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고 배트맨 무비를 보며 마음을 챙기다
배트맨을 배트맨답게 만든 건 바로 악당들
글/스텔라 박
때로 아동용 영화를 보다가 머리가 확 뚫리는‘아하 모먼트(Aha Moment)’를 체험할 때가 있다. 최근 개봉한 <레고 배트맨 무비>가 그랬다.
배트맨 영화 하면 아무리 할리웃의 구태의연한 프렌차이즈물이지만 폼 나고 가오도 난다. 하지만 <레고 배트맨 무비>는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고 레고의 특성상, 아주 귀엽다. 그럼에도 상상력 풍부한 세팅과 액션 가득한 영상은 우리들 눈에 적잖은 즐거움을 선사한다.
크리스 매케이 감독을 비롯한 제작자들은 철학적이면서도 인간 심리의 깊숙한 부분까지 귀여운 영화 안에 잘 담아냈다. 자, 그러면 안전벨트를 단단히 매고 고담(Gotham) 시로 여행을 떠나볼까.
고담시는 조커 외 수많은 악당들에 의해 난장판이 되어 있다. 그리고 조커 일당은 고담시의 약한 지반을 이용, 지하에 폭탄을 투하해 고담 시를 날려버리려는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우리들의 영웅, 배트맨이 이를 그냥 보고만 있을리 없다. 그는 홍길동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나 시원스레 악당들을 때려잡는다.
어두움이 있어야 빛이 빛일 줄 안다
이때 조커가 배트맨에게 날리는 멘트.
"배트맨. 너의 최대 적인 나를 잡는 것과 고담시를 구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해."
이 말에 대한 배트맨의 반응.. “조커, 너는 내 최대의 적이 아니야.” 조커는 배트맨으로부터 최대의 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깊은 상처를 받는다.
이 대목을 대하며‘마음 공부 좀 한다’, 하는 이들은 아마도 무릎을 탁 내려쳤을 것이다. 선과 악, 남과 여, 음과 양, 빛과 그림자에 대한 답이 이 대사 한 마디에 녹아 있었기 때문이다. 어두움이 있어야 빛은 빛일 수 있다. 악이 있어야 선도 있다. 조커와 악당들이 있어야 배트맨도 배트맨일 수 있는 것이다. 이 메시지는 이 영화 전체를 통틀어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고담시를 구한 배트맨은 시민들의 환호를 받고, 고아원에 들린다. 고아원생 중 하나인 딕 그레이슨은 평소 존경하던 배트맨을 직접 만났단 사실에 기뻐하지만 배트맨은 이 소년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다. 그는 고아원에 영혼 없이 장난감과 돈만 기부하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수행
일을 마친 배트맨은 그가 거주하는 배트 케이브로 돌아가, 부모 같은 집사인 알프레드가 준비한 랍스터 요리를 먹는다. 배트맨이 혼자서 랍스터를 마이크로웨이브에 넣는 장면은 아주 세세한 표현으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2분을 누른다는 것이 20분을 누르고 난 후 배트맨이 혼잣말을 한다. “이, 바보야.”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나는 눈물이 날 뻔 했다.
지난 해 가을, UCLA의 명상 코스 가운데 ‘자기 사랑(Self-Compassion)’ 클래스를 택했었다. 수업 시간을 통해 나는 우리 내면의 부정적 목소리와 자아 비판의 목소리에 대해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남들이 그런 실수 같지도 않은 실수를 했다면 우리는 “네가 왜 바보야? 너는 바보 아니야. 그냥 단순히 작은 실수를 한 것 뿐이야.”라며 용기를 북돋워줄 것이다. 하지만 어찌 된 건지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가장 가혹한 태도를 취한다.
수업을 다 듣고난 후부터 나는 나를 타인처럼 대하기 시작했다. 내가 실수를 하더라도 “이 바보 멍청아.”라고 하지 않는다. “아, 그렇게 생각했었구나. 알아차렸으니까 다행이야. 이제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나가면 돼.”라고 말이다.
또한 외롭게 밥을 먹어본 사람들이라면 이 장면에서 깊이 공감을 할 것이다. 배트맨이 혼자 앉아 밥을 먹는 장면에는 고독이 절절히 묻어난다. 제 아무리 맛좋고 값비싼 랍스터 요리라지만 혼자 먹는 밥은 이상하게 맛이 없다. 물론 마음을 챙겨가며 먹는, 식사 수행은 되겠지만 말이다.
외로움은 관계와 헌신을 두려워한 결과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난 배트맨은 혼자서, 로맨틱 영화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제리 맥과이어>를 시청한다. 남자들은 그저 때려부수는 액션 영화를 좋아할 것으로 생각하는데 배트맨은 마치 갱년기 남자들처럼 ‘관계(Relationship)’에 관한 영화를 즐겨 본다. 탐 크루즈가 르네 젤웨거에게 했던 그 유명한 말, “당신은 나를 완성시켜.”을 들으며 그는 사무치는 외로움을 달랜다.
