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각하는 힘, 노자인문학 / 최진석 / 위즈덤하우스
책을 통째로 옮겨 적어야 할 판이다. 내가 기억하는 한, 처음 접하는 본격 노자의 해설서이다. 일반상식을 통해서 내가 알고 있던 노자는 노자가 아니었다. 잘못 알아도 한참을 잘못 알고 있었다. 어디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비단 이뿐일것인가. 최근에 접한 서적 중에서 철학서적이나 정신 세계를 다룬 책들은 하나같이 "나"를 중요시 한다. 세계의 중심으로 "나"를 위치시킨다.
생각이 어떻게 일어나기 시작했고 어떤 작용을 하며, 인간의 삶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먼저 살펴본다. 중심은 중국을 두고 생각한다. 공자와 노자가 출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집어보고, 그 차이점은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현재 인류를 이끄는 생각의 흐름은 무엇이고 어떤 방향으로 흘러야 바람직한 것일지 집어본다.
노자를 더 폭 넓게 이해하려면 저가의 전작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함께 읽으라고 작가는 권한다. 옆에 두고 늘 읽어야 할 책인것 같은데...
메모 부분을 옮긴다. 너무 길다. 스크롤의 압박이 있을 것으로 본다.
6, 철학이라고 해서 역사나 과학을 반영하지 못한다면 가끔 허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그렇다. 무슨 학문 한답시고 세상과 담쌓고, 무슨 예술 한답시고. 세상과 동떨어져하는 예술이 순수예술이라고 떠벌리는 사람들이 간혹있다. 종교인들도 마찬가지 삶을 도외시한 종교생활이 바른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것은 도피행각이다.
7, 우리는 왜 '생각'할 수 없게 되었을까? 외부로부터 강한 신념, 이념, 가치관, 지적 체계의 영항을 받았기 때문이다. 반면 '경계에 있다'는 것은 신념과 이념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상태를 말하며, 통찰을 하는 사람은 바로 이 경계에 있는 사람이다. 결국 신념을 벗어난 '나'로 돌아가야 통찰력, 인문적 사고력이 생긴다.
18, 삶의 방향은 바로 생각의 방향이고, 가치의 충돌은 생각의 충돌이며, 제도의 변화는 생각의 변화와 직결됩니다. 다시 말해 생각을 추적하는 일이고 결국 인간의 정체를 추적하는 일이 될 겁니다.
21, 추상화는 사물을 개별적인 상태로만 보지 않고 그것을 하나의 범주로 묶어서 파악할 수 있을때 비로소 가능한 일입니다. 이 작업을 통해 '공통성'이나 '의미'등의 생각이 출연할 수 있었고, 공통성이나 의미에 관한 생각이 등장하면서 인간은 점점 '구별'하는 능력을 잘 구사하게 되지요. 공통성은 결국 사물의 '본성'이나 '본질' 등에 관한 생각을 가능하게 합니다. 또 사물의 배후 원리가 무엇인지 물을 수 있는 길을 열어줍니다.
25, 종법제도의 핵심은 혈연에 대한 몰두입니다. 혈연에 대한 몰두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근거와 행위의 정당성을 확인 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위치를 이 세계에서 보다 선명하게 확정하고자 했음을 의미합니다. <중략> 세계 속에서 '혈연'을 매개로 자신을 이해하기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자신의 존재적 지속성에 대해 질문하고, 더불어 자신의 존재 기반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했다는 뜻이지요.
30, 혈연을 매개로 자신을 이해하던 인간이 이제는 상제라고 하는 신을 매개로 자신을 이해하게 됐습니다. 이는 세계 속에서 인간의 지위가 상승하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예요.
31, 천명을 받는 것은 은나라라고 생각하던 당시, 아직 천명을 받지 않은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망시킨 것 자체도 정당성 문제를 가지는 겁니다. 이때 우리에게 현재까지도 중요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덕'이라는 개념이 출연 합니다. 즉 덕이 있으면 천명이 오고, 덕을 잃으면 있던 천명도 떠날 수 있다.
