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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장 TV의 힘
(1) TV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나
1991년 8월 당시 민자당의 김영삼 대표 최고 위원이 제주도로 휴가를 갔을 때
일어난 일이다. 김 대표는 아침 일찍부터 한 번만 그림을 만들어 주십시오.
라고 조르는 방송사 기자들의 성화에 못 이겨 호텔 앞 바닷가를 바라보는 포즈를
취하였다. 그 날 저녁 한 TV 방송사의 저녁 뉴스는 그 화면과 함께 제주에
머무르는 김 대표는 바다를 바라보면 마음이 탁 트인다고 말하고 있지만, 어쩐지
그 표정은 밝지만은 않다. 고 보도했다.
당연한 일이 아닌가, 아침 일찍 강제로 일어났으니 표정이 밝을 리 만무했다.
이 에피소드는 TV 뉴스와 관련해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TV뉴스는 그림이
없으면 뉴스가 될 수 없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미국의 어느 정치 평론가는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보도한 TV
뉴스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포드 대통령이 비행기를 내리면서 머리를 찧는 것을 보았다. 나는 카터가
조지아 주 플레인즈 에서 소프트볼을 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카터가 그의 딸
에미에게 키스를 하는 걸 보았고, 카터가 작업복을 입고 그의 아내 로잘린과
손을 잡고 땅콩 농장을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포드가 동구 문제에 대해
실언하는 것을 보야T고 일주일간 사람들이 그 실언에 대해 논평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오하이오 주에 온 포드가 자신이 오하이오에 다시 온 것이 얼마나
기쁜지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행진하는 밴드와 야유하는 관중을
보았고, 나는 군중의 숫자와 그 숫자의 의미에 대해 들였다. 그러나 내가
네트워크 TV뉴스를 시청하느라 소비했던 매우 긴장된 모든 시간 동안 나는
후보들이 선거 이슈 에 대해 말했어야 했을 것을 전혀 듣지 못했다. 그것은
뉴스가 아니었다.
TV뉴스는 행여 시청자들을 지루하게 만들까 봐 늘 그림에 집착한다. 그러다
보니 정작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정치적 사상이나 신념은 그림으로 표현하기가
어려워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는 경향이 있다. 만약 대다수 사람들이 TV 뉴스를
통해 세상 돌아가는 것을 이해한다면, 그러한 이해는 알맹이가 없고 대단히
피상적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국민의 여론에 크게 의존하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할 수 있을까?
아닌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TV가 민주주의의 위기를 낳고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 이유를 놓고서는 사람들마다 견해가 다양하지만, 현실 정치
세계에서 그 위기를 첫 번째 징후로 이의없이 제기되는 건 투표율이 하락이다.
TV를 정치에 가장 활발하게 이용하는 미국에선 최근 중간 선거의 투표율이
36.4%까지 내려가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미국의 대통령 선거 투표율은 1840년에 80%로 제일 높았고 1890년대엔 70%선을
유지했으나, 1920년에 60%로 하락을 기록한 이후 1952년부터 1962년까지 평균
투표율은 1960년 이래로 계속 하락세를 보여 왔는데 실제로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투표율을 기록하고 있는 나라들 중 하나이다.
1960년대부터 1978년까지 평균 투표율을 각 나라별로 보면 이탈리아 94%,
오스트리아 89%, 노르웨이 87%, 스웨덴 86%, 그리스 85%, 핀란드 84%, 서독 84%,
이스라엘 81%, 뉴질랜드 81%, 한국 80%(총선 76.6%, 대선 86.4%), 베네주엘라
80%, 필리핀 77%, 아일랜드 75%, 영국 74%, 코스타리카 73%, 스리랑카 72%,
캐나다 71%, 칠레 71%, 일본 71%, 우르과이 71%, 프랑스 70%, 터어키 70%,
자마이카 61%, 인도 60%, 인도 60%, 미국 59%, 레바논 56%, 스위스 53%등이다.
미국의 낮은 투표율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세계에서 가장 발달되어 있는
미국의 상업 텔레비전과 텔레비전 광고를 남용하는 미국의 텔레비전 선거 제도를
그 주요 원인으로 꼽고 있다. 물론 대중 매체가 정치를 상품화시켜 대중으로
하여금 정치를 즐기기만 할 뿐 정치에 참여는 하지 않게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은 텔레비전이 널리 보급되기 이전부터 사회 과학자들을 괴롭혀 온
까다로운 주제였다.
미국의 사회학자들은 워싱턴이 어떻게 할리우드나 브로드웨이와 경쟁 할 수
있겠느냐. 며 대중 매체가 정치적 무관심을 조장하는 경향에 대해 오래 전부터
우려를 표명해 왔다. 그러나 텔레비전이 할리우드와 브로드웨이를 점령하고
정치마저 할리우드 방식으로 변화시킨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정치적 무관심을
넘어 정치에 대한 혐오마저 미국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가고 있다. 많은
학자들은 미국 민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 또는 혐오가 텔레비전이 신문을
능가하는 주요 정보 원천으로 등장한 1960년대 중반 이래로 갈수록 심해지고
있으며 유권자들의 텔레비전 소비 율 과 투표율은 반비례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오락적인 속성을 지닌 TV는 그 속성을 극대화시키고자
하는 상업 방송의 운영으로 인해 선거를 오락 화한다. 즉, 선거를 시각적 소비의
대상인 구경거리 로 전락시켜 그저 즐기기만 하는 대중 문화의 일부로 만든다는
것이다.
