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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꿈꾸는 교회 / 김형준 목사
대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 일이었습니다. 강의를 하고 잠깐 쉬는 시간에 한 여학생이 다가오더니 “교수님!” 하고 불러서 보니까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강의를 들으면서 자기 나름대로 뭔가 느껴지는 바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 무슨 일이냐?”하고 물었더니, 저의 강의를 들으면서 지나간 몇 년을 잠시 생각해 봤다는 겁니다. “저의 가정은 참 행복했어요. 꿈도 많았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았고...... 그런데 아버님을 잃고서, 가정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몇 년 전으로 다시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잃어버린 내 모습, 나에게 있어서 귀중하고 소중한 모습을 다시 되돌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서 우는 자매를 본 적이 있습니다.
비단 이 자매만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오늘 이 곳에도 지나간 시간을 회고하면서 건강도 잃고, 가정의 행복도 깨지고,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 보내고, 사업도 어렵고 또 사회적으로 여러 가지 원치 않는 일로 인해서 겪는 어려움들을 생각하며 그전의 행복했던 모습을 회복했으면 좋겠다 하는 바램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돌아보면서도 아픔이 없고 고난이 없던, 이전의 역사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들이 우리 마음속에 다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과거로 돌아가고 싶기 때문이 아니라, 과거에 갖고 있던 좋은 것을 바탕으로 앞으로의 삶을 산다면 더 행복해 질 수 있을 것 같은 마음 때문에 그런 바램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명설교가로 알려진, 월리엄 코빈 목사님의 회고록에 이러한 글이 나옵니다. 코빈 목사님의 생애 중 가장 어려웠던 순간은 대학에 다니던 아들을 자동차 사고로 잃었을 때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때 그는 하나님이 그토록 원망스러울 수 없었다고, 다시는 회복할 수 없을 만큼의 깊은 좌절감에 빠졌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나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 나는 나의 과거를 잃었기 때문에 그런 대로 견딜 수 있었지만, 내 아들이 죽었을 때는 내 미래를 잃어버렸기에 삶의 희망을 잃고 말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느헤미야라는 사람이 울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는 왜 울고 있을까요? 그가 들었던 이야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후, 자신의 민족이 겪은 아픈 과거를 기억하면서, 이제는 작은 희망마저도 끊어졌다는 좌절감이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할아버지 때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 차례에 걸쳐 바벨론의 공격을 받는 동안, 성전과 궁전은 훼파되고 또 그 자녀들과 젊은이들이 죽임을 당하는 아픔을 겪으며 포로로 잡혀왔습니다. 잡혀 와서 칠십 년간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세대는 죽고 그 다음 세대 때 고레스왕이 들어서고, 이스라엘을 다시 세워 주자는 의견이 나와 이미 일차 귀환 부대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일차 귀환 부대는 잃어버렸던 나라, 이스라엘 공동체를 다시 건설하자는 희망을 안고 갔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어둡기만 합니다. 그 곳에 있는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고 남은 자들은 낙심해 있고, 세웠던 성은 부서지고, 성문은 불에 탔다고 합니다. 꿈을 세우기 위해 간 그들이 오히려 좌절해서 절망 속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느헤미야는 비통한 가운데 젖게 됩니다. 앞으로 내 나라와 내 민족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그런 좌절감이 느헤미야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보면 느헤미야는 우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눈물의 자리에서부터 공동체를 일으켜 세우는 회복의 역사의 주인공으로 서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 속에서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기 원하십니까?
우리 가정 속에서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기 원하십니까?
우리 민족과 사회 속에서 다시 회복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오늘 느헤미야가 어떻게 자기 민족의 공동체를 회복시켜 나갔는지 그 원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나의 삶과 나의 가정과 우리 역사 앞에 적용할 수 있는 지혜를 얻기 바랍니다.
느헤미야가 회복의 역사를 이룰 수 있었던
첫 번째 원리는 성경은 그가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4절 상반 절을 봅시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동안 슬퍼하며’
느헤미야는 바벨론 땅에서 지혜롭기도 하고, 영특하기도 하고, 신의를 지키기도 해서 포로이면서도 바벨론 왕 아닥사스다의 술 맡은 관원 장으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술 맡은 관원 장이라고 할 때, 단순히 술 따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고대 군주들은 독살당할 것을 가장 두려워했습니다. 음식에 독약을 타서 죽였기 때문에 자기가 가장 신임하는 사람을 세워 먼저 음식을 맛보게 하고 나서 그 사람이 죽지 않으면 먹었습니다. 그러니 술 맡은 관원은 단순히 술만 따라 주는 것이 아니라 술을 마시면서 대화도 할 수 있는 학식과 지혜 그리고 지식을 겸비해야만 했습니다.
