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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이승윤 | 금화(金華)에서 경론을 강의하던 회지(懷志) 스님이란 분이 계셨다. 열네 살 어린나이에 출가하여 오랜 세월 경론(經論)을 연구했던 스님은 학식이 뛰어나고 성품 또한 소탈했기에 동오(東吳)의 많은 학자들이 그를 존경하고 흠모하였다. 어느 날, 멀리서 찾아온 객승들을 맞아 차를 대접하는 자리에서였다. 객승들과의 허심탄회한 대화 끝에 회지 스님은 자신이 품은 평생의 뜻을 넌지시 밝혔다.
“요즘 불교집안의 행태를 보면 천태(天台)니 화엄(華嚴)이니 유식(唯識)이니 하며 제각기 종파를 세우고는 분분한 논쟁이 그치질 않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오직 한 맛일 뿐인데, 그림자 같은 자취를 두고 쓸데없이 이러쿵저러쿵 입씨름을 해서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세 종파의 의리를 회통하고 절충하여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볼까 합니다.”
그때 객석의 맨 끝자리에 앉았던 젊은 납자가 물었다.
“화엄종의 조사는 누굽니까?”
“두순(杜順)화상이지요.”
“저도 두순화상의 법신송(法身頌)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회주의 소가 볏짚을 먹었는데 익주의 말이 배탈이 났네 그래서 천하 명의를 찾아갔더니 돼지 왼쪽 허벅지에다 뜸질을 하더라.
이 게송의 뜻이 천태종·유식종 두 종파의 어떤 의리와 일치합니까?”
회지 스님의 얼굴이 한순간에 굳어버렸다. 입을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하자 젊은 납자가 공손히 말하였다.
“찾아오는 사람을 마다하지 않는 훌륭한 선지식이 제방에 수두룩합니다. 왜 그런 어른들을 찾아뵙지 않으십니까?”
회지는 그날로 강석을 파하고 선사들의 어록을 열람하기 시작하였다. 자유분방한 표현과 기이한 행동들이 많은 이들의 의구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하였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었다. 그런 그의 자신감은 임제 스님의 어록을 읽다가 단박에 꺾여 버렸다. '임제록'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임제 스님께서 어떤 스님에 물었다. ‘한 번의 고함이 금강왕의 보검과 같을 때가 있고, 한 번의 고함이 땅에 웅크린 금빛 사자와 같을 때가 있고, 한 번의 고함이 물고기를 탐색하는 장대나 물고기를 유인하는 풀과 같을 때가 있고, 한 번의 고함이 고함노릇을 못할 때가 있다. 너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질문을 받은 스님이 생각에 잠기자 임제 스님이 곧바로 고함을 쳤다.”
‘고함이 고함노릇을 못한다는 게 뭘까?’
밥이나 먹고 산을 유람하란 한 마디에 깨친 회지 스님
교화인연 수승하지 못하단 스승 말에 산중 수행 일관
회지 스님은 곧장 행장을 꾸리고 동산(洞山)으로 향했다. 해거름에 절에 도착한 그는 여독을 풀 겨를도 없이 곧장 방장실로 올라갔다. 당시 그곳에서는 황룡 혜남(黃龍慧南)선사의 법을 이은 진정 극문(淨克文)선사가 교화를 펼치고 있었다. 회지 스님은 극문선사에게 절을 올리고 공손히 여쭈었다.
“옛 어른께서 ‘고함이 고함노릇을 못할 때가 있다’고 하셨는데, 그게 무슨 뜻입니다.”
그러자 극문 스님이 냅다 성질을 냈다.
“네 이놈!”
쌍심지를 추켜세운 호랑이 같은 기세에 놀란 회지는 방문을 박차고 냅다 도망쳤다. 그러자 극문 스님이 배꼽을 잡고 웃다가 그를 불러 세웠다.
“어이, 놈팽이.”
꽁무니를 빼던 회지가 고개를 돌리자 극문 스님이 말했다.
“밥이나 먹고 나서 산을 유람하게나.”
이 한 마디에 회지는 비로소 임제 스님의 뜻을 깨달았다. 오랫동안 극문 스님의 법회에 머물다가 어느 날 이별을 고하는 자리였다. 마지막 인사를 드리자 극문 스님이 조용히 말씀하셨다.
“자네는 언행이 훌륭하긴 하지만 아쉽게도 교화의 인연이 수승하질 못해.”
극문 스님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는 알았다. 이후 상수(湘水) 유역을 편력하자 회지 스님의 빼어난 품격은 절로 대중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가는 곳마다 관청과 산중에서 주지직을 천거하며 세상에 나와 교화를 펼쳐달라고 청하였다. 하지만 스승의 당부를 가슴에 새긴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죄송합니다. 저는 복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대중을 떠난 회지 스님은 석두산(石頭山) 운계(雲溪)에 초막을 짓고 20여년을 살았다. 그를 흠모한 사대부와 납자들이 간간히 그 외진 곳까지 찾아왔지만 반기기는커녕 간단히 인사만하고 돌아보지도 않았다. 어느 날, 이를 이상하게 여긴 시자가 그 까닭을 묻자 회지 스님이 싱긋이 웃으며 답하였다.
“그들은 아는 것도 많고 말도 잘 하는 사람들이야. 헌데 나야 밥만 축내는 중이 아니냐. 그래서 그들을 만나면 저절로 입이 딱 붙어버려.”
언젠가 암자를 지나다 들른 노장이 물었다.
“산에서 사는 맛이 어떻소?”
그러자 게송 한 수로 답하였다.
산에서 사노라니 홀로 사립문 닫고 별다른 재미가 없어 장작 세 개 품(品)자처럼 걸치고 불을 지피면 붓을 들지 않아도 화려한 문장이 절로 펼쳐지지요.
세월이 흘러 차고 습한 산바람을 이기기엔 뼈마디가 너무 허술하다는 걸 안 스님은 친구처럼 지내온 시자와 함께 고향 강남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용안사(龍安寺)에 머물던 6월의 어느 날이었다. 주먹을 베개 삼고 드러누워 시자에게 물었다.
“예야, 아침이냐 저녁이냐?”
“벌써 밤입니다.”
그러자 스님이 웃으며 말했다.
“꿈속에서 너와 만났는데 나는 이제 잠을 깰 때가 되었구나.”
스승의 말뜻을 알아차린 시자가 울먹였다.
“저는 어쩌고요, 스님.”
“그저 절집을 떠나지만 말거라. 그게 부처님 은혜를 갚는 길이야.”
회지 스님은 그렇게 종지를 확연히 밝히고도 교화의 인연이 박함을 염려하신 스승의 당부를 가슴에 새겨 평생 법좌에 오르는 일 없이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성재헌 tjdwogjs@hanmail.net |
첫댓글 교화의 인연이 박함도 있는가봅니다. _()_나무아미타불......
회지스님 이야기 보면서 저도 조심스럽습니다~~ 나무아미타불....
@햇살 햇살스님 저희들이 더욱 열심히 정진해야겠네요. _()_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