>>> 그렇다면 개념 또는 생각은 현 상황을 해석하기 위한 것이다. 상황의 변화 즉 행동의 변화를 설명할 생각이 필요한 것이다. 요즘에는 생각이 삶을 지배한다고 한다. 거꾸로가는 것인가
32, 절차만 지키면 신을 만족시킬 수준으로 제사를 잘 지낼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 절차를 '예'라고 불렀습니다. 아마 이것이 예의 가장 원시적인 의미일 겁니다. '덕'은 제사장이나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신과 소통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준비한 마음의 상태인데, 태어날 때 갖고 있던 마음처럼 순화되고 정화된 마음의 상태를 말하지요. <중략> 인간은 신의 뜻, 즉 천명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내적인 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 신과의 관계가 변한다. 은나라 때에는 인간과 교감이 없는 대립적인 관계에서, 주나라때는 인간과 밀접하게 소통하는 이상적인 초월자가 된다. 따라서 신의 뜻을 황망하게 쫒는 것으로부터 인간적 자부심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인간적 관점에서 일을 처리하게 된다. 해서 나온 말이 '진인사대천명'이다.
41, 주자가 '활동력으로서의 덕'을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변질시켰다.
42, 덕은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향기와 힘을 발산하는 동력으로 회복돼야 합니다. 이 '덕'이 있어야 인간은 지식의 저장고가 아니라지혜의 발휘자로, 도덕을 연구허는 자가 아니라 도덕을 실천하는 자로,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에서 일상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겁니다.
>>> 하하하, 진실로 그렇다.
45, '세계를 봐야 하는 대로 보지 말고 보여지는 대로 보라', '이념의 수행자가 되거나 이념으로 세계를 지배하려 하지 말고 구체적인 세계에서 이념을 만들라'
70, 탈레스를 최초의 철학자라고 하는 이유는 이처럼 신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벗어나서 자기 스스로의 생각으로 이 세계와 마주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70,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중국에서 하늘이라는 존재 자체가 의심되자 사람들은 세계의 믿을 수 있는 대상으로 인간 자신만을 남겨두게 됩니다. 하늘이 사라지고 인간만이 남게된 세상에서 인간은 새로운 시대적 문제의식을 안게 된 것이지요.
>>> 춘추전국시대에 왜 공자나 노자 혹은 묵자의 이름으로 철인들이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주는 대목이다. 시대의 상황이 그들의 출현을 요구했던 것이다.
71, 인간이 인간만의 능력으로 건립한 그 길을 바로 '도'라고 합니다. 인간만의 능력이란 믿음의 힘이 아니라 '생각하는 힘'을 말해요. <중략> 도의 출현 이전에 중국인이 세계를 해석하는 두 개의 중심축은 '천'과 '덕'이었습니다. 도가 출현하고 나자 이제 중국인들은 세계와 관계하고 세계를 해석하며 또 삶의 의미를 확인하는 두 개의 중심축을 새롭게 갖게 됐으니 그것이 바로 도와 덕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도덕'은 바로 이 도와 덕을 붙인 말이지요.
72, 도는 천명을 극복하려는 인간이 만든 아주 인간적인 범주의 개념입니다. 도가 천명을 극복하려면 천명에 있는 문제점, 즉 비의성과 임의성 그리고 주관성을 극복해 투명성과 객관성 그리고 보편성을 확보해야 하지요. 이후 도를 중심에 놓고 인간의 길을 건설하려는 모든 철학자들은 자신의 철학 안에서 이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했습니다.
73,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인간 자신에게 있다." 공자는 인간이 인간인 이유를 '인'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논어 [위공령]에서 인을 잘 실천 할 수 있는 황금률 "네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은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말라"을 제시 합니다.
>>> 공자는 이 인을 유지하고 확대할 수 있도록 예를 추종할 것을 제안합니다 이를 주희는 '극기복례'로 압축해서 정리한다. 그러나 노자는 다음과 같이 반대 의견을 던진다.