그렇다고 할 때, 느헤미야는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포로로 잡혀와 큰 제국의 왕에게 신임 받는 실세 중의 실세였으며, 그랬기에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자기 민족의 아픈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주목해 봅시다. 누가 자신의 얘기를 해도 귀에 안 들어오면 ‘뭐, 그런 모양이다’ 하고 지나가는데, 느헤미야에게 들렸던 소식은 그의 귀를 타고 들어가 그의 영혼을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얼마나 충격을 받았던지 앉아서 울었는데, 수일 동안 슬퍼하면서, 밥을 굶어가면서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무너진 성과 부서진 성곽들 그리고 이미 좌절하고 상해버린 백성들의 심정을 생각하며 울고 있는 느헤미야를 봅니다.
살아가면서 들어야 할 이야기는 듣지 못하고,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듣는 우리의 귀가 병들어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우리의 귀가 정말 들어야 될 것을 듣지 못하게 되면 정말 좋은 소리는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경우에 해당되지는 않은지 생각해봅시다.
☛먼저 나 중심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내가 중심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은 가치 없는 것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슬퍼서 울든, 좋은 얘기를 하든, 기쁜 얘기를 하든지 안중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자기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들을 길에 떨어진 씨앗에 비유하면서, 길바닥과 같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어떤 이야기가 떨어져도 이 길은 빤질빤질해서 씨앗을 전혀 받아들이질 못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도 세상을 자기 중심적으로 보고, 사회 생활할 때도 자기 중심적으로 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의 이야기를 들어 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 혼자서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가장-우리 남자들-, 아내의 신음소리와 자녀들의 탄식소리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집안에서 자기 중심적으로 사는 부인은 남편의 탄식소리, 자녀들의 깊은 고민을 듣지 못합니다. 그냥 듣고 넘기는 것이지 진짜로는 듣지 못합니다.
서로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을 때, 공동체는 병들고 회복의 역사는커녕 분열과 단절의 역사만이 남게 됩니다.
☛다음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많을 때 남의 이야기를 듣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그것 때문에 성공했고, 그것 때문에 높아졌고, 그것 때문에 부유해졌고, 그것 때문에 평안을 얻었다면 다른 사람들이 어떤 얘기를 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가진 것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들어야 될 게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이 부정적인 요소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속의 상처, 아픔, 불행한 얘기로 가득 채워져 있는 사람은 남의 얘기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제과점에 앵무새가 있었습니다.
한 여자가 출근하는 길에 제과점 앞을 지나갈 때였습니다.
앵무새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봐 아가씨! 아가씨, 이리 와봐! 이리 와봐!” 그래서 신기해서 가보면, “너 왜 그리 못생겼어, 너 참 못생겼네, 메주 같구나.” 처음엔 여자도 신경을 안 쓰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 다음날 앵무새가 “이봐! 아가씨! 이리 와봐! 이리 와봐!” 해서 가면, “너 얼굴이 왜 그리 메주같이 생겼어, 왜 그리 못생겼어!” 기분이 상한 여자는 주인한테 가서 앵무새 버릇 좀 고치라고 얘기했습니다. 무슨 말을 저렇게 하느냐고...... 다음날 지나가는데 야단을 맞아서 그런지 앵무새 기가 좀 꺾인 것 같았습니다. “이봐 아가씨! 이리 와봐.” 오늘은 무슨 얘기를 할까 가까이 가보았습니다. “알지?”, “무슨 말할지 알지?” 뒷말은 들어보지도 못하고 여자는 그만 다른 생각을 할 여유를 갖지 못했습니다. 앵무새가 반복적으로 해 주었던 그 이야기만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경험이 많다는 것은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한 굳은 확신 때문에 그 외에 다른 이야기는 들려올 여유가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자기 중심적이면서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은 다른 것을 집어넣을 만한 저장 창고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 얘기는 들어올 틈이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 하나는 너무 깊은 좌절과 절망이 있는 사람은 남의 얘기를 들을 수 있는 여유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가족들의 신음소리가 들립니까?
이 민족이 병들어 가고 있는 소리가 들려옵니까?
