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孝道命理學會(효도명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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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칼럼 스크랩 대전 산내 집단학살
청죽 추천 0 조회 265 16.02.12 03:4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2010/05/21 13:43

대전 산내 집단학살에 대한 유해발굴 설명회에서 '재소자---예비검속자' 추정 유해가 무더기로 발굴되었다고 진실화해위원회는 밝혔다.

▲ 진실화해위원회가 대전 산내 3지점에서 발굴한 유해들.  ⓒ 진실화해위원회  대전산내

▲ 미국에서 발견된 1950년 대전 산내 학살 당시 사진.  ⓒ 이도영 박사  대전산내
 

한국전쟁당시 대전교도소 재소자 및 보도연맹원 등 수천여명이 집단 학살되어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어 오던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무더기로 유해가 발굴되어 집단 학살이 사실로 드러났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송기인, 이하 진실화해위원회)는 2일 오후 충남대 박물관에서 지난 6월 25일부터 9월 22일까지 진행한 대전 산내 골령골 유해발굴 결과에 대한 현장설명회를 가졌다.


이번 발굴을 맡았던 충남대 박물관팀은 제 5지점에서 5구의 유해를, 제 3지점에서 29구의 유해를 확인하는 등 총 34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뿐만 아니라 3지점에서는 수갑과 신발·단추·숟가락 등을 발굴하여 당시 재소자 또는 예비검속자가 매장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고, 5지점에서도 신발, 단추, 빗, 열쇠 등 일상용품이 나와 당시 주요 인사나 예비검속인이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3지점의 29구의 유해는 가로 1.7m와 세로 4m, 깊이 30㎝~1m 가량의 좁은 공간에 대부분의 유해가 거의 무릎을 꿇은 채 상채가 숙여진 자세를 취하고 있었고, 7행 4열의 구조로 매우 정형적으로 매장됐다.


5지점의 경우에는 5구의 유해가 각각 다른 방향으로 성인 한 명이 묻힐 정도의 작은 구덩이인 가로 3m, 세로 1m 안에 겹겹이 층위를 이루어 매장됐으며, 바른 자세의 유해 1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엎어진 상태로 매장됐다.


5지점의 탄알과 탄피는 매장지 아래지점에서 발견돼 매장지 옆에서 학살된 후 매장지에 인위적으로 매장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반면, 3지점은 유해들에서 다량의 탄알과 탄피가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학살 당시, 좁은 공간에 민간인들을 몰아넣고 앉은 자세에서 총살을 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5지점에서 발견된 명찰은 '총무부O'라는 직함과 '남용O'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어 유해의 신분을 추적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되며, 3지점 유품 중에는 '中'자가 박힌 단추가 나와 희생자 중에 학생이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3지점과 5지점의 각각 1구의 유해는 육안으로 식별이 가능할 만큼 타 유해들보다 뼈 발육상태가 작아 미성년자도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2일 오후 충남대학교에서 열린 대전 산내 골령골 유해매장지 발굴조사 보고회에서

박선주 조사단장이 유족들을 상대로 발굴 유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산내학살


진실화해위원회 이번 유해발굴로 산내 골령골이 증언으로만 여겨졌던 민간인 집단 학살 매장지라는 정황을 단편적으로 나마 확인하게 된 큰 의미가 있다고 밝히고, 1000명 이상 대규모로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1·2 매장지에 대한 유해발굴의 기대감을 한 층 더 고조시키고 있다고 밝혔다.


당초 진실화해위원회는 집단희생지 중 가장 많은 유해가 매장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1·2 지점을 발굴할 계획이었으나 교회 건축행위와 영농행위, 토지 소유주들의 비협조 등으로 발굴을 진행하지 못했다.


진실화해위원회 김동춘 상임위원은 "이번 유해발굴로 집단학살의 정황을 확인했지만 유해가 대량 매장된 곳으로 추정되는 곳을 발굴하지 못해 아쉽다"며 "발굴과 관련 있는 행정기관과 당사자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이날 현장설명회에는 진실화해위원회 김동춘 상임위원과 박선주 유해발굴조사단장, 산내희생자 유족, 시민단체 관계자 등 80여명이 참석했다.


