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랍비여 나는 아니지요?(마26:17-25)
오늘 본문을 보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17절에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유월절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무교절은 니산월 15일부터 21일까지 7일간 지키는 절기로 이 기간동안에는 누룩없는 떡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무교절과 유월절 절기는 모두 출애굽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던 중 모세에 의해 그곳에서 나오게 됩니다. 애굽의 바로왕은 여러 차례 보내주겠다고 약속을 했다가 번복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마지막 열 번째, 장자를 치시는 재앙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침내 애굽 땅을 빠져 나오게 됩니다. 하지만 언제 바로의 마음이 바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매우 급하게 그곳을 빠져나오게 되는데 얼마나 급했던지 발효되지 않은 떡이 담긴 그릇을 어깨에 메고 탈출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에 누룩없는 떡을 먹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즉 애굽을 탈출할 때 누룩을 부풀릴 시간이 없을 정도로 매우 긴박한 상황가운데서 탈출해야만 했던 것을 기억하며 누룩없는 떡을 먹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유월절 잡수실 것을 어디서 예비해야 할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나오는 '무교절 첫날'은 언제를 말하는 것입니까? 사실 '무교절 첫날'이 정확하게 언제냐? 에 대해 약간의 논란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복음서의 전체 내용을 고려해볼 때, 이날은 고난주간 목요일에 해당되며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는 날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나라에서 명절이 다가오면 집안에 모여 음식을 장만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우리는 주로 전을 붙히고 나물을 무치고 생선을 굽고 하지만 이들은 누룩없는 떡 외에 유월절 어린 양을 잡아 고기를 준비하고 떡과 포도주 그리고 쓴 나물도 준비를 합니다. 그러므로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양고기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출애굽을 할 수 있었던 직접적인 계기가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우슬초에 적셔 인방과 문설주에 뿌렸기 때문입니다.
출애굽의 결정적인 사건은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 중에 가장 마지막 재앙인 장자재앙이었습니다. 애굽에 있는 모든 생명의 초태생은 다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것은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각 가정의 대문의 인방과 문설주에 뿌리면 하나님의 사자가 그 피를 보고 그 집은 그냥 넘어가셨습니다. '유월', 패스오버(Passover) 즉 '지나간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은 것처럼 어린양의 피를 보고 죽음이 통과했던 구약의 출애굽의 역사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유월절 주간 목요일 오후에 어린양을 잡아 성전에 가서 그 피를 뿌리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후, 그 밤에 양고기를 먹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런 유월절 의식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오후동안에 이 모든 것을 준비해야하기 때문에 제자들은 시간을 지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유월절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예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하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18절에 "이르시되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유월절을 어디에서 준비해야 할지를 물었을 때, 주님의 대답은 '성안 아무에게 가서'라고 했습니다.