하나님께서 나와 내 가정과 우리 민족을 향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신음소리를 들으셨기에 우리를 그대로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오셔서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해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부으셨습니다.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들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선한 사마리아 비유를 봅시다. 비유 속에서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당시에 천대받고 무시 당하며 목소리 한번 제대로 내지 못하던-은 레위인과 제사장들이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갈 때, 죽어 가는 사람의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선한 이웃이 되기 위해서 가져야 될 필수적인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이웃의 아픔과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열린 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느헤미야는 자기 민족의 아픈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소식을 가지고 아픔을 같이 나누는, 그래서 이 일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묻고 구하는 회복의 계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오래된 얘기로 여러분의 기억 속에 얼마만큼이나 남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였습니다. 전 세계 매스컴이 삼풍백화점을 향해 초점을 맞추고 있었고, 연일 피 흙덩어리 속에서 살아 나오는 사람들과 인터뷰하는 장면이 타고 흘렀습니다.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있던 두 사람, 남자청년과 여자청년을 기억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부처님께서 나를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셨다.”고 꿈에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이신 것을 믿습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이 사건의 배후에, 생사화복의 배후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역사상 찾아볼 수 없는 기독교의 부흥이 있었던 한국에, 맨 마지막에 한 청년이 나오면서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염려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겠다고 너는 살아서 반드시 나갈 거라고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기에 죽음 문 앞까지 갔었지만 살아 나왔습니다.” 하고 이 한마디를 했다면, 엄청난 센세이션을 우리 민족 뿐 아니라 전 세계에 다시 한번 부흥을 일으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왜 그런 방법을 쓰지 않으셨을까요?
한국 교회를 향해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한국교회는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얼마 뒤에 성수대교가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굵직굵직한 사건의 배후 속에 있는 기독교인의 모습들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이 사회에서 더 이상 영향력을 갖지 못하는 기독교, 그러한 기독교가 백성의 신음과 아픔소리를 외면해 버리고 점점 귀족화되고 있지는 않은지, 민족의 역사 흐름 앞에 자신들의 교회와 자신들의 평안만을 추구하는 이미 역사성과 정체성을 잃어버린 교회 모습은 아닌지 우리 다시 돌아봐야 될 것입니다.
아니 무엇보다도 교회인 내 자신이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서 이 이웃에게 들려주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면, 오늘 우리는 회복의 역사를 시작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삼분의 일을 이미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음성 그리고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음성, 민족의 아픔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려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느헤미야가 민족을 다시 회복시키고 그 회복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었던 이유는
두 번째 이유로 느헤미야는 문제를 정확하게 진단하는 영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들려지는 소식을 보십시오. 성은 무너지고, 성문들은 불탔으며, 백성들은 사로잡혀 나가고, 그 나마 남은 자도 큰 환난과 능욕을 받는다는 소식이 들려집니다. 그는 6절, 7절을 통해서 이렇게 그 사건을 진단합니다.
“이제 종이 주의 종 이스라엘 자손들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이스라엘 자손의 주 앞에 범죄 함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 하여 주를 향하여 심히 악을 행하여 주의 종 모세에게 주께서 명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그가 발견한 고통과 아픔의 역사의 원인을 ‘하나님과의 언약’에서 찾았습니다.
느헤미야는 기도만 하고 금식만 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느헤미야를 예언자라고 이야기 할 때, ‘예언자’하면 어떤 느낌을 받습니까?
산 속에 들어가 40일 기도하고 눈감고 기도하는 사람입니까?
사실 예언자는 눈감고 기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눈뜨고 역사를 정확하게 볼 줄 아는 사람을 예언자라고 합니다.
예언자는 기도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역사를 알고,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역사의 흐름과 역사 속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눈을 뜨고 정확하게 분석할 줄 아는 지혜와 지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게다가 영적인 의미를 아는 사람이 예언자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느헤미야는 역사, 문화, 정치, 철학 그리고 모든 일에 왕과 대화할 만한 수준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얼마든지 사건의 원인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분석해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적이고 현상적인 방법으로 원인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 일 더 깊은 배후에 천지를 주관하시고, 우리 민족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 그 하나님과의 언약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이 오늘 우리 민족의 고통의 원인이며, 우리 민족의 아픔과 어려움을 당하는 원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단지 조상들의 죄 뿐 아니라 ‘나와 나의 아비 집이 범죄 하였나이다.’ 이렇게 나의 죄로 받아들이고 회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왕이 바뀌고 왕조가 바뀌어도 계속 국무총리로 남아 있었던 다니엘의 역사관을 보십시오.