77,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알면, 이는 추하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좋다고 하는 것을 좋은 것으로 알면, 이는 좋지 않다.
>>> 노자의 공격은 미과 추, 선과 악을 상대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닌, 특정한 기준을 정하고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하는 것에 반대한 것이다.
80, 천명을 극복하고 '도'라고 하는 인간의 길을 건립하려고 했던 두 철학자 가운데 공자는 인간의 내면에서 영감을 얻고, 노자는 자연의 존재형식을 사유의 원천으로 삼았습니다.
82, 노자가 말하길 "인을 주장하면 주장할수록 인에서 멀어지고, 효를 주장하면 주장할수록 효에서 멀어진다." 효를 주장한다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실천되는 효가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91, 도덕경 1장 첫 구절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
도라 말해질 수 있으면 딘정한 도가 아니고
이름이 개념화 될 수 있으면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 얼마전 읽은 책의 주제가 생각난다. 같은 의미일까? 금강경에 나왔다는 구절 "소위 '붓다의 실제'라 부르는 '붓다의 실제'에 관하여, 여래께서 이르시기를 이는 '붓다의 실제'가 아니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붓다의 실제'라 부르니라 하시더라".
노자의 말로 한다면, 붓다의 실제를 붓다의 실제로 정의를 내리면 붓다의 실제는 붓다의 실제가 아니다.
92, 권위나 역할 혹은 힘을 성징적으로 덤고 있돈 명칭, 이름, 직책 등을 당시 중국 사럼들은 '명'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명'을 감당하는 구체적인 사람 혹은 사물을 '실'이라고 불렀지요.
102, 노자가 본질을 긍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질이란 무엇일까요? 본질은 '어떤 것을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이게 해주는 성질을 말합니다. 어떤 것을 어떤 것으로서 존재하게 해주는 '존재근거'이지요. 그래서 당연히 그 존재에게는 그 본질이 '선'일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존재하는 근거이니까요.
102, '본질'을 긍정하면 확장의 최극단인 '이상'이 설정될 수밖에 없고, 이 이상은 '기준'으로 가능하겠지요? 기준은 구분하고 배제하고 억압하는 작용을 합니다. 배제와 억압이 사회적으로 나타나면 갈등이나 차등화가 되는 것이지요.
>>>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이 있었다. 그 카피가 생각나는 것은 이 지점에서 당연한 것이리라. 사회가 안정되고 시비의 따질 경우가 없이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편만하게 행복하다면 공자든 노자든 나설 필요가 없겠지만 그렇지않은 시절에 공자의 사상이 지배한다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더 읽어보면 달라질까
103, 노자는 바로 '본질' 자체를 부정하게 되고, 본질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기 사상의 토대를 마련하는데, 그것이 바로 자연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 알아낸 '관계성'입니다. 노자는 세계가 본질이 아니라 관계로 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노자가 파악한 세계의 관계성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유'와 '무'라고 하는 두 대립면의 상호 관계라는 것입니다.
무 명천지지시, 유 명만물지모
무는 이 새계의 시작은 가리키고
유는 모든 만물을 통칭하여 가리킨다
106, 몸 안의 공간처럼 비었으되 기능하는 영역을 '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유'라 이른 겁니다.
107, 무는 자기는 구체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면서 다른 것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해주는 영역이니 얼마나 묘합니까. 앞서 봤듯 '시작'이라는 개념도 얼마나 묘합니까. 이런 묘한 경계나 영역을 나타내기 위해 노자는 '무'라는 범주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 데카르트의 새계관과 노자를 비교하여 설명한다.
115, (데카르트의 경우) 정신이 정신인 이유는 정신 그 자체에 있고, 물질이 물질인 이유도 물질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이지요.
