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5년 8월, UCLA 재학시 LA 지역의 기독교 신문인 "생명의 길"에 기고했던 제 간증문입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하나님 강하심이라 !! - 나의 인생 나의 간증 (1995년 作, 이준수)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27년을 살아오면서 어떻게 보면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길이었지만 지나 온 나날들을 되돌아보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눈물로 감사와 영광을 돌려 드린다. 그리고 나에게 오늘이 있기까지 한 오라기라도 남김없이 사랑과 헌신을 쏟아 부어 주신 나의 부모님들께도 고맙고 감사한 마음으로 이 간증을 바치고 싶다.
1968년 11월 20일, 나는 서울에서 2남 1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몸이 약했던 어머니로부터 8개월만에 태어난 나는 인큐베이터에 옮겨져 두 달 동안을 있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인큐베이터 안에서 나는 심한 황달에 걸려 태어날 때 2.5kg 이었던 몸무게는 1.9kg으로 떨어지면서 병원에서는 전부 죽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린 나의 생명을 거두어 가시지 않고 살려 주셨다. 퇴원해 집에 돌아오면서 이제 건강해질 것이라고 믿었던 부모님들... 왠지 돐이 될 때까지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밤에 잠도 안 자고 울어대는 나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 '왜 걷지도 못하고 몸을 가눌 수도 없느냐?' 는 걱정스러운 질문에 병원 의사는 '발육이 늦어 그러니 괜찮다' 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두 돌이 지나도 여전히 낫지를 않았다. 결국 3살이 되어서야 병원 의사는 뇌성마비라는 결론을 내려 주었다. 갓 태어나 황달에 결렸을 때 바로 교환수혈을 해주었으면 뇌성마비에 걸리지 않았을텐데 하는 의사에 대한 원망과 함께 이 때부터 어머니는 몸을 가누지 못하는 나를 업고 전국의 유명한 병원이나 용하다는 한의원은 다 찾아 나섰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시고 집안이 어려워 경찰대학 간부 후보생을 거쳐 경찰 공무원으로서 바쁜 시간에 쫓기는 아버지의 뒷바라지도 뒤로 한 채 이 때부터 나를 위한 어머니의 희생은 시작되었다. 신체를 제어하는 자율신경만 손상되고 지적 능력은 정상이었던 나를 어떻게 해서든지 고쳐서 학교에 보내려고, 매일 아침 9시부터 오후 1시까지는 한양대학 부속병원에 데려가 물리치료를 받게 했고 오후에는 경희대학 한방병원에 데려가 침을 맞히고 한약을 먹였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4살 때부터는 병원에 갔다 온 후 저녁이면 가누지도 못하는 나의 몸을 조그만 밥상 앞에 앉혀 놓고 선을 긋는 연습부터 시작하여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선을 똑바로 그을 수가 없었다. 점선 따라 쓰는 글도 쓸 수가 없었다.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연습하고... 종이가 헤어져 구멍이 뚫어질 때까지 반복했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해보려는 어머니의 노력은 밤 12시가 넘도록 나를 붙들고 쓰기 연습을 시켰으나 기대보다 실망이 컸다.
초등학교를 들어갈 나이가 되었는데도 몸은 여전히 몹시 불편했고 도저히 학교 공부를 감당할 것 같지 못했다. 1975년 12월, 옛날 집으로서 생활이 불편한 이문동 집에서 새로 개발된 강남 압구정동의 현대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아파트의 생활은 편리했다. 그러나 몇 달 뒤 초등학교를 들어가야 되는데 학교가 없었다. 당시 새로 개발되는 강남 지역이라 학교가 아직 한군데도 지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할머니가 계시는 종암동의 숭례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버스를 두 번씩이나 갈아 타고 가야 하는 학교... 몸이 바보 같은데 그나마 마음과 정신마저 바보가 될까 봐 어떻게 해서든지 가르쳐 보려는 어머님의 집념은 나를 등에 업고 매일 같이 눈이 노나 비가 오나 초등학교를 찾아갔다. 그 것만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아예 교실 내 옆자리에 앉아 수업이 끝날 때까지 나를 도와 주셨다. 책상 위에 있는 연필, 지우개 등을 몽땅 떨어뜨리면 집어 주시고... 그러나 선생님이나 친구들의 반응은 좋을 리 없었다. '그렇게 몸이 불편하면 특수 학교에나 보내지...' 어머니까지 옆에 앉아 있으니 신경이 크게 쓰여졌던 모양이다. 그러나 어머니 없이 스스로 존재 할 수 없는 나에겐 옆에 있는 어머니가 의지가 됐고 어머니의 도움은 곧 나의 힘이었다.
