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석화산 정상에서 바라본 계방산
정상에는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기로 했다. 나는 정상을 생각하지 않았다. 도대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몇 시간이 지나갔다. 나는 걷고 또 걸었다. 오르고 또 올랐다. 그리고 오로지 위만 보고 수 미터 앞
만 본다. 위에 도달해서 더 이상 오를 수 없을 때까지 올라가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산행을 통해서 목표를 눈
앞에 두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습관을 붙여 왔다. 돌아서거나 기권하는 것은 결국 약한 탓이며 이런 것이 내
게는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여기는 좀 달랐다. 지치고 지친 몸을 앞으로 앞으로 내모는 것은 어떤 이해하기 힘
들고 저항하기 어려운 힘이다.
―― 헤르만 불(Hermann Buhl, 1924~1957), 『8000미터 위와 아래』
주) 헤르만 불의 낭가 파르바트 단독 등정의 과정이다.
▶ 산행일시 : 2022년 3월 5일(토), 맑음, 미세먼지, 황사, 강풍
▶ 산행인원 : 4명
▶ 산행시간 : 7시간 50분
▶ 산행거리 : 도상 11.1km
▶ 갈 때 : 동서울터미널에서 시외버스 타고 홍천으로 가서, 내면 가는 시외버스 타고 율전리 뱃재에서 내림
▶ 올 때 : 홍천 내면 창촌리에서 저녁 먹고, 시외버스 타고 홍천에 와서, 시외버스 타고 동서울터미널로 옴
▶ 구간별 시간
06 : 40 - 동서울터미널, 홍천 가는 시외버스 출발
07 : 45 - 홍천터미널(08 : 00 뱃재 경유 내면 가는 시외버스 탐)
08 : 51 - 뱃재(하뱃재), 산행시작
09 : 28 - 870m봉
09 : 52 - 860m봉
10 : 20 - 900m봉, 산죽지대
10 : 26 - 919.8m봉
10 : 36 - ╋자 갈림길 안부
11 : 23 - 1,052.3m봉
11 : 42 - △1,062.8m봉
12 : 00 ~ 12 : 37 - 잣나무 숲, 점심
13 : 08 - △989.3m봉
14 : 03 - 953.2m봉
14 : 17 - ╋자 갈림길, 문암재
15 : 07 - 석화산(石花山, 1,149.0m)
15 : 58 - △958.0m봉
16 : 41 ~ 18 : 00 - 내면(창촌리) 버스터미널, 산행종료, 저녁
19 : 05 - 홍천(19 : 30 동서울 가는 시외버스 탐)
20 : 35 - 동서울터미널, 해산
2-1. 산행지도(국토지리정보원 지형도, 현리 1/25,000)
2-2. 산행지도(국토지리정보원 지형도, 현리 1/25,000)
2-3. 산행지도(석화산, 국토지리정보원 지형도, 현리 1/25,000)
텔레비전을 켜기가 겁난다. 연일 전국이 산불로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는 특보 소식이다. 지난주부터는 강풍까
지 불어대니 소방헬기 100여대를 동원해도 산불이 더욱 번지는 상황이라고 한다. 특히 20년 만의 최대 규모의
산불이라고 하는 울진과 삼척은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판국에 산을 간다고 배낭 메고
집을 나서는 발걸음이 무겁다. 고개 숙이고 걷지만 뒤 꼭지에 꽂히는 뭇시선이 따갑다.
그래서일까? 상춘하기에는 아직 철이 이른 까닭도 있겠으나 동서울터미널에 등산복 차림이 드물고, 홍천 가는
시외버스도 서울홍천고속도로도 한적하다. 홍천은 최근에 우등버스를 배차하여 종전의 요금에 1,600원을 올린
9,000원을 받는다. 굳이 우등버스가 아니어도 좌석 서너 개를 차지하니 그 안락함이 우등버스 못지않았는데 요
금을 올린 셈이다. 오늘은 황사에 미세먼지가 심하다고 했다. 차창 밖 경치가 뿌옇다.
홍천에서 내면 가는 08시 첫차는 승객이 우리 4명을 포함하여 9명이다. 그중 등산 복장한 젊은 남자 한 분이 공
작산이 가깝게 보이는 조가터(朝霞臺)에서 내린다. 산을 갈 줄 아는 사람이라며 우리 일행 모두 입을 모은다. 서
석에서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자 4명이 내리니 우리뿐이다. 직통으로 간다. 고원인 하뱃재에서 우리 다 내리니
빈차다. 하도 자주 오가는 하뱃재이다 보니 정이 들었다. 교회, 율전초교 그리고 너른 들판이 반갑다.