노자는 이런 세계관과는 전혀 다른 입장이 서 있습니다. 무는 무 자체에 있는 어떤 특별한 성질을 존재근거로 하여 존재하지 않고, 유는 유 자체에 있는 어떤 특별한 성질을 존재근거로 하여 존재하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무는 그의 대립면인 유와의 관계에 의해 무가되고, 유는 그의 대립적인 무와의 관계에 의해서 유가 됩니다. 대립면과의 상호의존관계, 이것이 바로 노자가 이해하는 세계의 존재형식인 것입니다.
120, 노자의 철학 안에서 '득도'의 의미를 찾는다면, 그것은 유무상생의 원칙을 체득한다는 뜻일 겁니다. (122, 노자의 도를 이해할 때, 도라는 범주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유무상생'이라는 함의에 더 집중해야 합니다)
124, 이 세계의 모든 것이 대립되는 두 면의 꼬임으로 되어 있지만, 이렇게 꼬임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개괄하여 보여주는 '도'만큼은 반대편을 향해 열려 있거나 반대편을 향해 나아가는 어떤 것일 수 없다는 의미에서 바로 '독립불개'라고 한 것입니다. 대립면의 관계를 총괄하여 보여주는 범주이기 때문에 그것만큼은 짝이 있을 수 없는 것 아니겠어요?
129, 왜 사랑을 정의 내리고 시작하려고 하느냐, 사랑하라. 그것이 너의 사랑이다. 너의 사랑을 하라.
>>> 캬! 멋지다.
133, "음악은 음표 안에 있지 않고 음표와 음표 사이에 존재하는 침묵 안에 있다." - 모짜르트
138, '실상'을 알면 집착하지 않게 되고, 집착하지 않으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실상'은 세계의 실제 모습, 진실입니다.
139, 무소유라는 말은 재산을 많이 갖지 말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어떤 현상을 지어서 그것을 진짜로 정해버리는 행위룰 하지 말라는 뜻이예요. 가버린 버스를 두고 '아이고, 저건 내가 탈 버스였는데'라고 내가 탈 버스로 규정하는 게 '소유적 태도'입니다.
139, 사실을 자기 생각의 틀에 가두는 게 '소유'입니다. 사실을 '소유'의 눈으로 바라보면 반드시 고통이 따라옵니다. 왜냐하면 그 '소유'적 시선과 세계의 '실상'은 잘 맞지 않거든요. 잘 맞지 않는데도, 자신의 뜻을 고집하여 관철시키려 하는 것은 집착이지요. 집탁은 고통을 낳습니다. 그 집착으로부터 업이 쌓이고 결국 윤회의 틀에 갇히게 돼요. 불교에서는 그래서 '실상'을 아는 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141, 이 깨달음의 내용을 두 글자로 줄이면 '인연'이 되겠지요. 이것이 불교가 세계를 보는 근원적인 시각입니다. 인연을 요즘 말로 옮기면 관계예요.
143, 존재근거가 없이 존재한다는 것은 바로 관계성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되겠지요. 즉 '관계'적 존재라는 말입니다.
145, 스위스의 언어학자 소쉬르는 [일반 언어학 강의]라는 저서에서 전혀 다른 주장을 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이해하는 것은 '아름답다'라는 단어의 주위를 둘러싼 다른 단어들, 예를 들어 추하다, 더럽다, 느끼하다, 귀엽다, 애교스럽다, 무뚝뚝하다, 거칠다 등과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차이'에 의해서 '아름답다'는 의미가 '드러난다'는 것이지요. 의미는 발굴되거나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는 것이 됩니다. 여기서 '차이'라는 개념이, 의미를 드러내는 매우 중요한 장치가 되지요.
157, 본질론자나 실체론자가 말하는 '관계'란 실체끼리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반면 불교나 <주역>, 노자가 말하는 '관계'는 존재하는 '그것 자체'가 관계로 되어 있음을 뜻해요. 실체로 존재하면서 관계적으로 산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과 저것 사이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 자체가 관계로 되어 있고 저것 자체가 관계로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 공자 > 극기복례 > 인 > 규범 > 중앙집권
, 노자 > 거피취차 > 지방분권, 자방자치, 작은 나라
168, 1847년 일본 학자인 니시 아마네가 'philosophy'라는 단어를 '철학'으로 번역하면거 철학이라는 말이 동양의 학굴계와 사강계로 진입하게 되었습니다.
