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1차대전때 재림교단이, 안식일을 지키려는 신실한 성도 4000명출교한 사건 >
(아래 AI답변 내용입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은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영국, 프랑스, 러시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등)가 맞붙은 전면전이었습니다.
독일 교단 지도부(동독합회 및 중앙유럽지회)가 먼저 정부의 압박에 굴복해
"안식일에도 총을 들고 참전하겠다"는 지침을 내리자,
이 지침의 영향력은 독일 국경을 넘어 유럽 전역의 안식일교회로
도미노처럼 퍼졌습니다.
각국의 안식일교회 지도부 역시 자국 정부의 처벌과 교단 폐쇄를 두려워하여,
독일과 마찬가지로 전쟁 참여 및 안식일 군무를 지시했습니다.
이에 저항하며 "하나님의 계명(살인하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이 우선"이라며
양심적 병역 거부를 선언한 유럽 전역의 안식일 성도들이 자신의 교회로부터
차례로 출교 처분을 받았습니다.
2. ' 당시 재림교단의 결정에 항의하다가 유럽 각국에서
출교당한 안식일 성도의 수는 당시 유럽 전체 안식일교회 교인의 약 2%에 해당하는
약 4,000명이었습니다.
이 4,000명의 성도들은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등
유럽 전역에 흩어져 있었습니다.전쟁 중에는 국가 간 이동과 소통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각 나라의 양심적 거부자들은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각자 고립되어 자국 교회로부터 출교당하고 정부의 핍박(투옥, 총살 등)을
견뎌야 했습니다.
3. 전쟁 후 '4,000명'의 결집과 교단 창립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유럽 각국에서 살아남은 이 4,000여 명의 출교 성도들은 마침내 국경을 넘어
서로 연락이 닿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기성 안식일교회(재림교단) 본부(대총회)에 "당시 유럽 지도부의 배도 행위와
우리를 부당하게 출교한 것을 공식적으로 회개하고 바로잡아 달라"고
수차례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1920년과 1922년에 열린 총회에서 기성 재림교단과의 화해 시도가
최종적으로 불발되자, 이 4,000여 명의 성도를 대표하는 대표자들이 모여
1925년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개혁운동 총회를 조직하고
독자적인 교단으로 완전히 분리하게 되었습니다.
요약하자면
1914년 유럽(독일)에서 일어난 출교 사건은 단순한 교단 내 다툼이 아니었습니다.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여 생존할 것인가,
아니면 목숨을 잃더라도 계명을 지킬 것인가"라는 거대한 신앙적 시험대였습니다.
이 시험 속에서 기성 재림교회는 나치 시절까지 타협의 길을 걸으며 교단을 유지했고,
소수 개혁운동 무리들은 타협을 거부하고 순교의 길을 택하면서 오늘날까지
매우 엄격하고 보수적인 신앙 형태를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
1. 출교당한 성도의 수 약 2,000명 (독일에서만):
제1차 세계 대전 기간(1914~1918년) 동안 독일 교단 안에서 무기 휴대와
안식일 군무를 거부하고 정통 평화주의 입장을 고수한 독일에서 2,000명 이상의
양심적 병역 거부 성도들이 자국 재림교회로부터 출교 조치를 받았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교단에서 쫓겨난 후 정부의 보호를 받지 못해 감옥에 갇히거나
총살형을 당하는 등 극심한 핍박을 겪었습니다.
2. 독일 안식일교회 지도부가 정부에 보낸 각서 (원문 요약 및 번역)
“1914년 8월 4일, 동독합회장 H. F. 슈베르트(H. F. Schuberth) 목사는
독일 전쟁부(War Ministry in Berlin)에 공식 서한을 보내
교단 차원의 전폭적인 전쟁 협조와 안식일 무기 휴대 근무를 약속했습니다.
[독일 전쟁부에 제출한 각서 내용 번역]“
”우리는 지극히 높은 자의 정부에 복종하라는 성경의 가르침(로마서 13장)에 따라,
조국을 방어하기 위해 소집된 안식일교회 성도들이 전투원으로서
무기를 들고 싸울 것이며, 다른 군인들이 일요일에 복무하는 것처럼
안식일(토요일)에도 군 복무를 수행할 것임을 서면으로 엄숙히 밝힙니다." [1]
*********************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비극적 분열 이후,
독일 안식일교회는 제2차 세계 대전(나치 정권 시절)에 이르러
더 거대한 비극과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시기를 거치며 본부에서 갈라져 나온 개혁운동 교단과의
교리적, 실천적 차이도 더욱 뚜렷해졌습니다.
1. 나치 정권 시절(제2차 세계 대전)의 안식일교회 역사의 과오.
나치 당(NSDAP)이 권력을 잡은 1933년 이후,
독일 기성 안식일교회(재림교회)는 교단의 생존을 위해 나치 정권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이는 후대 안식일교회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가장 뼈아픈 오점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치 정부의 교단 금지령과 해제: 1933년 11월, 나치 정부는 안식일교회가
유대인과 유사한 안식일(토요일)을 지키고, 종말론을 전파한다는 이유로
교단 활동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이에 놀란 교단 지도부는 즉시 나치 고위층을 찾아가 자신들이 반(反)정부 단체가
아님을 피력했고, 불과 2주 만에 금지령을 해제시켰습니다.
히틀러 찬양과 나치화:
재림교단 지도부는 생존을 위해 나치 정권의 정책을 적극 수용했습니다.
교회 출판물에 아돌프 히틀러를 "하나님이 보내신 지도자"로 찬양하는 글을 실었고,
교회 안에서 나치식 경례("하일 히틀러")를 허용했습니다.
심지어 유대인 혈통의 안식일교인들을 보호하기보다 교회 직분에서 해임하거나
멀리하는 누를 범하기도 했습니다.
무기 휴대 군 복무의 재연: 1차 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2차 대전 당시에도
독일 안식일교회 청년들은 집총(무기 휴대)을 거부하지 않고
나치 군대에 입대하여 전투원으로 싸웠습니다.
기성 안식일교회(재림교회)가 나치에 협조하며 생존한 반면,
1차 대전 때 분리되어 나온 개혁운동 교단 성도들은 정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전면적인 지하 종교화: 이들은 "국가보다 하나님의 법이 우선"이라는 확고한 신념으로
나치의 국방 의무, 나치 경례, 선거 참여를 전면 거부했습니다.
이로 인해 1936년 나치 정권에 의해 교단이 완전히 해체 및 금지되었고
재산은 몰수되었습니다.
순교와 강제수용소 수감:
소수 개혁운동 성도들은 나치의 총칼 앞에서도
집총을 거부하다가 수많은 청년과 지도자들이 총살형을 당하거나
아우슈비츠 등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순교했습니다.
(이들의 순교 기록은 현재 나치 피해자 역사 박물관 등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구글 ai 답변끝>
http://cafe.daum.net/DRSTUDY
SDA 남은무리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