다행히 주민들이 눈에 띄지 않는다. 산을 가는 우리를 본다면 그들의 눈길이 곱지는 않을 것. 그래도 발소리 말
소리 숨소리도 죽인다. 오는 차안에서 이미 산행준비를 마쳤던 터라 내리자마자 신속하게 들판을 가로질러 농
로에 들고, 산자락 외딴집도 멀찍이 돌아 가장 가깝게 보이는 산기슭을 향한다. 자갈 밭이랑이 땡땡 얼어 있어
걷기에 좋다. 묵은 임도 잠깐 따르다 덤불숲 헤치고 생사면에 붙는다.
가파른 오르막이다. 낙엽 밑은 빙판이다. 몇 번 엎어지고 나서 낙엽을 쓸거나 맨 땅을 골라 딛는다. 찬바람이 세
게 일기 시작한다. 바람이 등 떼밀어 오른다. 지난주 백운산 산행에서 더웠기에 오늘은 산행복장을 일신했다.
얇은 바지로 바꾸었고 셔츠는 입지 않았다. 내 너무 성급하여 하루 종일 추위에 적잖이 곤욕을 치러야 했다. 배
낭 뒤져 귀까지 싸매는 멀티스카프를 찾았으니 그 덕을 톡톡히 보았다.
870m봉. 뒤에 오던 자연 님과 하운 님이 사면에서 덕순이 조각하는 메아리 님을 보지 못했다. 소리쳐 불러도
바람소리에 막혀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그들은 우리가 진행해야 할 동쪽과는 정반대인 △875.8m봉 쪽으로 갔
다. 다시 870m봉을 올라 그들을 뒤돌아 오게 한다. 발에 채여 방향 없이 흩날리는 낙엽이 앞을 가릴 지경이다.
한 차례 뚝 떨어져 안부를 지나고 860m봉을 오른다. 능선 한가운데로 철조망을 2중으로 둘러쳤다.
왼쪽 사면은 특수작물 재배지라며 수시로 출입을 엄금하는 경고판을 달았다. 그러나 예전의 특수작물 재배지
다. 곳곳에 거목이 쓸어져 철조망을 납작하게 덮쳤으니 가시철조망이 무용이다. 철조망 가까이 잡목 사이로 흐
릿한 인적이 보인다. 허허눈밭인 철조망 너머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인적 쫓는다. 860m봉. 자작나무 숲이 울
창하다. 첫 휴식한다. 추운 날씨라 입산주 탁주가 저절로 시원하다.
3. 율전리 뱃재(하뱃재) 들판과 서쪽으로 향하는 영춘기맥 1,079.2m봉
4. 876m봉 자작나무 숲이 곧 끝나고 길고 긴 산죽지대가 이어진다
5. 가파르고 긴 오르막인 1,052.3m봉이 산죽 숲으로 걷기가 아주 고약하다
6. △1,062.8m봉 남쪽 사면은 고랭지 과수밭이다. 멀리 가운데는 계방산
7. △1,062.8m봉 동쪽 능선은 잠시 펑퍼짐한 잣나무 숲이 우거졌다
10. 왼쪽 골 건너 무명봉
11. △989.3m봉 북쪽 능선 내리막, 눈이 깊다
12. △989.3m봉 북쪽 능선 내리막, 눈이 깊다
자작나무 숲이 끝나고 산죽지대가 이어진다. 잠시 동안일 줄 알았던 산죽 숲이 오늘 산행 전반을 장식했다. 산
죽 숲은 걷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다. 소로인 산길이 산죽 숲으로 덮였으니 발로 더듬어 길을 찾아야 하고, 더욱
이 요즘의 초봄에는 길 한가운데에 불룩하게 쌓인 눈이 얼었거나 빙판이기에 차라리 그 길을 벗어나 걷는 편이
낫다. 오늘 여기가 그러하다. 바람은 잦아들기는커녕 더욱 맹렬하게 불어댄다.
919.8m봉 넘고 야트막한 안부 지나 긴 오르막이다. 광활하게 펼쳐진 산죽 숲이 바람에 일렁이는 모습을 보노
라니 어지럽다. 그런 산죽 숲을 비칠거리며 오른다. 오늘 산행이 지도로만 볼 때는 덕순이 향도(香道)도 즐기는
춘유가 아닐까 했는데 그와는 전혀 딴판인 산행이 되고 만다. 산죽 숲을 원 없이 누벼 1,052.3m봉을 오른다. 가
파름이 한결 수그러들고 눈길 지쳐 조금 더 가면 남쪽 사면에 과수 심은 고랭지밭이 나오고 모처럼 조망이 트
인다.