실제로 텔레비전의 선거 보도는 후보자의 전문적인 능력보다는 성격과 용모,
언어보다는 이미지, 알맹이보다는 스타일을 더 선호하고 부각시키는 경향이
있다. 앞서 인용한 76년의 미국 대통령 선거 보도에 대한 논평은 바로 그 점을
잘 말해 주고 있다.
더욱이 정치인들이 텔레비전의 그러한 속성을 최대한 이용함에 따라 문제는
더욱 악화되고 있다. 예컨대, 정당의 전당 대회는 TV를 의식해 TV의 주요 시청
시간대에 맞춰 시작되는 건 물론이고 시청자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흡사한
편의 대형 버라이어티 쇼처럼 구성되고 연출된다
TV 지향형 정치는 필연적으로 정당의 약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후보들이
TV를 의식해 유권자들에게 직접 호소하는 방식을 택하는 것도 긍정적인 일면이
없는 건 아니나 이는 정당보다는 TV 전문가에 대한 의존을 높이기 때문에
정당을 유명 무실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효과를 낳게 된다.
선거 광고는 더욱 큰 문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80년대 중반 미국의 상원
의원 후보가 평균적으로 쓴 선거 자금은 6백만 달러이며 이 돈의 가장 큰 용도는
텔레비전 광고비였다. 대통령 후보의 경우에 선거 자금은 몇천만 달러에 이른다.
미국의 대통령 예비 선거가 시작되는 아이오와 주는 과거 후보자들이 농부들 을
직접 찾아다니며 악수 공세를 펴는 소매 정치 의 본산이었으나 이제는 텔레비전
광고를 중심으로 한 도매정치 의 출발점으로 바뀌어 버렸다. TV가 정치를
상품화 시키는 주범으로 유권자를 이미지의 소비자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회 과학적인 분석과는 별도로, TV가 부추긴다는 민주주의 의 위기
가 미국에서 본격적인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건 1969년 11월 13일 당시 부통령
스피로 애그뉴에 의해서였다. 그는 아이오와 주 데모인 에서 행한 연설에서
그레샴의 법칙이 네트워크 뉴스에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나뿐 뉴스가 좋은
뉴스를 몰아내고 있다. 고 주장하였다. TV뉴스는 비합리적인 것, 반디, 대결,
과격 분자, 폭력, 논쟁, 액션, 흥분, 드라마틱한 것, 종성, 위법 상태 들만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애그뉴는 또 TV방송사들의 앵커맨들을 겨냥하여
국민에 의해 선출되지도 않은 소수의 사람들이 국가의 중대사를 선별하고
제시하고 해석하는 데에 있어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고
비난하였다.
털레비전 네트워크들에 대한 애그뉴의 비난은 당시 전반적인 언론 보도에 대해
강한 불만을 품고 있던 닉슨 행정부의 공격적인 정치 공세의 일환이었다.
대통령인 리처드 닉슨도 침묵하는 다수(silent majority)'라는 표현을 구사한
일련의 연설을 통해 언론이 침묵하는 다수의 의견을 무시한 채 멋대로 정부를
비판하고 있다는 불만을 토로하였다.
당시 미국 국민은 닉슨 행정부의 언론에 대한 불만에 일리가 있음을
인정하였다. 갤럽 여론 조사에 따르면 애그뉴의 연설을 들은 사람은 5명중
4명이었는데 그 중 42%가 공감을 표시한 반면 반대의 생각을 나타낸 사람은
26%였다.
보수 진영의 TV에 대한 공격은 70년대 중반에 재개되었다. 특히 보수적인
정치학자 사무엘 헌팅턴은 TV를 비롯한 언론은 국가 권력의 가장 확실하고
새로운 원천 이 되었으며 자본주의 사회의 안정을 위협하는 민주주의적 불안 을
파급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언론이 민주적 수요 와 사회질서 사이에
불균형을 야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헌팅턴은 또 언론이 정부 정책에 대해
지나치게 비판적이므로 정부와 언론 사이의 균형을 복원시킬 필요가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헌팅턴 이외에도 텔레비전이 소비. 향락주의를 확산시킴으로써 자본주의
윤리를 해치고 정치 스캔들 폭로로 정치 냉소주의를 퍼뜨리며 정부와 제도의
권위를 훼손시킨다는 보수적 견해는 일단의 다른 학자들에 의해서도 제기되었다.
이에 반해 비판적 시각을 가진 학자들은 텔레비전이 지배 권력의 수중에
들어가 있는 데에서 모든 문제가 비롯된다고 보고 있다. 즉, 언론의 자유가
무한대로 허용되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언론이 권력과 자본에 예속되어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TV만 하더라도 시청률 경쟁의 노예가 되어 보다 많은 시청자들을
끌어들이려는 욕심 때문에 정치 보도를 재미있는 오락 상품처럼 다루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비판적 시각을 가진 학자들 가운데 한 명인 더글라스 켈러는 그의 90년
저서 [TV와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책을 통해 민주주의의 위기는 사회 정치적
시스템으로서의 민주주의가 경제 문화적 시스템으로서의 자본주의에 예속되기를
강요하는 상업 언론 체제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종래의 주장을 다시 제기하였다.
