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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위의 마을'을 향하여
새로 부임한 본당 신부에게 60대 후반으로 보이는 어떤 교우가 명함을 내민다. 이름 자 앞의 직함에 '전 예비역 대령'이라 새겨 있었다. 전역한 지 20년은 족히 지났을 텐데,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 달라는 뜻이겠으나 연민이 인다. 연민이란 현재 보여 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그리고 꿈도 희망도 없는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측은지심이다. 우리는 주변에서 이런 사람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왕년에 내가 ......." 그런 것이다. 이런 이들의 공통적인 모습은 자기 경험과 지식을 절대화하는 태도에 묶여 산다는 점이다. 젊은이들은 언제나 미래를 말한다. 꿈과 희망이 있는 사람들에게서는 생명이 피어나는 모습을 보게 된다. 희망도 꿈도 없이 과거의 궤적을 내세우며 사는 이들의 조울증 같은 것에서는 생명이 시들어 가는 모습을 보는 듯하다. 21세기 우리 교회는 세상에 대하여 미래의 희망을 말하는가? 아니면 전통 유산과 과거 업적에 기댄 권위의 조울증으로 살고 있지는 않은가? 생명이 피어나는 교회인가? 무너진 유적지를 보는 듯한 연민의 교회인가? 차갑게 질문할 때이다.
1. 교회에 부는 바람
우리 교회는 내부적으로 심상치 않은 변화를 목격한다. 새 입교자들의 증가세가 멈추고, 청소년과 젊은이들이 교회를 멀리하고, 주일 미사 참례자와 고해성사 등 성사 참여가 점차 줄어든다. 인터넷 게시판에는 본당 신부의 불합리한 처사에 대한 항의가 오르고, 환속하는 사제의 비율도 증가한다. 뭔가 변화의 기류가 흐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꼭 그에 대한 대응은 아닐지라도 교회는 특수하거나 전문 분야라고 느껴지는 사목에 대한 관심을 갖고 전담 사제를 배치하고 있다. 교회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그래서 교구마다 시노드를 열기도 한다. '교회는 세상에 대하여 무엇인가?' '이 시대에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진지하게 질문하기 시작하는 듯하다.
세상에 대한 교회의 비전은 우리 시대 그리스도교의 존재 이유를 발견하는 데서 얻을 수 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다르긴 하지만 교회는 세상에 대하여 예언자와 교사(敎師)의 모습일 수도 있고 위로와 안식의 모성(母性)일 수도 있고, 빛과 소금일 수도 있고 이상 세계의 비전과 희망일 수도 있을 것이다. '교회가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자문하는 교회는 아직 살아 있는 교회다.
그런데 교회가 자신의 정체성과 시대적 모습에 대하여 고뇌하고 질문하는 것이 어디에서부터 출발한 것이었을까? 단지 교세가 위축되는 위기 상황에 발빠르게 대응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어야 한다. 시대의 징표를 읽는 것, 변화의 진원지인 사회 역사적 실재와 현상들을 분명하게 목격하고 그것들의 발전 방향을 예측하는 것이어야 한다. 방향의 예측은 시대의 발전 가운데 인간과 인간성이 어떻게 위협받고 축소되고 있는지를 추적하기 위한 것이다. 하느님의 관심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시대의 징표를 읽을 수 있는 감각이 살아 있는 교회는 자신의 비전을 마련할 수 있다. 그런데 시대가 어떻게 변하고 있다는 것인가?
2. 세상에 부는 바람
한국 사회, 우리 시대의 성격을 단적으로 표현하면 '개인 중심의 소비 문화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정신과 물질의 두 차원에서 관찰할 때, 첫째는 윤리와 도덕 같은 정신 세계가 완전히 붕괴되어 버린 '정신적 공황의 시대'이며, 둘째는 후기 자본주의의 다른 말이기도 한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에 줄 서 있는 '소비 문화의 시대'이다. 과거는 독재 체제로부터 해방을 추구하던 저항의 시대였다. 그리고 빈곤을 극복하기 위한 노동의 시대였다. 체제에 저항하는 것, 열심히 일하는 것이 사회가 공감하는 덕목이었다. 그러나 이제 대단히 무한정한 자유와 민주주의 시대가 왔고, 빈부의 격차가 심각한데도 물질의 풍요를 구가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그런데 우리 시대는 또 다른 병리 현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저항의 시대에는 민주주의, 통일, 민족, 사회 개혁이라는 대의적 도덕성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행해지는 시위와 단체 행위의 성격은 거의 대부분이 이익 집단들이나 지역 주민, 특정 직업인, 학생 할 것 없이 자신들의 이익을 빼앗기지 않거나 더 확보하기 위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기주의적 성격의 시위는 참가자가 많고, 공익 성격의 시민 사회 단체의 시위는 참가자가 적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집단 행동의 자유화는 민주화 체제 아래서만 가능한 내용들이다. 그래서 군사 독재 시절에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하던 언론과 계층과 집단들이 무서운 결집의 힘을 행사하고 저마다 권리를 주장하며 나서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갈망했던 운동은 이런 극도의 이기심만이 난무하는 병든 민주화의 시대가 도래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우리 사회는 이기주의와 안락만을 추구하는 어둠과 절망의 늪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3. 병들고 갈라진 시대를 바라보며
물질적 풍요를 바탕으로 한 소비 사회는 소득에 관계없이 승용차를 굴리고 가족마다 핸드폰을 들고 다니도록 속삭이며 부추긴다. 갖가지 가전 제품들이 필요성도 확인되지 않은 채 안방을 차지한다. 소비가 침체되면 곧 국가 경제가 흔들린다. 가장의 직업이 불안정해진다. 말하자면 신자유주의 경제의 젖줄은 대량 생산과 지속적인 공급이다. 지속적인 수요의 시장을 필요로 하므로 모든 제품의 수명을 단축시키도록 끊임없이 업그레이드해서 쓰레기를 양산한다. 퍼스널 사양으로 출시하여 공동으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 결과 손에 핸드폰, 방마다 인터넷, 이웃은 고사하고 가족마저도 텔레비전 앞에 함께 모일 이유가 없어진다. 모두가 개인주의로 살아가게 만들며 혼자서도 행복한 시간으로 밤을 지새울 수 있게 하며 기쁜 소식을 대신한다.
