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의 한계
삶은 기억 속에
기억은 과거 속에
내가 살아가는 삶은 언제나 현재
과거와 현재
그 메울 수 없는 결핍
결핍을 찾아서...
해체
에셔-눈(Maurits Cornellius Escher_Eye)
결핍을 찾기 위해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답이 없는 것은 질문이 아니다.
삶에 대한 답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기에 질문을 던질 필요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고 접근방식마저 잘못되었다.
분석적 방법으로 삶에 접근하자 이내 삶은 해체되었다.
분석은 해부학의 메스와 같다.
호흡계, 순환계, 소화계, 생식계... 폐, 기관, 후두... 폐포, 폐동맥, 폐정맥... 조직, 세포, 핵...
세포핵을 분석한들 거기에서 무슨 몸의 의미를 담아낼 수 있단 말인가.
의미를 찾기위한 분석적 방법이 건져낸 건 허무.
삶은 분석하는 게 아니라 느끼고 구성하여 의미화하는 거다.
탈주: 속도와 이미지
이반슬라빈스키(IvanSlavinskyi)
[두 눈 시뻘겋게 뜨고 존재를 삼키려 달려드는 속도
도로 위의 사물들은 경계없이 문드러지고 내가 보는 건 오직 하나, 목적지]
현대사회는 속도와 이미지즘으로 압축된다.
무한으로 치닫는 속도가 보여주는 공포.
공포는 이해되기도 전에 지나쳐버리는 삶의 소외다.
시간이 존재의 항상성에 결여를 잉태한다면, 속도는 존재의 바탕에 몰지각을 양산한다.
세계-내-존재는 속도에 의해 세계-외-존재로 이중 소외된다.
존재 이해를 위한 존재바탕마저 더더욱 이해하기 힘들게 되었고,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 이해할 수 없는 개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미지에 빠져
이해하지도 이해받지도 못한 채 나는 사물이 되어간다.
목적지에 대한 깨달음은 커녕 이해하지도 못 한 채, 뒤돌아볼 짬도없이 속도에 밀려 겁없이 질주한다.
포기할 수 없는 어떤 것: 주변
<!--[endif]--> 레돈도(Vicente Romero Redondo)
빈센트 로메로 레돈도의 작품을 보면 인상파 모네와 색채의 마술사 르느와르가 떠오른다. 레돈도만의 특징을 찾아내기 위해 모네의 빛의 특징을 잘라내고, 르느와르의 색채를 제거하면 레돈도의 작품은....
빈센트 로메로 레돈도의 작품을 보면서 나(사물)에게서 포기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생각한다.
형태, 성격, 삶 등에서 타자와 점철되어도, 마지막 포기할 수 없는 자아동일성은 무엇인가? 나란 무엇인가? 라는 캐캐묵은 질문을 다시 꺼낸다. 현상학적인 방법으로 비본질적인 부분을 제거하고 마지막 남게되는 본질이 무엇인가를 생각했을 때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본질을 찾아 마지막까지 비본질을 제거해가다 보면, 결국 본질은 아무 것도 아니다. 본질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비본질을 가공하여 붙여넣어야 한다. 그것은 본질이 아님에도... 하여 본질과 제거된 부분을 다시 재봉하여 관계론이나 형태론처럼 전체를 생각한다.
미숙하여 내가 누구인가를 말 할 수 없어도 나에게서 포기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느낀다. 사람의 본질적인 개념보다도 척보면 사람임을 알고, 척보면 그가 누구인지를 안다. 오히려 본질적 개념이 대상을 파악하는데 어려움을 만들기도 한다.
자아동일성(본질)은 의식동일성으로 나라는 확신, 신념이 필요한 것 같다.
신념은 근거보다도 믿음이며, 믿음은 나에 대한 상상 혹은 착각, 논리적 오류다.
논리적 깊이: 관심과 애정
살몬(Jamie Salmon)
아무리 과학이 발달한다하더라도 인공지능이 이성을 대체할 수 없고, 기계가 인간을 대체할 수 없다는 근거로 논리적 깊이를 들기도 한다. 논리적 깊이란 간단히 말해서 결과물을 생산하기 위한 과정과 단계의 수 또는 시간을 말한다. 수 백만년동안 진화해 온 인간이기에 단기간에 만들어진 과학으로는 논리적 깊이를 모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위 극사실주의 회화의 결과물은 사진기의 셔터를 누름으로써, 극사실주의 조각은 3D프린터의 버튼을 누르는 간단한 조작으로 같은 결과물을 생산해 낼 수 있다. 더구나 대량복제생산이 가능하다.
