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혜로운 건축자들로 회막을 만들게 하시다
31: 1-11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 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3.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가지 재주로
4. 공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5. 보석을 깎아 물리며 나무를 새겨서 여러가지 일을 하게 하고
6. 내가 또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세워 그와 함께 하게 하며 무릇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자에게 내가 지혜를 주어 그들로 내가 네게 명한 것을 다 만들게 할찌니
7. 곧 회막과 증거궤와 그 위의 속죄소와 회막의 모든 기구와
8. 상과 그 기구와 정금 등대와 그 모든 기구와 분향단과
9. 번제단과 그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과
10. 제사직을 행할 때에 입는 공교히 짠 의복 곧 제사장 아론의 성의와 그 아들들의 옷과
11. 관유와 성소의 향기로운 향이라 무릇 내가 네게 명한대로 그들이 만들찌니라
======================================================================
늘 말씀드린 것처럼 출애굽기는 시내산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나라를 시작한 것을 기록했습니다. 나라를 세우려면 왕과 백성이 있어야 하고 왕은 그 권세가 탁월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왕은 자기 권세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고 자기 백성에게 생명을 주도록 해야 합니다.
출애굽기는 왕의 권세를 여호와의 강한 손이 나타남으로 설명합니다. 애굽의 바로 왕을 항복시키는 권세를 유월절에 나타내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무교절에 이스라엘 백성은 무교병을 먹는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애굽에서 먹었던 누룩이 있는 떡이 아니라, 누룩이 없는 새로운 떡을 먹었습니다. 그리하여 여호와께 속한 백성으로 새로운 떡을 먹음으로 새 생명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은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을 구름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보호하셨습니다. 홍해를 건너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늘의 만나와 반석에서 나는 물로 먹이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선한 목자로써 함께 하실 것임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보고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가 되기로 하였습니다. 제사장 나라의 언약은 십계명과 법규로 구성되었고, 이 언약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낭독하자 이스라엘 백성은 준행하기로 하여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이것이 출애굽기 24장까지의 내용입니다,
언약을 체결한 후 여호와께서 모세를 산 위로 불러 올리셨고 모세는 거기서 40일간 거하며 언약 돌판을 받고 여호와 하나님의 거처를 지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25장 이하에 여호와의 거처를 어떻게 지을 것인가를 말하고, 28장-29장에는 제사장을 위임하여 세워 회막에서 제사장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만나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회막이 지어지면 이스라엘 자손은 어떻게 여호와를 만나러 들어가야 할 것인지 출애굽기 30장 이하에 설명합니다. 그래서 분향단, 속전세, 물두멍, 그리고 관유와 향을 말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처소를 지으라는 명령을 모세가 출애굽기에 기록한 방식을 따라 그 의미를 새겨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회막에서 제사장의 제사를 통해 이스라엘 자손을 번제단에서 만날 것이며, 이스라엘 자손은 분향단에 기도의 향을 사르고, 구원하신 왕께 속전세금을 바치며, 물두멍에서 정결한 신부처럼 제사장이 수족을 씻으며, 관유로 거룩하게 된 회막의 가장 귀하고 존엄한 곳은 향을 증거궤 앞에 두신 곳이어서 이곳에서 여호와의 명령이 나오며 모세는 바로 이곳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납니다.
오늘 본문은 여러분이 읽으신 것처럼 회막을 만든 건축자들에 대하여 말해 줍니다. 31:1-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라고 하여 건축 총감독인 브살렐을 말하고, 그를 돕는 자로 31:6절에 “내가 또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을 세워 그와 함께 하게 하며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모든 자에게 내가 지혜를 주어 그들이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을 다 만들게 할지니”라고 해서 오홀리압을 부르셨습니다.
두 사람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영을 충만하게 주어 지혜롭게 하여 여러 가지 재주로 회막의 모든 기구를 만들게 하였습니다.
31:3-5절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정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보석을 깎아 물리며 여러 가지 기술로 나무를 새겨 만들게 하리라.” 이 두 사람과 함께 지혜있는 자들도 회막을 만드는 일에 참여케 하셨습니다.
그들이 만드는 것은 회막의 모든 기구와 제사장의 의복입니다. 31:7-11절에 이를 말해줍니다. “곧 회막과 증거궤와 그 위의 속죄소와 회막의 모든 기구와 상과 그 기구와 순금 등잔대와 그 모든 기구와 분향단과 번제단과 그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과 제사직을 행할 때에 입는 정교하게 짠 의복 곧 제사장 아론의 성의와 그의 아들들의 옷과 관유와 성소의 향기로운 향이라 무릇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그들이 만들지니라.”