다니엘서 9장에 보면 다니엘도 동일하게 이야기합니다.
고대 근동지방에 발달한 문화와 철학으로 훈련이 된 다니엘, 정치적으로 감각이 뛰어난 그 또한 이스라엘 민족이 당한 어려움은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에서 끊어졌기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일이 일어날 때, 그 일에 대한 원인을 어디에서 찾으십니까?
단순히 나타나는 현상적인 것들, 힘 써주는 사람이 없었다든지, 경제적으로 별로 도움이 되는 사람이 없었다든지 하는 등의 현상적인 것이 아닌, 배후에 주관하고 계시는 전능하신 주님을 보았던 느헤미야의 감각을 여러분은 가지고 계시닙까?
문제 진단을 잘 해야 됩니다.
전기고장이 나면서 미국의 포드 자동차 회사가 자동차를 생산하는 모든 시설들을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자체적으로 전기기사를 동원해서 고치려고 해보았지만 도저히 고쳐지지 않아서
유명한 전기회사의 기사를 불렀습니다.
이 사람은 공구 몇 개 들고 다니며 뚝딱뚝딱하더니, 조금 있다 해결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참 기술 좋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청구서가 와서 보니 무려 천불이나 나온 것입니다.
30분 뚝딱한 것의 대가로 무려 천불이 날라 왔으니 포드회사의 사장은 한 번 거절하는 의미로 명세서를 내 놓으라고 요청했습니다.
명세서가 왔는데 이렇게 되어있었습니다.
‘고장 원인 진단 비용 990불, 수리비 10불.’ 전문가는 진단을 잘합니다. 의사도 명인은 병의 원인을 잘 진단하는 의사입니다. 진단이 잘 되어야 처방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제가 아는 한 권사님 따님은 20대 초반에 당뇨병으로 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진단이 잘못 되어서 당뇨병 환자에게 포도당 주사를 처방한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을 잃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주고자 해도 진단이 잘못된 것은 생명을 죽일 수 있다는 권사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한반도가 나눠져 있고 아직도 민족의 아픔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주님은 왜 우리에게 부흥을 허락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를 왜 여기까지 성장하게 하셨고, 또 담임 목사님으로 하여금 개척하게 하셨을까요?
이 일련의 사건과 과정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일까요?
내 인생을 향한 그리고 우리 가정을 향해 일어났던 일련의 모든 일들의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 원인을 진지하게 영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사람만이 자기 개인의 문제와 가정의 문제와 민족의 문제를 처방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열심히 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문제가 어디서부터 왔는지 원인을 살피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사건의 원인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았기 때문에, 이후에 계속되는 회복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놓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역을 책임지시고 인도해 가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이 땅의 아픔을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민족은 무엇보다 더욱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지 아니하고 서로 물고 찢으면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의 원인을 ‘우리가 힘이 약해서’, ‘군사력이 약해서’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선각자들은 우리 민족이 하나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한데 있었다고 말합니다.
또 어떤 분은 우리가 정말 신용 있는 민족이 되어야 하겠기에 교육에 관심을 갖고서 그들 나름대로 민족의 문제를 진단하며 중요한 공헌들을 해 왔습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일어나는 일, 그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남편을 잘 못 만나서’, ‘아내를 잘못 만나서’, ‘원수 같은 자식을 만나서’, ‘집안을 잘 못 만나서’, ‘환경을 잘 못 만나서’ 등. 원인을 밖에서 찾을 때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상담을 해 보면 남을 원망했던 사람이 문제의 원인을 ‘나’에게서부터 찾기 시작할 때 풀리기 시작하는 것을 종종 보았습니다.
느헤미야는 우리 조상의 죄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고생한다고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 조상의 죄와 더불어 나도 범죄 하였나이다...”
...조상들이 저지른 죄를 업고, 하나님 앞에 동일시하며 회개하는 것, 그것이 느헤미야가 가졌던 진단의 결론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민족이 지었던 죄를 함께 끌어안고 기도할 수 있는 느헤미야와 같은 신앙의 모습이 있어야 할 줄 압니다.
그리고 우리의 어려운 이웃들이 고통 당하는 고통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항 한쪽이 깨지면 다른 쪽은 평안한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면 어항에 있던 물고기들은 다 같이 죽고 맙니다.