한편, 대전 산내 골령골은 1950년 7월 초 부터 중순경까지 대전형무소 재소자 등과 대전 충남북 일원의 보도연맹원 등 최고 7000여명이 군경에 의해 집단학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증언에 따르면 암매장지로 추정되는 2지점의 경우 구덩이 길이만도 200여m(폭 4m, 깊이 2m)에 이르는 등 한국전쟁전후 남한 지역 내 단일지역 최대 학살지로 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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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내 3지점에서 발굴된 3-9 유해의 노출 모습.  ⓒ 진실화해위원회  대전산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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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발굴된 유해들.
이번 발굴에서는 수갑 1개, '中'자가 박힌 단추, 숟가락 등의 특이한 유품들이 발견됐다.  ⓒ 오마이뉴스 장재완  대전산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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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발굴된 유품들.
이번 발굴에서는 열쇠 꾸러미나 빗, 철제통 등이 발견되어
교도소 내 재소자가 아닌 일반인이 희생됐다는 주장을 뒷받침 했다.  
 http://www.coreawa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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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산내학살 사건내역

 
1) 1950년7월 대전형무소. 각 감방은 여순사건, 제주 4.3사건 관련자 등 정치범들로 포화상태였다. 일반수를 합쳐 정원 1천 2백명 시설에 3배가 많은 3 ~ 4천여명이 들어차 있었다. 사상범들은 약 2천여명으로 4.3항쟁 관련자, 여순사건 관련자, 남로당원, 전쟁반발 직후 예비검속된 보도연명(광복이후 좌익활동을 하다 전향한 사람들로 구성된 단체)원 등이었다.


    "50년 7월 5~6일경 헌병대 s중위가 와서는 계엄군에 맡긴 예치수(군에서 관할해 형무소가 신병만 위탁관리한 재소자. 주로 여순사건과 4.3항쟁 관련자를 지칭-편집자 주)들과 정치범들을 다 내놓으라고 했다. 그들은 툭하면 '말을 안 들으면 쏴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당시 형무소 특별경비대 부대장이었던 이준연(77)씨의 증언이다.


     다음 날인 6일과 7일. 살기 띤 군 헌병대가 형무소를 에워싼 가운데 교도관들은 명직계(인명부)를 보고 정신없이 재소자들의 성향 분류작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분류는 석방(일반수)과 총살(사상범)로 나눠 졌다.


     이순일(92 -당시 대전형무소장 직무대리)씨는 지난 8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수석간수로서 몇 차례 법원장과 검사장을 찾아갔으나 제수자 처리지침과 분류 기준을 하달 받지 못했다. 분류작업은 백소령이 신분장을 석방가부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7월8일 아침, 형무소 직원들이 정치범들을 한 명 한 명 불러냈다. 가석방, 가출옥시킨다며 불러내서는 곧바로 헌병대의 손에 넘겼다.


     당시 도 경찰국 사찰주임으로 대전형무소학살사건의 총살집행잭임자 중 한사람이었던 변홍명(가명)씨가 지난 92년 '말' 자와의 인터뷰에서의 증언.


     "그들은 형무소에서 나오기만 하면 벌서 넋이 빠져 있었어요. 눈을 가린 채 전깃줄로 굴비엮듯 몇 사람씩 묶어 트럭에다 2중, 3중으로 실었습니다....나중엔 시간이 없어 트럭 적재함에 쭈그러뜨리고 앉히면 위에 또 얹고 차곡차곡 싣고 왔습니다. 꼭 콩나물 시루같이 죄수들을 싣고 총살 집행장으로 끌고 온거지요."


     이들은 대전형무소가 텅 빌 때까지 꼬박 3일간 정치범들을 실어냈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당시 대덕군 산내면 낭월리 골령골.


     "(골령골에)도착해서 내리라고 하면 앞이 안보이니까 못 내렸어요. 개머리판으로 때리고 발로 차면서 끌어내리면 돼지 새끼 구르듯 굴러 떨어졌죠" 병홍명씨의 증언은 이어진다. 변씨에 따르면 총살 집행장에는 경비헌병이 능선을 둘러 서 있었고 미군과 사회유지들도 포진해 있었다.