이것이 오늘 본문의 전체 내용입니다. 예전에 이 본문을 읽을 때에 저는 그냥 회막을 만드는 일에 참여한 중요한 두 사람의 이름을 알고 기억할 뿐이었습니다. 성경퀴즈 시간에 물어보면 답을 하려는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정말 이 의미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까지 회막을 지음에 대하여 배운다라고 하면 회막의 전체 모양이나 그 안의 여러 기구들에 대하여 그림을 통해 알고, 그 하나하나가 그리스도의 무엇을 예표하는지 배워왔습니다. 그러니까 그 안의 모양을 아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출애굽하여 세운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가지는 도성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는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도성과 궁전이 그 나라를 나타내는 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점에 비교적 무관심했던 것입니다. 회막을 지으라는 명령 속에는 그 회막을 통해서 그 나라가 어떤 나라임을 증거하고 나타내려는 것인데 이를 주목하지 못하였다는 말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도 현재 교회에 간다고 하면서도 교회를 어떤 모습으로 만들어가야 하는지에 대하여는 큰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저 개인이 천당만 갈 수 있다면 다른 모든 것을 알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교회가 어떤 성전으로 세워져야 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냥 우리가 일반적으로 눈에 보이는 건물이나 성도들의 수준이나 개혁성향 등을 가지고 교회됨을 말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 보다 더 근본적인 교회의 모습이 있는데 그걸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그냥 교회에 잘 나가서 예배 잘 드리고 헌금 잘 내고 말씀을 잘 배우고 기도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신비한 은사가 많이 나타나는 교회, 전도를 열심히 하는 교회 정도로만 알 뿐입니다. 교회의 모습이 과연 이런 것인가 다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출애굽기 25장-31장의 회막을 지음은 단순히 겉모양이 어떻게 생겼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회막이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저는 오늘 회막을 건축하는 건축자들에 대하여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전에는 잘 몰랐습니다. 단순히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회막을 지은 두 사람의 이름과 그들에게 주신 지혜로운 영을 아는 정도였습니다.
그럼 조금 더 자세히 회막 건축자들에 대하여 살펴 보십시다. 이 본문 말고 다른 출애굽기 본문에서 건축자들에 대하여 말해줍니다. 첫 번째 돌판이 깨어지고 두 번째 돌판을 받으려고 올라갔을 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른 말씀 중에 나옵니다. 성막의 전체 비용이 얼마나 들어갔는가를 말하는 가운데 38:22-23절에 나옵니다.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을 만들었고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이 그와 함께 하였으니 오홀리압은 재능이 있어서 조각하며 또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실로 수 놓은 자더라.”
이렇게 시내산에서 지어진 성막은 솔로몬 왕 때 예루살렘 성전으로 완성이 됩니다. 열왕기상 5:1-6절입니다. “솔로몬이 기름 부음을 받고 그의 아버지를 이어 왕이 되었다 함을 두로 왕 히람이 듣고 그의 신하들을 솔로몬에게 보냈으니 이는 히람이 평생에 다윗을 사랑하였음이라 이에 솔로몬이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 내가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려 하오니 당신은 명령을 내려 나를 위하여 레바논에서 백향목을 베어내게 하소서 ... 당신도 알거니와 우리 중에는 시돈 사람처럼 벌목을 잘하는 자가 없나이다.”
솔로몬의 성전에 두로 왕 히람이 함께 참여했습니다. 솔로몬 성전은 백향목으로 지었는데 그 벌목을 시돈 사람이 도왔고 두로 왕 히람이 보내주었습니다. 그러니까 남대문 화재 이후 복원공사는 목수 중에 최고인 대목장이 총감독하여 짓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솔로몬 성전은 특별히 이방 두로 왕이 함께 했습니다.
두로 왕이 보낸 사람에 대하여 열왕기상 7:13-14절은 보다 더 자세히 알려줍니다. “솔로몬 왕이 사람을 보내어 히람을 두로에서 데려오니 그는 납달리 지파 과부의 아들이요 그의 아버지는 두로 사람이니 놋쇠 대장장이라 이 히람은 모든 놋 일에 지혜와 총명과 재능을 구비한 자이더니 솔로몬 왕에게 와서 그 모든 공사를 하니라.” 이 사람을 히람이라고 하며 납달리 지파 과부의 아들이요 놋쇠 대장장이라고 합니다. 납달리 지파는 민수기에 진을 형성할 때 단 지파 안에 속합니다.