우리로선 TV로 인한 민주주의의 위기를 걱정하기엔 아직 이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TV가 정치적 냉소와 혐오를 조장하고 강화할 위험은 없는지 각별한
관심을 미리 기울일 필요는 있을 것이다. 시청자들도 TV의 문법 을 터득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TV를 정치적으로 이용함으로써 사회통제가 권위주의적
스타일에서 조작적 스타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2) TV는 여성에게 축복인가, 재앙인가
여성은 대중 매체에 의해 그들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생각하도록 주의 깊게
훈련되고 있다. 여성은 다른 여성들이...옷이자 화장품, 식품의 구입이나 직업,
취미, 교육 등을 통해...자신보다 더 매력적이고 여성적이라는 가르침을 받고
있다. 그래서 물건을 계속 구입함으로써 끊임없이 자기의 성적 능력을
입증하고자 하는 욕구에 엄청나게 열중하게 되고, 그것이 회사들에는 이익이
될지 모르지만 여성 개인에게는 잠재적인 수난이 되고 있다.
미국의 광고학자 윌슨 브라이언 키의 말 그대로, 여성은 대중 매체에 의해
훈련되고 있다. 그렇다면 여성만 그러한 훈련을 받는가? 그건 아니다. 보든
사람들이 다 대중 매체에 의해 훈련을 받지만 특히 여성이 가장 강도 높은
훈련을 받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대중 매체를 후원하는 광고주들이 파는
상품을 거의 여성들이 구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중 매체는 여성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 남성 내의를 선전하는 TV광고에 여성들 사이에서 가장인기가
높다고 알려진 노주현-유인촌-이덕화 트리오가 맹활약을 하고 있는 이유도 남성
내의를 사는 사람이 남성이 아니라 주로 여성이라는 시장 조사 결과에 근거한
것이다. 물론 여성은 대중 매체에게 훈련만 받는 것은 아니다. 사실 대중 매체의
발달은 여성에게 하나의 축복이자 재앙이었다. 특히 텔레비전의 경우 그것은
여성에게 기존의 질서를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다가섰다. 과거
여성들이 여성스러움 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었던 조건은 무엇보다도 여성의
정보로부터의 고립이었다. 바깥 세상은 남자들만의 것이었고, 여자는 외부
세계에 대한 무지와 공포 속에서 집에서 갇혀 지내야 했다. 여성적 특성은
사회와 절연된 가운데 철저히 가정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텔레비전은 바깥 세계와 가정의 전통적 구분을 허물어뜨리고 말았다.
텔레비전은 바깥 세계를 가정으로까지 배달해 줌으로써 여성에게 전혀 새로운
세계를 보여 주었다. 여성은 여자이기 때문에 근접할 수 없는 곳까지 텔레비전을
통해 비교적 자유롭게 간접 경험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텔레비전을 통해 여성은 학력과 지식의 정도에 무관하게 억압을 받는
사람으로서 집단 의식을 경험하게 되었고, 텔레비전 드라마 등을 통해 남성의
세계를 알게 외었으며, 과거 남성이 독점하던 역할을 여성이 맡는 걸 보게
됨으로써 보다 능동적인 의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또 텔레비전은 남녀가
공동으로 시청하거나 오히려 여아가 더 자주 시청하기 때문에 남성은 여성이 이
세상을 잘 모른다는 주장을 하기가 어렵게 되였으며, 여성 역시 그런 주장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원론적인 가능성이 가져다주는 축복 보다는 재앙 이 더 컸다.
텔레비전은 기존의 남녀 불평등 구조를 확대 재생산 하는 쪽으로 더 큰 힘을
발휘하였던 것이다. 텔레비전은 하루도 빠짐없이 여성이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열심히 가르쳐 준다. 의식이 깨인 여성들은 그런 교육 에 대해 반발하고
있다.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독자 투고 몇 개만 여기에 인용해 보자.
남편은 부인에게 끝없이 반말로 일관하는데 부인은 남편에게 공손하게
존대어를 쓰고 있다. 새댁의 집도 마찬가지로 남편은 아내에게 반말을 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존대어를 쓰고 있다.
남성은 개인적인 성취나 업적 등에 관심을 갖고 사회 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으로 제시되는 반면, 여성은 행동 반경이나 관심의 대상이 가정의 테두리 안에
있고 수동적이며 남성에게 복종적인 현모 양처로 제시되고 있다. 전문직 여성은
성격이 건방지고 이기적이며, 노처녀나 과부로 그려지고 있다. 또 똑똑한 여성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것으로, 전문직 기혼 여성은 골치 아픈 존재로
호전적이며 가정적으로는 무능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최근 자주 방송되는 TV CF[롯데 칠성 레쓰비[ 는 여성을 비하하는 잘못된
광고이다. 이 CF를 보조라면 우리 사회가 아직도 남성 우월주의의 꿈에서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케 된다. 미스 김, 커피 운운하는 설명은 미스 김이 고작
커피나 담배 심부름이나 하는 미미한 존재란 말로 들린다.
위에 지적된 것처럼, 텔레비전은 사회적 남녀 불평등 구조를 바로 잡기 위한
당위의 차원에서 남녀 관계를 묘사하기보다는 기존의 잘못된 남녀 관계를 그대로
보여 주거나 흥미 성을 높이기 위해 과장과 왜곡을 더하여 불평등 구조를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텔레비전 드라마나 광고에 서 나타나는 여성의
진보적인 역할과 이미지조차도 곧 소비주의 라고 하는 새로운 유형의
가부장제 에 종속되는 결과를 낳고 있다.
