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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복음 전파는 아시아에서 가장 늦게 이루어졌으나, 어느 지역이나 민족보다도 가장 복음적인 교회로 뿌리내리게 되었고, 특히 이북 지역의 복음 전파는 세계선교 역사상 가장 신속하고도 복음적인 선교의 결실을 보았다. 이러한 복음화가 이루어지기까지는 선교사들의 순교와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나님께서 이와같이 이북지역을 먼저 복음화시켜 한국 교회가 성장할 수 있도록 견인 역할을 하게 하신 데에는 깊으신 뜻이 있었다. 이는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을 먼저 전도의 지역으로 삼지 아니 하시고 북쪽이며 소외된 지역과 계층을 먼저 정하시고 사역하셨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가 있다하겠다.
현재 북한의 복음화를 준비하고 있는 우리는 지난 1세기 전에 어떠한 경로와 과정을 통해 북녘 땅이 복음화 되었는지 돌이켜 보며, 선교 2세기를 맞이하여 이북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그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겠다.
조선 반도의 내지까지 들어와 복음을 전해준 최초의 선교사며 최초의 순교자는 스코트랜드의 장로교 출신인 Robert J.Thomas 목사였다. 그는 중국의 상해로 파송받아 왔으나,부인을 병으로 잃었고, 본국의 선교회와도 뜻이 맞지 않아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산동성으로 가서 그곳의 세관직으로 있는 가운데,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소속의 Williamson을 만나 다시 선교의 열정을 불태우게 되었다. 그러던중 조선에서 천주교 박해를 피해 산동성으로 목선을 타고 피신해 온 조선인들을 만나면서 조선에 대한 선교의 비젼을 갖게 되었고, 조선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보던 차에 조선으로 가는 배를 만나게 되어 윌리암슨이 준 한문 성경을 많이 지니고 서해 황해도 연안의 창린도에 도착하여 약 두달 반을 머물면서 섬사람들에게 성경을 나누어 주며,한국어도 배우면서 전도를 하였다. 얼마후 그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재차 조선 본토로 들어갈 것을 기대하던 중에 미국 상선 제너랄 셔만호가 조선에 상업차 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 배의 통역겸 안내로 동승하게 되어 1866년 7월에 출항하였다.
이때 그는 런던선교회로 마지막 편지를 보내었다.
"나는 상당한 분량의 책들과 성경을 가지고 떠납니다. 조선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을 생각에 가슴 부품니다. 선교회에서도 이 성경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인간의 과오한 혼합 되지 아니한 심정으로 미지의 나라로 떠나는 나의 노력을 언젠가는 인정해 주리라 믿으면서 나는 떠납니다."
셔만호는 약 일주일 후 대동강변에 이르러 내지로 항진하면서 조선측의 불허와 저지가 있었으나, 이를 무시함으로 무력 충돌까지 발생하였고,마침내 이 배는 불 길에 싸여 토마스 선교사도 물로 뛰어 내릴 수 밖에 없게 되자 성경 몇권을 가슴에 품고 헤엄쳐 나왔으나, 병졸 박춘권에 의해 대동강변 모래 사장에 순교의 피를 흘리게 된다. 토마스선교사는 죽기 직전에 그에게 예수를 믿으라면서 성경을 마지막으로 건네 주었다. 나중에 그는 결국 토마스 목사가 준 그 성경을 통하여 예수를 믿게 되었고, 이후에는 안주교회의 영수가 되었다. 그리고 그 성경을 뜯어 벽지로 썼던 영문주사 박영식의 집은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이 되었다. 박춘권의 조카 이영태도 예수를 믿고 미국의 래널즈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한국인 성서번역위원회의 한 사람으로 공헌하였다.
토마스 선교사가 칼을 맞고 개신교 목사로 이 땅에 최초의 순교의 피를 흘린 때는 1866년 9월 2일, 그의 나이 27세였다. 그가 전해 준 복음은 한국교회의 초석이 되었고,그의 순교의 피가 뿌려진 대동강 물을 마신 평양의 주민들은 예수를 믿어 평양은 물론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의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을 듣게 되었다.
한국교회는 1927년 그의 순교를 기념하여 그가 죽어 묻혀있다고 생각되는 쑥섬에 1천여명이 모여 추모 예배를 드렸고, 1932년에는 토마스목사의 이름 첫자 모양인 "T"자로 예배당을 지어 토마스 목사 기념 예배당으로 봉헌하였다.
