불어 참 잘한 일이다. (청산해야 할 치욕스런 땅이 서울에 한 곳 더 있으니 바로 용산 미군기지다. 이 땅은 조선조 때는 청군(淸軍)사령부였으며, 왜정 때는 조선군(일본군)사령부였으며, 해방 후에는 미군사령부가 되었다.)
서대문형무소가 일제의 폭압기구였다면, 안기부(중앙정보부)는 군사독재정권의 억압기구였다. 남산으로 불리었던 곳. 나는 새도 중정의 상공에서는 날개에 쥐가 났다는 곳. 여자를 남자로 바꾸고 남자를 여자로 바꾸는 일을 빼놓고는 모든 것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곳. 이곳에서 만들어진 사건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았던가. 지금은 건물이 텅 비어있어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지하 2층, 지상 3층. 지하통로로 부속건물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 구조를 모른다. 그 많은 사람들이 잡혀가 고통을 받았지만, 눈을 가리운 채 끌려 다녔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안기부 건물을 헐어버리고 유스호스텔을 지어 돈벌이를 할 계획이라는데. 천만에. 이 건물 역시 본래대로 복원, 역사의 교육장으로 보존해야 한다.
마음이 확 트이는 도라산역
오전에 옛 안기부 건물과 서대문형무소를 현장답사 한 끝이어서 내내 아프고 우울하던 마음이 도라산역에 와서야 확 풀린다.
도라산역 대합실 벽에 걸려있는 거대한 아세아·유럽대륙 지도. 이 역에서 기차를 타고시베리아를 횡단하여 스페인도 가고 영국도 간단다. 그리고 세계 각국 사람들이 이 역을 통해서 들어온단다. 얼마나 야무진 꿈인가? 북에서도 서둘러 판문역을 짓고 있다 하니 이 꿈이 이루어질 날도 멀지 않았으리. 그러나 이게 어디 꿈인가? 잃어버렸던 역사를 다시 찾는 일일뿐이다. 그랬었다. 멀리는 신라의 학승(學僧)들이 이 길을 통해서 중국, 인도에 수행을 떠났고, 이 길을 통하여 유럽에 유학을 가던 때가 불과 반세기 전이었는데 분단이 이 길을 막아 왔다. 그래서 도망갈 자유마저 박탈당해야 했다. 도망갈 자유가 없는 정치. 그래서 한국정치가 그토록 각박했는지도 모른다. 이 모순의 땅이 희망의 땅으로 바뀌고 있다. 나는 이 엄청난 변화의 길목에서 새삼 광주의 정신과 힘을 느낀다.
도라산. 한국 땅에서 흔하디 흔한 야산이다. 개경(開京, 개성) 성밖 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이 야산은 천년사직을 그냥 내어준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배반과 애환이 서려있는 곳이다. 왕건의 후의로 왕건의 딸과 함께 살았다는 곳, 신라의 왕이 살았다는, 그래서 '신라의 도읍'이라는 뜻의 도라(都羅)산. 조선조 때는 평양으로 장사를 떠난 남정네들이 하루 빨리 '돌아'오길 바라는 여인네들이 이 산에 올라 북으로 뚫린 길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는 애잔한 이야기도 안고 있다. 그러니까 배반과 애환, 그리고 기다림이 서려있는 이곳에 남북을 다시 연결하는 길이 열린다는 것이 묘한 감흥을 일으킨다.
미국에서 살다 입대한 통역병
우리 일행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왔기 때문에 통역이 필요하였다. 불편하고 시간을 많이 빼앗겼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영어와 일어 통역이 꼭 필요하였다. 판문점 가는 길에 비무장지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에 들렸다.
전망대는 휴전선 구역이 잘 보이는 산등성이에 소형극장처럼 지어졌다. 다만 무대 대신 앞면이 대형 유리창으로 되어 있어 관객이 휴전선 일대를 훤히 내다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군관할인 듯, 사단 작전참모부 고급장교들이 우리를 맞았다. 작전참모부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중령의 설명(브리핑)이 시작되었다.
"우측 한 시 방향으로 보이는 큰 산이 송악산이고, 좌측 열 시 방향으로 보이는 것이 장단평야이며 …"
장단평야. 이 산 속에 저렇게 넓은 들판이 있었던가? 들판을 사이에 두고 남과 북의 거대한(정말, 거대하다!) 깃발이 흡사 방송국 송신탑 같은 철탑게양대 위에서 펄럭이고 있다. 그러나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들판의 벼는 누렇게 익어가고 있었다.
브리핑하는 장교의 말을 받아 옆에 서있는, 훌쭉하게 크고 앳된 일등병이 통역을 한다. 그의 영어는 놀라울 정도로 유창했다.
브리핑이 끝났다. 나는 지나가는 그 병사를 붙들고 물었다.
