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쥔장사찰자료실 스크랩 석장사지 가는 길
소윤당 추천 0 조회 110 13.12.21 19:5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석장사지 가는 길

뒷면이 협소하여 전면을 찍을수 없어서 석장의 사진을 붙여만든 파노라마 사진임

 

 

 

 

 

 

동국대병원 옆 새로 난 4차선 도로를 따라 조금만 가면 도로가 끝나고 길 오른쪽에 경주선교교회가 있다.

이 도로는 앞으로  현곡면 금장리의 포항 가는 도로와 연결이 될 것이라 한다.

선교교회 앞쪽 도로에 주차(차량왕래가 없어 주차 가능)를 하고 마을 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길 옆에 산불감시초소가 있다.

교회와 감시초소 사이의  넓은 등산로를 따라오르면 왼쪽에 초지가 있고 초지를 지나면 바로 산길로 들어선다. 이 곳에서 약 10분 정도 완만한 경사길을 오르면 첫번째 능선이 만나는 지점에서 길이 왼쪽으로 약 100도 가량 꺾어지며 오른쪽에는 마을에서 올라오는 작은 등산로와 합쳐지는 지점에 다다른다.

이 곳에서 왼쪽 등산로로 따라 오르지 말고 시선이 보이는 지점으로 직진, 소나무 옆의 작은 오솔길을 따라 계곡쪽으로 내려간다

완만한 경사의 비탈길로 약 5분 내려가면 왼쪽에 조릿대 숲이 보이고 길 옆에  작은 관을 묻은 샘물이 보인다.  2,000년전 양지스님도 이 물을 마시지 않았을까?(그릇이 비치되어 있지 않으므로 미리 준비)

그리고 바로 앞 작은 개울을 건너면 조릿대숲 속에 나무가 없는 구릉이 보이는데 이 곳이 석장사지이다

 

(석장마을의 마트 옆으로 올라가는 길도 있으나 교회옆에서 가는 길이 가장 빠르고 찾아가기가 쉽다)

 

 

 

 

석장사지는 신라27대 선덕여왕(632~646)때, ‘양지(良志)’라는 스님이 거주하던 절로 알려져  있으나 창건자가  누구이며  언제 지었고, 그후의 내력에 대해서는 자세히 전해오는 바가 없다

그러나, ‘석장사(錫杖寺’라고 이름 지어진 연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삼국유사에 전해 오고 있다.

양지스님이 자기 지팡이(석장) 머리에 포대하나를 걸어 놓았는데, 이게 저절로 날아 시주 집을 찾아다니며 방울을 흔들며 소리를 내었다. 집에서는 이 소리를 듣고 ‘아! 양지스님이 보내 시주를 받으러 왔구나.’ 여기고 그 포대에 재에 쓸 비용을 넣어주었고, 이집 저집 다니다 포대가 속이차면 날아서 다시 절로 되돌아오곤 했다. 이런 일로 해서 사람들은 이 절을 지팡이 절(석장사)로 불렀다고 한다.  

양지(良志)란 의미는 무엇을 만드는 기술이 뛰어난 공장(工匠)을 뜻하며, 석장(錫杖)은 머리에 여섯 개의 방울이 달려 흔들면 소리가나는 지팡이로, 스님이 이걸 갖고 다닌 까닭은 탁발을 할 때 자기가 문 앞에 와있음을 소리 내어 알리거나, 길을 다니면서 뱀이나 짐승을 쫓는 데 사용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동국대 박물관에서  1986, 1992년 두 차례의 발굴조사를 한 결과, 7-8세기경에 있었던 암자 정도의 산지가람이며, 고려시대에 와서 전대의 석재를 다시 사용하여 재건축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리고 이때 출토된 여러 탑상문전에서 일찍이 벽돌로 탑을 만들고, 아울러 삼천불상도 조각하여 탑에 안치했을 것으로 여기고 있다.

