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유 동인시집 제2집 정복선 외 『날마다 피어나는 나팔꽃 아침』 출간
‘유유 동인’은 이보숙, 이섬, 김현지, 정복선, 이혜선, 주경림, 박분필 7인이며, 첫 동인지 유유 제1집 『깊고 그윽하게』를 낸 지 2년 만에, 유유 제2집『날마다 피어나는 나팔꽃 아침』을 출간하게 되었다. ‘유유동인’이란 이름으로 한 배에 탄 7명의 시인들이 가장 아름답고 싱싱한 ‘시의 축제’를 열어 나간다. “문학이라는 호수 안에서 헤엄치는 시어詩魚를 찾아 오랜 세월 천천히 노를 저어가는 도반이다. 느린 수면을 바라보다 솟구치는 언어를 낚는다. 시를 짓고 기쁨을 나누는 일곱 명의 친구들은 이 항해를 지속하는 힘이 된다. 세월이 갈수록 더욱 소중해진다.(책 머리에)”
비가 내려도 바람이 불어도 내 이름은 아침입니다// 구름, 바람 차곡차곡 가슴에 쟁이며// 움튼다는 것, 싹 튼다는 것,// 모두 가만히 움켜쥐고 견뎌온 이야기// 숨죽이고 가만가만 살아 낸 이야기들// 오늘 아침 당신에게 모두 들려드릴게요// 빨강, 보라, 하양, 분홍……// 그대 가슴 속 환히 밝히고 싶어// 날마다 피어나는 내 이름은 아침입니다// 아침이란 이름의 연보랏빛 희망입니다 -김현지 「나팔꽃 아침」 전문
“내 이름은 아침”인 나팔꽃 시인은 꽃대궐에 살면서 시시때때로 꽃사진 영상을 올려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오늘 아침에도 수선화, 할미꽃, 홍매화, 산다화, 돌단풍, 박태기 꽃사진을 한아름 보내왔다. 눈뿐만 아니라 마스크를 쓰고 은둔의 생활에 지친 우리에게 “그대 가슴 속 환히 밝히고 싶”다며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준다. “구름, 바람 차곡차곡 가슴에 쟁이며” 움켜쥐고 견뎌온, 숨죽이고 살아낸 이야기를 움 틔우고 싹 틔운다는 것이 우리네 삶의 모습 그대로이기에 날마다 피어나는 아침의 감동이 그대로 전해진다. 필자가 혓바닥에 좁쌀처럼 작은 혓바늘꽃이 돋아 물 한 모금에도 눈물이 찔끔 나던 날, 세상의 모든 꽃들이 통점으로 보였다. 뿌리까지 앓으며 견뎌온 통점이 터져야 “연보랏빛 희망”이라는 이미지로 날아오를 수 있다. 고통이나 슬픔 등의 부정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나팔꽃이 아침의 메신저가 되기까지의 곡진한 사연을 조근 조근 들려주는 시작법에서 연륜의 안정감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단행본들을 부챗살로 펼쳐놓은 바다 속 장서관// 파도는 낡아가는 책을 보수하는 유능한 사서다// 표면의 광택을 파고 든 인간의 기억, 희망, 사랑을// 담았다 쏟아내고 쏟았다 담아내기를 수 십 만년// 몇 초가 영원처럼 흐르는 저 떨림, 저 무늬들,// 회색과 초록색이 뒤섞인 파도의 갈피 속에 미처// 해석되지도 기록되지도 못한 역사까지 껴안은 채// 물의 필체와 물의 언어만을 고집해 온 고서들// 신비로운 힘에 이끌려 뭉치고 엉키는 시간과 공간// 잿빛갈매기들 조용히 날아내려 고서를 뒤적인다 -박분필 「양남 주상절리」 전문