"영어를 참 잘 하시던데, 어디서 배웠소?"
"미국에서 살았습니다"
아, 그랬구나. 순간, 한국에서 내내 인기와 돈을 즐기다가 군대 가기가 싫어서 한국국적을 슬그머니 버리고 미국국적을 얻어 말썽이 난 가수 유 아무개 생각이 났다. 한 기자의 말도 떠올랐다. 대통령이 지명한 감사원장 후보가 국회의 인준을 받지 못했다는 소식을 전해주면서 그는 뱉듯이 말했다.
"그분에게도 문제가 있죠. 아들이 미국국적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판문점과 청바지
한민족이라면, 북에서 바라보든 남에서 바라보든, 판문점 경계에서 누구나 비애와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기야 독일의 전 수상 빌리 브란트도 "베르린 장벽보다 더 지독하다"고 한탄하였다니까.
판문점에서 이제 미군엠피(MP)는 볼 수 없다. 우리 일행을 태운 부대 구내버스 운전병 외에는 모두 한국군으로 바뀌었다. 훤칠한 체격의 한국군. 말쑥한 군복. 모두가 썬글래스를 끼고 있었다. 북한군과 눈이 마주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란다.
경계선을 절대 밟지 말 것, 말을 걸지 말 것, 손가락질을 하지 말 것 등등의 주의사항을 안내병사로부터 거듭거듭 들으면서 판문점 구역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저기 밀납인형처럼 꼼짝 않고 서 있는 경계병들. 가격자세랄까, 허리의 권총을 곧장 빼려는 자세랄까. 금방 어색해지고, 주눅이 들고, 불편해진다.
건너편의 인민군이 보인다. 정복차림의 인민군은 정모를 뒤꼭지에 붙이고 전혀 군인걸음 같지 않은 동작으로 이리왔다 저리갔다 한다. 남·북 군인의 자세가 서로 바뀐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남쪽 군인의 자세가 더 유연할 법 한데, 절도가 있다기보다는 잔뜩 굳어 있는 저 군사문화는 어디에서 왔을까? 미국에서?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미국에서 어쩌다 마주치는 행군대열을 보면, 그저 '쪼인트' 감이기에 말이다.
판문점에서의 해프닝 한 토막.
그날의 일정은 버스투어였기에 모두 옷차림이 간편하였다. 서양에서 온 분들이 많다 보니 청바지 차림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청바지 차림으로는 판문점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규정이란다. 미리 그런 규정을 듣지 못한 우리는 난감했다. 기념사업회의 이영교 선생의 얼굴이 잠시 굳어지더니 재빨리 휴대전화기를 꺼내 그 병사에게 건넨다. 안내병사가 어디론가 전화를 한다. 금방 그 병사의 대답이 예, 예로 바뀌더니 우리더러 그냥 타란다. 우리는 안도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어느 초소 앞에 차를 세우더니 옷을 한 보따리 들고 온다. 청바지 위에 걸쳐 입을 옷가지들이다. 할 수 없었다. 청바지 위에 다른 바지를 겹쳐 입었다. 남자의 모습은 그런 대로 괜찮았다. 그런데 여자들이 문제였다. 긴 청바지 위에 짧은 스커트를 둘러 입은 키 큰 서양여자, 상상해보시라. 세상에 없는 패션. 웃음이 절로 나왔다. 희한한 옷매무새를 서로 쳐다보며, 판문점의 긴장과 우울을 풀었다.
지금도 뜨거운 광주
우리 일행이 광주 망월동 구묘역에 닿았다. 5·18재단의 강신석 이시장님과 재단관계자들께서 우리를 맞았다.
망월동 묘역은 광주시립묘지 북쪽 끄트머리에 있는 자투리땅이다. 5·18항쟁 당시 쌓여만 가는 시신을 급이 처리한 곳이다. 그러니 초라할 수밖에. 그런데 묘지로 들어가는 길목 바닥에 "전두환"이라 새겨진 검은 돌판이 묻혀 있어 이상했다. 사연인즉 이렇다. 전두환 장군이 대통령이 되어 광주를 방문하였다. 그때가 1982년. 하룻밤 묵어갈 요량이었는데, 이를 그냥 놔둘 광주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는 쫓기다시피 광주를 빠져나가 인근 담양의 한 민가에서 자고 갔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돌로 팻말을 만들어 이 집 앞에 세웠는데, 이를 안 광주 사람들이 몰려가 이 표시 돌을 파다가 이곳에 묻었다 한다. 망월동 묘지에 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밟고 지나가라고.
망월동 묘역에서 등성이를 넘어가면, 바로 새로 만들어진 5·18국립묘지이다. 5만여 평에 여러 건물과 갖가지 조형물로 잘 꾸며져 있다. 국립묘지로서 손색이 없다.