중국의 요령성 항구 도시인 영구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로이드 죤스와 맥킨타이어는 같은 지역출신(스코틀랜드)인 Robert J.Thomas 선교사가 조선에서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고,조선의 복음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욱고 1874년 조선 땅을 보기위해 압록강 국경 지역인 지금의 안동시(고려문)을 방문하여 압록강변을 살펴보고 조선인들이 몰려사는 고려문이라는 변경 마을에서 조선의 형세를 파악한 다음 일단 돌아가서 조선을 전도해야겠다는 마음을 굳히고,다시 압록강변의 고을인 고려문을 재 방문하였다. 그당시 강건너편에 사는 의주출신의 백홍준,이응찬,이성하,김진기라는 청년들을 그 곳에서 만나게 되어 이들을 한국어 선생으로삼고 한국말을 배우면서 이들에게는 서양문물과 성경을 가르치고 마침내 4명의 조선 청년들에게 세례를 베풀게 되었다.
"매킨타이어는 네 명의 학식있는 한국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들은 앞으로 있을 놀라운 수확의 첫 열매 들이라고 확신한다... 한국인들은 중국인들 보다 천성적으로 꾸밈이 없는 민족이고, 보다 종교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으므로 나는 그들에게 기독교가 전파되면 곧바로 급속하게 퍼져 나갈 것으로 기대한다."
이 일이 있은후 같은 의주 출신인 서상륜과 그의 동생 경조와 함께 홍삼 장사를 하러 중국 영구에 왔다가 열병을 얻어 사경을 헤매는 가운데 로스목사를 만나 생명을 건지게 되었고,예수를 영접하게 되어 세례를 받게 된다.
로스목사는 조선 청년들의 도움으로 한글 성경을 번역하게 되어 우리 나라 최초의 쪽복음서인 누가복음서를 출간하고, 이어서 요한복음,마가,마태복음서까지 출판하였다.
로스목사는 이성하 청년에게 성경을 가지고 고국에 가서 복음을 전하도록 파송하여,그는 마침내 압록강에 이르러 여인숙을 정하고,잠시 외출한 틈에 주막 주인이 그들의 짐꾸러미를 풀어 보고는 그 당시 금서인 성경인 것을 알고 일부는 불에 태워버리고 나머지는 강물에 던져버리고 만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로스목사는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다.
"성경이 던져진 압록강 물을 마신 조선인은 생명수를 얻게 될 것이고 성경이 탄 재는 조선교회가 성장하는데 밑거름이 될 것이다."
이러한 실패 이후에 백홍준이 재 시도를 하여 의주지역에 복음이 전해지게 되었다. 이로인하여 조선 땅에는 복음이 외국어가 아닌 조선어 성경이 전해졌고,외국선교사가 아닌 토착인에 의해 자생적으로 압록강변으로부터 복음이 전파되었다.
의주의 어느 주막 집의 벽에는 복음서를 뜯어 벽지로 사용함으로 그 방에 머무르는 여행객들은 복음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는 일들이 생겼다고 한다. 이때는 아직 언더우드나 아펜셀러가 조선에 오기 일년전의 일이었다.
이어서 서상륜도 고향인 의주에 와서 전도활동을 하려했으나, 관가의 체포령이 내려져 그는 삼춘이 살고 있는 황해도 송천(솔내)으로 내려가 전도를 하여 그 마을 58호 가운데 50호가 예수를 믿게 되었고, 초가집에서 시작된 가정 교회는 우리 나라 교회사에서 최초로 자국인에 의해 세워진 교회로 기록되고 있다.
한국의 복음화는 이와같이 외국의 선교사들이 들어 오기전에 자국인에 의해 자발적으로 전도되었고, 교회가 세워졌다. 이와같은 사례는 세계 선교역사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놀라운 사건인 것이다. 또 한가지 복음 전파의 특징은 변방의 국경지대를 통해 내지로 점차 확산되었고,그후 1887년 1월 23일에 한성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언더우드 한테 세례를 받기 위해 황해도 솔내의 교인인 서경조,최명오,정공빈을 서상륜이 이끌고 와서 생명을 무릅쓴 세례를 받고 돌아 갔다. 이들은 그 당시 조선에서 외국인의 선교 활동과 자신들이 예수교를 믿으면 신변에 위험이 따른다는 것을 알고도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간곡한 편지를 올린 바가 있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으니 임금이 우리를 처형한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유로 임금이 내 목을 자른다 해도 상관치 않습니다."