또한 이때의 발굴조사에서 ‘錫杖(석장)’이라고 쓰진 묵서자기조각이 출토되어 이 절의 이름을 다시금 확인해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일제시대 임신서기석이 이 부근에서 발견되었다

 

 

동국대에서 발굴 후 세워놓은 표지판

 작은 나무들 위로 칡넝쿨이 휘감아 덮어 마치 공동묘지를 연상캐 한다

 

절터 주위로 조릿대(산죽)이 자라고 있다

 발굴 후  남겨둔 큰 초석과 장대석 등이 이곳 저곳에 그냥 널려 있다

 

 

 

 근간까지도 사찰이 있었던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석축

 

 

용도를 알 수 없는 팔각석주. 난간석으로 보기에는 너무 크고..... 

 

 

『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 때인 7세기 무렵에 신묘한 술법과 그림 및 조각의 기예로 이름난 양지(良志)라는 스님이 석장사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86년과 1992년에 2차에 걸친 유적발굴조사조사(동국대경주박물관)결과 양지가 주석(主錫)할 당시의 유구는 확인하지 못하였으나 통일신라에서 조선시대의 유구들은 확인할 수 있었다.

또「석장(錫杖)」묵서명의 조선시대 자기 굽바닥을 발견하여 이 곳이 석장사지임을 확인했고, 불탑과 불상을 새긴 통일신라시대의「연기법(緣起法頌)」명의 탑상문전편(塔像紋塼片)을 발견했다.

 

 

 

발굴모습

 

 

 

석장리사지 출토유물

 

 

 

 

 

 

연기법송명탑상문전

 

 

석가고행상 탑상문전

 

 

 

 

동국대에서 발굴 후 수합한 유물들

 

 

 

 

 

 

 

삭징사지에서 출토된 문양전돌들

(위의 사진은 http://blog.daum.bosar에서 가지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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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장사지

 

석장사지 출토 탑상문전소조불

 

석장사지, 그리고 양지 스님. 그 옛날 서라벌 온방골 산속에 자리잡은 석장사에는 3천불을 새긴 벽돌탑과 당대 최고의 예술가였던 양지 스님이 살고 있었다.

삼국유사 탑상조에는 석장사와 양지스님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양지(良志)는 그 조상이나 고향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오직 신라 선덕왕 때에 자취를 나타냈을 뿐이다. 석장(錫杖) 끝에 포대 하나를 걸어 두기만 하면 그 지팡이가 저절로 날아 시주의 집에 가서 흔들면서 소리를 냈다. 그 집에서 이를 알고 재에 쓸 비용을 여기에 넣는데, 포대가 차면 날아서 돌아온다. 때문에 그가 있던 곳을 석장사라고 했다. …… 또 일찍이 벽돌로 작은 탑 하나를 만들고, 삼천불을 만들어 그 탑을 절안에 모셔두고 공경했다.’

발굴조사가 중반을 지나 후반으로 접어든 1992년 10월 14일 오후 필자가 조사하고 있던 구역에서 작은 토기편 하나가 수습됐다. 길이 7cm, 폭 4.5cm, 두께 0.7cm의 붉은색 토기편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한낱 깨진 토기조각에 불과했지만 가을 하늘에 비친 이 토기 조각에서는 누런 금이 빛을 발했다. 토기 내부에는 발견 당시 얇은 금박이 넓게 분포되어 있었다. 토기에 금박을 붙여 장식하는 예는 지금까지 발견된 적이 없었다.

신라가 아무리 금의 제국이라 불렸지만 토기에까지 금을 발라 사용했다고 보기에는 무리다. 또 발견된 토기는 모래성분이 많은 연질 토기로 공양구로 쓰였을 가능성 조차도 희박했다. 과연 무엇에 쓰는 물건이었을까.

삼국유사에 나타난 양지스님의 행적으로 볼 때 그 금박 토기는 바로 불상 등에 금칠을 할 때 사용했던 용기였다. 요즘은 소형 불상에 금을 입힐 때 전기분해 방식을 이용하지만 옛날에는 아밀감이라는 방법을 사용했다. 아밀감이란 금을 수은에 녹여 그것을 불상 표면에 바른 다음 수백도의 고온에서 수은을 증발시켜 도금을 하는 방법을 말한다.