생각하기엔 주님이 너무도 무책임하고, 대책없는 말씀을 하시는듯 합니다. 그러나 '성 안 아무에게 가서'라는 말은 '성 안에 있는 아무에게나' 가서 얘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아무에게'라는 말은 단지 이름만 밝히지 않았을 뿐, 미리 계획에 의해 준비되어진 인물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자들이 성안에 들어갔을 때, 이 사람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을 보면 이 사람에 대해 좀 더 자세히 기술하고 있는데 누가복음 22장 10절을 보면 "이르시되 보라 너희가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가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사람'은 '남자'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대개 물동이는 여자들이 이고 다닙니다. 그런데 남자가 물동이를 이고 지나가고 있다면 제자들은 그 사람이 예수님께서 말씀한 사람임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에게 '아무에게나'가 아니라 이 일을 위해 예비해놓으신 그 사람에게 가서 유월절 만찬을 준비토록 말씀하신 것입니다. 생각건대 이 사람은 자신이 이 귀한 일에 쓰임을 받을 줄 꿈에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여인이 귀한 향유 옥합을 깨트려 주께 드렸을 때, 그 일이 주님의 장사를 준비하는데 쓰임을 받았듯이, 물동이를 이고 가던 이 사람도 주님의 사역을 위해 준비되어진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이름이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유월절 음식을 준비하여 주님의 마지막 만찬에 쓰임을 받게 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 쓰임을 받는 일에 이름이 밝혀지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높은 자리에 앉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정성껏 준비한 것들이 주님을 위해 귀하게 쓰여 진다면 그것으로 그저 만족하며 감사하는 모습이야말로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 아닐까요?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합 3: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박국 선지자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어도 하나님 그분으로 인해 기뻐했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즐거워하고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름이 밝혀지지 않아도, 명예를 얻지 못해도, 인기를 얻지 못하고, 성공하지 못해도, 주님 그분께 쓰임을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기뻐하실 수 있습니까?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그래서 19절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께서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사실 주님의 말씀 앞에 그대로 순종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구체적으로 이름을 언급하신 것도 아니고, 설령 물동이를 이고 가는 남자라고는 하지만 그 사람을 성안에서 바로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일일뿐 아니라 꼭 물동이를 이고 가는 사람이 한 사람 밖에 없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시키는 대로 행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주님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구구절절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주님의 말씀이기에 말씀에 의지하여 그들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베드로가 고기를 잡기 위해 밤이 맞도록 수고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했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베드로의 지식과 경험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때 수 십년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던 지식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어떻게 체험합니까? 주님의 말씀대로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말씀 앞에서는 그대로 순종하려는 자세가 필요할 뿐입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볼 때 뭔가 좀 맞지 않는 것 같아도,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내 생각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 해도, 그저 시키는 대로 행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만약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에 조목조목 따지고 물었다면 결국 그 날, 유월절 음식 준비하는 것은 실패로 돌아가 버렸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일이 필요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순종하려는 마음 없이 이것저것 핑계를 대고, 이유를 따져 묻는다면 결국 주의 일에 쓰임을 받기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만찬이 시작됩니다. 20절에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라고 했습니다.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한 사람의 헌신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만찬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내일 새벽이면 로마군병들에게 붙잡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고전 5:7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바로 우리 예수님이 유월절의 어린양이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출애굽역사에 유월절의 어린양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유월절 전날 저녁에 열두 제자가 함께 주님과 나란히 앉았습니다. 그 때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면서 아무도 예견하지 못했던 엄청난 말씀을 그들에게 하십니다. 21절에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식사 중에 주님은 느닷없이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 것"이라는 충격적인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이것은 실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과 같은 말이었습니다. 자신들 중에 누군가가 예수를 팔아넘긴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제자는 너무 떨려서 들었던 숟가락을 떨어뜨렸을지 모릅니다. 어떤 제자는 너무 황당해서 입을 벌린 채 다물지 못한 상태였을지 모릅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제자는 너무 기가 막혀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있었을는지 모릅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제자들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22절에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아마 '주여 나는 아니지요‘ 라는 질문은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 한명의 제자들의 물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설마 내가 주를 파는 사람은 아니겠지요?' 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물론 '주여 나는 아니지요'라고 물은 사람들 중에는 주님을 팔 자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입니까? 마 16:16에서 베드로의 고백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처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신앙고백입니다. 이렇게 신앙고백했다는 것은 구원받았다는 증거입니다. (롬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예수를 주로 시인한다는 것이 이 만큼 중요합니다. 주권이 바뀌었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나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들은 결코 예수님을 팔아먹지 않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당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내놓으시는 예수님앞에서 어떻게 자기 유익을 구하고 예수님을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누구보다 자신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학교에서 물건 도난 사건이 가끔 발생합니다. 그때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모두 눈을 감게 하고, 하시는 말씀이 "나는 누가 그랬는지 다 알고 있어, 지금이라도 솔직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손을 들면 용서해주겠어, 그리고 가져간 물건은 조용히 주인에게 돌려주기를 바란다, 그러면 아무 일 없었던 것으로 넘어가겠지만 끝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전체가 다 벌을 받을 줄로 각오해!"