169, 철학이 한계에 이르렀다 함은 새롭게 전재되는 사회 경제적 변화를 기존의 세계관이 담아내지 못하게 됐다는 뜻입니다. 이때부터 중국에서는 본격적으로 정치적 혼란이 시작되고 분열의 국면이 형성됩니다. 이틈을 비집고 한나라 말에 중국에 유입된 불교가 중국 사상계에 본격적으로 끼어들죠.
>>> 철학적 배경이 인간의 행동에 어떤 근거를 제공하는가보다. 다시말하면 나의 행동의 정당성을 부여해 줄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면 하는 일이 동력을 잃을 뿐더러 계속할 수 없다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그런 예는 많이 볼 수 있을것 같다.
170, 불교 이론을 대폭 받아들여 성현영이 완성시킨 성숙된 도교이론을 '중현학'이라 부릅니다.
181, 현대에서는 세계를 해석할 때 사유보다는 무시되었던 경험이 새롭게 부각되는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 같습니다. 사유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던 시대에서 경험이 부각되는 시대로, 이성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던 시대에서 감성이 중시되는 시대로, 정신이 절대적 우위를 점하던 시대에서 육체 혹은 욕망이 새롭게 조명되는 시대로 이행하는 것이죠. 집단에거 개별로, 보편에서 특수로, 본체에서 현상으로 건너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190, 중국인들에겐 이 세상이 좋은 세상이고 진실도 이곳에 있습니다. 진실이 여기에 있기 때문에 여기에 존재하는 진실을 그대로 연장해가는 것이 도교의 모습이예요. 이 연장은 '기'를 매개로 이뤄집니다. 현실과의 단절 대신 연장을 주장하고, 현실을 부정하는 대신 진실이라고 긍정합니다. 이 세계가 진실이라고 보기 때문에 철학을 구축하는 사유의 원천은 경험에서 옵니다. '경험의 구조'에 있는 이들에겐 경험이 진실입니다. 실제 현상이 진실입니다. 달리 말하면 변화를 긍정한다는 뜻이예요.
191, 철학이란 기본적으로 이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고 운행하는지를 파악하고 거기에 대응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결정하게 합니다.
194, 세계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인식 능력은 어때야 할까요? 노자에 의하면 그것은 '지'의 방법이 아니라 '명'의 방법이아야 합니다. 해를 해만으로 보거나 달을 달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달을 해와의 관계속에서, 해를 달과의 관계속에서 보는 것이지요. 해를 해로 보고, 달을 달로만 보는 것은 해와 달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지요. 분리된 것을 분명라게 인식하는 것을 '지'라고 합니다. 전면 해와 달을 상호 연관 속에서 인식하는 것을 '명'이라고 하는데, 달과 해가 존재적으로 따로따로 분리된 두 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이루는 한 벌의 사건으로 보는 것이지요. 해와 달을 동시에 포착하는 능력, 이것이 바로 '명'입니다.
>>> 해와 달을 한벌로 그리고 태양계를 한벌로 우주를 한벌로 그리고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 벌의 사건으로 봐야 '명'한 것인데, 가능한 것인가?
204, 통치를 잘하고 싶다면 이 세계가 대립면의 긴장으로 서 있다는 점, 반대되는 것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철저히 자각하라고 주문합니다.
205, 광이불요 화광동진
224, 노자는 바람직한 것을 모두 똑같이 수향하는 사람보다 '바람직한 것'을 없앤 후 각자 바라는 바를 다양하게 수행하는 사람들이 모인 사회가 더 강하다고 했습니다. 해야하는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다양한 사람들로 이뤄진 나라가 더 부강하다고 봤어요.