다른 애들 공부하는 것을 보고 나도 저렇게 열심히 해야 하겠다고 생각되어 열심히 노력하다 보니 조금씩 조금씩 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글자 하나 익히고 쓰는 것이 나에겐 얼마나 힘들었던지 내 얼굴에선 물이 뚝뚝 떨어졌고 온몸은 땀으로 펑 젖어 있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와서는 숙제를 해야 했다. 선생님은 숙제를 해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지만 숙제를 안 해 가면 공부에 아무 효과가 없고 이 다음에 사회에 속해 살게 하려면 어떻게 해서든 남들과 똑같은 공부를 시켜야 한다는 어머니의 믿음은 철저하게 나를 가르쳤다. 다른 애들은 15분 정도면 할 수 있는 숙제를 나는 5-6 시간씩 걸려 가며 해야 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밤 12시 이전에는 잠자리에 들어 본 적이 거의 없다. 집에서도 항상 내 옆에 앉아 공부를 가르쳐 주신 어머니는 시험 때면 교과서, 참고서를 읽어 주시느라 목이 쉴 정도였다. 그 결과 1학년말에 가서 본 전교 일제 고사에서 나는 전 과목 올백으로 1학년 전체에서 1등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는 어머니가 쏟은 눈물과 노력의 첫 성과였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는 강남에 학교가 생겨 전학을 하게 되었다. 압구정동의 구정초등학교였다. 황막한 벌판에 세워진 학교! 역시 선생님들이나 친구들이 모두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하면 된다 라는 가능성을 발견한 어머니는 남들의 시선엔 관심도 없었다. 오직 나를 위한 눈물겨운 희생뿐이었다.
내가 교회를 나가게 된 것은 1980년부터였다. 미션 스쿨인 이화여대 교육과를 졸업한 어머니는 빠듯한 살림 속에 뇌성마비인 나를 24시간 돌보느라 한동안 교회를 쉬었었다. 그러나 다시 믿음 생활에 열심을 내게 된 것은 1979년 강남에 광림교회가 세워지면서부터였다. 어머니는 나를 주일학교에 보내면서 밤마다 기도해주고 성경 말씀을 읽어 주시는 등 나의 믿음 향상을 위해 많은 신경을 써 주셨다. 밤 늦게까지 공부시키고 12시가 넘어서 잠자리에 들어서도 성경 말씀 읽어 주시는 것만은 빼 놓칠 않으셨다.
나는 시험만 보면 일등이었고 이젠 전교에서도 수석을 차지했다. 5, 6학년 때는 어린이들이 뽑아주는 반장을 두 번씩이나 했고 전교 어린이 부회장도 역임했다. 부잣집 아이들이 사는 곳이라 공부도 잘하고, 학부모들의 교육열 또한 대단했다. 그러나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전교에서 최고의 수석을 하는 영광을 차지했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포기한 채 45kg의 연약한 몸으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나를 업고 병원과 학교를 데리고 다니면서 짜증 한번 내지 않던 나의 어머니가 있었기에 얻을 수 있었던 승리요 기쁨이었다.
1982년에 잠원동에 있는 경원 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 공부는 훨씬 어려웠다. 이제부터는 어머니가 교실에 같이 계시질 않았다. 아침에 학교에 데려다 주고 집에 갔다가 점심 시간이 되면 점심을 가져다 먹여 주시고 다시 가셨다가 수업이 끝날 때쯤 되어 나를 데리러 오셨다. '앞으로 독립해 살아가려면 이제부터 너 혼자 공부해야 한다.' 라는 어머니의 말씀과 함께 나는 홀로 어려운 환경을 헤쳐나가야만 했다. 과목도 많아지고 글씨 쓰는 것이 시간이 걸려 따라가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 길을 헤쳐 나가야만 했다. 저녁이면 늘 내 곁에서 떠나질 못했던 어머니! 무엇보다 나는 아버지가 늘 고맙고 감사했다. 집에 퇴근해서 돌아오셔도 혼자 옷 갈아 입고 혼자 계시다 잠이 들어야 하는 아버지이셨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이해하시고 오히려 몸이 불편한 나를 위해 최선을 다 해 주셨다. 바쁜 와중에서도 시간만 나시면 나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고 사회성을 길러 주기 위해 전국에 좋은 곳이란 좋은 곳은 안 가본 데가 없을 정도로 데리고 다니며 사회 속에서의 나의 존재를 심어 주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이셨다.
