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中道)
심완 박전상환
1.
좋아도
머리 속에
물음표(?)로 가득하라
싫어도 상념 속에
물음표로 가득하라
함부로 마음(心)을 내어
흔들리지
않는 것
2.
무탐(無貪)의
자비희사(慈悲喜捨)
복덕(幸福德)을 탐(貪)치 않는
자무량(慈無量心)
비무량심(悲無量心)
희무량(喜無量心)
사무량심(捨無量心)
공덕(功德)을 탐(貪)하지 않는
그게 바로
중도(中道)다
3.
좋아도
좋다 말고
싫어도 싫다(閻) 말라
좋은 것 왜 좋은지
싫은 것은 왜 싫은지
언제나 물음표(?) 가득
자신(自我)에게
물(問)어라.
ㅡ 마음그릇 心椀 ㅡ
::::
중도(中途)의 길(道)
마음그릇 心椀 박 찬
중도(中道, 中途)는
온 우주
상하좌우 동서남북 어디에도
치우쳐 편견(偏見)되지 아니하는
옳고 바른 도리(道理)와
순리(順理)와 이치(理致)를
따르는 것을
불교에서는 중도(中道)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이 것도 저 것도 아닌
그저 단순히 막연한 중간이 아닌 《옳고 바른 깨달음의 길》
불교의 초기 경전이 제시하는
중도(中道)는 팔정도(八正道)이다
중도(中道 中途)의 가르침은
부처님 최초의 설법(說法)이다.
[ 초전법륜경 ]에서
부처님께서는 다섯 비구에게 이렇게 천명(遷命) 하신다.
“
비구들이여 !
무릇
출가자(出家者)는
이들 두 가지 극단(兩極斷)을
따라서는 안 된다.
무엇이 둘(兩極斷)인가 ?
감각적
욕망의 즐거움(快樂)에
탐닉하는 것은 저열하고 촌스럽고
범속하며 고결하지 않고
해(害)로움(삼독심)과
함께하나니
이 것이 하나의 극단이다.
스스로
자기 학대에
몰두(沒頭 빠져듬)하는 것은
저열하고 촌스럽고 범속하며 고결지 않고 해로움(三毒心)과
함께하나니
이 것이
또 다른 하나의 극단이다.
이러한
두 극단(兩極斷)을
따르지 않고
여래(如來)는
중도(中道)를 철저하게 깨닫고 눈(眼 佛眼 心眼 혜안)을 만들고
지혜(반야 智慧)를 만들었나니
중도(中道, 中途)는
고요(惺惺寂寂)함과
항상심(恒常心) 최상의
지혜(무상정등각 智慧)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涅槃 Nirvana)으로 이끌어
인도(引導)한다.
비구들이여 !
그러면
무엇이 중도(中道)인가 ?
바로
이러한 여덟 가지로 구성된
성스러운 팔성도(八聖道)이니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삼매(正定)이다.
”
[ 초전법륜경 ]뿐만 아니라
37조도품을 중도라고 설하고 계신
[ 증지부 ]의 한 곳을 제외한
모든 초기경전들에서도
중도(中道, 中途)는
반드시 팔정도(八正道)로
설명이 되고 있다.
물론 37조도품도
팔정도(八正道)가 핵심이다.
세부적으로
팔정도(八正道)를 살펴보면
첫째
바른 견해(正見)는
괴로움(苦)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일어남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로 이끌어 인도하며
수행하는 도(道) 닦음에 대한
지혜(반야 智慧 광명)로
정의되고 있다.
한마디로
바른 견해(正見)는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에
대한 지혜(智慧)를 말한다.
즉
연기(緣起)의 가르침이야말로
진정한 바른 견해(見解)이다.
이처럼 바른 견해는
고집멸도 사성제에 대한 지혜와
연기(12緣起)의 가르침으로
정리된다.
그런데
사성제 가운데
집성제(集聖諦)는
연기의 유전문(고의 발생구조)과 연결되고
멸성제(滅聖諦)는
연기의 환멸문(고의 소멸구조)과
연결된다.
그러므로
사성제(四聖諦)와
연기(緣起)의 가르침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 것을
바르게 보는 것이
팔정도의 정견(正見)이다.
둘째
바른 사유(正思惟)는
출리(出利) 즉
욕망에서 벗어남에 대한 사유
악의 (惡意)없음에 대한 사유
해코지 않음(不害)에 대한 사유
로써 정의되는데
불자들이
세상과 남(他者)에 대해서
항상 지녀야할 바른 생각을
말한다.
