將士郞 寧越嚴公之墓
公諱光舜字允孝, 姓嚴氏寧越人。天寶年間, 始祖諱林義, 以戶部員外郞, 始入東國, 因居寧越, 歷十二世, 而有諱興道, 寔公之考也, 公以忠毅公之長男, 生於世宗丙辰。世祖丁丑之變, 衆皆怵禍, 莫不縮首歛手, 其父獨能仗義效忠, 奮不顧身衣衾, 棺槨親自殮襲, 族黨懼禍, 爭欲止之, 乃曰: “爲善被禍, 吾所甘心”, 乃夜竊負梓宮, 奉藏弓劍, 於北五里, 鉢山之原, 卽今之莊陵也。公年甫弱冠有餘, 亦能奮發自勵, 不顧生死, 感父之忠, 成父之志, 趨走服事, 奉承惟勤, 使玉體賴以得寧盖, 其心卽忠毅公之心也, 其節卽忠毅公之節也。父子一體, 精神氣脈, 流注貫通, 眞可謂有是父有是子也。繼而遭憂, 葬于八溪, 懼禍將及避身于嶺南, 居義興鳥林山下, 以終其身, 世無知者。配平昌李氏斗三女, 墓在義興郡身南面, 依樓院堤內, 申坐原合窆。公墓久無碣, 其後孫柱河·日燮·在佑·在學·在植, 將立石而表, 阡千里而來, 屬余一言爲之識, 余感公忠義, 且悲夫事行之湮沒而無補, 不以不文略述片鱗, 以徵其實云爾。
孔子誕降, 二五一三年, 壬寅肇夏
竹溪 安寅植 識
夏山 成純永 書
將士郞 寧越嚴公之墓
公諱光舜字允孝, 姓嚴氏寧越人。天寶年間, 始祖諱林義, 以戶部員外郞, 始入東國, 因居寧越, 歷十二世, 而有諱興道, 寔公之考也, 公以忠毅公之長男, 生於世宗丙辰。
장사랑(품계 이름) 영월 엄공의 묘.
장사랑(將士郞) 영월 엄공의 묘소이다. 공의 이름은 광순(光舜)이고 자는 윤효(允孝)이며, 성은 엄씨(嚴氏)로 영월 사람이다.
당나라 천보 연간에 호부원외랑을 지낸 시조 엄임의(嚴林義)께서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영월에 살기 시작하셨다.
이후 12대를 거쳐 이름이 흥도(興道)인 분이 계셨으니, 이분이 바로 공의 아버지이다.
공은 충의공(엄흥도)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세종 병진년(1436년)에 태어났다.
世祖丁丑之變, 衆皆怵禍, 莫不縮首歛手, 其父獨能仗義效忠, 奮不顧身衣衾, 棺槨親自殮襲, 族黨懼禍, 爭欲止之, 乃曰: “爲善被禍, 吾所甘心”, 乃夜竊負梓宮, 奉藏弓劍, 於北五里, 鉢山之原, 卽今之莊陵也。
세조 정축년(1457년)의 변란(단종 승하) 때, 모든 사람이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며 목을 움츠리고 손을 거둔 채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그러나 공의 아버지(엄흥도)만은 홀로 의리를 지키고 충성을 다하여, 제 한 몸 돌보지 않고 떨쳐 일어나 수의와 관을 직접 갖추어 친히 염습을 마쳤다. 일가친척들이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다투어 그를 말리려 하자, 엄흥도는 "좋은 일을 하다가 화를 입는다면 나는 그것을 달게 받겠다"라고 말했다.
마침내 밤에 몰래 임금의 관(재궁)을 등에 지고 가 왕의 물건을 받들어 모신 뒤, 북쪽으로 5리 떨어진 발산(鉢山)의 언덕에 안장하였으니 이곳이 바로 지금의 장릉(莊陵)이다.
公年甫弱冠有餘, 亦能奮發自勵, 不顧生死, 感父之忠, 成父之志, 趨走服事, 奉承惟勤, 使玉體賴以得寧盖, 其心卽忠毅公之心也, 其節卽忠毅公之節也。
공(엄광순)의 나이 바야흐로 갓 스물을 조금 넘었을 뿐이었으나, 또한 능히 스스로 분발하고 격려하며 삶과 죽음을 돌보지 않았다.
아버지의 충심에 감동하여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자 분주히 뛰어다니며 도왔고, 받들어 모시는 일에 오직 부지런히 힘썼다.