이렇게 해서 공동체성이 붕괴된다. 소비를 조장하는 구조는 공동체적 삶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또 늘어나는 생활비를 확보하고 가족의 행복을 유지하려면 가장(家長)은 자기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대의(大義)나 공익을 말하는 것은 이상주의자가 된다. 정말 이토록 의식이 병들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서로 갈라져 대립하게 만든 소비 사회는 마법의 시대다. 모두가 마법에 걸려 살아가고 있는 변태와 절망의 시대를 우리가 직접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 교회가 있는 것이다. 신앙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앞에 복음이란 무엇인가? 그 선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에게 목격되는 시대의 부정성은 정확히 교회의 사명이 된다. 예수님께서는 병들고 갈라진 절망과 좌절의 땅에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신다. 잡목으로 우거진 혼돈의 땅에 불을 지르고 칼로 쳐 정(正)과 부정(不正)을 갈라 세워 새로운 창조를 제시하신다. 보이지 않으면서도 삶을 지배하는 힘인 악령을 추방하고 질병을 치유하시어 가족과 세상으로부터 소외되고 갈라진 이들을 복구시키신다. 그런 예수님의 사역이 바로 하느님 나라를 도래시키려는 당신 사명이라고 강조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갈릴래아 민중들의 희망이 되셨고 새로운 삶의 의미와 목표가 되셨다. 새로운 희망에 대한 신념이 너무나 확고했기에 결코 좌절되거나 포기할 수 없는 영원한 진리임이 부활과 함께 드러났다. 그래서 예수 없는 시대에 희망의 노래가 되었다.
4. 갈망의 시대, 희망의 발견
교회가 예수님의 사명을 계승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라면 좌절과 배반의 시대에 교회에 주어진 그리스도의 사명은 새로운 유토피아를 제시하는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는 자에게 구세주이실 뿐이다. 현재의 구원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에게 결코 그리스도일 수 없다. 그리스도를 찾는 사람에게만 당신을 계시하셨다. 문제는 이 좌절의 시대에 이상향의 세계에 대한 미련을 아직도 버리지 못한 이들이 있어 목말라하고 있다는 것이다. 살아 계신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는 아직도 계속해서 선포되어야 한다. 그들에게만이라도 희망의 빛이 되고 구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무엇을 찾아 헤매고 있는가?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첫 제자로 부르신 내용을 보면, 공관 복음과는 달리 요한 복음에서는 그들이 좌절과 절망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고 있었다고 전해 준다. 안드레아는 세례자 요한의 소개로 예수님을 만났는데, '어떻게' '무엇으로' 살아가는지 확인하고 싶어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와서 보시오." 하고 초대했다. 가서 함께 지낸 다음 그는 고백했다. "우리가 찾던 그리스도를 만났소." 예수님께서 기거하시는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기에 구원(그리스도)을 보았다고 하는가? 예수님과 함께 보낸 시간은 그 자체로 충만한 감동과 행복이었을 것이다. 희망의 발견이었고, 고대하던 새로운 삶의 길에 대한 확신이었을 것이다. 절망의 시대에 희망은 구원임이 분명하다. 희망이란 자체로 생의 의미를 충만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복음 내용이야 어떻든 역사적으로 추정할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아를 만나시면서 비로소 세상 사람들과 한 무리를 이루시기 시작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열두 제자는 이미 예수님 주변에 있는 이들을 유다 전통에 따라 부여한 대표성일 것이다. 따라서 이전에 이미 함께 사는 어떤 삶이 있었을 것이다. 필자는 그것을 예수님의 원공동체(原共同體)라 부르고 싶다. 원공동체(原共同體)는 예수님이라는 인물과 카리스마를 중심으로 보아야 한다. 이 원공동체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뒤 사도행전 공동체에 나타나게 되는데 우리가 주목할 바는 '2차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는 바로 이 사도행전에 나타난 공동체이다. 거기에는 예수라는 인물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라는 인물 중심의 카리스마를 넘어섰다는 의미다. 그것은 스승을 잃은 혼란의 와중에서도 제자들이 스승과 함께 살던 공동체의 삶을 너무나 소중히 삼았다는 말이고, 그래서 사도행전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안 계시는 상황에서 세상에 발견된 희망일 수 있었던 것이다. 진실로 그들 자신이 하느님 나라와 구원의 확신을 공동체의 삶에서 찾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 희망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을까?
5. 예수님의 공동체, 무엇이었을까?
좌절과 절망의 갈릴래아 시대에 희망으로 떠오르신 예수님의 삶은 모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삶, 삶과 삶, 인간과 자연, 자연과 자연이 온전히 '한 몸'이 되며 하느님의 질서대로 움직이는 삶이었을 것이다.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들을 종합한 것에 다름 아니다. 물질이 주인 행세를 하는 시대에 오직 하느님만을 절대화하는 신념, 행복을 담보하는 것은 빵이 아니라 성부의 말씀이란 것을 믿는 삶, 이기와 자기 중심적인 시대에 너를 통해서 내가 존재한다는 공존하는 삶, 그래서 사람들이 서로의 몸을 자기 몸처럼 위하고, 사람의 인격을 하늘처럼 받들고, 공경하는 삶, 바로 그것이었다고 본다. 그래서 자기 것을 기꺼이 내어 놓아도 그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며 함께 빵을 나누고 기뻐하는 것은 자신의 기쁨일 수 있었다.
