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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도 10기테마여행(철원DMZ안보견학)사진등은
행사모임 전체사진메뉴에 모두 올렸읍니다
2013년9월27일 홍보이사 김 철 수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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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여행(안보관광) 일정안내
◆테마:철원일원 안보관광(6사단인근)
◆일시:2013년9월27일(금) 오전8시
2호선 종합운동장역2번 집결
◆회비:1인:2만원 부부:3만원
◆선물:1인:2만원상당의 파프리카(민통선에서재배한무공해자연산)1BOX
(부부인경우:2BOX)
◆부대방문:6사단(6사단장:ROTC21기)예하 사단수색대대에서
점심식사(부대식사) 및 장비,내무반 등 견학
(안내:사단수색대대 인사장교 ROTC50기 후배가 안내)
◆일정:
♥아래일정이외에 철원특산물(쌀등),고추냉이(와사비),파프리카,
효소등 견학은 별도임
♥철원군에서 파견된 철원군문화관광해설사 2명 배치됨
김미숙해설사:010-3617-4959
김명숙해설사:010-6383-3775
08:00~11:00 ●2호선 종합운동장역 2번출구 출발 및 도착
●버스안에서 조식(김밥,떡,음료,등)
11:00~12:30 ●철의 삼각지 전적관 도착(개인별안보승인절차및수속)
●고석정(孤石亭):임꺽정활약
●직탕폭포-송대소경유
12:30~13:00 ●6사단예하 사단수색대대에서 점심식사 및 견학
(점심은 부대결정 및 식사시간 조정에따라 일정변경가능)
13:00~14:00 ●제2땅굴
14:00~15:00 ●평화전망대
●박대통령제안"철원DMZ PEACE PART(세계평화공원)"
●백마고지 승리관
15:00~15:30 ●두루미관, 월정리역
16:30~17:00 ●도피안사
17:30~18:30 ●저녁식사(철원민통선재배자연산농산나물정식:고추냉이
일명와사비잎등+철원산기름뺀민통선수육등)
18:30~21:00 ●철원출발-서울도착
[집결장소안내:2호선종합운동장역 2번출구 아침08시]
■고석정(孤石亭)
아픔의 전설
조선 중기 연산군 이후의 사회혼란은 국가 기강의 해이함을 틈타 중앙과 지방을 가리지 않고 가중되었다. 사회조직의 가장 아래 부분을 형성하는 농민세력의 피해는 크고 광범위하였고 피해 받는 농민들의 불만은 농기구를 무기로 고쳐드는 저항세력으로 발전하였다. 민중봉기의 정점을 이루었던 임꺽정의 황해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약 4년간의 무력시위는 서울의 중앙정부를 위협할 정도로 강력하였다. 관군 세력의 공격과 지도부의 분열로 임꺽정의 저항은 실패로 끝났지만 전국 각지에 그의 탁월한 힘과 지략을 전설로 삼는 이야기가 알려져 있다.
한탄강의 푸른 물줄기가 주변의 기암괴석과 어울리며 철원지역 최고의 경관을 만드는 고석정과 그 주변은 놀라운 힘의 장사로 알려진 임꺽정의 활동을 주제로 하는 전설로 가득하다. 고석정의 신비로운 모습이 예사롭지 않은 이야기와 어울린다. 고생대의 현무암 분출로 이루어진 용암지대는 지층의 단절을 보여주는 추가령구조대를 가장 정확하게 살펴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약 20m 높이의 고석정과 강을 따라 이어지는 직탕폭포와 순담계곡의 아름다움을 살피는 레프팅 코스도 인기가 높다. 이곳은 한국전쟁 당시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기 위한 치열할 전투로 수많은 사상자를 만든 철의 삼각지대의 정점이기도 하다. 계곡을 붉게 물들인 아픈 역사는 푸른 자연에 묻혀 더욱 선명하게 기억된다.
고석정을 찾아가는 길목에 위치하는 아치형 다리는 한국전쟁으로 남과 북이 한쪽씩 건설하여 연결한 특이한 모습이다. 이름 또한 이승만의 ‘승’자와 김일성의 ‘일’자를 따서 지었다가 훗날 한국전쟁 당시 전사한 박승일 연대장의 이름을 기념하여 한자만 다른 승일교로 변경하였다.