그리하여 임금의 옥체(단종의 시신)가 이들 부자의 손을 의지해 무사히 편안하게 안장될 수 있었으니, 대개 공의 마음은 곧 충의공(엄흥도)의 마음이었고, 공의 절개는 곧 충의공의 절개였다.
父子一體, 精神氣脈, 流注貫通, 眞可謂有是父有是子也。
아버지와 아들이 한 몸이 되었고, 그 정신과 기맥이 서로 흐르고 통하여 하나로 굳게 꿰뚫었으니, 참으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 일컬을 만하다.
繼而遭憂, 葬于八溪, 懼禍將及避身于嶺南, 居義興鳥林山下, 以終其身, 世無知者。
이어 (아버지의) 상사(喪事)를 당하여 팔계(八溪, 영월 팔괴리)에 장사 지냈다.
그러나 단종의 시신을 거둔 거사로 인해 장차 가문에 큰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영남 땅으로 몸을 피하였고, 의흥(義興) 조림산(鳥林山) 아래에 숨어 살며 평생을 마쳤으니, 세상에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配平昌李氏斗三女, 墓在義興郡身南面, 依樓院堤內, 申坐原合窆。
부인(配)은 평창 이씨(平昌 李氏)로 이두삼(李斗三)의 딸이다.
묘소는 의흥군(義興郡) 신남면(身南面)에 있으니, 의루원(依樓院) 방죽 안쪽 언덕의 신좌(申坐, 남서쪽을 등진 방향) 향에 두 분을 합장(合窆)하였다.
公墓久無碣, 其後孫柱河·日燮·在佑·在學·在植, 將立石而表, 阡千里而來, 屬余一言爲之識, 余感公忠義, 且悲夫事行之湮沒而無補, 不以不文略述片鱗, 以徵其實云爾。
공의 묘소에 오랫동안 비석이 없었는데, 그 후손인 주하(柱河)·일섭(日燮)·재우(在佑)·재학(在學)·재식(在植)이 장차 돌을 세워 묘소임을 표시하고자 하였다.
이에 후손들이 천 리 길을 멀리 마다치 않고 찾아와 나에게 한 말씀 지어 기록으로 삼아줄 것을 부탁하였다.
나는 공의 고결한 충의에 깊이 감동하였고, 또한 그 위대한 행적이 세상에 묻혀 전해지지 못했던 것을 슬프게 여겼다.
그리하여 내 글재주가 부족함을 핑계 삼아 사양하지 않고 그 행적의 편린이나마 대략 기술하여, 공이 행하신 역사적 사실을 후세에 증명하고자 할 뿐이다.
孔子誕降, 二五一三年, 壬寅肇夏
竹溪 安寅植 識
夏山 成純永 書
공자 탄강(誕降) 2513년인 임인년(1962년) 초여름(음력 4월)에,죽계(竹溪) 안인식(安寅植)이 글을 짓고,하산(夏山) 성순영(成純永)이 글씨를 쓰다.
원문출처
영월문화원 주관 주최, 제59회 단종문화제 영월학 학술심포지엄.
일시 : 2026년 4월 25일(토) 13시 00분
장소 : 영월군 여성회관 대강당
군위군 의흥 소재 호장 엄흥도 묘소는 진묘일 수가 없다.
-진묘 주장 5가지 근거에 대한 허구성 고찰-
박종석(영월 향토 사학자)
장사랑 영월엄공지묘(將士郞 寧越嚴公之墓) 각주 16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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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공엄선생신도비(忠毅公嚴先生神道碑)
有三子長好賢次光舜次聖賢
공에게 셋 아들이 있으니 맏은 호현이요, 다음은 광순이요, 다음은 성현이다.
신도비 개요 및 위치
위치: 경상북도 문경시 산양면 위만리(옛 우마이 마을) 입구 (구 의산초등학교 앞)
건립 경위: 비문 자체는 1874년 승지 엄주완이 작성하였으나 당시 건립되지 못했습니다.
이후 1962년(임인년) 족보를 대대적으로 수정할 때 문경군과 지역 주민, 유림이 뜻을 모아 현재의 자리에 정식으로 비석을 세웠습니다.