     대전형무소 정치범 학살은 8일 아침부터 10일 저녘까지 3일간 계속됐다. 당시 대전 형무소 특경대부대장 이준영씨는 "아침부터 저녘까지 실어 갔는데 2 ~ 3일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같은 증언은 50년 당시 대전형무소를 지켰던 직원들로 구성된 7.1동지회원(10여명)들의 한결같은 애기여서 현재까지 신빙성이 가장 높다.


2) 피해 현항


  형무소 관계자들이 하나같이 사상범 처형을 3일간 했다고 증언한 반면 현장 총살집행책임자였던 홍씨는 지난92년 말지와의 인터뷰에서"(총살)집행은 10여일 간에 걸쳐 진행됐다"고 밝혔다.


  다른 목격자의 애기도 들어보자. 임선기(77 - 산내 낭월동)씨. 토박이인 임씨는 "아침때부터 해거름까지 총소리가 쾅쾅 났는데 약 일주일간 계속됐다. 막판 이틀 동안은 한 밤중에도 총소리가 들렸다"고 당시를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송민용(66 - 동구 구도동)씨도 "당시 일주일 넘게 도라꾸(트럭)에 사람을 싣고 골링이(골랑골)로 들어갔다"고 말했다. 이규희(62 - 당시 국민학교 5학년 - 대전거주)씨는 "적어도 열흘쯤 재소자를 옮기는 도라꾸 행렬이 계속됐다" 주장한다.


  이처럼 형무소 직원들과 현장 목격자들의 주장이 다른 것은 왜 일까. 병홍명씨는 지난 92년 말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대전형무소학살사건이 끝난 뒤 3일 동안 대전보도연맹원과 좌익불순분자라는 죄목(?)으로 연행해온 5백여명을 같은 방법으로 계속 처형했다"


  즉 형무소 사상범외에도 군-경이 후퇴를 시작한 7월 14 ~ 16일 막판까지 보도연맹원 등에 대한 골령골에서의 처형이 계속돼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희생자 수도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현재 증언자들은 희생자 수에 대해 600여명에서 3000여명까지 다양한 주장들이 나와 있다. 미국립문서보관소의 기록에는 1천800여명으로 돼 있다. 물론 희생자 수에 따리 학살된 기간(일수) 도 달라진다.


600여명이라는 주장은 당시 정치범을 헌병대에서 내어준 대전형무소 특경대부대장 이준영씨 등 근무 교도관들의 증언으로 "당시 정치범을 수용하던 감방 수의 규모로 그 숫자를 산출"한 것이다.  (처형 일수 3일, 7월 8 - 10일)


1천 800여명은 해체된 미 비밀문서의 기록에 따른 것으로 여기에는  "대전에서의 1천 800여명의 정치범 처형은.." 으로 명시돼 있다. (처형 일수 3일 7월 첫째주)


3천여명이라는 주장은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과 무덤규모 등에 따른 것인데(처형일수 10일)객관성과 신빙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상태다.


학살기간은 증언자에 따리 50년 7월 2일부터 군.경이 후퇴하기 시작한 7월중순경까지 다양하게 제기되고 있는데 각기 증언들을 종합해보면 학살이 7월2일부터 중순경까지 계속 이어졌던 것으로 보여진다.


최근당시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증언자 안아무개씨(78,경기도 거주)는 7월 2일동료들이 희생된 것 같다고 했고 대전 대덕구 갈현리 주민은 당시 마을 희생자들이 7월 5일 처형됐다고 밝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확인결과 희생자 유가족들이 지내고 있는 제사일도 7월1일, 7월 5일 등 다양한 일자가 나왔다.


희생자가 3천여명에 이른다는 결정적인 증언은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던 정치범외에 타지역에 서 출소됐다. 풀려난 정치범들이 또 다시 붙잡혀 함께 처형됐다는 것와 정치범 외에 보도연맹원, ?익불순분자 등 민간인 학살에 관한 것이다. 이밖에 그동안 알려진 1.2학살지 외에 3학살지(산사태로 유실됐다함)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져 이 같은 증언에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이에 대한 보다 명확한 사실 확인 작업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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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가지 쟁점


<대전형무소 산내학살 사건, 50년전인 1950년 7월,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정치범 수천여명이 군인과 경찰에 의해 산내에서 학살된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대전충남 지역 시민사회 단체가 머리를 맞대고 있다. 그동안 '대전형무소 산내 학살 진상규명회'가 벌여온 조사내용을 토? 진실에 다다르기까지 밝혀야 할 남은 과제를 정리해 보았다.>


쟁점1. 누가 학살 명령을 내렸나?