참배를 마친 나는 일행에서 떨어져 나와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한 조형물 앞에서 대학생 차림의 여자와 마주쳤다. 그녀는 지나가는 말로, "그곳(구묘역)은 관리를 잘 안해서…"라고 하면서 말끝을 흐린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신사복 차림이 단박에, "알지도 못 하면서, 왜 관리를 안 해? 자원봉사 나왔으면 자원봉사 일이나 똑바로 할 것이지"라면서 면박을 준다. 아마 이 국립묘지를 관리하는 보훈처 공무원인 듯 하다. 졸지에 퉁을 먹은 '남도 새악시'의 얼굴이 금새 붉어진다. 그 자원봉사자의 말은 옳았다. 그랬다, 그곳은 겨우 쑥대밭을 면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인아, 민망해 하지 마시라. 나는 겨우 쑥대밭을 면한 그 묘지에서 80년 5월의 원형을 보았답니다. 그리고 그곳에 누어 있는 시인 김남주의 고집에서도 그 뜻을 읽었답니다.
5·18국립묘지에서 내려 온 일행은 광주시내에 있는 항쟁유적지를 돌아보았다.
항쟁당시 지도부가 있었던 전남도청, 가장 자유로운 토론이 벌어졌던 분수대, 시신이 안치되었던 상무관, 그리고 상무대 헌병대의 감방 등. 지금은 군부대가 떠나고 그 자리가 자유공원이 되었지만, 당시 '폭도'를 감금하고, 고문하고, 군사재판 놀음을 했던 헌병대 모습은 그대로 복원되어 있다. 규모가 작지만, 나치수용소가 연상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자유공원에 세워져 있는 들불야학 추모탑 앞에서 윤한봉 선생을 만났다. 부인 신소하 선생도 오랜만에 만났다. 칫솔 하나만 달랑 들고 전두환 정부의 삼엄한 현상수배망을 용케 뚫고 미국으로 망명해왔던 윤한봉. 미국운동사에 큰 획(劃)을 그었고, 미국운동의 기둥이었던 민족운동가. 세월이 흘렀어도 그에게서는 여전히 항쟁의 불꽃이 강하게 느껴진다.
어디 윤한봉뿐이겠는가. 누구를 만나든, 어디를 가든 항쟁의 불꽃을 느낄 수 있으니, 정녕 광주는 지금도 9월의 햇살보다 더 뜨겁게 타고 있는 것이다. 그 불길이 급기야 동남아로 번져 동티모르, 스리랑카에서도 타고 있다 한다.
권위주의 사라진 청와대
노무현 대통령은 애증이 수시로 엇갈리는, 참으로 힘든 분이다. 우리 부부는 며칠 밤을 지새우며 노무현 후보의 당선을 빌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미국방문은 심한 실망을 안겨 주었다. 결코 기대가 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박정희 대통령부터 시작하여 역대 대통령의 미국방문을 현지에서 주의 깊게 보아왔기 때문이었다.
노 대통령은, "저는 뒤늦게 민주화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따라서 여러분들은 제 선배님"이라는 말로 인사말을 시작하였다.
이번 면담에서 노 대통령은 안중식 목사(미국)와 힌즈페테 기자(독일)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을 빌어 세 가지 문제에 대하여 입장을 밝혔다.
지금의 혼란한 정치상황을 발전적 과정으로 보았고, 성급한 통일보다는 확고한 평화를 강조하였다. 마지막으로 북한의 인권문제에 대한 입장을 정리해주었다. 즉, 북한 인권문제를 인권의 면에서만 다루면 오히려 부작용이 커지니까 북한의 개방과 개혁을 유도함으로써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는 지혜가 필요하며, 따라서 지금은 북한의 인권문제를 제기할 때가 아니라고 정부의 입장을 정리하였다. 지금 북한의 인권문제를 가지고 새로운 반북논리와 반공단체가 여기저기에 만들어지고 있는 터여서(특히 미국에서) 적절한 정리로 받아들여졌다.
놀라운 것은, 무엇보다도 청와대에서 근엄과 권위주의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매우 특기할 만 한 일이다. 정문에서부터 느낀 바이지만, 속된 말로 '목에 힘주는 사람'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좋은 변화이며, 출발이다. (청와대가 구중궁궐 식으로 외진 곳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을뿐더러 건축양식이 권위주의적인 궁성 냄새를 풍기고 있어 국민을 멀리하고 방문객을 불편하게 하는데, 행정수도 이전으로 이 문제도 해결되리라 본다.)