여느 때는 가리왕산도 보였는데 오늘은 가망 없고 내면 저편의 계방산을 맹주로 한 한강기맥이 장릉으로 보인
다. 조금 더 가면 물푸레나무 군락지인 △1,062.8m봉이다. 눈 쓸고 얼음 녹여 판독한 삼각점은 ‘현리 318, 1990
재설’이다. 여기는 항상 키 큰 물푸레나무가 울창하여 아무런 조망이 없다. 마땅한 점심자리 찾는다. 정상에서
약간 벗어난 양지바른 과수원과 비닐하우스는 깊은 절벽이거나 너무 멀다.
바람이 모를 혹은 소홀한 틈을 타서 잣나무 숲속 평평한 눈밭을 고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여기 아니더라
도 비닐쉘터만 치려고 하면 잠자코 있던 바람이 벌떡 깨어나서 느닷없이 몰려들곤 한다. 쉘터를 갈가리 찢어버
리기라도 할 듯이 마구 흔들어댄다. 삭풍이 부는 산중에 점심은 바로 이런 맛이다. 식후 커피는 구수하다. 비닐
쉘터를 걷으니 바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하게 흩어진다.
┫자 갈림길. 왼쪽이 조금 더 길다. 그 길은 두 곳의 암릉을 돌아 넘고 문암동골로 떨어졌다가 물을 건너 석화산
서릉에 올라야 한다. 우리는 직진한다. 산죽 숲이 소강상태다. 눈이 상당히 깊다. 스패츠 맨다. 비로소 앞장 선
메아리 님 발자국에서 풀려난다. 눈길을 함부로 간다. 켜켜이 쌓인 오래된 눈이라 발이 빠지면 빼내기가 힘들어
걸음걸음이 더디다. 그러나 가파른 북사면을 지쳐 내릴 때는 제동이 잘 되어 아주 좋다.
△989.3m봉. 눈이 깊어 삼각점을 찾지 못했다. 그 북릉 내리는 길이 눈이 깊어 오히려 수월하게 간다. 뚜벅뚜벅
걷는다. 도중에 뒤에 오던 자연 님이 덕순이를 데려가라고 불려갔지만 완강한 거부에 헛심만 된통 쓰고 물러난
다. 이다음 953.2m봉은 남쪽으로 약간 내린 벌목한 사면에 서면 전망이 트인다. 운두령을 중심에 놓고 왼쪽으
로는 오대산 상월봉까지, 오른쪽은 청량봉까지 한강기맥이 장쾌하게 펼쳐진다.
953.2m봉을 넘어 평탄하게 지나다 암릉 돌아 살짝 내리면 문암재다. ╋자 갈림길이 나 있다. 오른쪽은 승지동
지나 내면 창촌으로 간다. 곧추선 오르막 긴 한 피치가 이어진다. 엉금엉금 긴다. 노거수 쓰러진 낙엽 깊은 사면
을 낮은 포복하여 통과한다. 불과 8분이 여기서는 무척 긴 시간이다. 가쁜 숨 잠시 돌리고 석화산 서릉을 간다.
암릉, 암벽이 나오면 오른쪽과 왼쪽 사면으로 번갈아 돌아 넘는다.
13. 953.2m봉은 사면으로 약간 내리면 전망이 훤히 트인다. 계방산
14. 953.2m봉 내리면서 바라본 석화산
16. 멀리 왼쪽은 오대산 상왕봉과 비로봉
17. 겨우살이
18. 맹현봉
19. 맹현봉
20. 가운데는 방태산 깃대봉
21. 맨 왼쪽은 청량봉
마지막 북사면 돌아 넘고 수직의 슬랩을 한 피치 오르면 조망 좋은 바위가 나온다. 교대로 들른다. 맹현봉 연봉
과 방태산 주릉이 잘 보인다. 이어 오른쪽으로 창촌을 간다는 ┣자 갈림길 이정표를 지나고 0.1km 더 가면 석
화산 정상이다. 따스한 햇볕이 가득한 공터다. 남쪽으로 5m 정도 내려가서 낭떠러지 위 암반에 서면 석화산 제
일의 조망을 즐길 수 있다. 아까는 계방산을 중심으로 한 단편적인 경치였지만 여기서는 더 보탤 것이 없는 가
경의 총체다. 혹시 바람이 불면 인사사고 날까봐 엎드려서 바라본다.