     미국립문서보관소에서 비밀문서(2급)로 분류돼오다 99년 12월 16일 비밀해제된 문서에는 '처형명령은 의심할 바 없이 최상부(최고위층)로 부터 내려진 것..'이라고 적고있다.


     이외 현재까지 확보된 증언은 당시 군 헌병대의 요구와 이우익 법무부장관의 동의에 의해 이뤄졌다는 점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 포항앞바다 함상에서 2백여명의 재소자를 학살,수장한 유사사건이 당시 국방장관과 내무부장관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는 증언이 확보돼 있다.


     다른 한편 김종필 자미련 명예총재는 지난 3월 이도영 박사와의 애기도중 " 이 사건의 내막은 당시 김창룡 특무대장이 알고 있을 것" 이라고 밝혀 당시 육군 정보국에서 군 복무를 했던 제이피의 이사건에 대한 인지정도와 범위에 여전히 관심의 쏠려 있기도 하다.


     이 밖에도 당시 충남도지사 관사에서 신성모 국방장관, 백성욱 내무장관 등이 참여한 가운데 열린 국무회의에서 '대전형무소 적색수감자 2천여명,에 대한 처리방안이 논의 됐음을 추정케 하는 기록(민족의 증언, 1983중앙일보사 간)이 남아있다.


     따라서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무총리겸겸 국방부장관 등이 학살 명령을 내렸을 것이라는 정항이 제기되고 있으나 대통령인지 국무회의인지를 밝혀낼 공신 무서나 증언이 확보되지 않고 있다.


     이에대한 국방부 등 정부측의 보유문서와 미국측 보유문서에 대한 철저한 확인 조사 작업이 요구된다.


쟁점 2. 미국은 사주했나 ? 방조 묵인했나?


    총살 집행장에 '미군'이 있었다는 증언은 여러 곳에서 나온다. 당시 총살을 집행한 경찰이 "총살 집행장에 미군이 포진해 있었다"고 했고 '미군 장교등이 짚차 두 대에 나눠 타고 현장에 나타나 처형장면을 참관했다.'는 당시 [런던 데일키 워커]지 보도기사도 확인했다.


    사진자료에는 미군장교가 지켜보고 있는 장면도 잡혔다. 실질적인 작전권을 행사한 미군이 정치범들이 트럭에서 내리는 모습에서 학살된 뒤까지 사진을 찍은 것이다.


또 하나 학살이 이루어지기 직전인 7월1일, 이미 미국 24사단이 대전에 도착해 있었다.


     그런데도 한국군의 처형을 저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방조묵인 범위를 벗기 어려우며 당연 그 이상의 묵구의 역활에 대해서도 많은 의구심이 알고 있다.


쟁점 3. 학살기간 사흘인가, 열흘인가?


     이 문제는 쟁점이 되는 희생자 수를 규명해 내는 열쇠이기도 하다.


현재 증언자들은 3일에서 10일까지로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고 있고 각 증언자에 따라 희생자의 수도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대전형무소 특경대부대장 이준영씨(77)씨등 당시 교도관들은 50년 7월 8-10일 오전까지 사흘(정확히 이틀 반나절)이라고 증언했고 해제된 미 비밀문서의 기록은 "3일동안 진행됐으며 7월 첫째주에 일어났다"고 돼있다.


     미국 한국전쟁 사학자인 브루스커밍수 교수는 [런던 레일리 워커]지 기사를 인용, 50년 7월 2월 - 6일이라고 적고 있다.(한국전쟁의 기원, 프린스턴대학 출판부,1990년)


     학살기간이 열흘이라는 증언은 우선 총살 집행 책임자(당시 도경찰국 사찰주임)인 병홍명(가명)씨에 의한 것으로 '처음 3일동안은 나무에 묶어놓고 죄수들을 처형했고, 그 이후에는 죄수들을 앉히거나 눕혀놓고 처형했으며, 죄수처형이 끝난 그 뒤 3일동안은 보도연맹원과 불순분자로 끌려온 5백여명을 계속 처형했다.'고 밝혔다.