선생님이 "누가 그랬는지 나는 다 알고 있다"고 말씀하셔도 한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학생은 아무 꺼리낄 것이 없습니다. 그 말에 주눅이 들거나 불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요? 자신이 아니란 것을 본인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열 한명의 제자들도 꺼리낄 것이 없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누가 그렇게 팔 것인지 알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해도 적어도 그런 계획이나 생각을 가지지 않았던 열 한명의 제자들은 주눅이 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주여 나는 아니지요?'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아니지요', '설마 내가 주님을 파는 사람이 아니겠지요?'라고 말한 것입니다. 왜 이렇게 말한 것일까요? 물론 우리는 여기서 그들이 적어도 주님으로부터 '그래 너희는 아니다'라는 말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 물음이 자신들도 주님을 배반할 수 있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말이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장담했던 베드로가 주님을 자그마치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바울을 따라 나섰던 데마도 결국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장담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만큼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장담하기에 앞서서 여기 제자들처럼 '주여 나는 아니지요?'라는 건전한 자기 의심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좀 더 자신의 정확한 신앙의 현주소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매에는 장사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운동선수 특히 권투선수 가운데 맷집이 좋다고 자랑하는 선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맷집이 좋아도 맞아서 쓰러지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에 장담은 있을 수 없습니다. 독불장군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항상 겸손한 모습으로 자신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 나는 연약합니다. 주님! 나도 별 수 없는 인간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나는 한 순간도 바로 설 수 없습니다. 주님, 내게 은혜를 부어주소서“ 그때 주님의 말씀은 이러했습니다.
23절에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참으로 알 수 없는 얘기입니다. "그래 네가 나를 팔자다"라고 말씀하셨다면 모든 것이 명확해 질텐데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들은 제자 중 누가 그릇에 손을 함께 넣겠습니까? 의식적으로라도 함께 손을 넣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지금 그렇다는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미 제자들은 모두 그릇에 함께 손을 넣었기 때문입니다. 좀 더 부연설명을 드리자면 여기서 그릇은 과일을 으깬 것과 식초를 혼합하여 만든 일종의 소스를 담은 그릇입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무교병을 먹을 때 떡을 떼어 이 그릇에 담긴 소스에 찍어 먹었습니다. 이 얘기를 하실 무렵은 이미 식사가 진행 중이었고, 그들 중에 대다수는 이 소스에 떡을 찍어 먹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그 그릇에 손을 함께 넣었는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아니 다 그 그릇에 손을 넣었습니다. 이 말씀만으로는 여전히 누가 자신을 팔 것인지에 대해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릇에 손을 함께 넣고 식사를 할 만큼 아주 가까이 있는 사람'이라고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해 평가하기를 24절에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가룟유다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의 생각을 물질에게 빼앗기고 사탄에게 도적질 당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열정적으로 따라다니던 가룟유다가 어찌 이렇게 패역한 제자로 바뀌었습니까? 생각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생각을 공격합니다. 하나님이 분명 우리와 함께 계신대도 불구하고 생각을 공격해서 부정적인 생각,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에 사로잡히게 만듭니다. 이렇게 생각을 빼앗기면 순간적으로 사탄이 그속에 들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 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생각속에 하나님을 모십시오. 하나님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그 외에 다른 생각은 내어쫓으십시오. 그것들은 믿음을 파괴시키는 사탄의 생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가룟유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기까지 가룟유다에게 회개할 기회가 많았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회를 다 놓치고 말았습니다있습니다. 예수님의 충격적인 말씀에 제자들은 모두 놀라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삼 년 동안이나 예수님과 생사고락을 같이 했는데, 과연 누가 예수님을 팔 자란 말인가! 나일까? 아니면 베드로인가, 요한인가, 야고보인가, 유다인가‥‥ 제자들은 서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굉장히 당황했을 것입니다.
