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화도 회군에서 동학농민혁명까지,
조선을 뒤흔든 ‘결정적 순간’
‘결정적 순간’은 사진예술론에서 어떤 상황이나 인물의 진수라 할 만한 순간을 직관적으로 포착하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프랑스의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사진집 서문에서 처음 쓴 이 말은 이후 브레송의 예술관을 상징하는 개념이자 가장 뛰어난 사진예술론의 하나가 되었다. 『역사 콘서트』의 부제는 ‘황광우와 함께 읽는 조선의 결정적 순간’이다. 저자는 위화도회군에서 동학농민혁명까지 시대를 뒤흔들고 일으켰던 조선의 혁명적 리더들, 그들의 ‘결정적 순간’을 포착한다. 정도전은 왜 이성계의 함주 막사를 찾았고 이성계는 왜 위화도에서 말머리를 돌렸는지, 세종대왕은 왜 17만 명의 농민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여론조사를 벌였는지, 이순신은 왜 그토록 공격받으면서까지 왕명을 거부했는지, 정조는 어떻게 단 한 명의 백성도 공짜로 부리거나 국고를 축내지 않고 화성을 세웠는지, 이 밖에 이방원(태종), 세조, 정인지, 성삼문, 조광조, 서경덕, 이황, 조식, 이이, 선조, 송덕봉, 서산대사, 허균, 김육, 송시열, 숙종, 영조, 박문수, 이익, 홍대용, 박지원, 임윤지당, 신재효, 황현, 비숍, 유계춘, 전봉준… 무수한 민중들은 왜 그때 그런 선택과 행동을 했는지, 왕과 선비뿐 아니라 여성과 노비에 이르기까지 조선 시대를 이루었던 인물들의 결정적 순간을 특유의 힘 있는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낸다. 이 여정에서 독자는 역사에 기록되었으나 누구도 잘 알지 못했던 ‘뜨거운’ 우리 역사의 진면목을 『역사 콘서트』로 만나보게 된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잃어버린 ‘나의 역사’를 찾아
비숍의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을 읽은 그날 밤 시인 김수영은 잃어버린 역사를 다시 만났다. 그랬다. 우리는 역사를 잃어버린 민족이었다. 고아가 잃어버린 부모를 만나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저 부모를 부둥켜안고 우는 것뿐이다. 그래서 시인은 그날 밤 휘몰아치는 영혼의 떨림을 그렇게 노래했던 것이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_‘서문’ 중에서
책(서문)은 김수영의 시로부터 시작한다. “나는 이자벨 버드 비숍 여사와 연애하고 있다”라는 시구에서 멈춰선 저자는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라는 구절에 이르러선 이해하기 힘든 역설을 느낀다. 그러다 한국어가 있어도 한국어를 배우지 못하고 한국사가 있어도 한국사를 배우지 못하는 한국인, 외국 여성(이사벨라 B. 비숍)이 남긴 기록을 통해서나 비로소 자기 역사를 만난 식민지 시인의 감격을 헤아린다. “그날 밤 김수영은 잃어버린 역사를 다시 만났다.”
저자에 따르면 조선의 역사가 위대한 까닭은 ‘기록’으로 남겼기 때문이다. 500권의 『조선왕조실록』과 3000권의 『승정원일기』를 차치하고라도 선비들이 남긴 문집이 1만 권이 넘는다. 『역사 콘서트』는 저자가 20년 동안 수많은 사료와 문헌들을 섭렵하며 역사와 마주하고 재해석·재구성한 결과물이다. 김수영이 잃어버린 역사를 만난 환희를 시로 남겼듯, 저자는 스스로 구하고 캐내 정성스럽게 살핀 ‘나의 역사’를 두 권의 책에 오롯이 담았다.