문경에 세워진 이유: 단종의 비밀 장례를 치른 후 세조의 보복을 피해 전국으로 흩어진 후손들 중, 장남 엄광순의 후손들이 문경 산양면에 정착하여 500년 넘게 영월 엄씨 집성촌을 이루어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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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광순 묘비명의 글을 짓고, 글씨를 쓴 인물사
죽계 안인식( 竹溪 安寅植)
1891년(고종 28) 11월 14일∼1969년 3월 16일. 일제 강점기 유학자‧교육자. 자는 송작(宋鵲)이고, 호는 미산(嵋山)이다.
본적은 충청남도 당진군(唐津郡) 순성면(順城面)이다.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1911년 면천공립보통학교에서 부훈도(副訓導)를 지냈다.
1919년 충청남도 도시학(道視學)을 지냈으며, 공주고등보통학교와 대구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직을 역임하였다.
1930년 명륜학원 강사로 활동하였고, 조선총독부 직속기관인 경학원에서 사성으로 임명되었다.
1936년 조선인 징병제 요망운동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39년 조선총독부가 유림(儒林)을 통제하고 지배하기 위해 조직한 조선유도연합회 상임이사를 지냈으며,
같은 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참사를 맡아 일제의 침략전쟁을 선전하는 시국강연을 전개하였다.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에서 참사가 되어 약 3년간 활동하였고,
1941년에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활동하는 동시에 평의원에 임명되었다.
1944년 국민동원총진회의 이사를 역임하였고,
1945년에는 국민동지회 발기인 및 조선언론보국회에 참여하였다. 광복 후
1949년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해 결성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기소되었으나 보석으로 풀려났다.
[참고문헌]
조선총독부급소속관서직원록(1923) 외 朝鮮臨戰報國團槪要(1941) 등
경학원잡지 제34호(1932.3.31) 외 매일신보(1945.6.9) 외 삼천리 제8권 제12호(1936.12) 외
[집필자] 김은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역대인물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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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夏山) 성순영(成純永, 1896~1972)
근현대 시기 영남 지역에서 주로 활동한 창녕 성씨(昌寧成氏) 출신의 저명한 유학자이자 문장가입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에 걸쳐 수많은 가문의 문집 서문, 재실 기문, 신도비명 등을 집필하며 영남 문인 및 유림 사회에서 두터운 학문적 명망을 쌓았습니다.
1. 학문적 계보와 교유스승과 사상:
한말 영남의 대유학자인 심재(深齋) 조긍섭(趙兢燮)의 수제자로 학문을 닦았습니다.
스승인 조긍섭의 문집인 《심재집(深齋集)》을 편찬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문인들과의 교유: 성리학적 가치체계를 수호하기 위해 변영만(卞榮晩), 하성재(河性在) 등 당대의 대표적인 영남 유학자들과 깊이 학문적으로 교류하며 문답을 나누었습니다.
2. 주요 집필 및 금석문 활동 (영남 향토사 사료)
성순영 선생은 영남의 수많은 가문과 사찰, 정자의 역사적 가치를 기록한 기문(記文)을 남겨, 오늘날 향토사 연구의 중요한 자산을 마련했습니다.
가락국 태조왕 영후유허비 (1956년): 부산 강서구 지사동 흥국사 경내에 있는 비석으로, 가락국 수로왕과 허왕후의 만남 및 건국 설화를 기록한 비문을 하산 성순영이 직접 지었습니다.
삼사재 기문 (三斯齋 記文): 창원 하천리에 위치한 김녕 김씨 문중의 재실에 걸린 기문으로, 단종을 향해 절개를 지킨 백촌 김문기 선생의 후손들이 겪은 고초와 효도를 기록했습니다.
용산재 중수기 (龍山齋 重修記): 창원 구룡산 아래 성주 이씨 가문의 재실인 용산재를 중수할 때, 조선 성종 시기 창원도호부사를 지낸 이영분 선생의 공적과 가문의 내력을 상세히 찬술했습니다.
기타 문집 서문: 의령의 학자 술산(述山) 신우삼의 유고 서문, 창녕의 학자 신충직의 《건재문집(健齋文集)》 서문, 진주 인근의 《겸산유고(兼山遺稿)》 서문(1970년작) 등을 집필하며 영남 문중들의 역사를 정립했습니다.
앞선 맥락과의 연결점
죽계 안인식(安寅植) 선생이 중앙 유림(성균관 부관장)을 무대로 활동하며 문중들의 족보 서문을 주로 썼다면,
하산 성순영 선생은 영남(창원·창녕·김해 등) 지역을 중심으로 은거하며 정통 성리학적 맥락에서 서문과 금석문을 탁월하게 구사했던 영남의 대표적인 문장가라는 차이점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