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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토아이코의 "뭐가 우습나" 26
何がおかしい(2020 佐藤愛子)
26 뭐가 우습나
"주간 요미우리" 6월 29일호에 전 중의원 법무위원장인 후케 토시이치(福家俊一) 씨의 이야기가 실려 었는데 내용이 재미있어 마침, 함께 있던 젊은 여성들에게 들려 주었다.
“옛 국회와 최근 국회를 비교하면 야유의 질이 달라졌다. 현대의 야유는 저급하다” 며, 후케 씨는 야유라는 것은 본래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전쟁 전, 대장성 장관을 지내고, 2.26 사건으로 암실당한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清 1854- 1936)는 원만한 둥근 얼굴로 "달마 대장상" 이라고 불렸지만 그 다카하시 고레키요가 예산위원회에서 해군의 확장 예산안 제안 사유를 설명한 적이 있었다.
그 설명 속에서 그는 지금 열강제국과 어깨를 나란히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해군력의 증강이 필요한가를 역설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었다. "속담에 도율(桃栗)3년 감(枾)은 8년 이라고 합니다만..." 그러자 그 때 위원석에서 미키 부키치(三木武吉 1884-1956)가 외쳤다.
"달마는 9년…" "이 유모어, 이것이 야유라는 것이다. 요즘은 '멍청한 놈' 이라든지 '무슨 말 지꺼리는거야' 라는 따위 시끄러운 소리 뿐이다. 다른 사람의 연설을 들을 때에는 조용히 경청해야 한다. 그러다가 이거다 싶을 때는 모두가 재미있어 할 짧은 한마디로 의표를 찌르는 것이다. 이것이 국회에서의 야유인 것이다" 라고 후케 도시이치 씨는 말하고 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젊은 여성들에게 소개하고, 함께 웃으려고 하는데 그 젊은 여성들은 정색을 하고 모두가 심각한 얼굴로 나를 처다 보고 있는 것이다. "재미없습니까?" 라고 도리없이 내가 물었더니 한 여성이 말했다.
"달마는 9년이란... 무슨 뜻입니까?" "다카하시 고레키요 라는 사람은 달마를 닮았답니다." "네에...?" 멍한 표정들이다. " '면벽 9년'이라는 말 모릅니까?" "몰라요" "달마는 벽을 향해 9년간 앉아있기를 계속한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는 고사가 있습니다." "아 네..."
"그러니까 달마와 닮은 다카하시 고레키요가 '도율 3년 감 8년'이라고 했기 때문에 달마는 9 년이라고 야유를 한 것입니다." "아 네..." 라는 잘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또 다른 한 여성이 말했다.
"말하자면 복숭아와 밤은 3년 걸려 열매를 맺고 감은 결실을 보는데 8년이 걸린다... 그렇게 장기간 군비를 증강해 나가자고 다카하시 고레키요가 말했다. 그러자 미키 부키치 씨는 '달마는 9년!' 이라고... 즉, 달마도 9년 걸려 깨달음을 얻었으니 당신도 서둘지 말라는 뜻이 됩니까?"
더 이상 우습지도 재미도 없다. 나는 더 이상 이야기하는 것이 민망해졌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대학의 선생님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 대학의 선생님이 바빴기 때문에, 자료준비를 하지 못한 채 강의에 섰다. 거기서 그 선생님은 학생들을 향해서 말했다,
"오늘은 권진장(勧進帳:가부키18번 중의 하나)으로 시작..." 이 말에 와아 하고 웃어야 할 참인데 아무도 웃지 않는다. 교실 안이 썰렁한 기운이 돌면서 모두들 선생님의 얼굴만 쳐다 보고 있다. "학생들의 웃음을 유도히기 위해서는 권진장(勧進帳)이란 가부키극에 대한 설명부터 하지 않으면 않될 것 같습니다." 라고 선생님은 말했다.
"--아주 옛날에, 아버지 미나모토 요리모토(源頼朝 1147-1199)에 의해 쫓겨난 미나모토 요시츠네 (源義経)가, 부하인 무사시보 벤케이 및 시텐노와 함께 수행승 모습으로 변장하고 오슈로 가는 도중, 검문소에 다다랐다. 그러나 통행증이 없었기 때문에 진짜 수행승인지를 증명하기 위해 권진장을 외워 보라고 한다. 그래서 벤케이가 백지로 된 권진장을 읽는 흉내를 내어 위기를 면한다고 하는 가부키 18번 중의 하나가 '권진장' 이라는 것이다." 라고 하는 설명을 했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아직 불충분하기 때문에 원래 권진장이라는 것은 절의 불상 건립을 위해 돈이나 공물을 모으는, 그 취지를 기록한 문서이며, 이 경우 벤케이는 남도(南都)에 있는 도다이지(東大寺)의 귄진(勧進-축문) 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읽는 척을 했다 라는데까지 설명을 하지 않으면 않되었다. 즉, "오늘은 권진장으로 시작하겠다고 말한것은, 시전준비 없는 백지교재로 강의를 하겠다, 라고 하는 의미야 라고··
그러나 학생들의 무반응에 맥이 빠져 그기까지 설명할 기분이 나지 않아 그 선생님은 고독감을 곱씹으며 강의를 했다고 한다. "정말로 요즘은, 농담 한마디 하는 것도 상대를 봐가며 해야겠습니다..." 라고 나와 그 선생님은 개탄했다. 그러나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면, 지금만큼 사람들이 잘 웃는 시대는 과거에는 없었던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웃음소리가 넘쳐난다.