석장사지에서 아밀감에 사용됐던 용기 조각이 발견되는 것은 삼국유사에 나타난 양지 스님의 행적으로 볼 때 당연한 일이었다. 금을 수은에 녹인 다음 이를 불상에 발라 고온에서 고착화하는 과정은 당시로서는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작업이었다.

신라시대의 각종 불상 등의 도금 상태를 과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첨단 기술을 이용한 요즘 도금 상태보다 더 뛰어나다고 한다.

여기서 잠깐 양지 스님의 행적과 관련한 재미난 추리를 해볼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양지 스님의 외모나 출신지에 대해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근래들어 양지스님이 남긴 유물을 통해 그가 서역 출신이었을 것이라는 학설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양지 스님의 출신지와 함께 눈길을 끄는 대목은 스님이 석장에 포대를 매달아 시주집에 보내면 석장은 저절로 날아가 시주를 해온다는 얘기다.

왜 양지스님은 석장을 보내 시주를 받게 했을까. 이 문제에 대해 그저 도력 높은 스님의 신비한 행적으로 치부할 수도 있는 일이다.

삼국유사 곳곳에서 도력 높은 스님들이 신통력을 부렸다는 얘기가 나온다는 점에서 별로 이상할게 없는 일이다. 그러나 양지스님의 신통력 사용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당대 최고의 예술재능을 가진 스님이 한가로운 산중에서 그것도 작은 암자에 해당하는 석장사에서 석장에 의지해 수행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영묘사와 사천왕사 등 대규모 국찰 불사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스님이라면 굳이 시주들에게 일일이 재(齋)지낼 비용을 보시받지 않아도 될 법하기 때문이다.

필자 나름대로 양지 스님이 석장을 부린 이유에 대해 분석한 결과, 양지 스님은 말년에 수은 중독으로 고통을 당했으며 이로 인해 양지 스님은 석장에 의지해 말년을 보냈을 것이라는 추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같은 결론은 바로 석장사지에서 발견된 금박이 붙은 토기조각 때문이다. 물론 이 토기 조각이 양지 스님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을 수도 있지만 영묘사 장육상 개금 불사 참여 등의 제반 상황으로 봤을 때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단서다.

아밀감으로 불상을 도금할 경우 금칠과 고온에서의 고착화 과정에서 다량의 수은 증기를 흡입, 중독에 이를 수 있다.

수은 중독은 급성과 만성으로 구분짓는데 양지 스님의 경우 오랜 동안 불상 개금작업 등에 동참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만성중독의 증세를 보였을 것이다.

만성 수은 중독이 되면 손·눈꺼풀·입술·혀 등의 미세한 떨림으로 인한 장애, 과도한 부끄러움증, 인격변화, 과도한 신경질, 기억력 저하, 지적능력 저하, 만성 피로, 불면증, 정서불안, 지속적인 두통, 근육약화, 체중감소, 피부염 등의 증세가 수개월에서 수년동안의 잠복기를 거쳐 발병한다. 이같은 수은 중독 증세로 볼 때 양지 스님이 석장을 부려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한뼘도 안되는 토기조각은 별 것 아니지만 그것이 양지 스님의 행적을 밝힐 수 있는 단서라는 측면에서 볼 때 그것은 토기 조각이 아니라 타임캡슐

에 보관된 역사 기록물에 해당한다.

한달여에 걸쳐 실시한 발굴조사는 석장사의 최초 창건 가람을 확인하고 석장사임을 증명할 수 있는 실증자료를 확보하는 데 있었다. 이 가운데 조사 지역이 석장사지임을 입증하는 자료로 ‘석장’이라는 명문이 있는 조선시대 백자편이 출토되었지만, 창건 당시의 가람 구조는 폐사 이전 수 차례에 걸친 중창으로 인해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이는 석장사가 창건이후 후삼국시대의 격돌과 신라의 몰락, 고려때 몽고의 침략 등등으로 인해 폐사가 되면서 후대에 다시 절을 세우면서 기존의 건축부재를 옮겨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함께 석장사의 최후 폐사 원인은 화재였으며, 그 시기는 대략 임진왜란 때인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 기록으로만 전해졌던 석장사지는 이렇게 해서 역사의 공백을 메우고 우리 곁에 다시 올 수 있었다. 또한 양지 스님이 공양하고 예불을 올렸던 3천불탑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으며, 이 탑에는 진신사리 대신 법사리(法舍利)인 ‘연기법송문전(緣起法頌文塼)’을 봉안, 신라시대 사리신앙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게 했다.