소유로부터 자유를 누리는 삶, 공존함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삶, 자신을 기꺼이 내어 놓을 수 있는 삶이 바로 구원의 실체로 여겨졌던 것이다. 사도행전 공동체가 그것이며, 앞서 안드레아가 '가서 보았던' 예수님의 원공동체의 모습이 그것이었을 것이다. 이는 정확히 그리스도 공동체의 영성과 이념이다. 교회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유다교는 이러한 공동체를 이단으로 일축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가운데 두고 앉아 있는 이들을 어머니요 형제요 자매로 삼아 '이단'의 집회에 거하셨다.
교회가 세상 속에서 대접을 받고 힘을 행사하면서 영성은 변질되고 해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성령으로 임재하시는 예수님의 공동체 영성은 수도원 운동으로 나타나고 수도자의 삶이 그것을 이어받았다. 문제는 세상 속의 수행이 아닌 독신과 특별한 조건의 수도로 공동체 영성이 특화되어 버렸다는 사실이며, '독신 서원의 수도자'라는 세상으로부터 특화시킨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님의 삶을 따르는 이라면 누구라도 기꺼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원공동체의 영성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하는 점이다. 오늘 우리 교회의 가장 큰 시대적 과제가 있다면 바로 이 공동체 영성을 발굴하고 새롭게 복구하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 한국 사회의 혼란과 방황은 목표적 삶이 없었던 데 이유가 있다. 과거 군사 독재에서 벗어나는 저항과 투쟁이 우선이었지 어떤 민주주의 세상을 만들자는 목표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라면 통일 문제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공동체 영성이란 현실의 극복만이 아니라 목표적 삶의 이상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 어둠과 혼돈의 시대를 벗어나기로 저항하되 막무가내의 저항과 탈출이 아니라 다가올 희망의 세상, 추구하는 세계의 영성과 철학이 이것이어야 한다. 사람과 자연과 관계적 삶을 대하는 정신과 태도의 모델이 바로 여기 공동체에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실재가 필요하며 그런 공동체를 건설하는 일이 바로 우리 교회에 주어진 이 시대의 사명이라 생각한다.
6. 다가오는 문명 세계의 전망
이른바 오늘날 전세계 최대 화두는 행복론이다. 선진 제국들이 만들어 가는 지구촌 공동 발전의 시스템이 과연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행복의 길인가에 대한 질문과 회의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본의 막중한 확보를 통해서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서로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성장과 발전은 결코 승자를 내지 못한 채 죽음의 환경과 비참한 공동 패배만이 확인시킬 뿐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미래 세계의 비전은 함께 공존하는 시스템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공존을 위한 기초는 모든 것을 작게 줄이고 작은 것으로 만족하는 삶의 양식에 대한 성찰로 나타날 것이다. 그에 따른 대안이 바로 공동체 의식과 정신 그리고 실재적 삶이다. 오늘날 선진 제국에서 무섭게 불붙고 있는 공동체 운동은 바로 그런 흐름의 징표이다. 새로운 세계의 문명은 공동체의 삶으로 정향(定向)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공동체 영성을 실현하고자 하는 운동들은 조금도 걸림돌 없이 국경을 넘어 결합되며 새로운 세계 국가의 이념이 될 것이다. 공동체의 삶에 참여하는 이들은 국경과 인종을 초월한 새로운 시민이 되는 것이다.
이런 문명의 탈출 흐름에 가장 강력한 철학 또는 영성으로 작용할 것이 바로 유심론적 세계관이다. 이미 구미 선진 제국에서 동양의 참선과 같은 영성 수련이 수용되면서 뉴에이지 선풍을 잠재우고 있다. 그들은 앞서 과학의 발전과 자본주의의 결과적 경험, 그리고 소비 사회의 병리 현상을 이미 경험한 역사를 가진 사회들이다. 종교 세계의 측면에서는 윤리적 가르침을 바탕에 둔 종교의 이념이나 수련의 방법들은 퇴조할 수밖에 없고, 반면에 유심론적 세계관을 가르침의 바탕에 두는 종교의 수행 방법들은 득세할 것이다. 멀리 볼 것 없이 왜 한국 사회에 참선과 마음 공부의 열풍이 불고 있는지, 세계 지성들의 인도행이 늘어나는지를 유심히 새겨 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영성이 실현되는 곳에서 미래의 희망을 본다. 이른바 영성의 시대가 이미 열리고 있는 것이다.
7. 복음을 따라 사는 사람들
우리 교회가 새로운 사목 방법을 개발하고 전담을 배치하고 예산을 투입한다. 소공동체 운동으로 지역 소모임을 활성화한다. 젊은이들을 위해 밴드와 랩을 동원한다. 미사 도구를 들고 직장의 휴식 시간에 찾아간다. 이는 변화하는 시대에 모두 필요한 일이다. 그렇더라도 그 모든 것에는 말씀 선포가 중심이다. 교회의 경험상 말씀과 삶은 반드시 같지는 않았다. 우리 교회가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고 호감을 주는 분위기를 만든다고 해도,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미 막강한 자본을 투입하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능가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제아무리 훌륭한 수단을 이용하여 복음을 선포한다고 하더라도 빠른 사이클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말씀의 효력은 너무나 짧기만 하다. 그러므로 이제는 복음 선포의 수단을 찾는 것이 아니라 목표의 삶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 그 복음을 따라 살아서 행복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에 견줄 수 있는 사목은 없다. 영성의 시대를 더 앞서 가는 것은 영성이 이루어지고 있는 삶을 확보하는 것이다.