물론 드라마의 리얼리즘 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거나 고발한다는 차원에서 여성의 비극을 강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텔레비전은 그런 목적 의식 없이 대부분 여성의 종속적 위치를
미화시키기에 바쁘다. 현실의 문제를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보여줌 써 문제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이른바 교정적 리얼리즘(corrective re-alism)'의 정신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구도 속에서 여성은 소비 행위를 통해 자존심과
삶의 의미를 찾는 소비 동물 이 되게끔 유혹을 받고 있다. 여성의
아름다움마저도 개성과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획일화된 기준으로 평가하고
그에 따를 것을 부추긴다. 여성은 진정한 자존과 독립을 위해 우선
텔레비전에서부터 여권 을 회복하는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캐나다에서는 연방 정부가 1979년 라디오. TV. 전기 통신 위원회(CRTC)에
여성의 성 역할에 관한 특별 위원회를 구성한 바 있다. 이 위원회에는 시민
대표도 참가하는데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 위원회는 방송 매체에서의 성
역할을 인권문제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 이 위원회가 4백여 방송사로부터 받은
자료를 토대로 작성한 보고서의 내용은 방송매체가 취해야 할 바람직한 태도의
형식과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여성상을 보여 주어야 한다.
(2) 여성을 단순히 성적인 자극을 주는 존재 또는 유혹 자로서 취급하지
말아야 한다.
(3) 성차별을 내포하는 단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4) 남성은 업적을, 여성은 단순히 모습을 보여주는 식의 소개를 하지 말아야
한다.
(5) 여성을 남성에 게 봉사하거나 의존하는 존재로 묘사해서는 안 된다.
(6) 여성은 젊음이나 아름다움에 관심이 많고 나이를 먹는 것이다 성적 매력이
없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식의 표현을 해선 안 된다.
(7) 여성 아나운서, 리포터, 사회자를 충분히 등장시킨다.
(8) 광고는 여성이 가정적 상품만의 구매자, 사용자가 아니라 모든 상품의
구매자, 사용자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미국에서는 대중매체를 대상으로 한 여권운동이 주로 방송사들이 면허를
갱신할 때 그 동안 지역민들의 바람을 얼마 충족시켰는가를 따지는 연방
커뮤니케이션 위원회의 확증제 를 통해 방송사에 압력을 가하는 형태로
이루어져 왔다. 여권 단체들은 70년대와 80년대 초까지 면허 갱신의 시점에 놓여
있는 약 15개의 방송사를 집중적으로 공략해 FCC가 면허 갱신 여부를 놓고 제법
심각하게 고민하게 끔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물론 여권 단체들은 단 한 개의
방송사 면허도 취소시키지는 못하였지만 그로 인해 방송사들의 태도가 크게
달라졌다고 믿고 있다.
오늘날엔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방송을 대상으로 한 여권 운동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여성 인력을 방송계에 많이 진출시키는 일이라는 데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도 방송계에 종사하는 여성
인력의 수는 절대적인 수는 절대적인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워싱턴의 보도 매체 및 홍보 센터가 최근 조사한 것을 보면 현재
TV뉴스에 가장 빈번하게 나오는 50명의 기자 중 여자는 10명에 불과하다. 92년
한 해 동안 ABC, NBC, CBS 3대 텔레비전 네트워크들이 보도한 뉴스는 1만 2백
26건인데 이중 19%가 여기자들에 의해 보도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의 경우 문제는 훨씬 더 심각하다. 92년 3월말 현재 언론사에 종사하는 총
3만 6천 2백 92명의 인원 가운데 남자는 3만 천 3백 69명(86.4%)인 데 비해,
여자는 4천 9백 23명(13.6%)에 불과하다. 매체별 여성 인력은 신문이 14.4%이고
방송이 12%다. 이 비율은 모든 직종을 다 포함한 것으로 대중 매체 상품 제작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직종(기자, PD, 아나운서)의 수는 훨씬 더 적을 것이다.
다만 방송 작가나 스크립터의 경우엔 여성 인력이 남성에 비해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그건 상당 부분 그 직종의 작업 조건이 열악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방송 매체에서 일상적으로 저질러지는 남녀 불평등 구조의 확대 재생산을
문제삼기 위해서는 여성 인력의 확충과 더불어 대중 매체를 감시하고 연구하는
여성 인력도 필요하다. 물론 그런 연구는 남성 연구자도 할 수 있을 것이나 남성
연구자는 자신이 아무리 페미니스트를 자처해도 남성 연구자로서의 한계를 안고
있기 마련이다.
이 점에 있어선 전국 대학의 신문 방송학과 교수진도 심각하게 문제삼을
필요가 있다. 전국 대학의 신문 방송학과 교수는 7명으로 전체의 5%에 불과하다.
한국에서 여성과 대중 매체 가 보다 더 무게있는 주제로 다루어지지 않는 것도
바로 그런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여성과 대중 매체 에 관한 연구는 대중 매체에 나타나는 여성상 왜곡에 관한
연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여성이 실제로 대중 매체를 어떻게 수용하고
이용하는가 하는 문제에도 눈을 돌려야 할 것이다. 여성과 대중 매체 에 관한
연구는 대중 문화 연구 전반에 큰 기여를 할 것이다.
(3) TV는 스포츠에 어떤 영향을 미치나
현대 스포츠는 우연히 생겨난 것도 아니며 자연 법칙에 의해 필연적으로
생겨난 것도 아니다. 현대 스포츠는 자본주의 발달 과정에서 생성된 것이다.
산업 자본주의는 전통적인 사회 질서를 붕괴시키면서 전혀 새로운 차원의 노동
개념과 휴식 개념을 탄갱시켰다. 과거의 전통적인 농경 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노동과 휴식 사이의 분명한 구분이 산업화와 더불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세기 후반 영국에서는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재충전시키는 휴식을 제도화하기
위해 조직적인 스포츠가 널리 보급되었는데, 이는 일부 선진 국가들의 적극적인
후원 하에 점차 전세계로 확산되었다.