이와같이 이북의 초대 성도들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나 구원을 받는 일에 목숨을 아끼지 않는 순교자적인 신앙을 불태웠다.
Hall 목사는 의사 선교사로서 1891년 9월 19일 미국 감리교 선교회의 선교사로 파송받아 수도 한성이 아닌 평양을 선교지로 택하여 3년이란는 짧은 기간 동안 누구 보다도 열정적으로 헌신하였고,부인은 홀목사보다도 1년 앞서 와서 한성에서 의사로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고, 이어서 홀 박사는 그와 결혼을 하고 선교지를 이북 중심지인 평양을 사역지로 삼아 목사로서 의사로서 교사로서 주야로 사역을 하였다.
아침과 저녁에는 학생들을 모아 학문을 가르쳤고,낮에는 환자 진료에 힘썼고, 주일이면 예배를 인도하였다. 그후 그의 교육 사업은 오늘의 광성고등 학교로 발전시켰고, 진료소는 평양 기독병원으로 성장하였다. 또 주일 예배 처소는 남산현 교회로서 서북지방 감리교회의 모교회가 되었다.
홀선교사가 평양으로 떠날 때 그의 친구 선교사가 그에게 "평양은 소돔같은 도시 인데 위험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내 한 생명을 바쳐 평양에 선교의 문이 열린다면 나는 기쁘게 바치겠노라"고 했다.
그가 평양에서 사역하던 그 당시에 청나라와 일본의 전쟁에 벌어져 평양도성이 전쟁터가 되어짐으로 일단 서울로 왔으나, 홀목사는 다시 평양으로 사상자들을 돌보기 위해 전쟁터로 갔다. 그는 야전병원과 같은 곳에서 부상당한 군인과 민간인들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그때에 평양에는 전염병이 번지고 있었는데 홀목사는 기력이 탈진한 가운데, 전염병에 걸려 결국 생명을 다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평양 시민들은 신.불신자를 막론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후에 평양의 교회는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그의 부인은 남편을 잃은 후 잠시 본국에 갔다가 다시 한국에 돌아와 남편이 하던 사역을 계속하였으며,평양에 남편의 이름을 딴 "홀 기념병원"을 세워 의료선교에 평생을 바치었다. 뿐만아니라 현지 의료인을 양성하기 위해 김정동(에스터 김)이라는 조선처녀를 양의사로 키우기 위해 미국 볼티모아의 여자 의과대학으로 유학을 보내 우리 나라의 최초의 여의사를 양육시켰다.
미망인이 된 로제타 셔우드 홀 선교사는 우리나라의 복음화 뿐만 아니라 조선의 개화에 크게 공헌한 위대한 의료 선교사였고 교육가 였다. 그녀는 43년 동안 한국에 있으면서 평양의 최초의 병원 설립, 맹인 농아학교 설립, 점자도입,어린이 병동설립,여자의학교 설립(경성 여전, 수도 의대,우석의대를 거쳐 교려대의대가 됨),동대문병원(현이대병원)인천기독병원,인천 간호전문보건대학 등을 설립하였다.
또한 그녀는 그의 아들 셔워드 홀을 미국을 유학보내어 의사선교사로 대를 이어 헌신하도록 하였고, 그는 미국인 여의사 마리안 홀과 결혼하여 한국에 와서 1941년 일본의 강제추방 당하기까지 2대가 50여년 이상을 평양,서울,해주 등에서 한국의 복음화와 문명화를 위해 헌신한 위대한 선교사 가족이었다.
이북 교회가 짧은 기간에 급격한 성장을 하게된 데에는 여러 요인들이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이 지역 주민들의 시대적 환경이 크게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지역적으로 소외되었고, 인재 등용도 차별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불만이 팽대했던 백성들은 새로운 정신 세계의 체험을 통해 정서적 욕구의 만족과 희망을 기독교라는 신앙에서 그 활로를 찾게 되었고, 특히 기독교의 주요 가르침 가운데 만민 평등 사상과 래세 지향적인 교리는 그들을 새로운 세계로 출애굽시키는 출로가 되었을 것이다.
이 지역은 과거 고조선,고구려,발해,고려라는 강대국으로서 대륙성향의 진취적 의식과 역사적 긍지가 있었던 그들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유교의 농공행상의 신분의 차별로 인한 사회적 신분의 박탈감과 소외감이 이들의 정서를 크게 위축시켰던 것 같다. 이러한 사회적 정서의 토양에 기독교의 복음은 그들의 메마른 정서와 갈급한 영혼을 윤택하게 하였으며, 긍정적인 의식 세계를 심어 주었다고 하겠다.