작가의 손에 의해 생산되었든 기계에 의해 생산되었든 결과물은 별반 차이가 없다. 같다.
그럼에도 생산품은 예술작품의, 논리적깊이가 던지는 아우라를 모방할 수 없다.
세상에 여자는 많아도 네가 아니면 안되는 이유다.
아무리 못나고 찌질할지라도 여전히 타인이 나를 대신할 수 없는 이유다.
논리적 깊이를 모르면 결과물들은 같다.
의미는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이다.
관심과 애정이 결여된 대상은 종류를 막론하고 똑같은 사물로 내팽개져 있다.
그러나 관심과 애정은, 의미화는 차별을 전제하고 있다.
가능성의 전체집합: 현재
달리(Salvador Dali)
"나 돌아가고 싶어"
박하사탕의 설경구의 외침, 그 절절함을 십분 이해한다.
내 삶이 무의미하고 경멸스러울 때 수십 번 외치고 싶은 절규다.
그러나 또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수십 번 과거로 돌아간 것은 아닐까?
나는 이런 삶을 백팔 번 째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수 없이 원했던 다른 삶을 살면서 왜 매번 불만족스러운 것일까?
백 구번 째 다시 산다면 지금과 달라질 수 있을 것인가?
무엇이 문제인가?
거지로 살 때는 의식주 해결에 전력을 쏟았다. 숨 쉬는 것조차 노동이었다.
부자로 살 때는 돈을 지키는데 정력을 다했다. 사랑마저도 투자였다.
정치가로 살 때는 권력에 혼열을 기울였다. 절벽 길을 위만 보고 걸었다.
그리고 사랑도 했다. 그는 떠났다.
나는 거지로, 부자로, 정치가로 매번 원했던 삶을 살았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가끔 웃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가고 싶다고 외친다.
무엇이 문제인가?
가능한 상상은 언제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가능성을 현실화시키는 한 걸음,
결단은 지금 내리지 않으면 안된다.
독립적 의미의 실패: 관계론
올빈스키-토스카 / 케테콜비츠-죽은 아이를 안은 어머니
화가는 모델을 대상으로 하지만 그 모델이 화가의 행동을 조정하기도 한다.
의식 주관이 대상을 관찰할 뿐 아니라, 대상이 의식을 구성하기도 한다.
대상이 이끄는 인식의 구성 역시 주관의 구상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대상의 구체적인 구현이 없다면 인식은 추상에 머물러 인식을 명료화 하기 어렵다. 주관이 구성한 대상이라고 할 지라도 그것은 주관과 대비되는 인식의 대상이다
숨쉬기도 버거운 살아남기다.
왜 사는지 허탈하다.
존재의미를 자신 안에서 찾는 것이 오류였던가?
내가 죽든 살든 세계는 흔들림없이 제 길을 간다.
정말 아무런 미동도 없단 말인가?
그대 나의 죽음에 꼼짝않을 것인가? 비웃음조차 없을 것인가?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로 인해 세계는 꼼지락거린다.
비록 스스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라도,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했을지라도
그대, 누군가에게는 영혼을 팔아서라도 지켜주고 싶은 의미가 된다.
그것이 당신의 존재 의미이다.
그대는 나의 세계를 지탱하는 거대한 사고, 숭고한 신념이다.
의미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미련: 집착
에셔-뫼비우스 띠/ 폭포
울며절며 많이도 왔다.
그러나 시간만 흘렀을 뿐 변한 게 없다.
유폐되었다.
생각으로부터, 삶으로부터 봉인되었다.
사고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다.
이 부조리한 사고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내 삶의 한계는 여기까지다.
초월: 풀리지 않은 문제
데타이유-꿈
적군을 앞에두고 전쟁 중에 꿈이라...
잠을자야 꿈을 꾸지.
현실만 바라보는 자는 꿈을 꾸지 못한다.
꿈을 꾸기 위함인가?
생리학적으로 육체가 한계에 다다랐다고 판단되면 뇌는 육체를 잠재운다.