     변씨의 주장은 당시 총살집행 책임자인데다 생생한 현장 증언이어서 신빙성이 가장 높아 보인다.


     산내에서의 "적어도 열흘 쯤 죄수를 싣고 들어가는 도라꾸(트럭)행렬이 계속됐다."는 다수 마을 주민들의 증언에 의해 변씨의 증언은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여기에 최근 희생자 유가족들의 증언을 통해 7월 3일 - 7월 15일까지 희생됐음이 뒷받침되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희생자 수와 직결돼 있는 문제인 만큼 보다 철저한 규명이 필요하다.


쟁점4. 몇 명이 죽었나?


     현재 증언자들은 희생자 수에 대해 600여명에서 3000여명까지 다양한 주장들이 나와 있다. 미국립문서보관소의 기록에는 1천 800여명으로 돼 있다. 물론 희생자 수에 따라 학살된 기간(일수)도 달라진다.


     600여명이라는 주장은 당시 정치범을 헌병대에게 내어준 대전형무소 특경대부대장 이준영씨등 근무 교도관들의 증언으로 "당시 정치범을 수용하던 감방 수의 규모로 그 숫자를 산출"한 것이다.(처형일수 3일 , 7월 8 - 10일)


     1천 800여명은 해제된 미 비밀문서의 기록에 따른 것으로 여기에는 "대전에서의 1천 800여명의 정치범 처형은.."으로 명시돼 있다.(처형 일수 3일 7월 첫째주)


     3천여명이라는 주장은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과 무덤규모, 유가족 증언 등에 따른 것인데 (처형일수 10일 )객관성과 신빙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상태다.


     학살기간은 증언자에 따라 50년 7월 2일부터 군.경이 후퇴하기 시작한 7월 중순경까지 폭넓게 제기되고 있는데 각지 증언들을 종합해보면 학살이 7월 2,3일부터 중순경까지 계속이어졌던 것으로 보여진다.


     최근 당시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증언자 안아무개씨(78.경기도 거주)는 7월 2,3일 동료들이 희생된 것 같다고 했고 대전 대덕구 갈현리 주민은 당시 마을 희생자들이 7월 5일처형됐다고 밝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확인결과 희생자 유가족들이 지내고 있는 제사일도 7월 3일 , 7월 5-6일, 7월 15일 등 다양한 일자가 나왔다.


     희생자가 3천여명에 이른다는 증언은 이밖에도 대전 형무소에 수감됐던 정치범외에 타지역에서 출소 됐다 풀려난 정치범이 또다서 붙잡혀 함께 처형됐다는 것과 청주 형무소 등에서의 정치범 집단 이송, 정치범외에 보도연맹원 , 죄익불순분자 등 민간인 학살에 관한 것이다. 이 밖에 그동안 알려진 1.2학살지외에 3학살지(산사태로 유실됐다함)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져 이같은 증언에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이에 대한 보다 명확한 사실 확인 작업이 요구 된다.

 

쟁점 5. 민간인 학살 있었나, 없었나?


     민간인에 대한 학살은 없었나 ?  이에대해 증언자들은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당시 총살집행책임자는 "대전형무소 학살이 끝난 뒤 보도연맹과 좌익불순분자라는죄목으로 연행해 온 5백여명을 처형했다"고 밝혔고 "상당 수의 10대 소년들도 처형했다"고 덧붙이고 있다.


     이 밖에도 유가족들의 증언에는 농사짓던 아버지가 형님이 전쟁이 터지자 경찰에 끌려간 후 처형됐다는 사례가 많다.


     이처럼 산내에서 좌익 정치범 사형사건외에도 민간인에 대한 대학살이 함께 있었다는 증언은'학살의 성격'을 달리하는 중요한 문제다. 구체적이고 풍부한 증언과 사료조사가 필요하다고 긴요하다.


쟁점 6. 사건의 열쇠, 심중위를 찾아라


     당시 학살 현장 책임은 군인들이 쥐고 있었고 그 책임자가 심중위였다. 따라서 정치점을 인계받고 현장 학살을 진두지휘한 심중위의 증언은 이 사건의 의혹을 푸는 '열쇠'라 할만하다.