한편, 정치권에서 386세대가 어쩌니 코드가 어쩌니 하면서 청와대를 곧잘 비판하는데, 일리야 없지 않지만 본질적인 문제제기 같지는 않다. 흡사 4·19정신을 팔던 박정희 쿠데타정권이 사회저항에 부딪치자 4·19세대를 들먹이면서 자기위선을 호도하려 했던, 바로 그 수작의 냄새를 386세대론에서 강하게 맡는다. 보다는 노 대통령의 혼란스런 방향감각과 쓸데 없는 배짱이 더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코드가 맞아야 컴퓨터가 작동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다만 그 코드가 정치권이나 언론의 입맛보다는 국민과 맞아야 한다. 김대중 전대통령이 김 아무개를 비서실장에 앉혔던 것처럼, 전혀 코드가 맞지 않는 사람을 써야 한다는 말인가?
해체되는 권위주의사회
변한 곳은 청와대뿐만 아니다. 이번 한국방문에서 두드러지게 느낌 점은 한국사회의 변화이다. 사회 곳곳에서 일고 있는 변화의 물결과 권위주의적인 사회의 해체. 이 당연한 변화에 보수·수구세력이 당황과 불안을 느끼는 것, 또한 당연하다 하겠다. 권위주의적인 사회에서 신분과 이익을 쉽게 누려온 그들이었으니까. 특히 권위주의체제 속에서 '일사불란'하게 (어쩌면 가장 편한 정치적 삶일 터였다.) 정치를 해 온 정치권의 당황과 혼란이 더 심한 것 같다. 그래서 사회가 더 혼란스러워 보인다. 사회의 여러 세력이 정치를 몰고 가는 게 아니라 정치가 사회의 모든 부문에 영향을 크게 미쳐 온 한국사회이니까 말이다. 이점에서는 언론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사실,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초기에 정치개혁의 방향과 범위를 제시하지 못한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또다른 권위주의적 접근으로 정치개혁을 꾀하지 않았던 것은 현명했다. 한국사회가 더 이상 권위주의적인 리더십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산업화과정에서 박정희의 권위주의적인 리더십이 먹혀들었던 것은 농경사회(Agrarian Society)의 리더십이 가부장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국사회가 산업사회로 급격히 변하였는데도 여태껏 권위주의적 리더십이 먹혀 들어간 것은 군부의 권위주의와 이에 대응하여 투쟁해온 김씨들에게 또다른 권위주의적 리더십을 부여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사회가 시민의 힘으로 다시 짜여지고, 그 바탕 위에서 정치개혁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 할 터이다. 물론 저항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김대중 정권 아래서 겨우 참아온 분노가 누무현 정권이 들어서자 절망으로 변했고, 그 절망적인 저항은 전혀 이성을 잃고 있는 듯 하다. 뒤집어서 말하면, 지난 50년간의 투쟁으로 다져진 변화의 동력이 그만큼 커졌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동력에 송두율 사건은 얼마간 찬물을 껴 얹었다.
송두율사건이 준 교훈
2003년 해외민주인사초청 한마당 참가자는 물론 한국사회가 송두열 교수의 귀국을 모두 기뻐하였다. 그리고 당국의 간단한 확인절차를 마침으로써 문제가 매듭지어질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날마다 새로운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모두를 당혹케 하였으며, 사회의 관심은 온통 그에게 쏠렸다.
분명 송 교수는 2003년 해외민주인사초청 한마당에 초청되어 왔다. 그런 그 때문에 한마당 잔치 자체가 사회관심 밖으로 밀려났다는 것은 기막힌 역설이었다. 사실, 해외의 우리는 한국사회의 발전에 감사도 드리면서 우리가 전할 말도 적지 않았다. 일행 가운데는 1937년에 조국을 떠나 평생을 민족운동에 받쳐온 분도 계셨다. 30년만에 다시 남한 땅을 밟게 된 그 분의 이야기도 진지하게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어야 했다.
송 교수는 왜 그랬을까? 법적으로야 의미가 있겠지만, 로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다, 아니다가 핵심문제일 수 없다. 50보 100보. 그의 고백대로, 그는 1973년에 로동당에 입당하였고, 그 후 북으로부터 적지 않은 돈을 받아 왔다는 사실이다. 그런 그가 이제 와서 왜? 우리는 자신과 민족 앞에 좀 더 겸허하고 정직할 필요가 있다.
송 교수의 문제를 빌미로 보수·수구세력의 기세가 거세어지고 있다. 반면, 그런 송 교수일지라도 남한사회가 과감히 껴안아야 한다는 논리 또한 힘을 얻어가고 있다. 전 같았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엄청난 변화다. 이 변화와 화해의 힘이 한국사회를 들끓게 하고 있는 지금의 갈등을 끝내는 녹여 낼 것이다. 민족의 희망을 본다.
그 희망 위에 일주일 내내 얼굴을 맞대온, 기념사업회의 젊은 실무자들의 풋풋한 얼굴들이 순서 없이 한꺼번에 겹쳐지고 있다. (*)
2003년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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