투쟁의 역사 Vs 기록의 역사
식민사관과 영웅사관을 넘어
인간은 두 역사를 갖는다. 하나는 살며 사랑하고, 소유하며 투쟁하는 역사이고 다른 하나는 그 삶을 기록하는 역사다. “지금까지 모든 철학은 세계를 해석해왔다. 이제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라는 금언 그대로 나에겐 오직 세계를 변화시키는 투쟁만이 의미가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삶을 기록하는 일이 투쟁 못지않게 비중 있게 다가온다. 아니, 투쟁의 역사보다 기록의 역사가 더 중요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_2권 ‘에필로그’ 중에서
인간은 투쟁하는 역사와 기록하는 역사를 갖는다. 투쟁은 10년의 현실을 바꾸지만, 기록은 100년의 역사를 바꾼다. 현실을 변화시키는 ‘투쟁’만을 의미 있게 여기던 사람이라도 역사와 온몸으로 만나고 나면 삶을 어떻게 ‘기록’하고 기억할 것인가가 삶만큼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저자는 시종일관 ‘식민사관 넘어서기’를 강조하면서 동시에 그것의 어려움을 상기한다. 국토의 아름다움을 예찬하거나 문화재를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거나 영웅을 찾아 칭송한다고 해서, 나아가 우리 국토의 영역이 더 광활하다고 주장하거나 한국 상고사를 보강, 민족주의가 강화된 교과서를 배포한다고 해서 식민사관을 넘어서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당장 『조선왕조실록』부터 찾아 읽어보라고 권한다. 세종은 왜 비밀리에 훈민정음을 창제했고 『동국정운』을 편찬했을까.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사진만 찍지 말고 한 번쯤 「세종실록」을 살펴봐야 한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뜨거운 민중
역사의 주인공이 되다
기존의 많은 역사서가 왕과 선비의 역사에 치중했다면 이 책은 평민과 노비, 여성의 역사를 두루 담고 있다. 저자는 양반의 100결 규모의 농장은 소작농과 노비의 땀 없이는 하루도 운영되지 않았고, 해전의 승리를 이끈 거북선은 이순신이 아닌 목수가 만들었고 64명의 격군이 번갈아 저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정조가 죽고 11년 만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을 시작으로 끊임없는 이어진 민란과 1894년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 동학농민혁명을 자세히 다루어 외세의 침략 못지않게 민의를 돌보지 않은 무능한 조정, 이에 저항하는 민중의 분노가 ‘스스로’ 파국을 결정지었음을 강조한다.
혁명과 개혁을 단행한 각계각층의 리더십과 주체적인 민중의 봉기에 대한 저자의 관점을 많은 분량에 할애했다.
지배자들이 당대의 문제를 외면하면 민중이 고통받는다. 나는 보았다. 진주민란과 동학농민혁명을 보았다. 그때 일어선 민중은 제 한 목숨 살고자 일어선 소인배가 아니었다. 모두가 세상을 바꾸자고 일어선 호민이었다.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역동적 역사였고, 역동적인 민족이었다. 평시에는 제 잇속만 차리는 것으로 알았던 그 어리숙한 민중이 한번 일어서니, 화산이 되고 해일이 되어 못된 세상을 휩쓸어버리는 모습을 나는 지난 역사에서 보았다. 우리 민중에겐 그 힘이 있다. 이것이 『역사 콘서트』가 보여주는 가르침이다. _2권 ‘에필로그’ 중에서
누구의 시선으로 어디를 바라볼 것인가
역사적 사건을 둘러싼 다양한 접근
역사는 주체의 시각과 의도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고 구성될 수 있다. 저자는 실록에 전하는 정치사 외에도 여러 문헌과 사료를 살펴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다각도에서 접근한다. 임진왜란을 이야기할 때는 「선조실록」을 중심으로 서술하면서도 해상에서 치열하게 싸운 명장 이순신의 시각(『난중일기』)과 왜란 당시 산으로 도망가 숨어 살았던 선비 오희문의 고백(『쇄미록』)을 보여주면서 동시대 인물들의 뿌리는 같지만 결이 다른 고뇌를 섬세하게 들여다본다.
주관성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조선왕조의 인물을 세계사의 인물과 비교하기도 한다. 정도전과 플라톤, 태종 이방원과 당 태종 이세민, 이순신과 그리스의 테미스토클레스, 서경덕과 코페르니쿠스, 조광조와 토머스 모어, 정조와 루이 16세, 판소리의 집대성자 신재효와 호메로스를 비교함으로써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를 세계사적 지평 위에서 서술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한국사 해석과 기록에 관한 논란이 불거지는 요즘, 각자가 스스로 시작할 수 있는 노력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역사 콘서트』를 통해 식민사관과 영웅사관을 넘어 비로소 ‘나의 역사’를 찾는 과정을 가늠해보길 권한다. 마지막 책장을 넘기고 흥미진진한 콘서트의 막이 내리면, 더 찾아보고 톺아보고 싶은 실록의 한 페이지, 역사의 결정적 순간이 한둘쯤은 떠오르지 않을까. 역사는 계속된다. 콘서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책의 특징
1. 흥미로운 구성
조선사 500년의 거대한 흐름을 한 축으로 설정하고, 시대를 뒤흔든 핵심 장면에서는 잠시 시간을 멈춰 세워 당시의 치열했던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의 고뇌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또한 구성을 재배치해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사건에 몰입할 수 있다. 대부분 책이 이성계를 중심으로 조선의 건국을 이야기했다면, 이 책은 조선의 정신을 설계한 정도전의 유랑의 한순간을 조명하면서 그의 고뇌가 이성계와의 만남으로 이어지고 두 사람의 결합이 조선의 건국을 이루는 과정을 흥미롭게 구성했다.
