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안드레아
![]() |
||
▲ 1999년 가톨릭생활성가밴드 ‘마제스티’ 앨범 표지사진. (드럼:전진찬, 키보드:박상욱, 베이스:아 미, 기타:이동욱, 보컬:임두빈) |
1999년 ‘한국가톨릭생활성가’ 음반시장에 ‘Deep Purple’ ‘Rolling Stones’ ‘Led Zeppelin’의 사운드를 들려주는 밴드가 등장한다. HardRock가톨릭CCM밴드인 ‘마제스티’가 그들이다. 1999년 서강대학교 박고영 신부님의 도움으로, 이전,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하드락, 헤비메탈 CCM밴드였다. 지금은 솔로로 활동하고 있는 임두빈 안드레아. 그에게 가톨릭생활성가를 하는 이유와 가톨릭음악저작권에 대해 들어본다.
다리절단 위기, 어머니의 헌신적 기도 덕분에 음악 시작해
“1994년 추락사로 다리 절단 위기가 왔어요. 2년간의 외로운 병원 생활과 8번의 수술, 그리고 재활을 겪게 된 시련을 통하여 여리고 나약하며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나에게 신앙이 찾아왔죠. 성가를 하게 된 계기는 1995년 아픔 몸을 이끌고 해외 순례를 떠났을 때에요.
이탈리아 로레또에서 열린 세계 젊은이의 날이었는데 ‘교황님과 만남’ 전야축제 공연을 본 감동으로 생활성가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나의 삶의 길잡이신 어머니를 통하여 신앙의 깊이를 알게 되었고, 고통과 고난에서도 어머니의 헌신적인 기도 덕분에 이겨내게 됐죠. 가장 본받고 싶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는 1995년 이탈리아 로레또에서 열린 WYD(world youth day, 세계청년대회)에 참석 후 자신의 길을 정한다. 음악 하는 이들이 너무 멋있고 자랑스러웠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기타와 노래를 배우고, 뜻이 맞는 이들을 만나 기쁨의 음악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삶이 늘 내 뜻대로 움직이질 않듯, 가톨릭 안에서 음악생활을 하면서도 많은 상처와 시련을 겪었다.
[하지만 생쥐야, 앞날을 예측해 바야 소용없는 건
너만이 아니란다.
생쥐와 인간이 아무리 계획을 잘 짜도
일이 제멋대로 어그러져,
고대했던 기쁨은 고사하고,
슬픔과 고통만 맛보는 일이 허다하잖니!]
-로버트 번스, ‘생쥐에게 To a Mause’중에서. / 존 스타인벡 <생쥐와 인간> 앞머리 글
![]() |
||
임두빈 안드레아. |
‘길’ 그리고 ‘온세상에 주님 사랑 전하리라’
“1999년 한국 가톨릭에서 하드락CCM이라는 말을 가장 먼저 표방한 가톨릭 최초의 락밴드라고 저는 자부해요. 그 당시 드럼에 전진찬, 키보드 박상욱, 베이스 아미, 기타 이동욱 그리고 저와 함께 음악을 시작했죠. 그 당시엔 상당히 파격적이었죠.
마제스티 앨범을 통하여 첫 번째 꿈에 도전을 했어요. 하지만 화려했던 기대와는 달리 처참한 현실에 팀이 해체되고, 외롭게 솔로의 길로 접어 들었어요. 주님께서 음악적인 시련만 주시는 게 아니더라고요. 2000년도에 행복한 성가정을 꾸미려 했으나, 내 의지와 관계없이 성가정의 꿈은 무너지고, 순식간에 거리에 덩그러니 남겨지게 되었어요. 2개월도 안된 핏덩이의 철없는 아버지가 되어, 깊은 절망과도 친구가 되었지요.
그 이후에 집안에 갑작스러운 재앙이 연이어 일어나고, 2001년 매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누나의 삶 또한 내 삶이 되었지요. 또 한번의 시련과 변변하지 못한 자식들 때문에 퇴직 후에도 계속 일을 하셨던 아버지가 추락사고로 하반식 마비가 되시고, 깊은 한숨과 보이지 않는 절망의 어둠에 자살을 하고싶은 충동을 여러 번 겪어야 했죠.
그러다가 2002년, 지금의 한국가톨릭문화원 원장이신 박유진 바오로 신부님 도움으로 포기했던 생활성가 가수의 꿈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고, 지금의 임두빈 안드레아라는 이름으로 주님을 찬양하고 있어요. 너무 험난하고 쓰러질 것 같은 삶이였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그 절망의 늪에서 어렵게 탄생한 성가가 있는데요, 2004년 제5회 PBC 창작생활 성가제 대상곡 ‘길’이란 곡이에요.