주상절리는 주로 현무암과 같은 화산암에서 형성된 육각기둥 모양의 돌기둥을 말한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경주시 양남 주상절리군에는 부채꼴 주상절리, 누워있는 주상절리, 기울어진 주상절리, 위로 솟은 주상절리 등 다양한 모양을 가지는 주상절리들이 모여 있다. 시인은 그 중에서 부채꼴 주상절리를 시적 대상으로 삼았다. 첫 행, “단행본들을 부챗살로 펼쳐놓은 바다 속 장서관”에서 필자는 대형서점의 가판대를 떠올렸다. 이어, 파도를 낡아가는 책을 보수하는 유능한 사서라고 의인화한 둘째 행은 전혀 예측치 못한 전개였기에 호기심과 흥미가 발동했다. 동(動)적인 파도의 움직임이 정(靜)적인 돌기둥에 생명 에너지를 불어넣어주어 시가 전환의 국면을 맞이했다. 이제, 육각기둥 모양의 돌기둥들은 책의 겉모습뿐만 아니라 ‘인간의 기억, 희망, 사랑”, “해석되지도 기록되지도 못한 역사까지” 심화된 내용까지 갖추었다. 가판대가 아닌 “바다 속 장서관”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자연의 질서와 변화가 만들어낸 풍경을 시인은 “신비로운 힘에 이끌려 뭉치고 엉키는 시간과 공간”이라고 정리했다. 필자가 무정물과 유정물, 시간과 공간까지 동원해서 빚어내는 장서관의 모습에 푹 빠질 만큼 박분필 시인의 연출력은 노련했다. 잿빛갈매기들이 주상절리에 날아 내리는 자연 풍경으로 돌아가 끝맺음하는 마지막 연도 돋보였다. 3년 째 계속되고 있는 코로나19 팬데믹은 전세계로 퍼져서 우리의 삶을 통째로 바꿔 놓았다. 많은 전문가들은 감기나 독감처럼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계절성 질환인 풍토병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을 예견하고 있다. 박분필 시인도 「나를 들쳐 업고」에서 오미크론으로 두 친구를 잃는 슬픔을 겪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슬픔으로 시인의 안에는 침묵이 자리 잡았고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눈 덮인 바라산에 올랐다. 겨울 산에서 푸른 잎 다 떨구고 기둥처럼 서 있는 은사시나무 편백나무들로부터 “너 자신을 뛰어 넘어라, 경계를 넘어라”는 전언(傳言)을 듣는다. 겨울 숲에서 “스스로 몸을 끌어안고 냉기를 밀어내고 있는” 아기고라니, “생명을 품고 얼어있는 흙들”에서 “그 생명의 굼틀거림이 거대한 물결의 길을 만들어 낼 것”이라는 희망의 메세지를 확인한다. 코로나19 팬데믹과 산불재앙이라는 현실적인 어려움 속에서 자연의 끈질긴 생명성으로 위로받고 치유되는 시, 「수樹수水카페 옆에는 청보리가 피고 있었다」, 「산불 현장에서 탈출한 아기다람쥐」 등이 우리에게 희망을 놓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깜깜한 시간도 가다보면 닿게 마련”이라는 위로를 건넨다, 필자는 오늘, 최악의 산불이 휩쓸어간 울진 산불 현장의 땅에 피어난 노랑제비꽃 사진을 신문에서 보았다.