제2땅굴
2013년 7월 4일 제2땅굴을 들어가 봤다. 1973년 11월 20일 야간 경계근무를 하던 초병 두명이 지하로부터 폭음을 듣게 된다. 최초에는 아무도 믿지 않았으나 그들은 강원도 탄광촌 출신으로 지하 폭발음을 들으며 자랐기 때문에 확신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후 청음활동을 강화하던 중 땅굴이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당시 농업진흥공사가 지하수 개발을 위해 도입했던 시추장비를 투입하여 총 45개의 시추공을 뚫어 이 중 7개가 적의 남침용 땅굴에 정확히 관통되었고, 1975년 3월 1일부터 3월 24일까지 25일간에 걸쳐 현대건설을 통한 시추작업에 의해 땅굴을 확인하였다고 한다.
북한에서 군사분계선까지 2,400미터, 군사분계선에서 우리쪽으로 1,100미터, 총 3.5km를 파내려온 땅굴이다. 최초에 우리 측에서 접근 땅굴을 통해 남침 땅굴로 투입된 군인 대여섯명이 북한군들이 설치한 무기에 의해 사망하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전설처럼 내려오는 일화가 있었다. 당시 우리 군은 땅굴을 발견하고 중립군 감시단에 알렸고 중립국 감시단의 입회를 요청하였다고 한다. 중립국 감시단은 중립국 여기자 서너명과 함께 이곳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광산촌에서는 여성이 갱도에 들어가면 사고가 난다는 속설이 있어서 여기자들이 들어가는 것을 공사 담당자들은 반대하였으나, 기자들을 못들어가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시내에 나가 제물을 사다가 푸닥거리를 한 후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때 적이 설치한 무기들로 인해 우리측에 사상자가 많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땅굴을 들어갈때는 군에서 준비한 헬멧을 쓰고 들어간다. 북한측 땅굴은 높이가 낮아 머리가 부딪히기 일수다. 일행들의 헬멧이 화강암에 무딪히는 소리가 자주 들린다. 머리조심!
북한은 이 땅굴을 남한이 판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으나, 북한이 판 증거들이 기술되어 있었다. 첫째는 다이너마이트 장전공 구멍들의 방향이 모두 남쪽이라는 점, 둘째는 배수로에 흐르는 물의 방향이 북쪽이라는 증거, 셋째는 우리는 대형 굴착기에 의한 터널공법인데 반하여 북한은 폭발공법을 쓰다 보니 화강암들이 화약연기에 그을려 검은색이라는 점 등이다. 내가 보기엔 자기네가 안팠다고 주장하는 자체가 바로 북한이 판 증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월남전에서 베트콩들이 미군과 싸워 이길 때 사용했던 땅굴작전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김일성은 땅굴을 판것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철원평화전망대
2007년 8월 준공된 철원평화전망대에 왔습니다.
모노레일을 타고 코너를 돌면 평화전망대가 나옵니다.
2층 전망대에서는 휴전선 비무장지대를 비롯 평강고원, 북한 선전마을을 전망할 수 있습니다.
북녁 땅을 향해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이렇게 전시되어 있는 사진을 찍어보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궁예도성의 모형입니다.
동송저수지의 모습
이 저수지에는 물고기들이 아주 많답니다.
아주아주 오래전 옛날에
이곳에서 군생활을 하던 병사가 너무 힘들어서 자살을 하기로 맘먹고
동송저수지로 들어갔다가 물고기들에 의해 쫓겨났다는 말이 ...
그때 물고기 들이 이렇게 말했답니다.
" 우리가 먹고 잘 자리도 좁아서 부족한데 당신까지 들어오면 우리 물고기들이 어떻게 살라꼬~ "
" 빨리 나가소! 마~ "
노동당사
분단된 남·북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건물에서 남과 북으로 분단된 현실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철원지역은 해방 후 북한의 관할 하에 놓이게 되는데 그때 지어진 노동당 철원군 당사 건물이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파괴되고 지금은 건물 외벽만이 보존되고 있다. 외벽의 포탄흔적은 한국전쟁 때의 상처이다.
골조에 나 있는 창의 형태를 보면 이 건물은 원래 3층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안으로 들어가면 1층만 방이 남아 있고, 2·3층은 무너져 버려 그 형태를 알 수 없다. 1층의 방은 밖에서 볼 때와 달리 크기가 작은데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었는지 궁금하다. 해방 후 외국에서 활동하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귀국을 하면서 좌·우의 노선 경쟁이 치열해지고, 남쪽에는 미국이, 북쪽에는 소련이 진주하게 되니, 그 갈등은 하나로 모아지지 못하고 전쟁이라는 비극을 낳는다. 철원 노동당사가 사용된 기간은 해방 후에서 한국전쟁까지의 시기라 하겠다.