죽음에 직면해 있을지라도.
당장 죽을지언정 그들의 꿈은 달콤하겠다.
첫댓글 그냥 눈물이 나네요. 고통과 단절이 느껴져요. 잘 읽었습니다.
너가 나이고 나가 너일때
내가 나비이고 나비가 나일 때
안이 밖이고 밖이 안일 때
소승이 대승이고 대승이 소승일 때
궁극의 실체에 닿을 때 초월을 경험하게 될겝니다.
피안에는 꿈도 눈물도 없을겁니다.
프라나만 있게 되어 충만함을 느끼게 될겁니다. 아마도
프라나는 불교용어입니다. 이 언어가 언젠가 동양철학시간에 제게 꽂혀 답을 준거 같습니다. 제게는
프라나(Prana): 프라나는 태조부터 존재해 온 힘, 우주에 충만해 있으며 삼라만상을 이루는 만물의 근원이자 생명의 실체를 말한다. 이런 막연한 것은 신을 설명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지만 한 마디로 말하면 전 우주의 모든 차원에 걸쳐 스며들어 있는 에너지로서 '프라나'라고 한다.
그 동안의 사고의 흐름을 정리해보았습니다.
사고의 세계에서나마 자유롭고자 삶에서 벗어나려했는데 한계에 부딪히니 이도저도 아니네요. 어쩔 수 없이 초월에 대해 생각할 수 밖에 없는 논리적 한계... 결국 내가 살아가는 세계는 부딪히면 "악"소리 나는 결핍된 세계. 20 여년 동안 결핍을 찾아 떠난 여정이 결국은 제자리네요. 놀랍게도 파랑새를 찾는 찌르찌르와 미찌르가 바로 나였습니다. 삶에 대한 접근 방식이 마치 종교를 과학으로 풀어내려는 방법의 오류. 실존철학은 결국 삶의 의미화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결국 결핍을 껴안고 사고의 한계를 초월할 것인지 사고의 한계를 인정하고 삶을 분리할 것인지 결단만이 남았네요.
네..... 한계인'나'를 떠나서 한계를 극복한다는 것은 어쩌면 사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보리수아래서 천상천하유아독존을 외친 부처나 십자가에 자기를 버림으로서 세계를 넘어선 예수
어느 결단이든 얻는게 있을겁니다.
죽기전에 깨달음을 얻는 다는 것은 축복인것 같습니다. 두려울게 없어지죠
독배를 든 소크라테스도 그런 심정이었을 것 같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록을 보니 유쾌했습니다.
죽음이 가까이 있는데도 맑고 밝고 유머가 있더라구요
프라나: 아르케(arche), 태극, 리비도(성욕보다 삶의 충동으로써) 등의 복합개념으로 이해하면 되나요?
프라나는 저도 잘 모릅니다. 다만 불교를 따라가 보다니 수 많은 위계와 위계에 따른 신과 정신들이 있더군요. 그 정점에 프라나가 있다고 하더군요. 저는 처음에 그저 고요한 큰 힘. 이정도로 이해하고 해석했는데요. 아르케, 태극, 리비도 모두 포함될수도 있겠지요. 저도 잘은 모릅니다.
책을 읽다 깜짝 놀랐습니다. 괜히 사르트르가 아니네요. 명료하게 진단을 내리네요
시선으로서의 '타자'의 소멸은 정당화될 수 없는 나의 주관성 속에 나를 내던지고, 파악될 수 없는 하나의 '대자-즉자'를 향한, 이 끊임없는 '추구되는-추구'로, 나의 존재를 환원시켜 버린다. 타인이 없으면, 나는 나의 운명이라고도 해야 할, 자유롭게 있다고 하는 이 무서운 필연성을 완전히 알몸 그대로 파악하게 된다.... 나의 맹목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를 타유화할 우려가 있는, 어떤 파악할 수 없는 '방황하는 시선'에 대한 의식(불안)이 늘 따르기 때문이다.
의미해석 좀 부탁드립니다.
지면상 새 글로 답변드립니다.
단상> 사르트르-존재와 무/결핍
존재와 무, 사르트르/정소성 옮김. 동서문화사. 2012.3.20/ 2판 5쇄 발행. [ 제3부 대타존재 633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