이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초기경전들에서
부처님(世尊)께서 강조하신
자애, 연민, 같이 함, 평온의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
사범주(四梵住)
사무량(四無量心)을
가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셋째
바른 말(正語)은
거짓말을 삼가하고
중상모략을 삼가하고
욕설을 삼가하고
잡담을 삼가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넷째
바른 행위(正業)는
살생을 삼가하고
도둑질을 삼가하고
삿된 음행을 삼가하는 것
이다.
다섯째
바른 생계(正命)는
삿(邪)된 생계를 제거하고
바른 생계로 생명을 영위하는 것
이다.
다른 경(經典)들의 설명을 보면
출가자(出家者)는
무소유(無所有)와 걸식(乞食)으로
삶(生命)을 영위해야만 하며
특히
사주(四住)
관상(觀相)
점술(占術)
등으로
생계(生計)를
유지해서는 안된다.
재가자(在家者)는
정정당당한 직업을 통해서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
이처럼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를 실천하는
지계(持戒 계율을 지킴함)의
생활은
그 자체가
팔정도(八聖道)의
고귀한 항목에 포함되고 있는
실참수행(實懺修行)임을
우리는 명심해야한다.
여섯째
바른 정진(正精進)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악하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일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이미 일어난
사악(邪惡 삿되고악함)하고
해(害)로운 법(惡法)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유익(有益)한 법(善法)들을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이미 일어난
유익(有益)한 법(善法)들을
사라지지 않게 하고
더욱 더 증장시키고
의욕을 생기게 하기 위해서
정진(精進)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쓰는 것
이다.
그러므로
바른 정진은 해탈열반과
향상에 도움이 되는 선법(善法)과
그렇지 못한
불선법(不善法)을
정확히 판단하는 것이
전제되고 있다.
선법(善法)
불선법(不善法)을
정확히 판단하지 못하고
무턱대고 밀어붙이는 것은
결코
바른 정진(精進)이
아니다.
일곱째
바른 마음챙김(正念)은
몸에서 몸을 관찰하고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고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고
부처님의 법(佛法)에서
언제나 옳고 바른 법(法)을
관찰하면서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을챙기며 머무름
하는 것이다.
바른 마음챙김이야말로
팔정도가 제시하는 구체적인
수행기법이다.
부처님께서는
나(我)라는 존재를 먼저
몸뚱이(身)
느낌(受)
마음(心)
심리현상(法)들로 해체해서
이 중의 하나에 집중한 뒤
그 것을 무상하고
고요한 무아(無我)라고
통찰할 것을 설(說)하고
계신다.
마음챙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해체이다.
중생들은
무언가 불변(영원불변)하는
참 나(自我)를 거머쥐려 한다.
이 것이
생사윤회(生死輪廻)의
가장 큰 동력원인이다.
무엇보다도
나(我)라는 존재를 해체해서
관찰하지 못하면
진아(眞我)니
대아(大我)니
마음(心)이니 하면서
무언가 실체를 세워서
이러한 것과
합일되는 경지쯤으로
깨달음을 이해하게 되고
이런 것을
불교의 궁극으로 오해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저지르게 되니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여덟째
바른 삼매(正定)는
초선과 제2선과
제3선과 제4선에 들어서
머무는 것이다.
이러한 바른 삼매(三昧) 혹은
선(禪)의 경지에 들기 위해서는
감각적 욕망(慾望)
악의, 해태.혼침, 들뜸.후회,
의심(疑心)이라는
다섯 가지 장애(藏碍)
오온(五蓋)을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이러한
장애(障碍)가 극복되어
마음의 행복과 고요와 평화가
가득한 경지(境地)를
순차적으로 정리한 것이
네 가지 선(四禪)이며
이 것을
바른 삼매(正三昧 Samādhi)
라고 한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중도(中道)는 팔정도(八正道)이다
중도(中道 中途)는
철학(哲學)이 아니라
실천(實遷)이다.
그저 공허(空虛)한
철학적(哲學的) 사유(思由)로
단순히
이해(理解)해서는
곤란(困難)하다.
다시말해서
이 것도 저 것도 아닌
그저 단순히
막연한 중간이 아닌
중도(中道)는
치우침 없이 총체적으로
팔정도(八正道)를 실천수행
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중도(中道)인 것이다.
- 終 -
강원도 정선 동강변
별빛 총총한
묵우당(墨友堂 글벗터)에서
마음그릇 心椀 박 찬
(박전 상환)
두손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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