중학교 때는 전교 1등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상위권에 있으면서 고등학교를 가기 위한 연합고사를 치르게 되었다. 200점 만점에 193점을 받아 집 근처에 있는 현대고등학교를 들어갔다. 고등학교 때부터는 내신 성적이 있었는데.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시험을 볼 때 시간을 나에게 좀 더 할당해주었는데 고등학교 때부터는 달랐다. 내가 저능아로 공부를 원래 못하면 몰라도 공부를 어느 정도 잘 하니까 자기 자식들이 밀려날 것 같아 학부형들의 견제와 질시가 심했다. 선생님들도 나를 도와 줄 수가 없었다. 내신성적으로 인한 학생들간의 경쟁의식 때문에 참으로 애를 많이 먹었다. 그러나 나는 열심히 했다. 보통 아침 7시에 학교에 가서 수업이 끝나면 독서실로... 늘 새벽 2시에나 집에 돌아와 잠을 자야만 했다. 매일 같이 4시간 정도밖에 못 자고 하는 공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어떻게 견뎌 냈을까 하며 아슬아슬 하게 느껴진다. 물론 어머니는 이런 나의 일촉즉발의 삶에 일거수 일투족이 되었다. 한 순간이라도 잘못하면 나 자신이 와르르 무너질 것 같아 정말로 힘들고 어려웠다. 나는 밤에 자기 전에 매일 같이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어떻게 해서든지 대학에 가야 하니까 공부 할 수 있는 힘을 주세요....' 내가 대학을 들어가야 하는 것은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 동안 오랜 세월 나를 위해 너무나 고생하신 어머니의 노고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고 싶었고, 전국에 있는 수 많은 장애인들한테 열심히 노력하고 기도하면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으며, 앞으로 내가 나가는 길에 자신감을 갖기 위해서도 대학은 꼭 가야만 했다.
고등학교 졸업 할 때도 전교 1등은 못 했어도 내신 성적 1등급으로 최상위권에 속했다. 그런데 더 커다란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학에서 나를 받아 주질 않는 것이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뇌성마비 장애가 있어 쓰는 것이 불편하여 다른 학생보다 시간이 더 걸린다. 그래서 시험 치르는 시간이 나에겐 더 필요했고 내가 시험지에 답을 체크하면 누군가가 답안지에 옮겨 줘야 했다. 답안지 (OMR card) 의 작은 공간을 흔들리는 내 손으로 체크 할 수가 없어서였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아 장애인들이 넘어야 할 험한 산들이 너무나 많다. 더욱이 그 당시 선지원 후시험제로 입시 방법이 바뀌어 각 대학 자율로 학력고사를 관리하게 되어, 수학 과목 같이 계산 문제가 많은 시험일 경우 나는 좀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데도, 대학에서는 나에게 다른 학생보다 시간을 더 줄 수도 없고, 답안지 체크도 스스로 해야 한다는 등 장애인에 대한 배려는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찾아가는 대학마다 거절을 당했다.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모두 장애인에게 특별한 대우는 해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마지막으로 서강대학교를 찾아갔다. 카톨릭 학교이기에 장애인에 대한 호감이 있을지도 모르니 한번 가보라는 주위의 권유에서였다. 이젠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서강대학교 보다 안 좋은 대학은 들어가지 않기로 결심을 했다. 몸도 불편한데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야 의미가 있는 것이지 떨어지는 데 가면 나에겐 의미가 없었다. 장애인이라 동정 받아 들어간 것 같아 무언가 장애인의 긍지를 살리고 싶은 자존심이 꺾이는 것 같아서였다. 처음엔 서강대도 안 된다고 했다. 남들과 똑같이 똑같은 시간에 시험을 보라는 것이었다. 어머님은 총장님을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했다. 어떻게 보면 마지막 절규였는지도 모른다. 이 곳마저도 거절되면 지금까지 피땀을 흘린 장고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불쌍한 준수를 사랑해 주셨다. 결국 허락을 받고 시험에 응시, 합격의 통보를 받은 나는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그 동안 어머니의 땀과 눈물로 걸어온 흔적이 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아려 왔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1988년 3월, 서강대 불문학과 학생으로 이젠 성년이 되었다. 