1개 리당 쌀 200가마씩을 거두어들여 이 건물을 만들었다는 이야기, 건물의 보안유지를 위하여 공산당원 이외에는 건축에 참가하지 못했다는 이야기, 공산주의에 반대하던 사람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고문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곳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계기가 있었다. 바로 90년대 대중문화의 아이콘이었던 서태지와 아이들 때문인데 그들의 노래인 ‘발해를 꿈꾸며’의 뮤직비디오를 촬영한 곳이 바로 여기이다.
백마고지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북서쪽으로 약 12㎞ 지점에 있는 해발 395m의 고지로서 군사적 관례에 따라 395고지라고도 한다. 6·25전쟁 때 국군과 중공군이 이 고지를 차지하기 위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심한 포격으로 산등성이가 허옇게 벗겨져서 하늘에서 내려보면 마치 백마(白馬)가 쓰러져 누운 듯한 형상을 하였으므로 '백마고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1951년 7월 정전회담이 시작되어 정전협정이 체결되는 시점의 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삼기로 정한 뒤 한국·유엔군과 북한·중공군 양측은 조금이라도 유리한 지역을 차지하기 위하여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백마고지는 중부전선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철의 삼각지대(철원·김화·평강)'의 하나인 철원평야와 서울을 연결하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당시 김종오(金鐘五) 소장이 지휘하는 국군 제9사단이 방어하고 있었다.
1952년 10월 6일 중공군은 백마고지 일대에 2000여 발의 포탄을 투하하며 공격을 개시하였다. 중공군은 제38군 예하의 제112·113·114사단의 약 4만 5000명의 병사를 동원하였으며, 아군은 제9사단 예하의 제28·29·30연대를 비롯하여 경장비 제51연대, 53전차중대, 제1포병단 등의 국군과 제5공군, 제73전차대대, 제49·제213·955 포병대대 등의 미군이 맞서 싸웠다.
10월 6일에서 10월 15일까지 열흘간 24차례나 주인이 바뀔 정도로 혈전을 치른 끝에 제9사단이 중공군을 격퇴하고 승리하였다. 이 전투에서 아군은 21만 9954발의 포탄을, 중공군은 5만 5000발의 포탄을 발사한 것으로 기록된다. 중공군은 1만여 명이 사상자 또는 포로가 되었고 제38군은 막대한 타격을 입고 후방으로 물러났다. 제9사단도 34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이 전투의 승리로 백마부대로 불리게 되었다.
이 전투의 대승으로 휴전을 앞두고 군사적 요지를 확보하게 되었으며, 유엔군은 정전회담에서 계속 유리한 입장을 지킬 수 있었다. 이 전투를 기념하여 백마고지 정상에 기념관과 전적비, 호국영령 충혼비가 건립되어 있으며, 해마다 10월 16일을 전승(戰勝) 기념일로 삼아 민·관·군 합동 위령제를 거행하고 있다.
도피안사(到彼岸寺)
땅속에서 발견된 천 년 철불
이름만으로도 분위기가 느껴지는 절이다. 우거진 주변 숲이 병풍처럼 둘러진 차분한 분위기로 신라 말 도선국사가 1,500여 명의 향도들과 함께 철불을 조성하고 안치하기 위하여 만든 절이다. 철원은 한국전쟁 때 격전지로 도피안사도 그때 소실되었다. 이후 철불이 발견되고 절이 새로 지어지게 된 사연이 재미있다. 제15사단장인 이명재 장군의 꿈에 불상이 나타나 땅속에 묻혀 있어 답답하다 하였다고 한다. 다음날 전방시찰을 나갔다 꿈에 나왔던 사람을 보고는 안내를 받아 찾아간 곳이 도피안사로 장병들을 시켜 이곳을 수색하게 하니 땅속에 묻혀 있던 철불을 발견한 것이다.
본전인 대적광전 안에 모셔져 있는 철불은 손가락을 감싸 쥐고 있는 지권인을 하고 있으니 비로자나불이다. 장흥 보림사 철불과 함께 9세기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불상으로 불상 뒤쪽에 100여 자의 조성기가 새겨져 있어 만들어진 사연과 시기를 알 수 있는데 1,500여 명의 향도가 함께 조성했다는 기록과 함께 만들어진 연대를 신라 경문왕 5년인 865년으로 알리고 있다. 신라 말 선종이 일어나고 지방호족세력과 결합하면서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귀한 금석문이다.