복음을 따라서 사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실천하고 그 가르침을 법으로 삼는 것이다. 왜 우리는 복음에 주석만 자꾸 달며 의미론적 해석으로 가득한 설교를 하고 있는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삶의 영성으로, 철학으로 삼아 살아가면 되었지, 굳이 말마다 성서 구절을 줄줄이 제시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그냥 삶으로 보여 주면 될 일을 한참을 설명해야 복음을 전할 수 있다면 그런 낭비가 어디 있는가? 주석이 많다는 것은 삶으로 보여 줄 것이 부족함을 고백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럼 2천년 전의 배경을 21세기에 그대로 적용하란 말이냐?" 하고 반문할 수 있다. 좀 과격하게 말해서 물론 '그대로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신념도 실재하는 공동체를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영국의 다벨 지역에 '부루더 호프'(형제들의 처소)라는 공동체가 있다. 70여 세대 280여 명이 직접 생산하고 학교를 운영하며 살아가는 곳이다. 그들은 산상 설교를 공동체의 유일한 헌법으로 삼고 있다. 서로 사랑하라 했기 때문에 사랑하고, 미워하지 말고 용서하라 했기 때문에 용서하고, 잘못한 형제가 있거든 직접 말하라고 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 앞에서 흉보지 않고 직접 충고하고, 예물을 드리기 전에 화해하라 했기 때문에 예배를 보다가도 서로가 나가서 자기 마음을 드러내며 화해한다. 그래서 80년 동안 탁월한 공동체 삶을 이끌어 가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으므로 그렇게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8. 산 위의 마을을 향하여
예수님의 삶은 곧 하느님 나라의 비유였다.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했다. 하느님 나라를 말씀으로가 아니라 몸으로 보여 주셨다는 말이다. 우리 교회가 이 시대에 보여 줄 것이 없다면 '와서 보시오.' 하던데 '가보니 아무것도 없더라' 할 것이다. 참된 행복이 무엇인지 말할 수는 있지만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을 보여 주지 못한다면, 사랑과 구원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지만 그런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을 보여 주지 못한다면, 사도 바오로의 경고대로 우리 교회는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할 것이다. 교회는 '보라, 이것이 바로 구원의 삶이다'고 주석 없이 보여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만이 희망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명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다. 산 위의 마을은 드러나게 마련이라 했다. 우리의 삶이 등경 위에 올려져 방안을 비추는 빛이 되고, 산 위의 마을처럼 삶이 드러나 보이게 될 때 아버지를 증거하는 것이라 했다. 산 위의 마을은 우리 시대 예수님의 비유이다. 우리 교회가 모두 산 위의 마을이 되어야 한다. 실재하는 사도행전의 공동체가 지금 이 땅에 있다면 하느님 나라에 대한 설명은 쉬워진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구원이 초월적인 종교 언어만이 아니라 지상의 실제임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공동체, 사도행전의 공동체가 오직 하느님만을 주인으로 섬기고 하느님 나라의 의를 먼저 구하는 매력적인 삶의 비전을 보여 줌으로써 세상 사람들이 세속에서 추구하던 가치와 삶의 양식을 버리고 공동체 삶의 길을 선택하였듯이, 오늘 우리 시대 유일한 복음 증거의 길은 그런 공동체의 삶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
교회는 어떻게 희망을 줄 수 있는가?
1. 들어가며
한국 교회는 200여 년 전 진리를 찾아 학문을 연구하던 소수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시작되었다. 그후 100여 년 동안 혹독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그 암울한 세상을 바로 잡기 위해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항상 희망을 간직하고 복음을 전파하였다.
한국 천주교회는 광복 이후 급속한 양적 성장을 하여 왔다. 신자의 증가와 더불어 사제와 수도자의 증가, 그리고 신학교와 수도원의 증설 등 한국 교회의 눈부신 성장은 세계 교회 역사상 실로 경이적인 것이라고 세계 교회는 찬탄해 마지아니하였고 우리도 자부심을 가져 왔다.
광복 이후 정치적 사회적 불안정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가지고 싶어서 교회의 문을 두드렸다. 특히 군사 정권 시절에는 한국 천주교회가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한 결과 많은 지성인들과 젊은이들이 교회에서 희망을 찾아 신자가 되었다. 1984년 천주교 전래 200주년을 맞이하여 거행된 103위 성인의 시성식 행사와 1989년 제44차 세계 성체 대회를 통하여 한국 천주교회는 세계 교회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더 나가서 세계 교회 안에서 가장 활기찬 교회로 부각되었다. 이러한 한국 천주교회의 성장과 발전은 하느님의 은총과 이 땅의 무수한 순교자들과 열심인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의 헌신적인 기도와 희생의 결과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는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가 외형적으로 교세가 늘어났음에도, 부정부패와 온갖 비인간적이며 비윤리적인 한국 사회의 죽음의 문화의 만연 속에서 진정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해 왔는가를 반성해 본다면, 우리 교회가 한국 사회를 선도해 왔는가 아니면 오히려 우리 천주교 신자들이 지나치게 속화되어 사회 속으로 끌려 다니고 있는가를 우리는 자문해 보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먼저 한국의 반생명적인 문화 상황의 실태를 살펴보고, 이어서 이러한 죽음의 문화에 한국 천주교 신자들도 얼마나 심하게 물들어 있는가를 살펴보고, 그 다음 우리 교회가 어떻게 우리 사회에 희망을 줄 수 있는가를 모색해 보기로 한다.