이 솔로몬 성전의 건축에 대하여 역대하 2장에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두로 왕이 자기 사람을 솔로몬에게 보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역대하 2:13-14절입니다. “내가 이제 재주 있고 총명한 사람을 보내오니 전에 내 아버지 후람에게 속하였던 자라 이 사람은 단의 여자들 중 한 여인의 아들이요 그의 아버지는 두로 사람이라 능히 금, 은, 동, 철과 돌과 나무와 자색 청색 홍색 실과 가는 베로 일을 잘하며 또 모든 아로새기는 일에 익숙하고 모든 기묘한 양식에 능한 자이니 그에게 당신의 재주 있는 사람들과 당신의 아버지 내 주 다윗의 재주있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게 하소서.”
공교롭게도 두로 왕이 보내는 사람이 단 지파 여인의 아들이랍니다. 아버지가 두로 사람이니까 국제 결혼을 한 것입니다. 단 지파 여인의 아들이 솔로몬과 다윗의 재주 있는 사람들과 함께 성전 건축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이 단 지파 여인의 아들은 우리 나라 역사 가운데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들을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일본의 도자기 공예가 수준이 높아진 것은 전부 우리 나라 도공들 때문이 아닙니까! 이와 같이 단 지파 여인의 아들이 솔로몬 성전을 건축하는 일에 기묘한 재주를 가진 자로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일까요? 시내산의 성막을 지은 자도 단 지파 아히사막의 아들 오홀리압이었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의 성전을 건축하는 일에 함께 한 자도 단 지파 여인의 아들이고요. 시내산의 성막이 솔로몬의 성전으로 완공된 것에는 이처럼 기술자들도 연결시켜 말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여기까지 구약의 성전 지음에 어떤 건축자들이 참여했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어느 정도 공통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었습니다. 시내산의 성막 건축이나 솔로몬의 성전 건축이나 끝까지 따라다니는 사람은 다윗 사람과 단 지파 사람입니다. 유다 지파 브살렐과 단 지파 오홀리압처럼. 그리고 과부의 아들이라는 점을 유념했으면 합니다.
제가 사극이나 전쟁영화를 좋아한다고 말씀을 여러 번 드렸습니다. 요즘 ‘뿌리깊은 나무’라는 사극을 보지 않고 있었는데 아시는 분들이 자꾸만 추천을 해서 한꺼번에 5편을 연속해 보았습니다. 역시 사극은 제가 말씀을 전하는데 유익한 대사들이 너무 많이 나옵니다.
거기 보면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를 일으킨 일에 크게 두 사람을 꼽았습니다. 태조 이성계와 삼봉 정도
전이었습니다. 이성계가 나라의 외곽을 세웠다고 하면 나라의 내면은 정도전이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조선이라는 나라는 이성계와 정도전의 합작품인 셈입니다. 이렇게 이씨 왕조와 성리학을 근간으로 한 나라가 바로 조선입니다.
이 조선의 한양이라고 하는 도성은 성리학의 가르침을 따라 만들게 되어 있습니다. 성리학을 따르고 주창하는 사람들이 조선이라는 나라를 만들어가는 일에 참여한 것입니다. 정도전을 따르는 유림이 대표적입니다. 유교 선비들 말입니다.
이처럼 성막을 만드는 건축자들을 말할 때도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게 임하여 지혜로 지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영은 분명 여호와의 영입니다. 그러니 여호와의 나라를 건축한 것입니다. 그 집은 율법의 규례를 따라 만들어지게 될 것이구요. 이러한 점을 우리가 성막 건축에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리를 하고서 마가복음 12:35-44절을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듣더라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만약 마가복음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저 구약의 성전에 누가 어떻게 참여했는가를 알 뿐입니다. 그리고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를 것입니다. 구약 성전의 성격과 모습에 대하여 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분명 신약의 성전은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같은 자들이 짓지 않았습니다. 구약의 성전은 손으로 지은 성전이고, 신약은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이기 때문에 이러한 목공이나 대장장이와 같은 기술자들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 신약의 성전을 짓는 일에 참여하는 건축가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그리고 어떻게 짓겠습니까? 그 점을 우리가 오늘 생각해 보려 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열매를 맺지 않음에 대하여 분노하셨습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려면 용서의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죄 가운데 있었던 만민이 죄사함을 받고 이 성전에 들어올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당국자들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들은 쫓겨날 것입니다. 포도원 농부의 비유에서 나타난 것처럼 주인의 아들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는 새 성전을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새 성전의 왕은 어떻게 섬김을 받습니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고 했던 것처럼 가이사 보다 더 높으신 만왕의 왕으로 세금을 받으실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의 부활의 질문에 대하여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닌 산 자의 하나님으로 말씀하셔서 막달라 마리아와 같이 부정하고 비천한 여인이 부활하신 주님을 제일 먼저 만나뵙는 자가 된 것처럼 그런 교제를 이루는 성전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최고의 계명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을 지킴으로 이 성전을 만들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이 오셔서 새 성전을 지으심에 대하여 말해 왔는데 누가 이 성전에 어떻게 참여하는지에 대하여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부분, 즉 주님의 몸된 성전에 참여하는 건축자가 누구인지 오늘 본문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순전히 출애굽기 흐름과 병행한다는 것으로 보고 알게 된 것입니다.