정상 가장자리에 ‘석화산(石花山)명 유래’를 쓴 안내판이 있다.
“석화산(문암산)은 옛날 바위에 석이버섯이 많이 자생하여 멀리서 바라본 바위가 마치 꽃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지역에서는 모두 석화산이라 부른다.
석화산(문암산)은 해발 600m의 홍천군 내면 창촌리를 감싸고 있으며 암봉과 노송이 한 폭의 동양화 병풍 같고
봄에는 진달래가 장관을 이루며 가을 단풍의 절경은 설악을 방불케 한다.
문암산으로 표기된 이유는 석화산 서북쪽(내면 율전리 문암동) 계곡에 마치 거대한 문과 같은 바위가 있어 지
도에 문암산으로 표기된 듯 하며 현재 국립지리원 편찬 지도에 표기된 석화산 위치는 잘못 표기된 것으로 문암
산이 석화산이고 홍천군 내면 창촌초등학교 교가에도 있는 내면의 자랑인 석화산으로 부름이 타당할 것이다.”
이 산의 바위에 석이버섯이 자생하기는 한다. 석화산 동릉 하산 길에 문설주 웅장한 암문(巖門)을 지나면서 그
위로 덕지덕지 붙은 석이버섯을 보았다. 그러나 석이버섯을 석화산의 유래로 보는 것은 좀 어색하다. 이 산 정
상부에 어우러진 크고 작은 그리고 수많은 기암괴석의 모습이 멀리서는 마치 석화(石花)로 보여서가 아닐까?
가야산은 흔히 ‘석화성’이라고도 부르는데. 거기는 석화성(石火星)이다.
하산! 이제 오늘 산행의 하이라이트가 시작된다. 석화산 북쪽 사면을 약간 돌아내리면 ┫자 갈림길이 나오고,
왼쪽은 석화산 북릉을 타고 백성동으로 가고, 직진은 석화산 동릉 타고 내면 창촌으로 간다. 주릉은 오르내릴
수 없는 암릉이다. 눈 깊은 북쪽 사면을 돌고 오른쪽 슬랩을 트래버스 한다. 아무려면 우리가 가지 못할 선답의
흔적이 있을까? 핸드레일과 바위에는 발판을 설치했고 가파른 데는 데크계단도 놓았다. 예전과 달라졌다.
어느 해인가, 이곳을 지날 때 암벽꾼인 옥지갑 님이 줄사다리를 준비하여 이를 타고 내린 적이 있다. 아기자기
하던 그때를 생각하여 슬링을 준비하고 손맛을 다셨는데 도리어 여러 발자국과 함께 내리니 싱겁기 짝이 없다.
그나마도 암문(巖門) 지나면 끝나고 이후로는 평범한 산길이다. △958.0m봉은 등로에서 약간 벗어났지만 내가
대표로 들른다. 삼각점은 ‘현리 465, 2005 현리’이다.
산릉을 껍질 벗기다시피 피나게 벌목한 능선을 지나 목제계단 놓인 낙엽송 숲길을 통통 내려 사방댐 위쪽 골짜
기로 가서 교회 담장 돌고 내면파출소 앞을 지나면 버스종점이다. 홍천 가는 버스는 막차로 18시에 있다. 지금
시각 16시 40분. 시간 절약을 위하여 이른 저녁을 먹기로 한다. 여러 곳 들러 문 연 음식점을 한 곳 찾았다. 지
담이다. 손님은 우리뿐이고 이따 18시에 여섯 분의 예약이 있다고 한다.
여주인의 다정한 덕담 섞인 서비스에 노릇노릇 구워진 삼겹살 안주에 덕순주 술잔을 금방금방 비운다. 해거름
산촌에서는 1시간이 짧기만 하다. 홍천 가는 막차 승객은 홍천까지 우리뿐이다.
23. 멀리 왼쪽은 약수산, 오른쪽은 봉복산(?)
24. 멀리 가운데는 청량봉
25. 멀리 가운데는 계방산, 그 왼쪽은 소계방산
26. 멀리 오른쪽은 보래봉, 가운데 안부는 운두령
27. 석화산 정상에서
28. 계방산
29. 왼쪽이 오대산 상왕봉과 비로봉, 가운데는 호령봉
30. 내면 창촌리 하산 길에 바라본 석화산
31. 내면 창촌리 하산 길에 바라본 석화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