서양 스포츠의 세계적 확산은 서구의 육체적 문화를 세계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당연히 후진 국가들의 고유한 스포츠는 사라지게 되었다. 이는
오랜 식민지 역사를 갖고 있는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더욱 그러하다. 유럽의
지배자들은 아프리카인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스포츠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게
만들었고, 그 결과 그들에게 공동체 의식을 심어 주던 전통적인 직접 참여형의
스포츠는 그저 구경이나 하는 상업적인 관중 스포츠로 대체되고 말았다.
유럽의 축구는 불과 수십 명이 참가할 수 있을 뿐이지만 수천 수만의 관중을
끌어들일 수 있다. 그에 반하여 아프리카의 고유한 춤은 수백 명이 한꺼번에
직접 참가하여 즐길 수 있는 스포츠이다. 그러나 그 춤엔 사람을 흥분하게
만드는 경쟁 이 없기 때문에 축구처럼 많은 관중을 끌어 모을 수는 없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그들의 춤을 추지 않는다. 그들도 그 어느
나라의 국민 못지않게 축구에 열광하고 있다. 그들의 스포츠 선수들은 대부분
서방 국가들에서 훈련을 받는다. 많은 아프리카 나라들이 국위 선양을 하는 데에
스포츠 이상 좋은 것이 없다고 믿기 때문에 그런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후진 국가들이 서구 스포츠에 빠져들면 그들이 치러야 할 비용은
끝이 없다. 스포츠 장비, 스포츠 의류, 스포츠 음료, 스포츠 과학을 수입하고,
스포츠 선수, 스포츠 심판, 스포츠 의사, 스포츠 관료 등을 외국에 보내
훈련시키고, 국제 스포츠의 TV중계를 위한 시설과 위성 사용 등을 위해 서방
국가들에게 끊임없이 돈을 지불하게 된다.
어찌됐거나, 그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오늘날의 스포츠는 철저히 관중 스포츠
이며 TV스포츠이다. 스포츠 중계와 스포츠 뉴스는 TV의 주요 프로그램으로서
많은 시청자들을 끌어들인다. 우리 나라 TV에서도 스포츠 중계가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크다. 올림픽 등과 같은 주요 국제 경기를 중계할 땐 채널간 및
채널내 중복, 반복 편성이 일부의 격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어김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정도이다.
미국의 경우 91년 9월 1일부터 92년 8월 31일까지 1년간 주요 방송사의
프로그램별 시청률을 분석한 결과 상위 10위권 중 7개가 스포츠 중계인 것으로
나타났다. 93년 1월말에 열린 프로 미식 축구 결승전인 댈라스 카우보이 대
버팔로 빌스의 수퍼볼 게임 때는 텔레비전을 보유한 미국내 9천 2백 10만 가정
가운데 45.1%가 NBC방송 생중계를 시청해 미국 방송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TV는 스포츠의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 스포츠를 인간 드라마 로 연출하고
스타르르 만들어 내기 위해 전력을 기울인다. 게다가 스포츠는 만국 공용어
이기 때문에 방송의 국제화가 급속도로 진전되면서 스포츠 중계의 인기는 더욱
높아질 것이 틀림없다. 미국의 스포츠 전문 케이블 채널인 ESPN은 최근 아시아
시장을 적극 공략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추세는 앞으로 더욱 강화될 전망이다.
방송사의 입장에선 중계권료가 문제가 되긴 하지만 스포츠 중계는 결코
시청자들을 질리게 하지 않으며 소재 고갈을 염려할 필요도 없다는 장점이 있어
스포츠 중계를 계속 선호할 것이 분명하다.
새로운 방송 기술의 도입과 시범이 주로 제일 먼저 스포츠 중계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도 스포츠가 갖는 대중적 위력을 입증해 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대부분의 개발 도상 국가들이 위성 중계 지구국을 설치하게 된 계기는 자국이
참여하는 국제경기를 중계하기 위해서였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경우엔
HDTV(고화질 TV)가 본격적으로 선을 보였는데 HDTV수신기는 유럽 전역 7백여
곳에 설치되었다.
오늘날의 스포츠는 TV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특히 중계권료 수입은 스포츠
운영의 절대적 재원이 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스포츠라 할
프로 야구의 경우 92년도 3개 방송사가 프로 야고 중계료로 지불한 돈은 모두
18억 2천만 원인데 이는 한국 야구 위원회 예산의 80%이상을 차지한다. 미국
프로 야구 메이저 리그의 경우 지난 90년 CBS와 맺은 4년간 독점 계약 중계료는
10억 6천만 달러로 연간 2천 1백 20억 원이나 된다.
올림픽과 같은 국제 경기의 경우 TV중계권료 수입이 없으면 개최 자체가
불가능하다. 미국 방송사가 하계 올림픽의 중계권료로 지불한 돈은 60년 로마
올림픽 때 3만 9천 4백 달러이던 것이, 64년 동경 올림픽 땐 1백 50만 달러,
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4백 50만 달러, 72년 뮌헨 올림픽 7백 50만 달러, 76년
몬트리올 올림픽 2천 5백만 달러, 80년 모스크바 올림픽 8천 7백만 달러, 84년
로스엔젤러스 올림픽 2억 2천 5백만 달러, 88년 서울 올림픽 3억 달러,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4억 1백만 달러였으며, 96년 애틀란타 올림픽은 5억 달러
이상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96년 애틀란타 올림픽의 중계권료는 모두 15억
달러 규모로 추산되고 있다. 올림픽의 중계권료 급등에 따라 올림픽 개최 종목
또는 참가 인원을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 방송계로부터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TV로 중계되는 스포츠는 그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광고 이벤트이다. 우선
중계권료를 실질적으로 부담하는 스폰서들의 광고가 스포츠 중계 도중에
삽입되는 것부터가 그러하다. 93년 1월 미국의 수퍼볼을 중계한 NBC의 경기 삽입
광고는 30초짜리 하나에 85만 달러나 된다. 뿐만 아니라 경기장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광고는 TV중계를 염두에 둔 것이며 당연히 광고비도 TV카메라에 잡히기
유리한 정도에 따라 매겨진다.
