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32] 최봉춘(崔奉春) - 일본 개척의 감회 2. 입교 후 일본 전도 결정 - 1
1 그 후 신학공부를 하기 위해 일본에 가서 얼마 동안 있다가 한국에 다시 돌아왔었다. 당시는 6.25사변 이후라서 미국 선교본부에서 구호물자를 원조해 주어 교회를 운영하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2 나는 이전에 미군부대에서 통역을 해본 일이 있었기 때문에 원조 물자를 얻어 교회를 지어 독립 교회에서 시무했으며 사회단체도 운영한 적이 있다.
3 사실 내가 한국에 와서 교회에 봉사하고 있지만 실제로 많은 고민에 휩싸여 있었다. 나에게 만족할 만한 자리가 없었고 성경을 보면 이해하기 곤란한 점이 많았으며, 교회 지도자인 목사 장로들의 행동을 보고 실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교회를 떠나 시골에서 농사를 지은 때도 있었다.
4 그러나 나 자신이 아직 젊었기에 시골에만 있을 수 없어 다시 상경했다. 얼마 후 인천에서 학교 일을 보았지만 그 일이 잘 안 되어 고통을 받고 있었다.
5 그때 마침 송도빈(宋道彬)씨와 함께 미국 대사관 미술과에 근무하던 친구를 만났다. 내가 자주 서울에 올라온 뒤 일이 잘되지 않아 그 친구의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6 그때 송 장로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분이 어느 교회에 나가는지 알게 됐다. 그래서 나는 송도빈(宋道彬) 씨를 상당히 경계를 하면서 그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7 한번은 그와 함께 식당에 가서 커피를 마시면서 그는 “이 세상에 목사 장로 그 누구든지 신앙을 자랑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인 것은 제일 잘 안다는 대제사장이나 율법사들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8 그 말씀이 나에게 전과는 새로운 방향으로 들리며 ‘어이쿠!’ 하는 마음과 함께 내가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겠다고 느껴졌다. 겸손해야 되겠다는 마음이 다시금 들어왔다.
9 그 후 나는 송도빈(宋道彬) 씨가 나에게 대하는 사랑의 감정이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임을 느끼게 됐다. 그때 일이 잘 안되어 끼니를 굶는 때도 있었는데 그분은 식사도 대접해 주었고 제가 빚에 쪼들릴 때 대신 갚아 주기도 하였다.
10 그러한 가운데 통일교회에 가서 원리를 들어 보지 않겠느냐 하는 권유를 물리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원리 강의를 듣고 많은 감명을 받고 입교를 결심했다. 그때가 1956년 4월 10일이다. (협회원번호36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