가끔 철불이 어디 있냐고 궁금해하는 관람객들이 있는데 철불에 개금을 하였으며 그 때문에 철이 가지는 고유한 질감이 감추어져서 아쉬운 마음이다. 대적광전 앞에 삼층석탑이 있는데 기단의 형태가 독특하니 눈 여겨 보자. 보통의 탑들이 사각의 기단을 2층으로 놓고 위에 탑신을 올리는 데 비하여 이 석탑은 불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처럼 연꽃무늬를 새긴 8각의 이중기단이 탑을 받치고 있다.
월정리역(月井里驛)
경원선 월정리역이다.
만약 기차라도 다닌다면 국내 최북단 기차역이 될것이다.
월정리역은 비무장지대에 위치해있으며 6.25 사변때 역사전체가 소실되었다가 휴전이후 분단상징으로 다시 복원되었다.
월정리역 역사안의 모습이다.
아무것도 없다.
상징적으로 만든 역이라고는 하지만 오히려 너무 설렁해서 아쉬움이 든다.
그래..
오히려 여기서는 서울이 더 멀다.
역사 여행을 하기에는 여기만큼 좋은곳도 없을것이다.
월정리역 정거장의 모습이다.
달우물의 전설이 있다는 월정리역..
폴사인은 임의로 새로 만들었다.
예전에는 낡은 나무로 만든 폴사인이었던걸로 기억하고 있는데..
더이상 철길도 사람도 앞으로 나갈수가 없다.
저 장벽을 넘으면 북한지역인 강원도 평강군이다.
사진상 담을수 없었지만 맑게 개인 가을하늘아래 북한지역의 능선과 평야 지역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강원도 평강읍 까지는 여기서 불과 19킬로미터 거리에 있었다.
철원역 방향으로 바라본 모습이다.
현재 철원역도 정거장과 몇가지 흔적들이 남아있다고 하는데 기회가 된다면 철원역도 찾아가볼 결심이다.
민간인이 가장 최북단 지역에 접근할수있는곳이 아마도 여기 월정리역이라고 본다.
증기기관차가 한창 달리던 시절 월정리역은 어느정도 이용객이 있었는지 궁금해지는데..
6.25 당시 신의주로 가던 열차가 북한군의 폭격을 맞고 주저앉아버린채 녹슨 기관차의 잔해이다.
한때 논란이 많았다.
어찌하여 경원선에서 신의주행 열차가 다닐수 있느냐고...
여러 증언들에서 이 열차의 목적지가 신의주행을 뒷받침 해주었으니 더이상의 논란은 필요없을듯 하다.
신의주행 열차의 최종 목적지는 경원선 간이역 월정리가 끝이었다.
엿가락처럼 휘어진 통표걸이에 앉아 쉬고있는 고추잠자리..
통일이 된다면 여기 월정리역은 그저 한가한 시골 간이역 정도의 구실밖에 못할것이다.
아니 차라리 그렇게 되어야 할것이다.
분단의 상징이 아닌 평화로운 한적한 시골간이역으로서 하루 통근 무궁화호 열차 몇번 머물다 떠나는게 전부인 간이역..
그날이 온다면 원산행 통근 무궁화호 열차가 30초 머물게 되겠지..
첫댓글 아기기도하였답니다.
내가 통신대장으로 근무하며 순찰돌던 철책.
그때의 모습은 많이 변했지만 땀방울의 흔적은 그대로.
7년전 같이근무하던 동기생 (동국대 - 김일권)과 나를도와주던 통신병들, 모시고있던 대대장님 (육사 14기 박동원장군님)을모시고 철원일대와 문혜리를거쳐 민통선 안쪽과
당시 함께 근무하던 선임하사들을 만나서 1박하며 오랜세월의 추억을 더듬어보던 곳이랍니다.
당시는 노동당사에가 순찰과 근무중 휴식공간이되어 안에들어가 잠시 오수를
다시한번 마님모시고 추억이 깃든곳을 방문하고싶네요.
대한민국 rotc 10기 동기/가족여러분께 국가안보의식을 고취할수 있는 절호절명의 기회이며 대한의 장교가 되었었음을 자랑스럽고 영광스럽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