경기하는 선수들도 움직이는 광고탑 이다. 스포츠 용품 업체는 유명 선수가
자사의 제품을 착용하는 대가로 거액의 돈을 지불한다. 역도나 마라톤에서도
스타 선수는 TV카메라가 지켜보는 순간을 틈타 일부러 후원 기업의 특정 음료를
마셔야만 한다. 후원 기업이 TV중계를 통한 광고 효과를 원하기 때문이다. 또
일단 TV에 의해 스타가 된 선수는 경기와는 무관하게 광고 모델로 맹활약하게
된다. 미국의 14세 테니스 스타 제니퍼 캐프리애티는 그런 광고 수입만으로
6백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나이키와 같은 다국적 기업이 세계적인 스타 선수와의 모델 계약에 쓰는
돈만도 91년에 2억 달러에 이르렀다. 나이키, 리복, 아디다스, 베네통, 미즈노
등 세계적인 스포츠 용품 화사들이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투자한 홍보비는 1천
6백억 원에 이른다. 국내 업체들도 최근 외국 유명 축구팀의 운동복에 기업
마크를 붙이는 방식으로 스폰서 계약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또 기업들은 기업
홍보의 차원에서 자체 스포츠 팀을 육성하는 등 스포츠에 투자한다.
스포츠의 인기 종목은 TV중계량에 따라 결정된다. 우리 나라에서 한때 인기가
없던 씨름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도 전적으로 TV중계 덕분이었다.
최근 국내 권투가 침체 국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TV가 중계를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사정 바람으로 크게 위축되고
있는 골프도 한동안이나마 제법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건 방송사의 경쟁적인 골프
중계에 힘입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TV는 인기 종목을 만들어 낼뿐만 아니라 인기를 더욱 높이기 위해 중계
방식에도 혁신적인 방법을 도입한다. 미국에서 미식 축구를 중계할 때 선수의
헬멧에까지 특수 카메라를 장착해 실감나는 영상을 보여 주는 시도가 그 대표적
예이다. 마라톤처럼 지루한 경기조차도 TV중계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TV프로그램으로서의 상품성을 지닐 수 있게 된다. 제 64회 동아 마라톤 중계 때
MBC가 국내 최초로 3천만 원의 중계료를 지불하고 비교적 흥미진진한 중계
솜씨를 선보였던 것도 앞으로의 마라톤의 인기와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 크다.
사격도 전자 채점기를 도입하여 사격 한 발이 텔레비전 화면에 그대로
나타나도록 배려를 하고 있다.
당연히 TV중계에 불리한 경기는 큰 인기를 얻기가 어렵다. 축구가 미국에서
전혀 뿌리르 내리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TV가 중계를 외면하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중간 광고가 가장 극심한 미국 TV의 입장에선 축구가 중간 광고를
내보내기엔 영 마땅치 않은 경기이다. 때문에 축구가 농구 경기처럼 쿼터제로
바뀌지 않는 한 축구를 계속 외면할 것이 틀림없다. 실제로 미국은 94년 월드컵
대회 때부터 중간 광고 방송을 위해 25분 4쿼터제로 경기 방식을 바꾸자는
주장을 공공연히 해 왔다.
그런가 하면 미국에서 농구 코치들이 작전 지시를 할 일이 전혀 없어도 한
게임당 적어도 8번은 의무적으로 타임 아웃을 요청해야 하는 것도 순전히 TV
중간 광고를 위해서이다. 올림픽 행사도 바르셀로나의 경우처럼 유럽 지역 TV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스포츠 중계는 뉴스에도 영향을 미친다. 대부분의 나라들의 방송사에서 보도와
오락은 그 제작 시스템상 분리되어 있다. 스포츠는 그 중간에 위치해 있거나
보도 부문에 속해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 스포츠는 보도 부문에 편입돼 있다.
그러나 스포츠는 그 속성상 오락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오락성을 높이기 위한
각종 시도가 적극적으로 적용되기 마련이다. 그렇게해서 터득된 오락성 향상
기법은 뉴스 제작에 원용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미국에서 TV뉴스가 상품성 을 높이기 위한 시도에서 급격한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 건 77년 ABC-TV에서스포츠 중계를 전문으로 허던 룬아를레지아가
ABC뉴스의 사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자신의 스포츠 중계 경력을 십분
발휘하여 뉴스의 속도감을 높이고 각종 시그널 뮤직을 사용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뉴스를 즐길 수 있는 영상 이미지로 만드는 데에 앞장섰으며 그의
독특한 제작 기법은 다른 방송사들에게까지 확산되었다.
우리 나라에서 스포츠 중계가 뉴스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직접적인 영향이 아니라 하더라도 뉴스 제작자들이 이미 스포츠
중계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외국의 뉴스 기법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는 걸
무시할 수 없다. T,포츠 중계 기법을 흉내내 뉴스의 상품성 을 높이고자 하는
시도가 무조건 잘못됐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런 시도가 뉴스의 본질을
희생시키지 않는 한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원칙은 분명히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
(4) 케이블 TV는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까
자연에 대한 인간의 통제력을 높이는 데에 기여한 기술 문명의 발달은
역설적으로 인간을 수동화시켜 왔다. 특히 최첨단 기술이 실생활에 응용되는
도시 생활은 인간에게 여러 가지 편리함을 안겨 주었지만 그 편리함을 보장받기
위해 따라야 할 규칙이 너무도 많다.
