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명철
가을의 마지막 절기 상강(霜降)이 한로(寒露)의 강을 건넜다. 낙엽을 물들이며 입동(立冬)으로 흐르고 있는 상강이다. 찬이슬 내린다는 한로에 찬이슬은 내리지 않고 비만 오락가락 상강에 인계하고 뒷방으로 물러간다.
그러나 마음은 더위의 끈적임이 가시지 않은 것 같은 여름에 머물러있다. 아직 여름의 꼬리를 밟고 있는 것 같은데, 몸을 움츠리게 하는 낯선 찬바람이 불어온다.
따뜻한 방안공기는 창문 틈으로 다 빠져나간다.
음산한 바람이 황량한 거리로 낙엽을 몰고 가는 이별의 슬픈 계절임을 확인하듯 밤벌레 소리 구슬프다.
상강이면 서리가 내리고 고장에 따라서는 살얼음이 얼거나 눈이 내리며 단풍이 절정에 이르러야 할 것인데 아침까지도 비가 내렸다.
사람들은 이상기온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 역시 같은 마음이면서도 누구를 탓할 수 없는 지구 위에 사는 모든 사람의 책임이기에 씁쓸한 심정을 스스로 달래본다.
이맘때쯤이면 추수가 거의 끝나고 동물들은 일찌감치 겨울잠에 들어갈 준비를 해야 하는데, 농사지으려 내려온 우리 손자는 500평 정도에 콩을 심어놓고, 수확할 생각은 안하고 나락 수매현장에 알바를 나가고 있다.
’제힘으로 뭐든 해봐야 한다‘는 옛사람들의 말에 공감은 하면서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고된 노동이기에 짠하고 안쓰러운 마음 어디에 비길 데가 없다.
제가 선택한 것이지만 다른 애들 같으면 여행을 가고 연애를 하며 한창 피어나는 청춘을 즐겨야 할 때라는 생각을 하면 더욱 그렇다.
계절, 특히 가을은 사람의 오욕(五慾) 칠정(七情), 그중에서도 서글픔과 허무(虛無)를 품고 세월에 몸을 맡긴 채 달려간다. 한없고 끝없는 허공을 향하여 쉼 없이 달려간다.
그런 걸 알면서도 평소에 품고 있는 짠하고 안쓰러운 마음이다.
오욕과 칠정 등이 머무는 곳은 어디일까? 답 없는 물음을 던져놓고 푸념의 감정을 넣어 보지만 스스로 고개 숙여 얼굴 붉힌다.
본연의 자기 자리가 있을까? 자신의 영역을 지키며 사는 인간의 삶이란 가을 따라 흘러가는 존재일 뿐이란 생각에서는 그 어떤 감정도 보태질 여지가 없는 것 같다.
모든 생명체는 다 그럴 것이다. 문득 이제 사랑을 갈무리할 때란 생각을 해본다.
제법 스산한 가을바람이다.
가슴 시린 바람 소리, 잘못 닫힌 창문에서 울고 있다.
비 갠 푸른 하늘이 텅 빈 가슴처럼 차갑게 느껴진다.
빗물에 젖은 낙엽이 발길에 밟힌다.
모양성 솔바람 청아한, 아직 떠나지 못한 뻐꾸기 노래 구슬프다.
성황봉에 잠시 쉬였다 가는 구름이 바람까지 잡아놓는다.
먼 하늘가에 아련히 떠오르는 사람, 남들도 다 잊지 못한다는 첫사랑의 여인이 가을 단풍 숲에서 나에게 손짓한다.
화려한 단풍 오색 옷을 입고 사뿐히 춤을 추며 나에게 오고 있다.
먼~먼 추억의 오솔길에서 사뿐 사뿐 미소 지으며 다가오고 있다.
이 가을 허망한 꿈일망정 생의 종착역을 장식할 나래를 펴보자.
그리하여 나의 황혼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년의 시절, 건강하고 행복한 화양연화(和樣年華)의 가을로 가꾸어 나가기를 소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