2. 현대 한국 사회의 도덕적 몰락
유엔 아동 기금(UNICEF) 한국 위원회가 발표한 보고서([중앙일보](2001. 10.10.))에 따르면, 동아시아 태평양 17개 국가 중에서 "윗사람에 대한 청소년들의 존경심"에 대해 설문 조사한 결과 한국이 최하위였으며, 놀랍게도 미국의 이민 교포 사회가 모국인 한국 사회보다도 오히려 어른에 대한 존경심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이 조사가 시행되기 전에 사람들은 동아시아 17개국 중 한국이 가장 충효심과 장유유서(長幼有序)가 돈독한 나라일 것이라고 추측했으니, 이번의 조사 결과는 너무나도 충격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 해방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성직자들을 비롯하여 많은 식자(識者)들은 날로 황폐해져 가는 한국인의 도덕적 해이에 대해 질책과 염려를 해 왔다. 여기서 윗사람이란 부모와 교사를 비롯하여 각계각층의 지도급 인물들을 망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사실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기성 세대를 불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일본에서 유행했던 말 중에 '모두가 도적'이라고 했던 말이 우리나라에서도 한동안 자학적으로 사용되더니 이제는 그런 말이 들리지 않는다. 그 까닭은 아무리 질타해도 아무런 경각심도 일으키지 못할 뿐더러 더 이상 사용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한국 사회가 배금주의에 빠져 도덕적으로 몰락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왜 한국 사회는 도덕적으로 몰락하게 되었을까? 이렇게 된 것에 대해 모든 한국인에게 책임이 있다. 아무튼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반생명적이고 비도덕적인 사회의 질곡에서 벗어나 밝고 맑은 생명의 문화를 재건하기 위해서 우리는 한국의 죽음의 문화의 실태를 우선 파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이러한 죽음의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한국 천주교 신자의 실태를 점검해 보기로 하자.
1) 반생명적인 죽음의 문화의 실태
우리는 한국 사회의 '죽음의 문화'의 실태의 원인을 임신 가능한 여성 중의 80%가 넘는 낙태, 곧 공공연한 살인 행각, 폭력의 난무, 공해로 말미암은 생태학적 위기, 반생명적인 생명 공학의 발호, 인간성을 잃어 가고 있는 사이비 예술과 놀이 문화, 현대 의학의 상업화와 비인간화, 교육의 상업 도구화와 인간성 상실, 그리고 정보화 산업의 인간의 기호화(記號化, codification) 등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를 불안에 떨게 만드는 이러한 반생명적인 문화의 실태와 원인을 다른 기회에 상세히 논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오늘의 주제와 관련해서만 간략하게 개관해 보려고 한다.
낙태의 폭증과 만연:한국 보건 사회 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1회 이상 낙태를 경험한 15세부터 44세에 이르는 여성의 수가 1964년 7%에서 해마다 증가하여 1972년 20%, 1991년에는 54%로 나타났다. 이후 전문적인 설문 조사 기관의 조사에 따르면 15세부터 44세에 이르는 여성 중에서 1회 이상 낙태를 경험한 사람은 78%에서 83%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73년 유신 체제의 비상 국무회의에서 성안된 모자보건법이 발효된 후부터 낙태는 살인 범죄가 아닌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 결과 1985년부터 해마다 약 150만 건의 낙태가 발생하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폭력의 난무:가정 폭력, 학교 폭력, 직업적 조직 집단의 폭력, 국가 기관에 의한 제도적 폭력, 성폭력 등은 인권을 유린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시킨다. 그런데도 폭력을 과시하거나 심지어 미화시키기까지 하는 영화, 만화, 인터넷 등은 많은 청소년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폭력을 조장하고 있으나 돈벌이가 된다는 구실로 방임되고 있다. 최근에는 특히 학생들 간에 자행되고 있는 학교 폭력이 청소년들을 불안에 떨게 하고 인권을 유린하고 있는데도 불식시키지 못하고 있다.
공해와 생태학적 위기:무분별한 산업 개발과 도시화 등에 따른 환경 오염은 범세계적인 문제이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옛날부터 전해져 온 생명을 존중하는 아름다운 전통은 무너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중요한 공해 원인은 국가에 의해서 주도되고 있다. 성장 위주의 경제 정책, 과시적 국토 개발 정책의 발호, 소비를 권장하는 산업화 정책, 공해 발생에 대한 정부 당국의 은폐와 미봉책, 정부의 근시안적인 계획은 자연 파괴와 각종 공해를 유발한다. 여기에 미래 세대에 대해 아무런 책임감도 느끼지 않고 돈을 벌 수만 있다면 자연을 언제든지 파괴할 용의가 있는 무지몽매한 장사꾼들과 새 것, 편리한 것과 화려한 것을 선호하는 일반 시민들의 허영심이 상승 작용을 한다. 그리고 공해 방지와 생명 존중에 대한 시민 교육이 소홀히 취급되고 있는 것 등이 오늘날의 생태학적 위기를 초래한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
반생명적인 생명 공학의 발호:생명 공학은 생명 현상을 공업적으로 이용하여 돈을 버는 데만 주력하고 생명권을 경시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유전자 변형 식품과 복제된 동물의 식용은 엄격히 금지되고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런 통제도 받지 않고 있으며 동물권도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그 밖에 인간의 체외 수정과 인공 수정은 심각한 윤리적 문제를 낳고 있는데도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아무런 제약도 없이 시행되고 있다. 냉동된 잉여 배아에 대한 연구 허용은 배아 복제와 더 나아가 인간 개체 복제를 가능하게 할 수 있을 뿐더러 실제로 생명체인 배아를 죽일 수도 있는데도 생명 공학자들의 배아 줄기 세포 연구 허용에 대한 집요한 요구로 잉여 배아 연구는 허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문제는 인간 존엄성과 생명 존엄성이 훼손된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사이비 예술가와 놀이 문화의 비인간화:현대 예술에서는 인간의 고귀함과 순결한 사랑, 아름다운 이별 등을 찬미하는 작품을 찾아보기 어렵다. 특이한 것과 기상천외한 것을 추구하는 나머지 균제미와 중심을 잃고 모든 윤리적 제약에서 벗어나 자의적으로 작품을 만드는 사이비 예술가들이 우리 주위에는 너무나 많이 있다. 그들은 돈벌이에 급급한 나머지 인간의 말초 신경을 자극하거나 인간을 비하하는 것을 능사로 삼고 있다. 제들마이어(Sedlmeyer)가 현대 예술의 특징을 혐오감, 패러독스, 아이러니(미학적 허무주의), 악마적이라고 말한 것은 정곡을 찌른 것이라고 본다. 예술은 인간을 천사로 끌어올릴 수도 있고 악마로 끌어내릴 수도 있다. 그러나 현대 예술은 대체로 그 어떤 시대보다도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시도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우리는 놀이를 통해 다른 사람과 더 친해질 수 있다. 놀이는 건전하고 깨끗하고 공정해야만 다른 사람과 제대로 놀 수 있다. 깨끗하지 않은 놀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폐해를 가져다 준다. 예컨대 사행심을 조장하는 놀이와 놀음(도박)은 반사회적이며 인간을 황폐화시킨다. 놀이의 일종인 스포츠는 오늘날 기업화되어 있고 많은 역기능을 초래하고 있다. 어떤 스포츠는 운동 선수를 혹사하고 대중의 꼭두각시로 또는 상품으로 취급한다. 고도의 기술 연마는 때로는 선수의 안전을 무시하기도 하고 인권을 유린하기도 한다. 스포츠는 점점 더 상업화되고 도박화되어 가고 결국 인간 존엄성을 훼손시킨다. 스포츠는 본래 휴식, 연대 의식의 함양, 긴장 이완과 재창조를 위한 것인데, 오히려 오늘날 스포츠는 경쟁 심리를 유발하고 집단 이기주의를 선동하고 연대 의식을 파괴하는 부작용을 낳고 상업주의에 이용당하고 있다.