아주 단순한 차원에서 이야기하더라도, 들판을 걷는 것과 도시 한복판을 걷는
것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도시에서는 인도를 따라 신호등의 지시에
복종하면서 걸어야 한다. 소리를 함부로 질러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어서도 안
되며 침을 함부로 뱉어서도 안 된다. 걸음걸이도 단정해야지 마음대로 갈짓자를
흉내냈다간 접촉 사고 를 내기 쉽상이다. 어디 걷는 것뿐이겠는가. 아파트
생활에서 공공 장소에서의 행위에 이르기까지 규칙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에겐 원시적인 본능이 있다. 자기 혼자만의 세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앗는 공간을 갖고 싶어하는 욕구가 꿈틀대고 있다. 기술 문명이
발달하면서 프라이버시 의 권리가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도 바로 기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러한 공간을 확보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대중은 그 대체 공간으로서 미디어의 세계에 눈을 돌리게 된다. 최근의
미디어가 자아 매몰 의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미디어가 인간이 이용하는 도구의 차원을 넘어
인간을 아예 흡수해 버리는 소우주 로 군림하는 경향이 대두된 것이다.
자아 매몰 의 대표적인 미디어로는 워크맨 과 비디오를 들 수 있다. 이
미디어들은 기존의 매스 미디어가 충족시켜 줄 수 없는 나 혼자만의 세계 라고
하는 환상을 수용자에게 듬뿍 안겨 준다. 귀에 워크맨 의 리시버를 꽂으면 그
누구든 자신이 실제로 존재하는 물리적 상황을 초월해서 리시버를 통해
흘러나오는 음악의 세계로 완전히 빠져들 수 있다. 비디오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프로그램을 내보내는 TV와는 달리 비디오는 수용자에게
자신이 선택한 시간에 자신의 선택한 내용의 프로그램에 빠져들 수 있는 특권을
안겨 준다.
수용자에겐 음악 또는 프로그램의 내용도 중요하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공간과 시간의 한계를 초월해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모든 대중 매체의 발전 양상이 그러하다. TV는 어느덧 한 가구당 한 대에서 한
명당 한 대로 보급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그것도 집에서만 보는 것이
불만이어서 포터블 TV가 나오고 심지어 남들이 엿볼 수 없게 혼자서만 보라고
스키 안경에 TV를 부착시킨 고글 복스 라는 상품까지 등장했다.
전화도 예외는 아니다. 이제 우리 나라는 한 가구당 두 대의 전화를 놓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이제 곧 삐삐 를 박물관에 진열하게 만들지도 모를 이동
통신 의 시대가 활짝 만개할 날도 멀지 않았다. 개별화 에 이동성 까지 보장해
주는 그런 시대는 이미 부분적으론 현실이다. 요즘 들어 운전하면서 또는 길을
걸으면서 전화를 하는 사람을 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게 되었다. 심지어
목욕탕 안에서 발가벗은 채로 전화를 하는 사람까지 볼 수 있게 되었다.
현대 도시인에게 자아 매몰 의 성향이 있다는 건 분명하지만 그걸 발전시키고
확산시키는 건 다름 아닌 전자 통신 산업이다. 특히 가전업체의 입장에선 자아
매몰 이야말로 시장을 확대시킬 수 있는 구세주 와 같다. 5명이 살고 있는 한
가정에 TV를 1대만 팔 수 있었던 것에 비해 5대를 팔 수 있다면 그걸 마다할 리
없다. 그래서 자아 매몰 은 가전업체들의 마케팅 공세에 의해 더욱 심화되고
있다.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발달과 함께 대두된 자아 매몰 현상은 케이블 TV의
발전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무엇보다도 케이블 TV는 다른 미디어들과는
달리, 국가의 정책적 개입을 필요로 할 만큼 산업적 규모가 크기 때문에 그에
따른 자아 매몰 도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사회적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케이블 TV는 기존의 TV시스템을 근거로 하여 채널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킬 수
있다. 케이블 TV가 가장 발달된 미국의 시청자들은 이제 곧 5백 개의 채널을
갖게 되며 우리 나라에서도 수년 내로 수십 개의 채널이 선을 보이게 되어 있다.
그러한 채널의 폭증은 협송 또는 마이크로캐스팅 응 가는케 하여 전통적인
방송의 개념을 진부하게 만들 것이며 이는 일부 국가들에선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미국에서 5백 개의 채널을 가능하게 만드는 신기술은 이른바
디지털 컴프레션 이다. 그러나 이 기술도 수년 내로 진부한 것이 될는지 모른다.
전화선이나 케이블 선 속에 삽입한 광섬유 한 가닥은 적어도 이론적으론 수천
개의 채널을 각 가정에 보내는 일을 가능케 할 것이다.
그럴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니 채널이 수십 개만 되어도 작지 않은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우선 각 채널의 프로그램을 안내해 주는 신종 사업이
호황을 누릴 것이다. 시청자들은 더욱 자주 리모컨을 사용하게 될 것이고, 더욱
성급해질 것이다. 프로그램은 시청자들의 그런 성향을 염두해 두고 시청자들을
지루하게 만드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빠른 속도감과 더불어 무언가 볼
거리를 풍성하게 제공하는 데에 모든 노력을 경주할 것이다.