배트맨은 또한 돌아가신 부모님과 찍었던 가족 사진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혼자서 살아본 이들은 이 장면의 비애를 안다. 이 세상에서 가족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가족과 마찬가지인 집사, 알프레드는 배트맨의 가장 아픈 부분을 찌른다.
“도련님은 가족의 일원이 되는 걸, 가장 두려워하세요. 하지만 이제 도련님에게도 가족이 필요해요. 관계도 만들어나가야 하지 않겠어요? 도련님 양아들을 키우면서 책임감 있는 어른이 되셔야죠.”
나는 요즘 조용히 명상을 하면서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자다 봉창 두드리는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오랜 침묵의 명상 끝에 내 내면에서 나는 이런 소리를 들었다.
“나는 사랑입니다. 세상이 사랑 없어도 그저 사랑의 통로가 되세요. 내가 평화롭기를, 내 삶이 편안하기를.”
사랑이 가득할 때 두려움은 머물 공간이 없다. 배트맨의 사랑, 관계, 헌신에 대한 두려움은 사랑 없음과 외로움이라는 형벌을 결과한다. 영화는 그의 마음 가득하던 두려움이 어떻게 사랑으로 채워지는지를 풀어나가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선함을 알기 위해서는 악함이 있어야
한편 배트맨에게 무시당해 상심한 조커는 슈퍼맨에 관한 뉴스를 보다가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뉴스는 ‘슈퍼맨이 조드 장군을 팬텀존에 가두는데 성공, 조드 장군이 없어졌으므로 이제 세상은 슈퍼맨도 필요 없게 됐다’는 것이었다.
한편 브루스 웨인의 모습으로 짐 고든 경찰 청장의 은퇴 파티에 참석한 배트맨은 짐 고든의 딸, 바바라 고든에게 홀딱 반한다. 파티에서 브루스를 발견한 고아, 딕은 배트멘에게 자신을 입양해 달라고 조르고, 브루스는 바바라에게 정신이 팔려 있던 터라 건성으로 딕을 입양하겠다고 대답한다.
신임 경찰 청장이 된 바바라는 취임 연설을 통해, “배트맨이 있어도 고담시에는 범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범죄의 뿌리를 뽑기 위해서는 배트맨과 경찰이 연합해서 일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한다. 브루스는 이에 반박한다. 배트맨은 ‘함께’보다 ‘혼자서’, ‘독단적으로’ 활동하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순간 쳐들어온 조커 일당이 파티장소를 쑥대밭으로 만든다. 브루스는 배트맨 슈트로 갈아입고, 조커를 잡으려 한다. 그런데 조커는 전혀 기대치 않았던 수를 쓴다. 그는 자신이 이 자리에 스스로 체포 당하러 왔다면서, 거대한 선물상자를 이용해 다른 악당들도 모두 잡아버린다. 이로써 고담시의 악당들은 모두 아캄 수용소에 갇혀버린다. 이제 고담시에는 퇴치할 범죄나 악당 그 어떤 것도 없었고 더 이상 배트맨을 필요로 하지도 않게 됐다. 더 이상 존재 의미가 없어진 배트맨은 의욕을 잃은 채 배트 케이브로 돌아간다.
네가 있어야 내가 있다
배트맨은 배트 케이브 안에서 조커를 처리할 방법을 궁리 중이다.
알프레드는 배트맨에게 고아 소년, 딕을 입양했으니 그를 가족처럼 대하라고 설득한다. 배트맨은 알프레드에게 딕을 다시 고아원으로 보내라고 하지만 알프레드는 오히려 딕을 배트 케이브 안으로 들여보낸다. 딕은 배트맨을 만나 기뻐하면서도 배트맨과 브루스 웨인이 동일인물임은 눈치채지 못한다.
한편 배트맨은 양아들 딕과 함께 조커를 팬텀존에 가둘 장치를 슈퍼맨으로부터 훔쳐낸 후, 아캄 수용소로 잠입해 조커를 팬텀존으로 보내버린다. 하지만 이는 조커의 계획에 제대로 걸려든 것이었다. 조커는 배트맨이 자신을 팬텀존으로 보내면 팬텀존에 있던 슈퍼 악당들을 고담시에 풀어놓으려던 것이었다. 이내 고담시는 조커, 사우론, 볼드모트, 스미스 요원, 킹콩 등 수많은 슈퍼 악당들로 난장판이 된다. 조커는 배트맨의 웨인 섬을 장악, 자기 마음대로 개조한다.
가자, 가자, 저 언덕에 다 함께 가자.