더욱이나 텔레비전 방송국의 오락 프로그램은 '웃음꾼' 이라는 아르바이트를 고용하여, 프로그램을 고조시키기 위해 웃음소리를 내게 하고 있다고 한다. 진행자 중에는, 이 웃음꾼을 지휘하는 사람이 있어, 때맞추어 양손을 올려 지시를 하면 웃음꾼은 이에 따라 "와하하하" "껄껄껄" 하고 나름대로의 웃음소리로 보조를 맞추는 것이다.
텔레비전 카메라는 그것이 녹음된 웃음소리가 아니라, 진짜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웃고 있는 객석을 일부러 비추어 보여 준다. 확실히 남녀노소, 큰 입을 벌리거나 혹은 그 입에 손을 대고, 어깨를 흔들거나 몸을 뒤로 젖히기도 하며 객석은 애써 웃음으로 가득차 있지만, 원래 웃음이라는 것이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애써서 웃는 웃음’이라는 것도 묘한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웃음꾼들도 점점 숙련되어
가기 때문에, 저것은 웃음꾼 같지? 아니 진짜 손님 같애, 그럴까? 라는 등 TV를 보면서 웃음꾼의 정체규명에 관심을 가지기도 한다.
어느 날, 문득 본 텔레비전에서 젊은 사람들이, 별로 우습지도 않은 일로 크게 웃고 있어서, 오늘의 웃음꾼은 과잉연기 같다고 하자 아니야 요즘의 젊은 여자아이들은 진짜로 잘 웃어요 라고 하여 놀랐다. 아카시야 산마 (明石家さんま- 희극배우-사회자)가 나와서 뭔가 말하자 "와아" 하고 웃어 졌힌다.
나로서는 무엇이 우습는지, 전혀 모르겠다. "우하하 우하하" 웃어대면, "뮈가 그리 우습나." 라고 화내고 싶어진다. 다케시가 무엇인가 말한다. 또 '우하하' 이다. 나로서는 웃는 기분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뭐가 그렇게도, 숨넘어가듯 웃을 정도로 우습다는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그녀들은 산마나 타케시가 좋기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이 웃기려고 무언가를 말하면, 가령 웃음을 폭발시킬 정도가 아니더라도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웃기려 하고 있다." 고 생각함에 의해, 반사적으로 "핫하하.."하고 웃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젊은 그녀들(혹은 그들)은, 속된 말로 "젓가락이 굴러가도 웃는다." 는 나이라서, "우스운 일을 당해서 웃는다."가 아니라, "웃고 싶다는 욕구때문에 웃는다." 즉 웃는 것은 에너지의 발산이기 때문에, 오락 프로로서는 재미는 없을지라도, 에너지 발산의 계기만 주면 좋은 프로로 평가된다는 사고 때문이 아닐까?
잉여에너지가 없는 나 같은 할머니는 그래서 '뭐가 우습나!' 라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화면 속의 웃음의 소용돌이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겨울 중학교 2년의 S라는 남자 학생이 왕따괴롭힘을 당하고 자살했다는 사건이 있었다. 그 원인 규명 단계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교실에서 그 남자 학생의 장례식 놀이를 했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S군이 죽은 걸로 하자'고 하여 모두가 회람쓰기용 색종에 추도의 말을 돌아가며 쓰게 됐다. 그 추도사 색종이는 다른 학급에도 돌다가 세사람의 교사에게도 돌아게 되었다. 한 명의 교사는 그 추도사 색종이에 '편안하게' 라고 쓰고 다른 한 사람은 '슬퍼요' 라고 썼다.
이 일이 문제가 되었을 때, 한 명의 교사가 한 말이 신문에 게재되었다. "S군의 조문을 위해서라고 부탁받아 한번은 거절했는데, 학생들이 "농담, 농담으로"라고 부탁해서, 써 버렸습니다."