현대 의학의 비인간화:현대 의학의 설명 전략은 물질적 환원주의, 기계적 결정론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인간의 기능과 질은 가능한 수량(數量)으로 표현되고 측정 가능한 생화학적, 생물리학적 과정으로 환원된다. 인간의 생명을 종합적으로 다루어야 할 의학이 오로지 자연 과학의 가설만을 받아들이고 인간을 사물화(事物化)한다. 현대 의학은 질병이 유전적 소인으로 결정된다는 유전자 결정론을 내세우고 인간의 유전자를 조작, 변형하고 생명을 복제하려는 시도까지 감행하려고 한다. 최첨단 의료 기구에 둘러싸인 의사들은 환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고 의사와 환자의 대화는 단절되고 상호간의 신뢰는 무너지고 있다. 생명을 아끼고 존중해야 할 의료 종사자들이 단순한 기술자나 상인처럼 처신하고 과잉 검사와 과잉 진료를 하거나 환자를 착취, 수탈한다면, 그 사회는 멸망하지 않을 수 없다. 해마다 150만 건이 넘는 낙태의 대부분이 생명을 수호해야 할 의사에 의해 자행되고 있다.
건축 문화의 비인간화:현대 건축은 시멘트, 철조, 합성 수지, 유리 등으로 만들어진 긴 상자를 일직선으로 나열하거나 수직으로 높이 쌓아올린 것으로 보인다. 건축물의 대형화와 고층화는 부자연스러운 직각으로 되어 있고 획일적이고 기계적이고 기능주의적이며 여러 가지 공해를 유발하도록 되어 있다. 고층 건물에 사는 사람들은 항상 단전, 단수, 연쇄 방화, 청소부의 파업 등에 잠재적인 불안을 가지고 산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이웃에 대해 무관심하고 익명인 채로 산다. 그들은 자기 집에만 당장 위협이 안 되면 남의 집에서 화재가 나건, 도둑이 들건 상관하지 않으며 자기가 사는 아파트 값 상승에만 관심이 있다. 그들에게 집은 영혼의 안식처가 아니라 돈벌이를 위한 투기의 대상이며 집을 사기도 전에 팔 생각 먼저 한다. 그들은 과밀한 사람들 속에서 살면서도 고독하게 비인간적으로 산다. 도시인들은 각종 도시병으로 신음한다.
이 밖에도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반생명적인 작태가 우리 사회에는 많이 있다. 매춘과 음란물에서 여성을 성적 노리개로 삼고 여성의 인권을 무시하는 것, 장기 매매, 각종 작업장에서의 안전 시설 미비, 향정신성 물질의 범람과 구입 용이로 말미암아 인간성을 상실하는 약물 중독자의 폭증, 100만이 넘는 전문 도박꾼, 알코올 중독자의 속출, 수많은 사이비 종교의 가렴주구, 착취 수탈, 인권 유린, 그리고 청소년의 인간성을 파괴하는 입시 교육 제도, 세계 제일의 교통 사고율, 그리고 컴퓨터와 뉴미디어에 의한 인간 소외 등의 죽음의 문화의 어두운 그림자는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2) 한국 천주교 신자의 반생명적 작태
한국 사회 전반이 반생명적 탁류에 휩쓸리고 도덕적 위기에 빠져 있는데, 어떻게 천주교 신자만이 유독 탁류에서 벗어나 고고(孤高)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최근에 여러 기관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국 천주교 신자들의 생명관과 신앙 생활이 천주교 신자 아닌 개신교, 불교, 천도교 신자들보다 질적으로 훨씬 낙후된 것으로 나타났다.