우주의 품에 안겨 숨 쉬는 찻잎, 에 안겨 붙어// 사각사각 신명을 따라 읽다가 쓰다가// 벌레들이 열공 중이다// 파헤치고 배산임수의 터를 차지하는가 하면// 나비와 벌새들의 날갯짓, 혹은// 매미들의 한 철 울음을 미리 휘갈겨 놓는다// 하, 별로 세상에 기여한 게 없다, 그럼에도// 못자란 찻잎으로 만든 ‘동방미인(東方美人)’// 초록애매미가 숭숭 불러들인 살바람이나 별빛 입술로// 찻잎에 음송하고 있는 천일야화, 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 게으른 이가 차농사를 망쳐 벌레 먹은 찻잎으로 만들게 된 백호오룡차에 붙여진 새 이름. 초록애매미가 줄기의 진액을 빨아먹어 자라지 못한 찻잎에서 오히려 상큼하고 향기로운 과일향이 생긴다고 함. -정복선 「벌레미인」 전문
‘벌레미인’은 찻잎을 갉아먹고 줄기의 진액을 빨아먹고 사는 초록애매미에게 정복선 시인이 붙여준 이름이다. 찻잎에 손상을 입히는 해충을 ‘미인’이라고 부르다니,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첫 행에서는 “우주의 품에 안겨 숨 쉬는 찻잎, 에 안겨 붙어”로 차츰 좁혀가며 벌레들의 위치를 알려준다. 전체 시의 2/3 정도까지는 찻잎에서의 생존을 위한 벌레들의 활약상으로 이어진다. 신명을 따라 읽다가 쓰다가 하는 흥겨운 모습, 파헤치고 배산임수의 터를 차지하는 경쟁적인 모습, 등이 우리네 삶과 다르지 않아 재미있게 읽힌다. 차나무는 진액이 다 빨려 죽지 않으려고 달콤한 향기로 초록애매미의 천적을 끌어들인다. 그 곤충이 초록애매미를 잡아먹고 사람들은 향기로운 찻잎을 따서 과일향, 꽃향기가 그윽한 매력적인 차를 만든다. 차의 향기에 반한 빅토리아 여왕이 ‘동양에서 온 아름다운 여인’, ‘동방미인’이라는 차 이름을 선사했다고 한다. “하, 별로 세상에 기여한 게 없다,”는 구절은 벌레들이 찻잎에 어떤 유익함도 끼치지 못했다는 뜻인 듯하다. 하지만 초록애매미야말로 향기로운 ‘동방미인’을 만든 1등 공신이기에 시인이 ‘벌레미인’이라 부르는 것 아닐까. 정복선 시인은 우주의 질서를 「인력과 중력의 유희」로 노래한다. 지구의 위성인 달에 대하여 “달은 지구를 향해서만 울음 우는 한 마리의 새”라니, 시인의 기발한 상상력이 어디로 튈지 다음 행을 읽어본다. “지구는 홀로 사유하면서 동시에 태양을 사유하는 탁월한 니체” 라는 시인의 고유한 언어를 번역하면 지구는 자전하면서 동시에 태양을 공전한다는 이치일 것이다. 읽는 이도 상상력의 날개를 달고 우주의 질서를 언어의 유희로 즐겨보기를 권한다.
그날은 구례지역의 폭우로 물난리 속에 축사를 탈출한 10여 마리의 소들이 살기 위해 한 시간 가량을 아스팔트 산길을 따라 해발 531m의 사성암에 오른 날이기도 했다. 빗물에 흠뻑 젖은 소들은 사성암 유리광전 아래쪽 마당에서 풀을 뜯어 입매를 하며 얌전히 쉬었다고 한다. 누구 하나 뛰놀거나 큰 울음소리 내지 않았다. 그날, 우리의 모임도 사성암에 모인 소와 같았다. 코로나19와 폭우를 피해 더 좋은 시를 쓰며 살기 위해 모인 자리였다. 그 이후 ‘거리두기’로 근 1년을 모임을 갖지 못하다가 백신접종을 한 후, 박분필 시인의 초대로 2021년 7월 21일 백운계곡에서 모였다. 첫 회장이었던 이혜선 시인의 뒤를 이어받은 이섬 시인이 다시 정복선 시인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이취임식, 그리고 이섬 시인의 시집 『낙타에게 미안해』 출간 축하를 겸하는 자리가 되었다. 2021년 11월 24일에 대학로에서 모여 유유 제2집 출간에 관한 세부사항을 논의하고 마로니에 공원에서 동인지에 실릴 사진촬영도 했다. 이제, 우여곡절 끝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이 풍토병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라는 예측도 조심스레 나오고 있다. 〈유유〉 동인들도 “그대 가슴 속 환히 밝히고 싶어” 유유 제2집 『날마다 피어나는 나팔꽃 아침』을 발간하게 되어 기쁘기 그지없다. 이 자리를 빌려 동인지의 해설을 쓰기에는 여러모로 필자의 식견과 필력이 턱없이 얕았음을 고백한다. 부디 혜량(惠諒)하는 마음으로 읽어주시고 사랑해주시길 부탁드린다. ----주경림 동인 해설, [유유하게, 면면이 유장하게]에서
----김현지 외 유유동인 시집, 『날마다 피어나는 나팔꽃 아침』,도서출판 지혜 값 10,000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