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自轉車)
류 근 만
현관문을 나서면 낡은 자전거 한 대가 맨 먼저 눈에 띈다. 서로 눈길도 주지 않는 처지가 된 지 오래다. 창문을 열고 밖을 보면 냇가에 자전거 애호가들이 줄지어 시원스레 달린다. 천변 정비 차원인지 건강복지 차원인지 모르지만, 자전거 길은 물론이고, 지역 해당 구에서 설치한 시설물들이 장관이다. 돌리고, 밀고, 끌어당기고, 자전거 타기, 등 마사지까지 전신운동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 고맙다.
나도 가끔은 혼자서 또는 아내와 함께 천변을 걷는다. 운동 시설도 이용한다. 사람이 다니는 길과 자전거 길이 구분되어 있어 편하다. 내가 걷는 옆으로 자전거가 씽씽 달리는 것을 보면 옛 생각이 난다. 자전거 길도 그렇고, 시원스레 자전거 타는 건장한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다.
나는 자전거에 대해 잊히지 않는 아련한 추억이 있다. 면사무소에 근무할 때의 일이다. 그곳에 있는 자전거는 관용이었다. 면장님 전용 자전거 自轉車가 있고, 직원들이 출장 갈 때 타는 자전거 세 대가 있었다. 원거리 출장일 때는 출장명령서에 자전거 사용을 허가받아야 했다. 거리가 멀거나 나처럼 젊은 직원은 자전거를 타고 출장을 다녔지만, 나이가 많은 동료직원은 자전거 타기를 외면했다.
신작로는 주먹보다도 큰 자갈들이 즐비했기에 자전거를 운전하기가 편치 않았다. 냇물을 건널 때는 용감하게 신발과 양말을 벗고 바지는 최대한 끌어 올렸다. 옷은 젖어도 자전거는 물에 젖지 않도록 들고 건너야 했다. 체인에 물이 닿으면 안 된다고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자전거 타고 출장을 갔다가 소달구지(구르마, 수레)나 소 발바닥의 낡아 빠진 징(못), 억센 가시 등에 찔려 바퀴에 펑크라도 나면 자전거를 모시고 다녔다. 앞바퀴가 펑크 나면 앞바퀴를 들고, 뒷바퀴가 펑크 나면 뒷바퀴를 들고, 성한 바퀴로 자전거를 굴려야 했다. 지금은 추억이 되었지만 당시는 예방 차원의 일로 튜브가 바퀴에 눌려 찢어질까 봐 했었던 일상이었다.
튜브에 바람이 빠지거나, 펑크 난 곳을 때우려면 진땀을 뺀다. 면 소재지 한 곳뿐인 자전거포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애물단지를 노련한 선배직원들이 탈 이유가 없음을 새내기인 나는 늦게야 알았다. 그것도 모르고 선배들의 배려인 줄 알았으니 참으로 천진난만한 생각을 한 것이다.
혹시나 선배 동료와 출장을 같이 갈 때면 자전거 뒷좌석에 잘 모셔야 했다. 자갈길을 털털거리고 가다 보면 선배가 자전거에서 떨어질 때도 있고, 엉덩이 깨어진다고 야단을 맞기도 했다. 웃지도 못하고 속으론 고소하기까지 했다. 참으로 재미있고 잊히지 않는 추억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내가 더 어렸을 때의 일이다. 중학교에 입학한 기쁨도 잠시, 통학이 문제였다. 처음엔 삼십 리가 넘는 길을 걸어 다녔다. 감내하기가 너무 고역이었다. 한 달도 넘기지 못하고 발바닥이 부르터서 도저히 걸을 수가 없을 때였다. 아버지가 어디서 중고 자전거를 구해 오셨다. 나는 자전거 타는 연습에 몰두했다. 아버지가 뒤에서 밀어주었지만 나는 겁이 나서 넘어지기 일쑤다. 처음엔 밀다가 차츰 손을 놓으면서 거짓말로 나를 안심시켰다. 아버지의 열정에 며칠 만에 숙달하여 자전거 통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너무 좋아서 날밤을 새웠다.