종교인에게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은 종교적 체험에서 얻은 강렬한 소명 의식이다. 그러나 한국 천주교 신자들은 종교적 체험과 종교 의례 참석, 기도 시간과 성서 읽기 등에서 다른 종교에 비해 훨씬 낮은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1) 요컨대 현대 한국 천주교 신자들은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 무지하며, 천주교 신앙의 정체성을 잃어 가고 있다. 예컨대 창조설의 수긍율(1984년:81.9%, 1989년:69.3%, 1997년:64.2%), 하느님의 공심판 수긍율(1984년:76%, 1989년:62.9%, 1997년:48.6%) 등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2) 그리고 천주교 신자들의 관심이 기복주의, 운명론, 미신, 사사화(私事化)에 갈수록 더 쏠려 가고 있다는 조사 보고도 나오고 있다.3)
최근에 교회가 강조해 온 "생명 존중"에 대한 천주교 신자들의 반응을 보면 천주교 신자 아닌 사람들보다 더 좋은 모습을 보여 주지 않고 있다. 서강대학교 생명문화연구소가 1992년 전국민을 대상으로 표본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천주교 신자들은 1992년 낙태 완전 허용을 71.2%가 찬성했고, 교구 내 구역 반장 월례 교육에 참가한 719명 부인들 중에 낙태 경험자가 83.6%, 1995년 71.5%, 2001년 78%에 이른다. 여기서 천주교 신자들은 다른 종교의 신자나 심지어 종교가 없는 사람들보다도 더 생명 존중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 사실만을 보아도 한국 천주교 신자는 한국 사회의 반생명적 분위기에 휩쓸려 가고 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도대체 한국 천주교 신자는 무엇하는 사람들인가? 우리나라의 지도 계층 요소 요소에 천주교 신자가 많이 포진하고 있지만 왜 한국 사회가 온통 점점 더 죽음의 문화의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가를 우리는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대부분의 한국 천주교 신자들은 그들의 신앙의 정체성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한국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직분을 하지 않고 있다. 온갖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켰던 순교자들의 정신은 어디로 갔는가?
3. 교회는 어떻게 세상에 희망을 줄 수 있는가?
대부분의 개신교 신자들은 어디서나 그들이 그리스도교 신자임을 분명히 밝히고 산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들은 같은 직장의 동료들이 그들이 천주교 신자인지를 얼른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신자임을 드러내지 않고 산다.
드러내지 않고 막연히 하느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의 태도는 마음의 확신을 분명하게 적극적으로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신자 개개인의 분명하지 않은 태도는 다른 사람들의 신앙에 물의를 빚을 수 있다. 천주교 신자는 모름지기 세상 사람들에게 죽음의 문화의 문제점에 대하여 그때그때 책임 있는 대답을 분명히 하고 구체적으로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미 황금 만능주의에 따른 생활 습관에 깊숙이 젖어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 산업 사회의 정치, 경제 제도를 비롯하여 문화 전반에 걸쳐 사회 생활의 온갖 체제가 윤리적 가치를 무시하고 짜여 있는데, 어떻게 천주교 신자들이 이 사회를 되돌려 놓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지 모른다. 이미 하강을 시작한 문화를 되돌려 놓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인 것만은 틀림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지금의 물질 향유와 편리해 보이는 삶이 앞으로 오랫동안 더 계속될 수 없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미 도처에서 가족 제도 붕괴 등 사회 해체 현상이 일어나고 에너지 등 자연 자원의 고갈과 생태학적 위기로 말미암아 성장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고 세계 종말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있다.
그러나 죽음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로 재건하는 일은, 우리가 하느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확고한 믿음과 어떤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을 가지고서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을 지키겠다는 의연한 결단을 할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문화 재건에 대한 논의들이 아무리 그럴듯하고 논리 정연하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를 믿고 근본적으로 인간을 존중하고 생명을 지키겠다는 의지의 결단이 최우선이 되지 못한다면 그 많은 논변들은 공염불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을 아끼고 인간을 사랑하는 실천이 무엇보다도 요청된다. 한국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 안을 이미 사목 의정서 등을 통해 내놓았다. 그러므로 교회가 어떻게 희망을 줄 수 있는가를 물을 것이 아니라 먼저 교회의 구성원인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아야 할 것이다.
라칭거 추기경은 1993년 '도덕의 위기와 현대의 영성'에 대해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현대의 지배적인 문화 상황과 천주교적 도덕은 너무 동떨어져 있다. 더욱이 적지 않은 천주교 윤리 신학자들까지도 지배 문화에 대한 영향력 있는 지지자가 되어 죽음의 문화에 동조해 왔다. ......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지배적 경향은 교회의 도덕의 기초를 공격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가 자신에 충실하려면 번거롭고 낯선 것, 곧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보이는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그러므로 윤리학자들은 현대 사회를 거부할 것인가 아니면 교도권을 거부할 것인가 양자택일을 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우리들은 사회의 경향과 타협하지 않는 용기를 되찾지 않으면 안 된다. 시대의 풍조에 따를 것이 아니라 복음적인 정열을 가지고 이에 맞서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보통 사람들과 같은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잊어서는 안 된다. ...... 한때 어떤 수도회에서 참된 개혁과 종래 지켜 오던 엄격성의 완화를 혼동하였다. '쇄신'과 '안락'을 혼동했다. 수사들의 요구대로 밤늦게 TV를 시청하기 위해 성무일도를 포기했다. 얼마 못가서 그 수도원은 해체되고 말았다."라고 말한 적도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인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기가 소수파에 속한다는 것, 이 세상 사람들에게 당연하고 논리적으로 보이는 것들에 자기가 대립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능력을 되찾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긴박한 과제이다." "현대 천주교 신자의 가장 긴급한 목표의 하나는 신앙의 사고 방식과 현세적 사고 방식 간에 적절한 거리를 자각하는 영성의 적극적인 요소의 재건이다. 1970년대 이후 사람들은 천주교 신자의 가장 시급한 문제가 '새로운', '열린', '신성한 영역으로 도피하지 않는', '세상을 향한', '세계와 연대한' 신앙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외쳐 왔다. 그러나 오랫동안 방황한 나머지 이제 와서야 '옛 영성', '세속에서부터 도피'(fuga saeculi)라는 영성과의 연결점을 재발견하는 것이 긴급한 과제임을 찾아내고 있다."우리는 천주교 신자라는 긍지를 가지고 고통 속에서도 환희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초대 교회에서 성서를 읽어 왔던 관행을 다시 익히도록 신앙 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도 많은 어려움을 견뎌내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지상 낙원을 약속하지 않으시며, 우리의 삶의 어려움도 고통도 당장 없애 주시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웃 앞에서 현재 생활에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써 책임 있는 생활을 하기 위하여 부정 불의와 타협하지 말고 생명을 지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을 우리가 믿는다면 희망은 끊임없이 지속될 것이다.