왜 최고의 계명 다음에 다윗이 주라고 불렀던 주님과 서기관들의 행태를 지적하고 그 다음에 예수님은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셔서 과부의 헌금에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분명 예수님은 성전에서 가르치시면서 말씀하신 것이고, 헌금함에 앉으신 것이니 모두 성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다윗의 자손이라 서기관들이 말하였어도 그리스도는 다윗이 왕이라고 불렀던 분이십니다. 성전에서 더
가르치시면서 서기관들을 삼가라고 하셨습니다. 서기관들이 어떻게 행동하며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말씀하시면서 그 서기관들이 더 중한 판결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나오는 다윗 왕과 서기관은 조선의 이성계와 정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나라를 이루었던 자들 중에 서기관은 율법의 선생이니까, 마치 조선의 유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리학을 따르는 선비들이, 그리고 사대부 집안이 어떻게 평민들 위에 군림하며 지배하여 높은 자로 다스려 왔는지 생각해 보시면 꼭 여기에 말하는 서기관들과 같습니다.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것 등이 꼭 조선의 유교를 숭상하는 선비들 모습 같습니다. 그들이 높은 지식으로 낮은 서민들을 어떻게 착취하였는지 역사에서 배우시지 않았습니까!
‘뿌리 깊은 나무’에서 사대부와 유림들이 한글 창제를 반대하는 이유도 그들이 지식을 독점하여 평민들 위에 군림했던 기득권을 잃지 않으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종 대왕은 모든 사람이 글을 통해 지식을 깨달아 더 좋은 삶을 살게 하려 한 것이었다고 작가는 한글 창제를 해석했습니다.
이렇게 다윗 왕과 서기관들에 대해 가르치신 후에 예수님께서 마가복음에서는 갑자기 헌금함에 대하여 앉으셨다는 말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과부가 드린 두 렙돈 이야기는 전후 문맥을 빼고서 말한다면 어느 헌금이 더 좋은 것이냐는 해석만 가능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헌금함에 앉으신 일은 단순히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일어난 시간 순서대로 옮긴 것에 불과합니다.
헌금함에 넣은 액수는 분명 여러 부자들이 더 많이 넣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모든 사람보다 두 렙돈을 드린 과부가 더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더 많이 넣으셨다고 하시는가? 부자들은 다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부자들이 넣은 헌금과 과부가 넣은 헌금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풍족한 중에서 넣은 것과 가난한 중에서 생활비 전부를 넣은 것이 차이점입니다. 우선 이 과부는 마가복음에서 말하는 수로보니게 여인,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의미로 보아야 합니다. 비천하고 가난한 여인입니다. 분명 서기관과 대비가 됩니다.
그럼 이 말씀은 단순히 헌금에 대한 가르침입니까?
제가 일부러 시내산의 회막과 솔로몬 성전을 짓는 자들에 대하여 추적했던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단 지파 과부의 아들이라고 하는지에 대하여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자기들이 가진 공교한 재주로 성막을 만드는 건축자로 참여했습니다. 이런 일은 현 시대에 우리가 회사를 위하여 일하는 직원들이나 기능공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기술로 회사를 섬겨 회사를 만들어 가는 자들입니다. 즉 각자가 가지고 있는 재주와 기능들을 회사를 만드는데 쓰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직원이나 기능공들은 단지 재주나 기능들만 제공할 뿐이지 자신의 전부를 다 회사를 위하여 바치지는 않습니다. 헌금함에 넣은 부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풍족한 중에서 얼마를 떼어 드렸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과부는 전부를 드렸습니다.
구약의 지혜로 여호와의 성막을 지음은 공교한 재주와 기능으로 만들었다고 하고, 신약의 지혜로 주님의 성전을 지음은 과부가 전부를 드림으로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단 지파 과부의 아들이 성전을 지음에 참여했던 것처럼.