그러나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은 늘 힘들고 어려운 고난들이 쌓여 있었다. 이 교실, 저 교실을 옮겨다니며 강의를 들어야 하는 일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필기를 못해 교수님 강의 때에는 녹음기로 강의 내용을 녹음해 집에 와서 다시 듣고 옮겨 적어야 하는, 남들이 잠자는 시간에도 나는 책상 앞에서 장애인으로서의 운명 극복을 위한 치열한 투쟁을 계속 해야만 했다. 다행하게도 88년도부터 한국에 컴퓨터가 보급되기 시작, 사용할 수 있게 되어 감사했다. 불편한 손으로 더듬거리며, 다른 곳을 자꾸 치게 되면 또 다시 지우고 다시 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컴퓨터라는 과학의 산물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노력해 왔다. 앞으로의 과학기술도 더욱 발달하여 우리 장애인들의 삶을 도와 줄 것이라고 믿으며 용기를 잃지 않고 현실을 극복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에겐 대학 4년의 생활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여자친구였다. 사학과를 다니던 캠퍼스 커플 친구로 나에게 너무나 헌신적으로 잘 해준 좋은 친구였다. 시험 때마다 노트를 카피해 주고 책 살 것이 있으면 사다 주고, 밖에 나가지 못하는 나를 위해 자주 우리 집에 찾아와 놀아 주고, 휠체어를 밀며 밖을 거닐어 주던 친구이며 연인이었다. 그녀는 내 외모를 보지 않고 나의 진실된 마음을 바라보며 사랑으로 대해 주었다. 3년 동안의 사귐!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느껴본 소중했던 젊은 시절의 사랑이었다.
나는 서강대에서도 좋은 성적으로 졸업을 했다. 이제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원은 사회사업학과를 전공하려고 하였다. 나의 신체적 사회적 환경과 관련된 학문을 공부해 그 분야에서 일하는 것이 좋다는 주위의 권유에 따라서였다. 그러나 미국의 7개 대학에 사회사업과 지원을 문의했으나 편지 온 것을 보니 모든 대답이 한결 같은 것이었다. '현장에서 많이 뛰어야 하는 사회사업 분야를 몸이 불편하여 어떻게 하겠냐?' 라는 것이었다. 이 무렵 내 마음은 힘들고 어려운 때였다. 여자친구 부모님들은 내가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몸이 불편하여 딸을 맡길 수 없다는,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위해 헤어져야만 했다. 미국의 대학들은 입학 허락이 안 되고, 또 다시 장애인으로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괴로운 현실들 앞에 마음 아픔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92년 미국에 들어오려던 계획이 좌절되자 부모님들은 나에게 걸음을 보다 편하고 안정되게 걷도록 하기 위해 발목의 아킬레스건을 연장시켜 주는 수술을 받도록 해 주셨다. 수술 후 병원에서의 한 달 입원을 거쳐 집에 와서 양다리를 허벅지까지 기브스한 상태로 석 달 동안 누워 있어야 했다. 이 때에 나 자신이 왠지 비참하고 초라해 보일 수가 없었다. 내 인생에서 최대의 위기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어느 분이 책 한 권을 사다 주셨는데 「강인한 사람은 계속 나아간다」라는 로버트 슐러 목사가 쓴 책이었다. 이 책은 당시 좌절감에 빠져 있던 나에게 크나 큰 용기를 주었다.
이제 수술한 다리가 다 낫고 난 후, 나는 대학에서 부전공한 역사학과 계통으로 미국 대학에 다시 알아보기 시작했다. 토플도 보고, GRE도 다시 보았다. 토플 시험이 590점, GRE가 1320점이 나왔다. UCLA 대학원에서 입학 허가 통보가 왔다. 나는 하나님께 감사 드렸다. 사실 UCLA는 생각지도 못 했고 미시간 주립대학이나 시애틀에 있는 워싱턴 주립대학을 가려고 했었는데 되려니 생각지 않던 UCLA에서 입학 허락이 온 것이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또다시 나에게 길을 열어 주신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시간은 날씨가 추운 곳이고, 시애틀은 비가 많이 와서 내가 생활하기에는 불편한 곳이다. 그러나 LA는 기후도 좋고, 시설도 좋고 특히 한국분들이 많아 문화적으로나 거리적으로 한국과 가까운 곳에 있다. 나를 UCLA로 인도해 주신 것 역시 간구하는 자에게 응답하신다는 하나님의 축복이요, 은혜였다.