디다케(Didache)
1. 문헌의 가치와 중요성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핵심인 [사도신경]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초대교회 신도들의 윤리생활과 전례와 제반 규정에 관한 중요한 문헌인 디다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디다케(Didache)란 희랍어 단어는 [가르침]이란 뜻이다. 이 문헌의 원래 이름은 (열두 사도들을 통하여 이방인들에게 전해진 주님의 가르침)인데 이를 줄여 (열두사도의 가르침)이라고도 부르고, 더 줄여서 그냥 디다케로 부른다.
이 문헌의 저자는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저술 연대에 대해서 논란이 많지만 대략 1백년-1백 50년 사이로 보고 있다. 16장으로 되어 있는 이 문헌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수 있는데, 전반부(1-6장)에서는 윤리적인 가르침을 두 가지 길, 즉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로 서술하고 있으며, 후반부(7-15장)에서는 교회의 전례와 제반 규범을 규정하고, 끝으로 주님의 재림에 관해 가르치고 있다.(16장)
디다케는 초대교회부터 중요하게 여겨져서 마치 신약성서의 정전(正典)처럼 읽혀져 왔다. 이 때문에 4세기에 에우세비오와 루피누스는 디다케가 정전이 아니라고 명백히 밝혀야 했다. 한편 성 아타나시오에 의하면 디다케의 전례 기도문이 교회 안에 널리 사용되었고 또 예비자들을 교육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디다케는 2세기 초엽까지의 교회 공동체의 생생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며, 후대 동방 서방 교회의 모든 전례 및 윤리규정들에 원형젹인 규범이 되어왔다. 이 문헌은 교부문헌총서 제7권(정양모신부 역)에 우리 말로 번역되어 있다.
2. 두가지 윤리적 가르침
디다케 1-6장에 나오는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의 내용은 [두가지 길]이란 주제로 후대 영성생활과 수덕생활에 관한 저서들의 기초가 되었다. 이 주제는 신명 11,26-31. 시편 1,1-6. 마태 7,13-14에 나오는 것인데 디다케는 생명에 이르는 길과 죽음에 이르는 길의 항목들을 보다 폭넓게 제시하고 있다. 두가지 길에 이어 세례 의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윤리적 가르침은 예비자들이 세례를 받기 전에 지켜야 할 전제 조건이거나 또는 세례 후에 신자로서 준수해야 할 사항들을 규정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의 길인데 두 길의 차이가 큽니다. 생명의 길은 이렇습니다. 첫째로 당신을 만드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둘째로 당신이웃을 당신처럼 사랑하시오. 또 당신에게 하지 않기를 원하는 모든 것들을 당신도 남에게 하지 마시오"(1,1-2).
이어서 여러가지 윤리적인 권고와 금령들이 열거되어 있다. "죽음의 길은 이렇습니다. 무엇 보다도 이 길은 악하고 저주로 가득차 있습니다. 살인,간음,탐욕,음행,도둑질,우상숭배,마술,교만,인색,수다,음담패설,질투,무례,교만,자만,현명치 못함등입니다."(5장). 그리고 여러가지 악행들이 계속 열거되는데 금령들중에 오늘의 한국 현실과 연관하여 우리의 주의를 끄는 대목은 "태아를 낙태하지 말고, 영아를 살해하지 마시오"이다. "낙태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여기 말고도 초대 교부시대의 문헌인 [바르나바 서간] 19,5에도 나오는 것으로 보아 교회의 일관된 준엄한 가르침이었다. 교회는 모태에 있는 태아를 죽이는 것을 살인행위로 보고있다.
3. 전례와 기도의 가르침
디다케가 가지는 역사적 가치와 중요성은 후반부에 나오는 전례와 기도에 관한 가르침에서 더욱 높다. 제 7장은 세례의 방법에 대해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흐르는 물에서 세례를 베푸시오. 만일 흐르는 물이 없으면 다른 물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또 찬 물이 없으면 더운 물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둘 다 충분치 못할 때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마에 세 번 부으시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세례는 흐르는 물, 즉 강이나 샘에서 완전한 침수(沈水)로 베푸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흐르는 물, 즉 살아있는 물(生水)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하느님의 생명 안에 새로 태어난다는 세례의 의미와 잘 부합되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교회에서 흔히 실시하는 이마에 물을 붓는 세례의식이 사실은 모든 여건이 불가능 할 때에 사용하는 예외적인 방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제 9장에는 미사의 성찬기도문이 나오며 세례를 받지 않은 예비자들은 영성체를 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성찬 전례를 하기에 앞서 자기 잘못들을 고백해야 한다는 규정(14장)은 오늘의 미사 시작부분에 바치는 [참회의 예절]의 기원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유대교 전통에 매여 있던 그리스도교가 점차 이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길을 찾아가는 모습을 이 문헌에서 볼 수 있다. 토요일을 안식일로 하여 하느님께 예배를 바치는 유대교의 오랜 전통을 버리고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일요일을 주님의 날(主日)로 정하여 모든 신자들이 함께 성찬전례를 거행하였다.(14장) 이에 곁들여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을 하던 유대교의 전통대신에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을 하도록 명하고 있다.(8장)
그리고 하루에 세 번 주의 기도문을 바치라고 하는데(8장), 이것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하루 세 번 바치던 "쉐마 이스라엘"(이스라엘아 들으라)기도 대신에 신약의 가장 중요한 기도문인 주의 기도문을 바치게 한 것이다. 주목할 점은 주의 기도문안에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주님의 것입니다."란 구절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구절은 오늘날 미사 때에 주의 기도문 끝에 바치는 구절이며, 어떤 성서 고사본의 마태 6,13절에도 나오는 구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