2. 이해를 돕는 보충설명
본문 중간에는 박스와 표를, 각 장 말미에는 ‘Tip’을 넣어 본문의 흐름을 끊지 않으면서 보충설명을 더하는 장치를 두었다. 하나의 예로, 세도가들에 맞서 이성계가 추진한 과전법을 설명하기 위해 1401년에 태어난 덕칠이네 집안 이야기를 들려준다. 국가가 토지를 소유하면서 농작물 수확의 절반 가까이 내던 세금이 십 분의 일로 줄어들게 되자 삶이 어떻게 개선되는지를 생생한 대화체로 풀어냈다.
3. 한눈에 들어오는 그래프와 지도,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는 일러스트
조선 후기 인구변동과 노비 증감표를 보여주는 그래프와 위화도 회군로, 임진왜란 해전도, 동학농민군의 진로와 격전지 등을 그린 지도를 넣어 정보가 한눈에 들어오도록 했다. 그뿐만 아니라 일러스트 작가가 그린 조선의 인물과 그들의 결정적 순간을 담은 삽화를 본문 곳곳에 배치해 이야기의 몰입을 높이고 시선의 리듬을 주고자 했다.
4. 다양한 독자층이 즐길 수 있는 책
저자 특유의 위트와 통찰이 담긴 스토리텔링을 따라가며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한국사를 처음 접하는 입문 독자에서 청소년, 학생, 역사 분야의 관심 독자까지 다양한 독자층이 즐길 수 있다.
‘왕조실록’, 그거, 왕들의 일기장 아냐?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만나고 싸우고 연대하여 만드는 것이 인간의 역사이거늘 그 역사를 한두 명의 왕과 장군의 이야기로 대체하는 것, 이른바 영웅사관에 입각한 왕조 이야기를 비판하는 볼멘소리다. 그렇다. 나도 예전엔 영웅사관을 싫어했다. 나도 역사를 왕들의 이야기로 보는 것을 비판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역사는 기록이다. 『조선왕조실록』을 왕들의 일기장으로 치부하고 나면 우리에게 남는 것이 무엇일까? 『조선왕조실록』이 있기에 조선은 역사를 남긴 왕조가 되었다. _‘프롤로그’ 중에서
결국 이성계는 스스로 회군하기로 결심했다. 이성계는 장수들을 이렇게 설득했다.
“만일 명나라 영토를 침범함으로써 천자로부터 벌을 받는다면 즉각 나라와 백성들에게 참화가 닥칠 것이다. 내가 이치를 들어서 회군을 요청하는 글을 올렸으나 주상께서는 잘 살피지 않으시고 최영 또한 노쇠해 말을 듣지 않는다. 이제는 그대들과 함께 직접 주상을 뵙고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자세히 아뢰고 측근의 악인들을 제거해 백성들을 안정시켜야만 한다.”
군 서열로 보면 조민수가 이성계보다 위였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장수가 이성계를 따랐으므로 조민수 역시 이성계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성계가 군대를 돌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우왕과 최영은 황급히 서경에서 개경으로 돌아왔다. 이성계는 천천히 남하했다. 6월 2일 이성계의 군대가 개경성을 둘러쌌고 6월 27일에 도성 안으로 들어가 최영을 체포했다. _41쪽
역시 세종이었다. 세종의 정책 결정에서 밀어붙이기란 찾아볼 수 없었다. 거꾸로였다. 묻고 또 물었다. 과거 시험에서만 물어본 것이 아니라 지방의 관리들에게도 묻고 농민들에게까지 물었다. 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중앙의 관료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17만여 명에게 의견을 물었단다. 평균 10명의 식구가 1호를 구성한다. 17만 명의 의견을 청취했다는 것은 사실 170만 명의 여론을 살폈다는 것이다. 세종 시대의 전체 인구가 500~600만 명이었으니 가히 전 국민적 의사소통이었다. _99쪽