신라 최고의 예술가가 살았던 석장사지는 언제 다시 복원될지 모르는 미래를 기약하며 다시 흙 속으로 파묻혔다. 두 차례에 걸친 발굴 조사를 통해 막연한 기록과 추정으로만 일관되어 오던 양지 스님의 예술성을 재조명 할 수 있었다. 특히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부처님 고행상이 삼천불을 새긴 벽돌에서 발견되어 화제를 모았다.

우리 나라는 온 국토가 타임캡슐이다. 종종 들려오는 유적지 훼손 소식을 들을 때마다 울분과 함께 슬픔이 교차한다.

우리는 지난 세기 나라를 잃고 역사마저 도둑질당하는 암울한 시간을 보냈다. 그로 인해 왜곡된 역사는 우리의 민족성마저도 혼란의 구렁텅이로 내몰았다. 바로 이 순간 전국 각지의 유적지에서 실시하고 있는 발굴 조사는 바로 단절되고 왜곡되어 있는 역사를 복원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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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수께끼의 예술가 양지 

 

 

감은사지동탑사리함

 

 

“그는 신라 사람이다.”
“아니다, 서역 사람일지도 모른다.”
“신라 사람이긴 한데 중국에 유학해서 서역 미술을 배워왔을 것이다.”
  
한 예술가의 국적 문제를 두고, 한국 불교미술사 분야에서 대가로 꼽히는 세 학자가 저마다 다른 견해를 주장하고 있다면 우리는 도대체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하는 것인가? 학자들이 문제삼고 있는 인물은 『삼국유사』 의해편 ‘양지사석’조의 주인공 양지(良志)이다.
  
일찍이 양지를 주목했던 동국대 문명대 교수는 “그의 기법과 양식이 새로운 양식의 시원(始源)”이라고 규정하면서 양지를 신라 사람으로 보았다.
  
이에 대해 국립경주박물관장을 역임했던 이화여대 강우방 교수는 ”혹시 그는 신라인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양지의 국적에 의문을 제기했고, 양지의 작품들이 삼국시대의 미술양식과 연결되지 않는 새로운 도상(圖像), 새로운 양식, 새로운 기법을 보여주면서 새로운 재료를 선호한 것으로 보아 그가 외래인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주장했다. 서역인으로서 중국에서 활동하다가 신라로 귀화한 것이 아닐까 하고 추정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동국대 장충식 교수는 “양지는 젊은 시절에 분명 서역을 오랫동안 여행하였거나 아니면 그곳에서 불교미술에 대한 수련을 쌓은 인물일 가능성이 짙다”고 추정하면서 “신라 일세(一世)에 국한된 인물이 아니라 인도 서역적 조각 유풍을 지닌 국제적 인물로서 조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들에 대해 문명대 교수는 다시, “양지는 젊었을 때 혹시 중국에 유학 갔다 왔을 가능성은 전혀 배제할 수 없지만……”이라는 표현으로 양보하면서도 “양지가 외래인일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못박고 있다.
  
양지는 『삼국유사』에서는 드물게, 예술가로 기술되고 있다. ‘양지사석’조가 의해편, 그러니까 고승들의 열전 중에 들어 있음에도 양지는 승려로서보다는 예술가로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양지사석’조에는 양지가 만들었다는 작품이 여럿 열거되고 있다. 신라의 전불(前佛)시대 7처 가람 중 한 곳으로 꼽히는 영묘사의 장륙상을 비롯하여, 같은 절의 사천왕상, 전각 및 탑의 기와, 사천왕사의 탑 팔부신장, 법림사의 주불 삼존과 좌우 금강신, 영묘사와 법림사의 현판 글씨, 석장사의 삼천불 전탑 등등이 그것이다.