233, 도는 이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알려주는 범주인데 노자는 그것을 자기 몸으로 실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유무상생을 몸으로 실천하라는 것이지요. 유무상생을 몸으로 실천하는 것을 노자는 '무위'라고 했습니다.
246, '무명'의 원초적인 의미는 무엇을 함축 할까요? 그것은 바로 개념화되지 않는다는 것, 언어화 되지 않는다는 것, 혹은 어떤 이념 체계로 구성되거나 거기에 지배되지 않는다는 것, 세계와 접촉하는 하나의 고정된 틀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53, '무위'란 아무것도 안하는게 아닙니다. '무위'란 세계와 관계할 때 기준의 틀이나 방식에 갖힌 상태가 아님을 뜻해요. 이미 있던 신념, 이념, 가치관을 무시하고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신이 고유하게 생산한 자신만의 문제의식으로 세계와 직접 관계하는 겁니다. 세계를 볼 때 시준을 갖고 보지 말라는 겁니다. 이론을 가지고 문제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 안으로 직접 침투해 들어가는 태도가 '무위'입니다.
259, 세계가 움직이는 방향과 함께하라는 것이 '무위'가 강조하는 핵심입니다.
282, "남을 해치는 짓을 하지 않으나 인은을 베푸는 모습도 대단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이익을 위해 움직이지는 않지만,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문지기나 노예를 천하다고 하지도 않습니다. 재물을 다투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남에게 양보하는 일을 훌륭하다고 치켜 세우지도 않습니다. 남의 힘을 빌리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일을 훌륭하게 여기지도 않으며, 탐욕을 천한 것으로 치부하지도 않습니다. 그 행동은 세속 사람들과 다르지만, 그렇다고 남과 특별히 다른 것이라고 높이지도 않습니다. 그 행동은 뭇사람과 함께하지만, 그렇다고 아첨응 천한 것으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장자가 말하는 '대인'
288, "사람들마다 다 털 한 올을 뽑으려 하지 않고 사람들마다 다 천하를 이롭게 하려고 하지 않으면 천하는 다스려진다. 천하가 다스려지지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다 천하를 위하기 때문이다." 양주
290, "자기를 천하만큼귀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천하를 맡길 수 있고 자기를 천하만큼 사랑하는 사람에게 천하를 줄 수 있다." 도덕경 제13장
292, "왜 혁명이 이루어지지 못하는가? 왜 완수 되지 못하는가? 그것은 혁명을 하는 혁명가들 스스로 혁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함석헌
293, 우리는 흔히 자유와 평화는 큰 이념을 위해 존재한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자유와 평화는 바로 자기 삶을 위해 존재해야 하지요. 모든 이념은 구체적인 실재에서 생산되고 실재의 세계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지만, 이것이 전도되어 오히려 그것들이 실재를 지배해버리려고 덤빕니다.
293, 양주나 노자의 위아론은 진정한 덕성, 진정한 힘, 진정한 자유, 진정한 활동의 원천과 귀착점이 바로 각자의 몸이라고 강조합니다. 천하나 보편적인 세계는 이차적이지요. 그러면서 일차적인 것에 집중하는 사람을 훨씬더 진실한 인격으로 묘사합니다.
(2017.1.23 평상심)
첫댓글
첫 인사
드립니다.
오늘
가입했네요.
새해 들어
더 마음이 가는
좋은 화두입니다.
생각하는 힘 속에
올 한 해도
더욱
깊어지고
넓어지고
의연해지기를
기대해봅니다.
좋은 글
소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참 기쁨 평화!
배우고 익히는 것이 즐거운 일이지만 생각을 동반하지 않고 배웠던 지난 시간들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저에게는 배우는 것은 모두 바른 것이라는 생각이 너무 깊이 뿌리 내린 것 같습니다. 공자가 정답이다 노자가 정답이다보다는 현재 내 모습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을 노자가 말한 "관계"속에서 있는 그대로 볼 수만 있다면, 내가 품어야 하는 마음이나 취해야 할 행동이 자연스레 나타나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