훈민정음이 없는 세상에서 처녀 총각이 어떻게 연애편지를 주고받았을까? ‘나는 너를 사랑해’를 어떻게 옮길까? 이두로 써볼까? ‘나는我隱 너를余乙 사랑해思爲’라고 쓴다면 의미의 전달은 가능하겠지만 사랑의 정조를 전달하는 데는 실패한다. 생각해보자. 훈민정음이 없던 시절 『천자문』을 처음 배우는 학동들이 ‘천지현황天地玄黃’의 뜻과 음을 어떻게 배울까? 서당 훈장의 강의가 아니라면 天이 ‘하늘 천’이고, 地가 ‘땅 지’인 것을 무슨 수로 배우느냐는 말이다. 그러니까 애당초 한자엔 발음 기호가 없어서 한자의 음은 가르치는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발음의 대혼란, 그것이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 한 또 하나의 이유였다. _109쪽
선비들은 주사위의 숫자만큼 위로 오르길 선택하는 반면 퇴계 이황은 주사위를 던져놓고 자기 마음대로 움직인다. 남들이 싫어하는 외직을 자청하여 단성 군수, 풍기 군수를 선택한다. 형조참의를 거부하고 은일로 내려가는 것이다. 조선 500년 왕조사에서 참으로 기이한 선비가 나온 것이다. 새장의 안과 밖을 제집 드나들듯 자유롭게 드나든 퇴계 이황. 그는 난진이퇴難進易退, 즉 나아감은 어렵게 하고 물러섬은 쉽게 함으로써 조선 선비의 품격을 한껏 높인 선비였다. _193쪽
2권
“지배자들이 당대의 문제를 외면하면 민중이 고통받는다. 나는 보았다. 진주민란과 동학농민혁명을 보았다. 그때 일어선 민중은 제 한 목숨 살고자 일어선 소인배가 아니었다. 모두가 세상을 바꾸자고 일어선 호민이었다.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역동적 역사였고, 역동적인 민족이었다. 평시에는 제 잇속만 차리는 것으로 알았던 그 어리숙한 민중이 한번 일어서니, 화산이 되고 해일이 되어 못된 세상을 휩쓸어버리는 모습을 나는 지난 역사에서 보았다. 우리 민중에겐 그 힘이 있다. 이것이 『역사 콘서트』가 보여주는 가르침이다.” _‘에필로그’ 중에서
거북선은 목수가 만들었다. 그러면 거북선은 누가 저었을까? 거북선을 저은 것은 장군들이 아니다. 뱃사공들, 정확히는 격군들의 무쇠 같은 팔뚝이 저었다. 거북선 한 척에는 16개의 노 가 설치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2인 1조가 되어 노를 저었으니 거북선 은 32명의 격군에 의해 진격했던 것이다. 거북선 밑창에는 이 격군들이 하루 2교대로 노를 젓고 휴식할 수 있는 격군들의 방이 마련되어 있었 다. 그렇다면 거북선은 64명의 격군의 힘으로 진격했던 것이다. _24쪽
“호남이 아니었다면 조선은 없었을 것”이라는 이순신의 유명한 말처럼 임진왜란을 막은 것은 이순신과 더불어 싸운 민중들, 진주에서 광양을 거쳐 여수와 순천, 곡성과 옥과, 광주와 나주와 영광, 해남과 완도와 진도, 강진과 보성과 장흥에서 이름 없이 싸우다 스러진 민중들이었다. _26쪽
여기 한 명의 반성하는 선비가 출현했다. 지난 350년 선비의 삶과 사상을 총체적으로 반성하고 새로운 삶, 새로운 사상을 모색하는 정직한 선비가 드디어 나왔다. 역사는 이 사람을 보려고 얼마나 오랫동안 인고의 세월을 보냈던가! 그는 이익이다. 그는 제 손으로 농사짓는 선비였고, 제 눈으로 민중의 삶을 직시한 선비였으며, 제 머리로 경전을 읽고 생각한 선비였다. 이익은 농장의 노비들을 다 내보내고 자식들과 함께 손수 농사를 지었다. 또한 붕당과 과거제를 통렬히 비판했고, 사대부의 교조주의를 배격했으며, 실사구시의 새 학풍을 일으켰다. 이제 역사는 성호학파라는 새로운 지식인, 새로운 선비상을 보게 된다. _124쪽
1796년 10월 화성華城이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나는 듯 솟아올랐다. 남쪽과 북쪽의 성루와 장대를 보건대 날아갈 듯 아름답고, 깎아지른 듯 가파르게 잘 쌓았다. 1794년 1월 첫 삽을 떴으니 34개월 만의 낙성식이다. 단 한 명의 인부도 공짜로 부리지 않았다. 조선왕조 역사에 없던 일이었다. 국가의 경비 단 한 푼도 축내지 않았다. 조선왕조 역사에 없던 일이었다. 왕이 솔선수범하여 절약했고 저축한 보람이 있었다. 신기술을 도입한 것도 축성의 공기와 비용을 절감해 주었다. (…) 화성에 가면 정조의 마음을 보아야 한다. 화성은 군사적 거점, 그 이상의 뜻이 새겨진 곳이었다. _1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