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작은 배에 매여 있으리요
무염 국사는 신라 무열왕의 8대손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화 씨가 팔이 긴 천인으로부터 연꽃을 받는 꿈을 꾸고 잉태하였고, 법장이라는 서역(西域) 스님이 십호계(十護戒)를 주는 꿈을 꾸고 낳았다고 전한다. 속성은 김(金) 씨 법명은 랑혜(朗慧), 법호는 무염(無染), 휘호는 백월보광(百月 光)이다. 12세에 경주 금오산 설산오색석사에 주석하고 계신 법성 선사에게 출가했다. 국사의 경전 탐미는 정밀했으며, 선리는 하늘이 기울만큼 날래었다.
이에 스승 법성 선사는“빠른 발로 달리면 뒤에 떠나더라도 앞서 도착한다”며 문하에서 떠나라고 하였다.
이에 국사는 자리를 옮겨 부석산 석등 대사를 찾았다. 석등 문하에서 화엄의 표하건나(驃訶健拏 : 잠을 자지 않을 정도로 쉼없이 염불수행에 용맹정진함을 일컫는 말)를 하였다. 이에 다른 사람이 3년 동안 할 것을 단 하루만에 하였으매, 석등은 국사에게 “동쪽으로 얼굴을 돌려 바라보면 서쪽의 담을 보지 못한다. 저쪽 언덕 중원(中原)이 멀지 않은데 어찌 신라만을 생각 하리요” 라고 말하자, 국사는 “중원으로 가서 대선지식을 찾으리라”고 답했다.
마침내 국사는 헌덕왕 13년(821) 조정사(朝正使) 왕자(王子) 흔(昕)을 따라 중원으로 향했다. 대흥성 남산의 지상사(至相寺)에 도착한 국사는 <화엄경>을 설법하는 스님을 찾아 법을 물었다. 그러자 그 노승은 “나는 아는 것이 없으니 다른 곳으로 가서 법을 구하라”고 대답했다. 국사는 다시 발길을 돌려 불광사에 들려 여만 스님에게 다시 법을 물었다. 여만 스님도 “나는 아는 것이 없으니 마곡 보철선사를 찾아뵙고 법을 구하라”고 일러 주었다. 국사는 형산 마조암에 주석하고 계신 마곡을 찾았다. 마곡선사는 국사의 말의 떨어지자마자 “그대는 멀리 사물에서 취하고자 하는 것보다 그대 마음 속의 부처를 인지하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마곡은 다시 “옛날에 나의 스승이신 마화상(馬和尙)께서 나에게 유언하기를 봄꽃이 번성하고 가을의 열매가 적은 것은 보리수를 오르는 사람이 슬퍼하고 탄식하는 바이다. 이제 너에게 법을 줄 것이니 뒷날에 중원이 선을 잃으면 장차 동이(東夷 : 신라)에게서 물어야 할 것이다. 뒷날 배우는 무리들 가운데 기이한 공이 있어 가히 봉(封)할 만한 자가 나타나거든 봉(封)하여서 법을 뭉크러지게 하지 말라. 불법이 동쪽으로 흐를 것이니 이것은 구참(鉤讖 : 부처님의 말씀)에서 나온 것인즉 저 해뜨는 곳 신라에 불법의 근본이 성숙될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국사에게 여러 가르침을 전하던 스승 마곡은 어느 날 말없이 국사에게 나뭇가지를 손에 쥐어주고 홀연히 열반했다. 이에 국사는 천지를 진동하는 확오(廓悟)를 하였다.
일심무애(一心無碍)
筏師旣捨矣(벌사기사의)
舟子何繫焉(주자하계언)
큰 배를 이미 버렸거늘,
어찌 작은 배에 매여 있으리요.
국사는 스승 열반 후 중원에서 동방의 대보살이라고 불리었다. 하지만 문성왕 7년(845)에 신라로 다시 돌아와 상주 심묘사에 참선도량 무염당(無染堂 티끌에도 물들지 않는다는 뜻)을 열어 선법을 펼쳤다. 보령 성주사에 주석할 때에는 대중이 무려 2천명에 이르러 성주산문의 문풍을 크게 떨치기도 했다.
국사의 선풍은 작선(作禪)이다. 스님은 빨래와 공양 준비는 물론 모든 것을 다른 사람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했다. 그 이유를 제자들이 물으니, 국사는“산이 나를 위하여 더럽혀졌는데 내가 어찌 몸을 편안히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 국사께서는 우리나라 선종사의 터를 닦은 분이다. 진성여왕 2년(888) 법랍 65세, 세수 89세로 성주사에서 입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