우리는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대단한 지혜와 재주로 성막을 만들었구나 하며 칭찬을 할지 모르겠지만
, 그것은 어디까지나 구약의 지혜에 불과합니다. 신약의 관점에서 보면 그건 부자가 풍족한 중에 얼마를 드리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성막을 만드는 일에도 이스라엘 자손이 헌금을 드리는 방식으로 예물을 가져왔습니다. 그것들은 애굽에서 애굽백성으로부터 받아 가지고 나온 전리품입니다. 그것을 드렸어도 가난한 과부처럼 전부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생명을 다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가는 과부의 헌금을 드림을 통하여 출애굽기의 성막 건축자들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누구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면 상대방도 그런 사랑으로 응답해서 함께 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만일 내가 사랑한다고 했는데 상대방은 그저 좋은 친구로 지내자고 하거나, 난 널 좋아하기는 하는데 사랑하지는 않는다고 하면 정말 싫습니다.
좋아한다는 말도 별로 나쁜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말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사는 관계도 서로 같은 질로 응답을 해야 함께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여호와와,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와는 다릅니다. 애굽에서 구원하신 여호와에게는 교묘한 재주로 봉사하여 그런 성막을 만들면 됩니다. 풍족한 중에서 얼마를 드린 부자들처럼 섬기면 됩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우리 죄인을 위하여 자기 생명 전부를 드려 사랑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럼 우리는 이 사랑에 어떻게 응답을 해야 하겠습니까? 그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는데 부자들이 풍족한 중에 얼마를 내어놓은 것처럼 사랑하면 되겠습니까? 가난한 과부처럼 생활비 전부를 드려 사랑함을 나타내어야 하겠습니까?
바로 예수님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죄인을 용서하여 짓는 이 성전에 함께 참여하는 건축자들은 대장장이도 아니고 목수도 아닙니다. 자기 생명 전부를 주님을 위하여 헌신하는 백성들이 이 성전에 참여하여 함께 건축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죄인을 용서하여 자기 몸에 연합시키셔서 주님의 몸으로 짓는 성전에 함께 하도록 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처럼 우리도 주님을 사랑함으로 이 성전을 만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냥 주님은 여러 성인들 중에 괜찮은 분입니다. 그런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전 생명을 섬기는 사랑하는 대상으로 주님을 알고 섬겨야 우리가 모이는 이 교회를 짓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교회가면 착한 소리를 들어요, 교회가면 좋은 사람들 만나요 이런 말로 교회를 만들지 맙시다. 주님이 몸된 성전은 그저 부자들과 공교한 기술자들만 모여 얼마를 드림으로 만드는 곳이 아닙니다. 비록 가난한 과부라도 자기 생명을 다하여 헌신하는 자들이 이 성전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거의 대부분의 교인들의 삶이 풍족한 중에 얼마를 드린 부자들과 같습니다. 대다수가 그렇게 사니 우리 스스로도 그렇게 사는 것이 합당한 줄 압니다. 적당하게 교회를 나가고 적당하게 어울리고 그렇게 살면 교회를 만들어 가는 것인 줄 착각하게 되어 있는 현실입니다. 정말로 개혁을 말하고 진정한 진리를 외치는 자들도 어쩌면 여러 부자들이나, 서기관이나, 브살렐과 오홀리압 정도 뿐일 것입니다.
여러분 눈에 이것이 보여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 여기 이 성찬상에 모임은 어떤 모습의 교회를 만들려고 모이는지 아셔야 합니다. 이 교회를 세우는 자들이 누구인 줄 아셔야 합니다.
물론 교회는 각자의 가진 성령의 은사로 만들어 갑니다. 주님의 몸의 지체로써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오른 팔이 오른 팔을 섬기지 못합니다. 오른 팔은 다른 팔을 섬기도록 되어 있습니다. 방언이나 예언이나 지식이나 가르침이나 병 고치는 은사나 모두 주님의 몸을 섬깁니다. 이렇게 섬길 때 그저 은사만, 재주만 내어놓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함으로 연합하라고 로마서는 영적 예배를 그렇게 설명합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최고의 계명을 따라 섬기는 삶의 모범은 바로 이 가난한 과부에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왜 성전으로부터 영원히 제거되었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성령을 속인 자였습니다. 여호와의 영으로만 충만한 자여서 드리고자 했던 것 중 얼마를 떼어 드렸던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몸된 성전에 참여하는 자로써 합당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지혜를 따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와평강교회를 만드는 일에 참여했다는 의미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아니라 아들의 영, 곧 성령의 지혜로 우리 교회를 만들어가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