대상 이후부터 생활 성가 작곡자로서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기 시작하게 되고, 그 이후 선교세상을 거쳐, 아름드리 선교단, 현재는 한국 가톨릭 문화원 성가사업부 팀장으로 한국 가톨릭 저작권에 힘쓰며, 생활 성가 가수로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평탄하지 못한 삶 속에서 늘 주님께서 함께 계셨고, 넘어져도 나를 일으켜 주신 그분의 사랑을 온 세상에 전하겠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을 표현한 곡들을 많이 만들게 되었어요.
‘온 세상에 주님 사랑 전하리라’는 성가는 대상곡인 ‘길’이라는 성가와 함께 제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곡이며, 저를 아는 많은 생활 성가 가수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곡이기도 합니다. ‘길’이라는 곡은 마르코 복음 16장 15절의 말씀을 바탕으로 쓴 찬미가이기도 해요. 예수님께서는 많은 이들에게 이르셨죠.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고…”
가톨릭교회애서도 저작권 여전히 논란 중
![]() |
||
이야기를 잠시 벗어나 보자.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서 객원기자로 활동하는 분과 저녁식사를 했다. 그분이 내게 말한다.
“상훈씨. 내가 찍은 사진과 동영상에 음악을 넣어서 인터넷에 올리고 싶은데, 그런 것도 저작권에 위배 되나?”
“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음악에 대해 저작권보호라는 이름으로, 소비자가 통제 받고 있죠. 아마 형이 알고 있는 음악 모두를 자유롭게 쓸 수 없을 겁니다. 저작권을 갖고 있는 부류는 크게 두 부류인데요, 작곡, 작사, 편곡을 담당하는 직접적인 저작자가 있구요, 그 저작자를 간접적으로 돕거나 후원을 한 실재연주자, 음반제작자 그리고 그것을 홍보하고 송출하는 방송사업자 등이 있어요. 그들과 직접적으로 만나서 하나하나 협상을 하거나, 그들 저작자와 저작인접권자들이 저작권을 직접, 간접적으로 위탁한 사업체가 있는데요, 한국에서는 한국음악저작권협회(KOMCA콤카)에서 저작권을 담당 보호하고 있어요. 그곳에 합당한 지불을 하고 허락을 맡으면 쓸 수 있어요.”
지난 2011년 7월 1일 자로 한-EU FTA자유무역협정에서, ‘저작권법시행령 일부 개정령’이 시행되었다. 2007년 한미 자유무역협정에서 저작권법은 미국저작물을 중심으로 저작권시장을 내주었다. 그후 4년, 한-유럽연합 및 그 회원국간에도 한-미FTA 때와 비슷한 저작권법이 만들어졌다. 대중적 문화예술시장이 역사적으로 길지 않은 한국은 상대적인 면에서 굴욕적인 계약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작자의 생존기간과 사후 70년 동안 보호를 받고, 저작인접권자인 실연자(연주자), 음반제작자, 방송사업자들도 발행 후 50년 동안 보호를 받는다. 가톨릭교회와 개신교에서도 저작권에 관한 몇 년간의 다양한 일들이 일어났다. 가톨릭에서는 前가톨릭대학음악교수인 최병철 교수가 가톨릭성가에 대한 저작권 싸움에서 승소한 일이 있고, 개신교 성가대에서는 모든 합창곡들이 출판사 혹은 저작권관련 사업체로부터 승인 후 사용이 가능하다. 하지만, 가톨릭교회 안에서는 아직도 저작물에 대한 인식과 위험을 모르는 것이 지배적이다. 가톨릭 음악 저작권과 관련하여 임두빈 안드레아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저작권법은 ‘창작의 샘’이다
“솔직이, 음악을 만든 사람이 성당 지휘자나 관계자들에게 ‘내 곡을 연주했으니 합당한 대우를 해주세요’라고 말하면, 사실상 전 매장 당해요. 아직도 성당 안에서는 음악 또는 악보를 사용하는 이들이 작품을 만들어 낸 사람에게 ‘봉사’라는 개념만을 요구해요. 그것이 지배적이다 보니, 저작권에 관해 요구를 할 수 없어요. 요즘 생활성가, 복음성가라는 이름으로 많은 악보집들이 나오는 데, 하물며 음반까지도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면 저작자에게 허락받지 않은 곡이 너무 많아요.
만약 개신교 또는 저작자들이 가톨릭에 소송을 걸면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갈 겁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일은 그것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싶은 거죠. 그래서 가톨릭음악저작권법과 관련하여 여러 신부님들과 뛰고 있어요. 하지만, 힘들어요. 지치기도 하고…”
![]() |
||
▲사랑합니다. (영상:장석조 안셀모, 음악:임두빈)
개와 인간의 이야기. 누구도 본적 없고 귀로 들은 적 없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사랑을
…임마누엘 예수님…사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