이른 아침, 책가방을 자전거 짐받이에 꽁꽁 묶으면서 신바람 나게 학교에 갈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집에서 신작로까지는 마을 안길이다. 신작로에 비하면 양반 길이다. 그러나 자동차가 다니는 길은 주먹보다도 큰 돌들이 깔린 자갈길이다. 도로가 패지 않도록 주민들이 주기적으로 돌을 펴고 깔기를 반복했다. 그 당시는 자동차 위주로 도로정비를 하는 부역이었다.
삼십여 리 길을 자전거로 신바람 나게 달리겠다고 나선 것은 큰 착각이었다. 자전거가 털털거리고 핸들은 제멋대로 움직인다. 어쩌다 자동차가 지나치면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먼지로 분칠을 한다. 여름철 땀에 젖었을 땐 옷이며 얼굴이며 참으로 볼썽사납다.
자전거로 학교 가는 길은 두 시간 정도 걸렸다. 걷는 것보다 한 시간 정도 덜 걸리지만, 힘은 더 들었다. 옷은 땀에 차고 헐떡거리면서 공부하기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래도 아버지가 사주신 자전거는 내게 고마운 애마였다. 한 시간을 더 자든지 아니면 공부를 더 할 수 있었다. 힘이 들 땐 영어단어장을 손에 들고 걷는 재미도 쏠쏠했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 동생은 중학생이었다. 중고등학교가 함께 있어 등교할 땐 동생을 자전거 앞 체대에 앉히고 나는 운전을 했다. 혼자 다니기도 힘든 길을 둘이 탔으니 자전거가 몸살이 날 정도다. 걷는 시간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자전거 타다가 힘이 들면 걸어서 다녔다.
형제가 함께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뒤에서 오는 자동차를 비키려다가 사고가 난 적도 있다. 갑자기 나타난 자동차를 피하려다 비탈길로 털털거리면서 내리박혔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동생은 엉덩이가, 나는 자전거 안장에 지쳐서 타박상을 입고 뒹굴기도 했다. 결국은 오래가지 못하고 자취를 하면서 자전거와 경별했다.
그 당시 자전거는 오늘날 승용차를 타는 자가용보다 몇 배 더 귀한 몸이었다. 비록 중고 자전거지만 반질거리게 닦고 기름칠하면서 상전으로 모셨다. 지금은 집마다 자가용이 한 대 또는 가족 수대로 있지만, 그 당시는 자전거 있는 집도 흔치 않았다. 자가용 시대가 오면서 이동수단으로 사용하던 자전거는 점점 사라졌다.
대신에 가볍고 모양이 예쁘고 질 좋은 자전거가 선보였다. 가까운 거리의 통근용, 시장 갈 때 주부들이 타는 자가용으로 한때는 인기가 좋았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내가 직접 고른 자전거가 있었다. 아내의 애마였다. 운동 삼아 타기도 하고, 시장갈 땐 짐차가 되고, 성당 갈 때도 탔다. 그런데 눈길에 미끄러져서 팔이 부러졌다. 한동안 입원해서 수술도 받으면서 병원 신세를 진 이후로 사이가 멀어졌다. 홀로 고독을 지키던 애마는 고물상에 팔려나갔다.
현관 앞에 바람이 빠진 채 홀로 서 있는 내 애마가 처량하다. 밭에 갈 때 운동 삼아 타라면서 원주에 사는 딸이 보내준 것이다. 최신형도 아니고 쓸모가 적어진 물건이니 밭에 다니는 용도로 쓰곤 한다. 요즈음엔 승용차와 자전거를 수시로 바꾸어 탄다. 나도 자전거만큼이나 변하는 시대를 살고 있으니 쉬엄쉬엄 타는 것이다. 자전거도 새 놈일 때가 좋고, 사람도 젊었을 때가 좋은 것 같다. 그토록 나의 등굣길, 출장길에 헌신했던 자전거가 기억에서 사라져 가고 있으니 아쉬움도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