이때 놀랍게도 가룟 유다가 제일 먼저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하고 예수님께 소리지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가룟유다의 말을 관찰해보십시오. 그가 예수님을 다른 제자들처럼 ‘주’라고 부르지않고 ‘랍비’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룟유다에게 예수님은 그저 존경하는 인물, 선생이라는 것입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주가 아니라 선생이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처럼 예수님을 어떻게 고백하는냐가 그의 신앙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랍비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그저 입술로만 주여주여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삶의 주권을 주님께 드리고 주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러한 가룟유다는 지금 자기는 절대 아니라는 자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아무도 말을 안하고 있으니 그 침묵을 견딜 수가 없어서 자기는 아니라는 사실을 다른 제자들보다도 먼저 모든 사람에게 알려 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명확하게 누군지를 밝히지 않습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애매 모호한 말씀만 자꾸 하십니다. 그럴 때 누가 제일 견디기 어렵겠습니까? 예수를 팔기로 작정한 '가룟유다' 자신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팔아넘길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이 알려질까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라고 말한 것입니다.
아마 그가 기대하고 있었던 것도 '주여, 나는 아니지요?'라고 다른 제자들이 질문했을 때 주님이 대답하신 것처럼 자기의 질문에 대해서도 애매하게 대답함으로서 자신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싶었을 것입니다.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라는 말로 자신의 배신을 숨기려 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이며 말입니까? 주님은 가룟유다의 모든 생각과 행위를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가룟유다가 나를 팔자다'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 것이다'라고만 말씀하신 이유는 그에게 뉘우칠 기회를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뉘우치기는 커녕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라는 말로 자신을 방어하려고 했습니다. 여러분! 주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숨기려 하는 가룟유다의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아니 그 자리에 있던 제자들에게 들키지 않으려는 가룟유다의 행동이 얼마나 초라합니까?
유다의 생각대로 어쩌면 그곳에 있는 제자들에게는 들키지 않을 수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주님이 대답을 하시지 않거나 애매모호하게 답변을 하시면 그냥 어물쩡 그 자리에서의 위기를 모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유다가 3년이란 세월을 주님을 따라다녔건만 주님을 몰라도 너무 몰랐습니다. 사람에게 들키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까? 주님이 아시는데,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데, 사람에게 들키지 않는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지는 것입니까?
우리의 신앙을 사람들 앞에서 포장해 보일 수 있습니다. 저의 모습을 여러분에게 거룩하게 포장해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눈을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주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면서 우리의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들키지 않는 것이 곧 주님에게 들키지 않는 것으로 알면 너무도 큰 착각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룟유다는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라는 말로 자신의 엄청난 계획을 숨기려 했습니다. 그때 주님의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25절에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네가 네 입으로 말하였구나'라고 하셨습니다. 가룟유다는 여러 차례 회개할 기회를 놓쳤습니다. 아니 의도적으로 회피했습니다. 그 결과 그의 정곡을 찌르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가룟유다처럼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라는 질문으로 자신의 죄에 대해 주님 앞에서 변명하려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감추려 애를 써도 감추어지지 않는 것이 우리의 죄입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주여! 바로 접니다. 제가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은 즉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사실 고기를 많이 잡은 것과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에는 별 상관이 없는 듯 보여집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되면 자신이 죄인임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가룟유다가 예수가 누군지를 알았더라면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라는 자기 변명보다는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고백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필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유월절을 맞이하고 계십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의 삶은 어떠한가를 생각해 봅시다. 과연 '주님 제가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이 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하며 주님 앞에 변명하며 적당히 얼버부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물과 피를 흘리시고 구원해주신 우리 주님앞에 우리 모두는 지금 서 있습니다.
그 피가 묻어있는 우리가 아직도 변명하고 합리화시키고 서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 앞에 나를 다 내려놓고 죄인 됨을 인정하고 주님의 은혜를 구함으로 오늘 그 은혜 속에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