이 목록으로 미루어 양지는 조소, 서예, 기와공예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 불교미술사의 보고(寶庫)라고 일컬어지는 『삼국유사』 탑상편에도 이처럼 세세하게 작품 목록이 열거된 예술가를 찾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이 작품들 뿐 아니다. 몇몇 학자들은, 분황사 모전석탑의 인왕상, 문무왕 화장터로 추정되는 능지탑의 소조상, 금속공예의 극치로 꼽히는 감은사 동서 쌍탑의 사리구에까지 양지의 손길이 미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쯤 되면 양지는 당대 최고를 넘어, 한국 역사상 최고의 예술가로 불리우기에 손색이 없다.
  
이렇게 열거된 작품들 중 대부분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양지사석’조에 양지의 작품 활동과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영묘사 장륙상의 경우, 양지가 선정(禪定)에 들어 삼매경에서 보았던 부처의 모습을 법식으로 하여 장륙상을 소조(塑造)할 때, 서라벌의 선남선녀들이 다투어 진흙을 나르며 풍요(風謠)라는 노래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대목은 영묘사 장륙상이 단순한 손끝 재간이 아니라 종교적 영감으로 이루어진 것을 말해 주면서, 동시에 그의 작품활동이 일반 대중들의 열렬한 성원을 받았다는 구체적 정황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위대한 작품의 탄생 과정을 말해 주는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양지사석’조에 언급되고 있는 작품들 중 양지의 것이 틀림없다고 믿어지는 몇몇 작품들의 파편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우리는 이를 통하여 그의 작품세계를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된 사천왕사 탑 팔부신중 조각들과 경주 동국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석장사 터 출토 탑상문전(塔像紋塼)들이 바로 그것이다.
  
양지의 작품임이 확실한 사천왕사 출토의 팔부신중이나 석장사의 탑상문전이 그 섬세한 아름다움으로 찬탄을 불러일으키고 있을 뿐 아니라,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몇몇 학자들이 양지 소작(所作)으로 보는 감은사 쌍탑 사리함 조각은 신라 공예기술의 지극한 경지를 보여 주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현대 미술사가들의 말을 빌릴 것 없이, 『삼국유사』 ‘사불산 굴불산 만불산’조에서 당나라 황제 대종이 했다는 찬탄을 상기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는 신라 조각품 ‘만불산’을 두고 ’신라의 재간은 하늘의 솜씨이지 사람의 재주가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양지의 국적에 대해 이견을 보이고 있는 미술사학자들이 한결같이 동의하고 있는 점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양지의 작품이 당나라의 양식과도 구분되는 '중앙아시아적 요소를 간직하고 있다‘든가(문명대), '그의 뛰어난 조각 기법은 곧 서역적 수법에 능통해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든가(장충식), '양지가 서역풍의 조각을 상당히 만든 조각가로서 명성이 높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강우방)는 발언들에서 보이듯, 양지의 작품에 서역풍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간다라 지역에서 흔히 보이는 석가 고행상(苦行像)의 모습이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석장사 터 출토의 탑상문전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도 작품 소재의 관점에서 양지 작품의 '서역풍'을 거들어 주고 있다. 이러한 서역풍은 양지의 소작(所作) 여부에 논란이 있는 감은사 동서 쌍탑 출토의 사리함 조각에도 여실하다.
  
이 서역풍과 관련하여 문명대 교수는 “그의 기법과 양식이 새로운 양식의 시원인 것, 따라서 그의 유파를 설정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고, 강우방 교수 또한 “양지의 작품들이 삼국시대의 미술양식과 연결되지 않는 새로운 도상(圖像), 새로운 양식, 새로운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양지가 우리나라 고대 미술사에 있어 새로운 획을 그었음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사리함을 양지가 만들었는지 여부의 논란은 양지의 작품활동 시기 문제로 이어진다. ‘양지사석’조는 “양지의 행적이 선덕여왕 대에만 드러났다”고 말하고 있는데, 선덕여왕 대와 감은사 탑 사리구가 만들어지는 신문왕 대와는 약 50년의 시차가 있다.