세상은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프로그램은 그 어떤 장르를 막론하고 단순
명료하여야 한다. 시청자들에게 생각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죄악과도 같다. 그저
피부에 와 닿는 느낌으로 어필해야지 시청자들의 두뇌를 사용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런 강박 관념에 시달리다 보면 뉴스 전문 채널마저도 그 어떤 오락 전문
채널 못지않은 오락성 을 추구하게 되지 않을까? 설사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진지하고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공중의 관심에서 더욱 멀어져 가게 될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시장을 세분화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어떤 채널은 과거 공중파
방송보다 더욱 진지하고 심각한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룰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채널은 결코 많은 시청자를 확보하지는 못할 것이다. 또, 어떤 방식으로든 그런
채널이 시장에서 살아 남는다 하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과거 공중파 방송의 경우엔 모든 채널들이 일정 시간에 뉴스를 내보냄으로써
시청자들의 선택에 다소의 제약을 부과하였다. 그러나 케이블 TV는 그런 제약을
해제시킴으로써 시청자들간의 정보 격차를 더욱 크게 만들 것이 분명하다. 보도,
교양 프로그램을 즐겨 보는 시청자는 케이블 TV덕분에 세상 돌아가는 일이나
상식에 더욱 밝아지겠지만, 그렇지 않은 시청자들은 그런 프로그램을 더욱
외면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케이블 TV가 가장 발달한 미국의 대중이 국제
문제에 대해서는 세계에서 가장 무식한 사람들에 속한다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케이블 TV의 소프트웨어 문제도 심각하다. 신기술 도입으로 채널을 늘리는 건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지만, 그 채널을 매울 프로그램 제작 능력을 키우는 건
오래 걸릴 뿐만 아니라 자국 시장 여건에 따라 아예 불가능 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일부 나라들에선 케이블 TV의 갑작스런 도입이 이른바 문화 제국주의 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기 마련이다.
1992년을 기준으로 하여 전가구 대비 케이블 TV 가입 가구수의 비율은 벨기에
92%, 네덜란드 80%, 캐나다 77%, 스위스 76%, 룩셈부르크 69%, 미국 62%, 덴마크
53%, 스웨덴 48%, 아일랜드 36%, 핀란드 35%, 노르웨이 31%, 독일 30%,
오스트리아 24%, 일본 15%, 이스라엘 6%, 프랑스 4%, 헝가리 4%, 영국 2%,
아이슬란드 1%, 스페인 1%등이다.
미국의 가입률은 세계에서 6번째이지만, 가입 가구수는 모두 5천 4백 50만으로
다른 모든 나라의 가입 가구를 합한 것보다 1천만 가구가 더 많다. 미국은
자국의 방대한 시장 규모에 힘입어 프로그램의 대외 경쟁력에서 가히 독보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다. 충분한 프로그램 제작 능력을 갖지 못한 우리 나라의 경우,
갑작스런 케이블 TV 채널의 폭증은 미국 프로그램의 대량 수입으로 이어질 것이
분명하다.
공보처가 지난 2월에 마련한 종합 유선 방송법 시행령 개정안은 외국 프로그램
편성 비율을 30%로 제한하되, 과학 기술, 교양, 스포츠 등 3개 분야는 전체 방송
프로그램의 50%까지 허용하기로 했다. 이 비율 자체도 대단히 높은 것이지만,
그것이라도 제대로 지켜 낼 수 있을지 걱정이다. 아마도 영화의 스크린
쿼터제처럼 매우 어려울 것이다. 또 미국의 통상 압력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어느 정도로든 케이블 TV가 미국 대중 문화 상품의 전송로로 기능하는 건 문화
제국주의 의 관점을 떠나서도, 대중의 사회로부터의 도피 를 더욱 심각하게
부추기라는 점에서 매우 우려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케이블 TV의 사회적 영향력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다고 해서 케이블 TV
무용론 을 주장하는 건 아니다. 대중의 여가 시간이 크게 늘고 있는 추세에
비추어, 자신의 취향에 맞는 프로그램을 집중적으로 보고 싶다는 욕구를
충족시켜 준다는 장점은 케이블 TV가 갖고 있는 그 어떤 사회적 역기능의 비용을
상쇄하고도 남는다는 주장을 반박할 필요는 없다. 마찬가지로 자아 매몰
현상도 꼭 부정적으로만 볼 건 아니다. 어찌 보면 케이블 TV는 개인과 사회가
어떤 관계를 맺으며 어떻게 기능해야 하는가에 관한 철학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케이블 TV는 고독한 개인에게 큰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 개인의 입장에선
분명히 그렇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사회 전체가 그런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이다. 케이블 TV의 수많은 채널이 시사하듯이 개인의 무료함과 고독을
치유하는 커뮤니케이션은 일방적일 망정, 넘쳐흐르고 있는 반면 공동체적 문제를
다루는 사회 커뮤니케이션은 빈혈 상태에 놓여 있고 앞으로도 더욱 그럴
전망이다.
거의 모든 매체가 시장에서 살아 남기 위해 개인적 관심사에 치중하고 정부와
공공 기관마저 싫은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정책 기조를 개인의 편의 보장에
두는 동안, 교통이나 환경의 경우처럼 개인의 편의를 다소 억제해야 할는지도
모르는 공동체적 문제는 각 개인의 관심을 끌지 못한 채로 위기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걸 부인하기 어렵다. 케이블 TV가 점유하게 될 대중의 시간
그것도 파편화된 관심사로 채워진 대중의 시간, 이라고 하는 기회 비용 은
민주주의의 근간이라 할 여론 과 국론 의 성격과 가치에 새로운 의문을 제기할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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