‘나는 부자니까, 나는 여유가 있으니까 괜찮겠지’ 생각하지만, 공동체라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같이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시간 문제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영적인 원리는 기도로 문제를 풀어 가는 영적 열쇠를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4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면, 느헤미야가 이스라엘 사람들의 아픈 소식을 들었을 때 제일 먼저 했던 것은, 순간적으로 충격을 받고 슬퍼서 울기는 울었지만, 첫 번째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느헤미야서 짧은 책 속에 느헤미야가 기도했다는 내용이 무려 아홉 군데나 나오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왕과 상의하면 끝나는 사람입니다.
왕은 어떤 사람입니까?
왕에게 느헤미야는 자기 생명을 지켜주는 사람이기 때문에 부탁하면 들어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왕을 의지하지 않고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방백들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의 기도를 들어보면 주님에 대한 바른 고백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기도합니다. 뿐만 아니라 기도에 따라서 내가 헌신하게 해 달라는 헌신에 대한 내용도 담겨져 있습니다. 기도 속에 내 헌신이 들어가지 않으면 기도가 완성되지 않습니다.
중국에서 선교를 했던 허드슨 테일러에게 어떤 분이 찾아와서 질문했다고 합니다. “선교사님, 선교사님, 어떻게 해서 이렇게 성공적인 사역을 하시게 되셨습니까?”
허드슨 테일러가 대답 합니다. “저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사람들을 움직이시도록 하였습니다. 당신도 당신의 힘으로 사람을 움직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사람들을 움직이도록 하십시오.”
신앙의 사람, 허드슨 테일러는 자기가 할 수 있어도, 하나님으로 하여금 움직이게 하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장군이었으며 황제가 되었던 나폴레옹은 전쟁을 참 잘합니다. 전쟁을 하면 꼭 승리하는데, 승리하는 비결 중의 하나가 전쟁이 막 벌어지고 있는 동안 자기 측근들과 함께 전쟁터를 볼 수 있는 높은 고지에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질 수밖에 없는 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때였다고 합니다.
나폴레옹과 그의 측근 장군들이 올라가서 보는 동안 나폴레옹 황제가 말했습니다. “저 건너편에 농장이 보이냐?”,
“보입니다.”,
“저 농장을 반드시 점령하시오! 그리고 사수하시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도 좋으니 무조건 사수하시오.”
그 전쟁은 나폴레옹의 승리로 끝이 났는데, 그 이유가 농장의 거점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승리했다고 합니다. 상황과 환경을 남다르게 볼 줄 아는 사람, 나폴레옹, 그는 어디에 서있어야 승리하는지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역사와 문화, 사회 그리고 경제, 모든 것을 볼 줄 아는 사람, 느헤미야는 자기의 성공해야 할 자리, 일어설 수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 곳은 바로 기도의 자리였던 것입니다.
기도의 자리를 잃어버릴 때,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는 기도의 자리를 놓지 않았습니다.
기도의 자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며 자기의 사역을 해 나간 느헤미야를 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승리를 위해서 어떤 방법으로, 어떤 위치에 서서 행하십니까?
느헤미야는 자기의 좋았던 위치를 버려두고, 주님과 기도하는 자리에 위치를 세워 회복과 부흥의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노숙자를 무료로 재워주는 곳이 있습니다.
그 곳을 ‘쉘터’라고 부릅니다. 쉘터에서 노숙자들은, 낮에는 자기 소유물을 맡겼다가 밤에는 자기 소유물을 찾아 그 곳에서 잠을 잡니다.
한 노숙자가 쉘터에 와서 자기 옷을 찾다가 꼬마의 잠바를 잘못 찾아서 집고는, 집는 순간 “Not mine(내 것이 아니다)! 내가 이 옷의 주인 아이처럼 어리다면 내 인생은 지금보다 훨씬 잘살 수 있을텐데” 했답니다.
그때 그것을 듣고 있던 자원봉사자 한 사람이 얘기했습니다.
“잠깐 여보시오, You are child of God(당신은 하나님의 어린이 입니다).”
노숙자는 뭔가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 같더니 얼굴이 밝아지면서
“맞습니다.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입니다. 나는 다시 시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이기 때문입니다.”
회복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린이와 같습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것 다시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신 기쁨의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 동안교회가 개인의 삶과 가정 속에서 잃어버린 것을 회복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고 도와주는, 우리 민족이 잃어버린 아름다운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유산들을 다시금 회복시켜주도록 도와주는 교회로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