한편 바바라는 고담시를 지키고자 어쩔 수 없이 딕과 배트맨을 감옥에서 꺼내준다. 함께 악당을 퇴치하자고 팀을 이뤄 웨인 섬에 도착한 배트맨은 다른 이들을 로봇에 태워 다른 곳으로 보내버리고 혼자 조커를 잡으러 간다. 조커는 다른 이를 보내고 갚개 보내고 돌아온 배트맨을 보며 “넌 변한게 없어!”라고 비판한다.
이제껏 독립군으로만 일했던 배트맨은 고담시를 지키는 것도 혼자 해내고 혼자 모든 영광을 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캐릭터.
하지만 우리 삶이라는 게 어디 그런가. 하다 못해 수행도 혼자서가 아니라 상가(수행 공동체)를 이뤄 함께 하라 하지 않았던가. <반야심경>의 끝구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가자 가자 저 언덕에 가자, 저 언덕에 다 함께 가자)”는 자기의로 가득한 우리들의 에고, 그리고 배트맨의 에고에 커다란 공명을 울린다.
보고자 하는 내가 아닌 진정한 나의 모습
조커는 배트맨에게 “내가 싫다고 한마디만 해줘.”라고 부탁을 한다. 그는 어쩜 그렇게라도 배트맨으로부터 존재감을 인정받고 싶어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배트맨은 그에게 “난 너를 싫어하지 않아. 난 그저 네가 거슬릴 뿐이야.”라고 응대한다. 존재감을 인정받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는 크다. 화가 난 조커는 배트맨을 팬텀존에 가둬버린다.
배트맨은 팬텀존을 지키는 문지기에게 자신을 보내달라고 부탁하지만 문지기는 그가 악당처럼 보인다며 배트맨을 스캔하기 시작한다. 문지기가 그를 스캔하자 배트맨이 주변 사람들을 떠나보내는 모습이 영상으로 나오기 시작한다.
오랜 시간 명상을 하다 보면 자신이 믿고 싶어하는 대로의 모습이 아닌, 본래의 자기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들은 스스로를 퍽 멋지게 보이고 싶어하고 자신이 그렇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스스로를 주의집중하며 있는 그대로 보기 시작하면 가장 치사하고 찌질한, 자신의 모습인지도 모르던 모습들이 여과 없이 보이게 된다. 팬텀존의 문지기는 배트맨에게 바로 그런 순간을 경험하게 한다.
나는 약하지만 우리는 강하다
문지기는 배트맨이 악당은 아니나, 그렇다고 좋은 사람도 아니라고 판단한다. 자신의 일행들이 위험에 처한 것을 알게 된 배트맨은 팬텀존 문지기에게 밖으로 보내달라고 통사정을 한다. 팬텀존의 문지기는 꼭 다시 돌아오겠다는 배트맨의 다짐을 믿고 그를 보내준다.
다시 돌아온 배트맨은 바바라, 알프레드, 딕을 구출해낸다. 배트맨은 그들을 놔두고 혼자 떠났던 이유가 가족이 생기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음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그는 이들에게 조커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는 고담 시민 모두의 힘이 필요하다며 도움을 청한다.
배트맨은 새 가족들과 함께 악당 무리들을 팬텀존으로 보내버린다. 하지만 조커가 설치한 폭탄으로 인해 고담시의 지반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배트맨은 고담 시민들에게 서로의 머리에 올라타 줄을 만들어 고담시를 이어 붙이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두동강 나는 고담시를 잇기에 줄은 너무 짧았다. 배트맨은 어쩔 수 없이 건너편에 있던 조커에게 도움을 청한다.
“조커, 인정할께. 내게 네가 필요하단 사실을 깨달았어.”
건너편에 있던 조커 일당은 서로의 머리에 올라타 긴 줄을 만들고 배트맨의 손을 잡아 고담시를 이어붙인다. 배트맨과 조커는 서로에게 정말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우리들이 이해할 수 없는 화해를 한다.
배트맨은 양아들인 딕에게 자신이 브루스 웨인이란 사실을 밝힌 후, 문지기와의 약속대로 다시 팬텀존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팬텀존의 문지기는 배트맨이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변화했다며 그냥 고담시에 머무는 것을 허락한다.
마음의 돌이킴이 카르마를 바꾼다
<레고 배트맨 무비>는 혼자만의 영웅심으로 살아가던 배트맨이 자기의를 내려놓고 협력하는 존재로 변해 가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진정으로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과정, 악의 세력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모습, 자신이 되고자 하는 수퍼 에고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깨닫는 모습도 그려내고 있다.
아이들도 즐길 수 있는 오락 액션 애니메이션 영화에 담겨진 심오한 정신세계의 지혜에 혀를 내둘렀다.
사실 <레고 배트맨 무비>뿐 아니라 세상은 우리들이 보고자 하기만 하면 가르침을 준다. 원수 같았던 직장 동료도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그의 수행을 위해 그렇게 살고 있을 뿐이다. 아름답지 않은 도시의 구석도 그저 있는 모습 그대로 여여할 뿐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우리들로 하여금 세상을 바꾸려 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를 닦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