 

양지가 영묘사 장륙상을 만들던 선덕여왕 때의 나이를 서른으로 친다면, 감은사탑 사리구 조각은 양지의 나이 일흔이나 여든에 만들어졌다는 얘기가 된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만 다소 무리한 추정이다.

그렇다면 감은사 탑 사리구가 양지의 제자나 또는 양지의 작풍(作風)에 익숙한 다른 사람이 만들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만일 양지의 작풍을 따르는 일단의 예인들이 있어 감은사탑 사리함 조각을 만들었다면 그들이 하나의 유파를 이루었다든지 아니면 양지의 작풍이 하나의 흐름으로 성립되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나라의 옛그림』의 저자 동주 이용희 선생은 조선조 후기 회화사를 개관하면서, 추사 김정희가 청나라의 영향을 받아 일으킨 문인화의 새 바람을 ‘완당 바람’이라는 말로 표현한 바 있다. 삼국시대 말, 통일신라 초 신라에서 양지가 서역풍의 새로운 기법과 양식을 도입하여 하나의 새로운 흐름을 일으켰다면, 우리는 그 흐름을 ‘양지 바람’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견해를 털어놓자면, 나는 이러한 바람을 몰고 왔던 양지가 서역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정에 끌리는 편이다. 그 이유로는, 우선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서역풍을 들 수 있겠고 여기에 덧붙여 『삼국유사』 ‘양지사석’조에서 풍기는 묘한 뉘앙스를 꼽을 수 있다.
  
 일연은 『삼국유사』의 탑상편 ‘영묘사 장륙’조에서 “선덕여왕이 영묘사를 세우고 소상을 만든 내력은 ‘양지법사전’에 자세하다”고 하여 ‘양지법사전’이라는 글을 언급하고 있다.

일연은 양지의 전기로 추정되는 그 글을 읽고 참고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양지사석’조 첫머리에 “그의 조상과 고향이 자세치 않다(未詳祖考鄕邑)”라고 쓰고 있음을 볼 때, 일연은 양지의 소종래(所從來)에 대하여 일부러 말을 않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양지가 신라 사람이었다면 그의 출신 또는 국적과 관련하여 일연이 그렇게 얼버무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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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서기석이야기

 

 

 

1934년 5월4일, 어느 일본인이 경주 북천 건너 금장대 부근(현 경주 동국대 후면)의 구릉을 걷고 있었다.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 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오사카 긴타로(大阪金次郞)였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 선덕여왕대 유명한 양지스님과 관련된 석장사(錫杖寺) 터를 조사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문득 오사카의 발에 돌 하나가 걸렸다. 냇돌(川石)이었다. “어, 거참 이상한 돌이네”. 고고학자 특유의 눈썰미가 이 예사롭지 않은 돌에 꽂혔다. 자세히 보니 길이 30㎝에 지나지 않은 냇돌에 새겨넣은 글자가 어렴풋이 보였다.

 

 

◇우연히 주운 냇돌의 비밀은?

 

글자는 ‘임신(壬申)’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면밀히 살펴보니 5줄에 모두 74자나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돌의 글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몰랐다. 이듬해인 35년 12월18일. 당시 일본 역사학의 대가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가 경주분관을 둘러보았다. 수집해둔 몇 편의 비석편 가운데 그의 눈길을 끈 것이 바로 이 돌이었다.

“이거 어디서 주웠습니까?”. 흥분한 스에마쓰는 오사카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리고는 새겨진 글자 가운데 첫머리에 임신(壬申)이란 간지(干支)로부터 시작되고 있고, 새겨진 글자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본 결과 두 사람이 서약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바로 ‘임신년에 서로 서약하는 내용을 기록한 돌’이란 의미에서 그 자리에서 이 돌의 이름을 임시로 부르기로 했다. 그는 바로 이 돌에 새겨진 글자를 판독해서 이듬해인 1936년 경성제대 사학회지 제10호에 ‘경주출토 임신서기석에 대해서’라는 제목으로 탁본과 함께 논문으로 발표했다.