     그가 생존해 있다면 현재 나이는 약 75-80세 남짓으로 추정된다.


     현재까지 심중위와 그 소속부대원을 찾는 작업은 순조롭지 않다.

 

쟁점 7. 당시 '수형인 명부 ' 있나 없나?


     수형인 명부를 찾아내는 것은 희생된 사람이 누구누구인지를 밝혀내는 자료가 된다.


     일단  제주 4.3 사건과 관련자 300여명의 수형인 명부가 정부기록보존소에서 발견돼 군법회의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당시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다 처형된 것으로 추전되고 있다.


여순사건 관련자 26명도 당시 대전 형무소에 수감돼 있었다는 증언이 확보됐다.


     50년 10월경 대전형무소 수형인 명부와 당시 교도관 인사카드 등도 정부기록보존소가 보존 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그런데도 유독 학살사건 당시의 '수형인 명부'만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정부와 관계기관은 "찾을 수 없다"  "자료가없다 " 는 등 매우 미온적인 답변 뿐이다.

 

쟁점 8. 정부, 왜 뒷짐지고 있나?


     잇달아 드러나는 한국전쟁 당시의 참혹한 실상들에 대해 정부의 태도는 매우 불성실하다.


     충격적인 명백한 살인행위에 대해, 억울한 죽음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또 하나의 죄악"이다. 당시 비극적 상황에 대해 있는 그대로 밝혀내는 일이 상처를 아물게 하고 '통일로 가는 수순'임을 정부가 정말 모르고 있기 때문일까.


<참고자료 / 사건일지>


* 6.27 /  이승만 대통령 및 정부 대전으로 피난
*  7.1 /  이대통령 부산 피난. 대전형무소 수감자 탈옥시도 임시 국무회의(충남지사공관) 미국 2사단 대전도착
* 7. 2-10 / 대전형무소 수감 좌익인사 및 군 예치수 처형된 것으로 추정.
* 7.8 /  전국 비상꼐엄령 선포 (대전에서)
* 7.22-14 / 보도연맹자 등 좌익계 인사 골령골서 계속 처형(인원 모름)된 것으로 추정.
* 7.13 / 작전지휘권 미국으로 이양
* 7.14 / 대전형무소 패쇄, 형무소 특경대원 철수
* 7.20 / 북한군 대전 장악
* 9.28 전후 / 유엔군 서울 수복, 대전형무소 우익 1천 3백여명 집단 처형.

 

     ((부루스 커밍스 교수는 골령골 사상범 집단 학살일자를 50년 7월 2-3일 학살장소를 준비하고 7월 4-6일(3일간) 집단 학살했다고 주장했고 대전형무소 당시 근무 교관들은 동년 7월 6-7일 처형장소를 준비하고 7월 8-10일(3일간) 집단 처형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당시 현장 총살 집행자중 한 사람은 7월초부터 10일동안 처형했다고 증언했는데 정황상 기장 신빙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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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입수한 미 비밀문건
'대전형무소 정치범 처형' 자료 입수 당시를 되새기며
  이도영(dylee0128) 기자     

1999년 5월경 나는 제주도 출신 고광림 박사의 자제분 중 한 사람인 고홍주(미국명 헤럴드 고, 예일 법대 교수)씨가 클린턴 행정부에서 국무성(Dept. of State) 인권차관보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이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제주도에서 한국전쟁 전후에 발생한 두 건의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을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하고 이 사건들을 진상규명하는데 미국정부 문서를 열람하고 싶다, 도와달라는 부탁을 간절하게 했다.


나는 당시 탐라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제주4·3사건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을 위한 투쟁과 한국정부 비밀문서 수집을 해 오고 있었다. 탐라대학에서는 이미 재임용에서 탈락한 상태였다.


나는 보따리를 싸고 모슬포의 동생집에 맡겨놓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10월 초순이었다. 집에 돌아온 지 며칠 되지 않아 미 정부문서보관소의 한 학예관에게 전화를 받았다.


'미스터 고'에게 편지를 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답하였다. 거기에 오면 보관된 문서들을 찾는 방법을 도와줄 수 있다고도 했다.