또 이 지역의 주민들의 정서적 성향이 이남 사람들 보다 상대적으로 진취적이며 적극적일 뿐만아니라 근면성이 이들의 신앙심에 긍정적인 영향으로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선교사들은 지역의 복음전파 사역만 한 것이 아니라 학교를 설립하여 문맹퇴치와 서양의 학문과 과학을 가르쳤고,병원을 통한 질병 퇴치와 전염병 예방을 위해 의료선교를 하였다. 또 장애인들과 고아들을 위한 사회복지에도 힘씀으로,지역 사회의 복음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우리나라의 개화와 근대화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이러한 문명화 사역은 교회의 성장에 밑거름이 되었고 지속적인 성장에 발판이 되었다. 나아가서 개화된 기독교 계층은 신학문의 심취와 향학열로 이어져 한국의 근대화를 이루는데 필요한 걸출한 많은 인재와 지도자들을 배출하였다. 특히 지역적으로 이북 출신들이 그 다수를 차지한 것은 이들이 거의 기독교인이며, 선교사들이나 교회에서 세운 기독교 계통의 학교 출신이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도사 안창호,오산학교를 설립한 남강 이승훈,고당 조만식,김구선생,이승만 등이며,교육기관으로는 정주의 오산학교,숭실전문대학,평양신학교,광성학교,평북 강계의 명신학교,원산 루씨고등학교,개성 호수돈 여학교 등 수백교에 이른다.
의료기관으로는 평양의 기흘병원,여성전용 병원인 광혜여원, 간호원 양성소,해주의 결핵병원, 강계의 계례지병원 등이다.
일본의 패망과 함께 이북지역에 쏘련의 강점과 이어진 공산화는 한국 교회사에 가장 참울한 비극으로 이어졌다. 강토와 민족,교회는 강압에 의해 분단되었고, 북녙의 교회는 환란에 처해 결국 폐쇄되었다. 이북지역에서의 공산화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의 순교와 핍박으로 인한 피는 어느 교회사에서도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처절하였다.
동양의 예루살렘이라는 평양의 270여개의 교회와 북한 전역의 3천여개 이상의 모든 교회들은 일시에 지상교회의 사명을 행할 수 없게 되었다. 공산정권 수립에 협조 안하는 기독교인들은 순교와 환란을 당할 수 밖에 없었고, 이러한 가운데서도 일부 기독교인들은 불의한 세력과 타협을 하므로 신사참배에 이은 두번째 배도를 하나님과 교회에 다시 함으로 결국 그 피의 값을 스스로 치르게 되었다.
6.25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은 온 국토를 피로 적시게 되었고,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 되기 직전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유엔군의 참여로 북진하여 일시적이나마 그 땅에 신앙의 자유와 교회가 다시 문을 열고 평양의 광장에서 수십만의 성도들과 시민들이 모여 감격스런 감사의 예배를 드렸으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그 땅에 남아 있던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 오게 되었고, 그러한 가운데서도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북녘의 교회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남은 거룩한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의 수가 얼마나 될 지는 추측키 어려우나,하나님께서는 남은자들로 때가 되면 다시금 생명력을 회복하는 그루터기와 같이 보존하고 계시다.
전쟁이 끝난 후 김일성의 공산정권은 패전이 마치 기독교인들의 반전운동 때문인 것처럼 몰아 1969년까지 기독교 말살 정책을 폈다. 58년부터 60년까지 중앙당 집중지도라는 명목으로 종교인들과 가족을 반혁명 계층으로 분류하고 70년까지 주민재증등록사업을 펴 기독교인들을 특별 감시 대상으로 삼았다. 당시 기독교 탄압의 대표적 사레는 이만희목사의 지하교회 조직을 적발,10여명을 공개처형 한것과 박천여교사 찬송가 사건, 평북운상군 남산리 태극기 게양 사건 등이다.
이런 혹독한 현실 속에서도 지하교회 성도들의 신앙은 마치 풀무불 가운데서 연단된 정금과 같이 정결한 빛을 어둠 가운데서도 발하고 있다. 물론 그렇게 드러난 사건 자체가 아직도 북녘에 성도들의 신앙이 살아 쉼쉬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순교의 피와 부르짖음을 결코 외면치 아니하시고 그수가 차면 그땅에 다시 복음의 생명수가 온 북녘 땅에 강처럼 흐르게 하실 것이다.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니라"(슥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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