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욥기3:11~19
11.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12.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젖을 빨았던가
13.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
14.자기를 위하여 폐허를 일으킨 세상 임금들과 모사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요
15.혹시 금을 가지며 은으로 집을 채운 고관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
16.또는 낙태되어 땅에 묻힌 아이처럼 나는 존재하지 않았겠고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 같았을 것이라
17.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피곤한 자가 쉼을 얻으며
18.거기서는 갇힌 자가 다 함께 평안히 있어 감독자의 호통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19.거기서는 작은 자와 큰 자가 함께 있고 종이 상전에게서 놓이느니라
<설교>
사람은 누구나 천국을 원합니다. 기독교인들도 예수를 믿기에 죽으면 천국에 가는 것을 당연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천국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인에게는 허락되었다고 생각하겠지만 기독교인 또한 인간이기에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면 인간에게 허락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죽음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죽음이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의미한다는 것을 간과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작 저주와 심판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는 조건을 내세워 저주와 심판의 세계인 죽음은 건너뛴 채 천국을 상상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의미를 알지 못한 사람은 천국을 단지 고통이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곳으로만 상상하기 십상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천국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천국을 아는 것은 죽음에 담긴 인간의 저주와 심판을 알게 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천국은 저주와 심판에서 구출된 사람들로만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욥은 죽음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본문의 내용에서 잘 드러납니다. 생일을 저주했던 욥이 이제는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않은 것을 두고 탄식 합니다. 아예 모태에서 죽어 나왔다면 지금과 같은 고통을 겪지 않았을 것이고 무덤에서 편히 쉬고 있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욥의 이런 생각은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젖을 빨았던가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11-13)라는 내용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즉 욥은 죽음을 심판과 저주의 시각이 아니라 ‘삶이 없으면 고통도 없다’는 시각에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욥이 고통이 없는 삶을 행복으로 여긴다는 의미도 됩니다.
과연 그럴까요? 삶에 고통만 없다면 행복할 수 있을까요? 사탄이 욥을 치기 전에는 욥의 삶은 평안 그 자체였습니다. 열 명의 자식과 넘치는 소유가 울타리가 되어 부요와 평안을 누렸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삶을 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욥이 재앙으로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리기 전에는 행복을 누린 것입니까? 아마 우리에게는 그렇게 생각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인생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탄에게 욥의 모든 것을 치되 허락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생명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욥의 목숨을 허락하지 않으신 것이지만 욥에게 하나님이 하고자 하신 일을 생각하면 욥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사탄이 훼방할 수 없게 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탄이 욥을 침으로써 욥이 죽는다면 욥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사탄에 의해서 훼방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욥은 하나님에 의해 붙들려 있습니다. 이것이 죽음이 허락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의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참된 의미는 고통이 없는 삶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붙들려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통이 없는 삶을 원합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의 동일한 기대이고 소원입니다. 고통은 현재의 삶을 무너뜨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고통이 없는 평안을 누리고 싶어 합니다. 이것을 목적으로 신을 찾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살아가는 신자로서 좀 더 깊은 생각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은 고통이 없는 삶이 우리에게 남기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고통이 없는 삶이 우리에게 남기는 것은 무엇일까요? 고통이 없는 삶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거나 나의 무가치함을 알게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평안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잘 하는 자신에 대한 우월감으로 기울어질 위험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고통이 있게 되면 자연히 현재의 형편에 대한 불만과 불평을 하게 됩니다. 고통이 크다면 욥처럼 생일을 저주 할 수 있고 차라리 죽어 태어나는 것이 좋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모습에서 내가 주를 믿고 사랑하는 자가 아니었고 오히려 미워하고 핍박한 자였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이 죽음의 존재임을 아는 것입니다.
욥은 죽음을 고통에서 벗어나는 평안의 상태로 생각합니다. 죽어 버리면 어쨌든 현재의 고통과는 무관하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태어날 때, 아무런 의식도 없는 상태일 때 죽어 나왔다면 지금의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될 것이고 평안이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죽음에 대한 욥의 시각이 잘못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죽음에 대한 욥의 시각은 “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피곤한 자가 쉼을 얻으며 거기서는 갇힌 자가 다 함께 평안히 있어 감독자의 호통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거기서는 작은 자와 큰 자가 함께 있고 종이 상전에게서 놓이느니라”(17-19절)는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욥이 말하는 ‘거기서는’은 죽은 자의 세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욥이 생각하는 천국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욥은 죽은 자가 가는 ‘거기’를 악한 자가 없고 쉼과 평안이 있으며 작은 자와 큰 자, 종과 상전이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마도 기독교인의 대다수도 천국에 대해 이렇게 상상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상상일 뿐 천국의 실상은 아닙니다.
전도 1:3절에 보면 낙태된 자가 그보다 낫다는 말을 합니다. 또 5절에서는 낙태 된 것이 살아있는 것보다 평안하다고 합니다. 솔로몬의 말에 비춰 보면 욥의 말도 맞다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고통이 있는 삶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누린 평강과 영화의 삶에 대한 평가를 한 것입니다.
전 6:1-6절의 내용은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모든 소원을 부족함이 받아 누리고 백 명의 자녀를 낳고 장수하고 산다 해도 영혼이 그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하면 차라리 낙태된 자가 그 모든 것을 누리고 산 것 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즉 만족이 없는 삶에 대한 평가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욥은 재앙이 오기 전에는 평강을 누리며 그 영혼이 행복했을까요? 그렇지 못했을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께 범죄 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만약 욥이 만족을 했다면 범죄 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는 자신에 대한 만족이지 삶에 대한 만족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재앙을 당하기 전의 욥에게는 평안은 있었지만 행복은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 33:29절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을 가리켜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유는 여호와의 구원을 얻은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구원으로 인한 행복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언제나 현실로 향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욥도 고통이 없는 현실을 행복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차라리 죽어 태어났다면 평안했을 것이고 그것이 더 행복했을 것이라고 탄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죽음에 담긴 의미를 모르는 무지한 자의 탄식일 뿐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욥은 죽음의 상태를 고통에서의 해방으로만 생각하지만 죽음은 저주와 심판의 현장입니다. 따라서 욥이 죽어 태어났다면 편히 쉬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을 저주와 심판에 속한 죽음의 존재로 보지 않는다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욥이 비록 악에서 떠난 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해도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현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 문제는 도외시하고 욥처럼 죄를 범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잘하면 복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죽음을 알지 못하는 자의 헛된 생각으로 결론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요 5:28-29절에 보면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말씀합니다.
무덤 속에 있다 해서 편히 쉬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면 영원한 고통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선한 일을 행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합니다. 그들만이 생명의 부활로 나오게 되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은 자임을 아는 것이 행복입니다.
(신윤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