나는 아내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자영업을 하고 있던 아내가 같이 가서 찾아보자고 따라 나섰다. 10월 13일이었다. 한 학예관이 우리 부부를 3일 동안 도와주었다. 3일째 되는 날, 미군 정보문서 목록에서 주요한 키워드들(political prisoner, execution)이 담긴 비밀문건 5건을 발견했다.

 

 


즉각 열람을 요청했으나 아직 비밀이 해제되지 않아 보여 줄 수 없다고 했다. 비밀문서 공개 요청법(Freedom of Information Act)에 의해서 청구서를 내면 상당 시일이 걸리겠지만 아마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그중 3건이 비밀 해제되어 내 손에 도착한 날짜가 바로 5년 전 오늘 12월 23일이었다. '대전형무소 정치범 1800명 처형(1950년 7월 초)', '서울에서 공산 게릴라 39명 처형(1950년 4월 20일)', '대구근교 부역자 처형(1951년 1월)'.


나는 <제민일보> 김종민 기자와 제주4·3연구소에 이메일로 급히 알렸다. 대전형무소 '정치범' 처형 문건에는 사진 18매가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제민일보> 1999년 12월 24일자 특보로 나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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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문건 목록을 처음 발견했을 때의 나의 심정은 '바로 이거다!' 50년 묵은 산삼을 초심자 심마니가 깊은 산중에서 발견하는 그런 기분이었다. 우편으로 배달된 누런 서류봉투를 개봉하고 그 문건을 들여다보았을 때 내 심장은 터질 것만 같았다.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분노가 솟구쳤다.


나는 아내와 함께 로스엔젤레스에 3일 동안 여행을 떠났다. 미주한국일보 한우성 기자를 만났다. 내가 발굴한 문건들을 들여다보는 순간 그의 눈도 둥그래졌다. 발굴 경위를 소상히 인터뷰하고 나서 1주일 가량만 시간적 여유를 달라고 했다.


한 주가 지나갈 무렵 전화가 왔다. 이 문건을 기초로 해서 기사가 완성되어 서울 본사로도 보냈으며 KBS에도 나간다고 했다. 최종적으로 나의 'O.K'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나는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하라고 했다. 나는 모든 자료들을 들고 서울에 나가서 기자회견을 하고 밝히고 싶었다.


2000년 1월 6일 <한국일보>와 KBS를 통해서 전국에 알려졌다. 나는 1월 19일 서울 외신기자클럽에서 기자회견을 하면서 사건의 전모를 공개했다. 국방부에서도 나의 직접 연락을 받고 영관급 3인이 나와서 경청했다.


만 5년이 지나가는 오늘 날, 대전형무소 '정치범'들이 총살되어 암매장 된 곳은 그냥 그대로 남아 있다. 별다른 진척이 없다. 다만, 그 후 해마다 제주4·3 유족회 몇 분들이 가서 위령제를 현장에서 지내는 정도이다.


현장 훼손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가속화되었다. 그 학살터 위에다 교회를 지었다는 서글픈 뉴스도 접했다. 건축과정에서 유골들이 튀어나왔는데도 몰래 방기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내가 직접 수차례 찾아가서 접한 현장은 너무나도 비참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었다. 그 학살터 위에 채소를 가꿔서 먹는 '잔인'함인지 몰지각함도 목격했다. 뼈 조각들이 농기구에 걸려 튀어나오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더욱 가슴 아프게 만드는 '소문'은 '인골 가루나 기름이 불치병에 좋다'는 미신으로 도굴 유실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런 미신으로 인한 유해유실은 전주형무소 '정치범' 학살터(황방산 기슭, 전주공동묘지 입구 왼편)에서도 동일하게 진행되었다. 그 학살터 위에 '기독교 안식관'을 세운 것마저 대전 낭월동의 복사판이었다. 분노가 또 다시 솟구쳤다.


사람은 죽어서나 살아서나 '존엄성'은 매한가지가 아닐까? 하루속히 유골들이 수습되고 안장되는 그날을 바라본다. 관련 유족분들께는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한국전쟁전후 민간인피학살자 전국유족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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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의 여자분이 정해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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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의도에서 농성중인 이계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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