1993년 6월! 나는 홀로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공항에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는 나를 떠나 보내는 어머니는 오히려 나에게 '가서 혼자 독립해 잘 살아야 한다' 며 무언가 하나님께 맡긴 믿음의 확신에 찬 말씀을 해주셨다. 오히려 아버지가 나를 떠나 보내며 많이 마음 아파하셨다. 내가 이 세상에 장애인으로 태어나 처음으로 부모님 곁을 떠나 보는 유학의 길이었다. LA 공항에 도착하니 88년 이민와서 UC Irvine에 다니고 있는 고등학교 때 친구 범진이가 마중 나와 있었다. 범진이는 생활이 어렵고 공부하기 바쁜데도 늘 나를 찾아와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고마운 친구이다. 나는 UCLA 기숙사에 짐을 풀었다. 교회는 나성한인감리교회(송기성 목사님)로 나가기로 했다. 한국 떠나 올 때 광림교회 김선도 목사님이 추천해 준 교회였기 때문이었다.
이 곳의 목사님을 비롯한 성도님들 모두 나에게 너무 잘 해주셨다. 고독하고 외롭지 않도록 지극한 관심과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 미국 생활은 장애인이 살아가는 데는 너무나 편하고 좋은 환경이다. 그러나 역시 힘들고 고달픈게 많다. 특히 석사 과정의 공부는 너무 힘이 들었다. 영어도 딸렸고 공부하는 시간도 많이 걸렸으며 말을 제대로 못하여 커뮤니케이션이 제대로 안 되었다. 그러나 미국 교수님들이 이해해 주시고 도와주시기에 하나씩 하나씩 견뎌 나가지만 장애인으로서 혼자 극복해야 하는 어려움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세탁기에 빨래하는 일, 옷을 개는 일, 식사시간이 정해져 있어 수업이 늦게 끝나면 밖에 나가 사먹어야 하는 일, 물건 사러 가는 일 등등... 그렇지만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이 많아 그들을 생각하면 고생이란 생각을 가질 수가 없었다.
나는 매일 밤 자기 전에 우리 주님께 꼭 기도를 드린다. 한국에 계신 부모님을 위해, 그리고 이곳에서 잘 견뎌 낼 수 있는 능력과 힘을 달라고 기도한다. 강의를 들으러 가면서도 주님께 기도 드린다. 왠지 부모님 곁을 떠나 있으니 주님과 더 가까워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늘 새벽 2, 3시에나 잠자리에 들어가면서 수행해 나가야 하는 이 어려운 과정, 믿음과 용기와 신념으로서 결단코 이겨내리라 기도와 함께 다짐을 해본다.
지금도 집이 그립고 부모님들이 보고 싶다. 친구들이 보고 싶고 가끔씩 내가 사랑했던 여자 친구가 떠오른다. 힘들고 고독하면 더더욱 그리워지는 그녀... 그러나 다시 이루어질 수 없기에 가슴 깊은 한 구석에 고이 묻어둔다. 오직 행복을 빌 뿐이다. 나는 이곳 미국에서 주님 없으면 하루도 살지 못한다. 그만큼 주님은 나의 친구이며 위로가 되어 주신다.
지금 나는 아무 능력이 없고 지혜도 없고, 건강도 부족하지만 오직 하나님 은혜로 하나 하나 이루어 가고 있다. 앞으로 나의 인생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지만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피 흘려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길을 인도해 주시리라 믿고 감사하며 오늘을 살아간다. 나는 나에게 능력과 기회가 주어진다면 내가 받은 은혜들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며 살고 싶다. 특히 나와 같은 장애인들의 자유와 인권을 위해 나의 모든 노력을 다 바치려고 한다. 오늘도 나는 나 스스로가 장애인임을 자랑하고 싶다. 그리고 능력이 없는 것을 자랑하고 싶다. 그것은 내가 약할 그때에 하나님이 강하게 역사해 주시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에게 힘을 주시며 나를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고린도후서 12장 9절을 소개하며 이 간증을 마치려 한다.
'내 은혜가 너에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