또 다른 교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오락극에 사용한다고 해서 '바보같은 짓 하지 말아 라' 라고 나무랐지만, 결국 '잘가라' 라고 썼습니다."
그것을 읽고 교사의 불식견에 분개하고 있던 사람들은, 더욱더 분노했지만, 나의 분노는 반대로 식었고, 허공에 떠돌던 분노는 갈 곳을 잃었다. ---농담, 농담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렇게 썼다---
명색이 교사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식견없는 말을 할 수 있나 라고 비난하는 것은 간단하다. 그러나 요즘은 '농담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별 볼일없는 사람이다' 라는 것이 대부분의 사회통념과 같은 것이으로 인식되고 있는 세상이다. 어쨌든 재미있는 사람, 남을 웃게 하는 사람이 사랑받고 존경받는 세상이다. 그 내용이 천박하더라도, 말이다.
학생들의 농담에 웃으며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 교사는 학생들의 신뢰를 잃게 된다. 함께 웃으며 웃게 해주는, 말이 통하는 교사가 아니면 학생은 따라오지 않는다. 성실함은 경원받는다. 아니, 미움받는다. 학생들의 인기를 얻지 못해 교육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으려면 교사는 우습지 않아도 학생과 함께 웃는 인간이 되지 않으면 않되는 것이다.
어떤 학교에 초로의 대머리 선생님이 있었다. 이 대머리 선생님은 학생에게 인기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대머리라는 말을 입에 달고 있어 학생들을 웃게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머리!” 라고 학생들이 말해도 교사는 화내지 않았다고 한다. 아니, 말하기 전에, 스스로 대머리라고 광고를 했다고 한다.
만담가처럼 익살꾼처럼 스스로 자신의 대머리를 광고하는 인간적인 '여유'의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학생들은 안심하고 대머리, 대머리를 연발했던 것이다. 그 중에는 뛰어올라, 철썩! 하고 손바닥으로 대머리를 때리는 학생도 나오는 있은 모양이다. 그래도 '아하하' 하고 웃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은 '여유'라는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모든 게 교사로서 살아남기 위한 테크닉, 아니 인내였다. 그는 참을수 없는 어려움을 견디며 ‘좋은 교사’로 남고 싶었던 것이다.
학생들이 농담이라고 해서 장례놀이에 참여하게 된 선생님의 심중을, 나는 그렇게 이해하여 주고 싶다. 그러나 마음 곧고 정의감을 가진 사람들은 “진정한 좋은 교사는 그런 교사가 아니다!” 라고 화낼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여기서 "좋은 교사"의 이상형을 말한다는 것이 도대체 얼마나 도움이 될까? '이상적인 교사'가 되기 위한 '신념'을 갖도록 지금의 젊은 교사들은 그런 환경에서 자라지 않은 것이다.
자신의 장례식 놀이를 당한 S군은, 교실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조의문색종이와 선향과 사탕 그리고 밀감 등의 제물을 보고, "뭐야, 이것" 이라고 말하며 웃음을 띄웠다고 한다 .
나는 이 "웃음을 띄웠다"라는 한 줄을 읽고 가슴이 찢어지듯 했다. 불과 14살의 소년이 자신의 장례식 놀이를 당하고 화내지 않고 웃음을 띈 것이다. 농담이다 농담···. 이라고 그는 자신에게 그렇게 되뇌였음이 틀림없었을 것이다. - 농담이기 때문에 화내거나 울지 말자고.
사건 이후 교육위원회는 정례회의에서 이 문제를 토의했다. 그 자리에서는 “교사 쪽에는 장례놀이에 가담할 마음이 없었나” “괴롭힘과 장난을 구별하지 못할 것 같으면 교육자로서 실격이다” 라는 의견이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세 명의 교사가 특별히 괴롭히는 쪽에 가담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단지 교사들은 '농담'이란 말 한마디에 대한 저항력이 부족했다. 마치 옛날 어사의 마패처럼 "농담"이란 한마디는 상대를 침묵시켜 버렸다.
선생님들은 농담이 통하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학생들과 잘 어울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할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 교사들의 사활이 걸려 있다.
지금은 웃음에 지성이 없어졌다. 웃음의 격조가 무너지고, 웃음도 농담 반의 웃음이 되고 있다. 어디에 진심이 있고 어디까지가 농담인가. 농담이 삶 속에 들어와 베어 있어, 농담, 농담이라며 웃어야 매사가 진척되는 것이다.
함께 웃지 못하면 같은 패거리에 끼일 수 없으니까, 우습지 않아도 와아하고 웃는다. 농담은 더 이상 "여유"가 아닌 것이 되어 버렸니다. 지금은 그것은 살기 위한 몸부림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더욱 웃을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