이렇게 되어 임신서기석이란 용어가 마련되어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이 돌은 돌을 주웠던 오사카의 개인소유였다. 그러다 광복되면서 미처 일본으로 가져가지 못하고 두었기 때문에 경주박물관에 보관되었다. 이것은 당시 우리나라 땅에서 동산문화재는 어떤 경우든 먼저 수집하는 사람의 소유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맹세연도가 732년이냐, 612년이냐

 

그러나 광복 후 이병도가 다시 이 서기석을 관찰하고 종합적인 해석을 내렸다. 글이 쓰인 연대는 신라 진흥왕 때인 552년이나 진평왕 때인 612년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였다. 스에마쓰 주장과는 무려 120년간의 차이가 있었다.

스에마쓰는 비문의 내용 가 운데 시경·상서·예기 등 신라 국학의 주요한 교과목을 습득하고자 한 것을 맹세한 점에 주목했다. 결국 신라에서 국학을 설치하고 한층 체제를 갖춘 신문왕 이후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던 것이다. 즉 임신년을 문무왕 12년인 672년이 아니면 성덕왕 31년인 732년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이병도는 신라에 국학이 설치되기 이전부터 유교경전이 신라 지식사회에 수용되었음을 강조했다. 특히 비문 내용 가운데 나라에 충성하는 길을 맹세한 점이 돋보인다는 것. 이 충성맹세는 신라 화랑도(花郞徒)의 근본정신이며, 따라서 이 임신서기석은 이 제도가 융성했던 진흥왕 13년인 552년이거나, 진평왕 34년인 612년으로 보는 것이 좀더 타당하다는 주장인 것이다.

 

이와 같이 동일한 비문을 놓고 그 해석에 있어서 내용은 동일하나 비문이 쓰인 연대는 1세기 이상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고고학보다도 문헌사학을 통한 고대사 해석시에는 이러한 명문, 즉 글자가 새겨진 유물이 발견되면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왜냐하면 열악한 기록에만 의존하고 있는 학문세계에 새로운 기록이 나타남으로써 부족한 기록을 보태는 것은 물론 당시의 사회를 복원할 수 있는 훌륭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최초 발견 당시 전후사정 볼 것 없이 쉽게 접근한 것이 바로 신라가 국학을 설치하고 교과목으로 채택한 경전이 돌에 새겨진 점이었다. 바로 이 점에 착안해서 일본 어용사학자의 선두주자나 다름없었던 비중있는 학자가 발표했기에, 아무런 비판없이 수용됐던 것이었다. 결국 이 임신서기석의 연대가 통일후 문화가 가장 융성했던 성덕왕대의 것이라는 스에마쓰의 해석에 반기를 드는 이는 없었다.

 

 

◇“임신서기석은 화랑정신의 상징석”

 

그러나 광복 후 이병도는 스에마쓰의 해석을 분석해 새롭게 조명했다. 신라에는 화랑도의 정신이 있었다. 바로 그 화랑도 정신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평정하고 나아가 외세인 당나라의 세력까지 몰아냄으로써 삼국을 하나로 통합했다. 그건 역사적인 사실이다. 알다시피 화랑에는 젊은 화랑들이 지켜야 할 5가지 행동강령인 ‘세속오계(世俗五戒)’가 있었다.

 

이 강령을 보면 첫째가 임금, 즉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며, 둘째가 부모에 효도하는 것이고, 셋째가 벗과는 신의를 지켜야 하며, 넷째가 싸움에 나가 물러서지 않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다섯째가 살생은 가려서 하라는 것이다. 진평왕때 원광(圓光)스님이 마련한 이 강령은 화랑도의 근본사상이었다.

 

그런데 이 ‘임신서기석’의 내용을 분석해보면 당시 상당한 교육적 지식을 갖춘 두 사람임이 분명하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 충성을 맹세한다는 것은 세속오계의 화랑정신과 일맥상통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렇다면 이 서기석의 임신년은 진평왕대인 서기 612년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바로 삼국통일 전의 사회정신을 말해주는 젊은 지식인들의 ‘나라에 대한 맹세’라는 편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조유전/고고학자 2003.8.18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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