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 년이 훌쩍 지나버린 학창 시절, 군 작업복을 까맣게 물들여서 교복 삼아 걸쳐 입고 25원짜리 전차를 타고 희멀건 깍두기 안주에 텁텁한 막걸리로 육법을 읊조리던 법우(法友)들의 모임이 하나 있다. 만성(晩成)회, 애당초의 꿈은 사라졌지만 차근히 무언가를 이루어 성공한 삶을 구현하자는 의미를 담았다.
어느 여름날, 정기모임에서 한 친구가 거제도 여행을 제안하였다. 후덥지근한 날씨 탓이었을까, 모두가 찬성이다. 마침 거제도 대명리조트 회원권을 가지고 있는 친구가 있어 이박삼일 여행을 가기로 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도 여럿 있지만 살아서 함께 한다는 벅찬 가슴으로 8명이 승용차 두 대로 거제도 여행길에 올랐다. 여행을 많이 해본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는 친구들의 우격다짐에 어쩔 수 없이 총책을 맡는다.
우선 유람선을 타고 해금강과 외도를 유람하기로 했다. 승선 요금이 일인당 삼만 원이었다. 밑져봐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매표소 직원에게 읍소를 한다. “이보시오, 은퇴한 사람들인데 여비가 빠듯하오, 요금 좀 깎아 주면 안 되겠소?" 라고. 연식이 오래된 일행들을 살펴보고는 연민의 정이었을까, 각각 오천 원을 할인해 주겠다고 한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친구들이 “유람선 뱃삯을 깎는 놈 처음 본다.”라고 하며 평생토록 총책 하라고 악담을 해댄다. 웃어넘길 수밖에…….
다음날, 아침에 매표하기로 하고 우리 일행은 별빛 쏟아지는 바닷가에서 우정의 잔을 부딪치며 추억 속으로 빠져든다. H 여대생과 미팅할 때 누구의 파트너가 제일 예뻤고 누구는 어디가 아파 운명 달리했고 누구 아들은 신인 영화 감독상 후보에 올랐다는 얘기들을 나누며, 거제의 밤을 지새웠다.
늦은 아침을 먹고 지세포 유람선 매표소로 갔다. 요금을 할인해 주길 했던 그 직원이 창구에 앉아있다. 우리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웃는다. 정겨움이 느껴져 기분이 상큼하다. 승선 티켓을 보니 “청소년”이라고 적혀 있었다. 오천 원을 할인받은 대신 칠십 노인이 청소년으로 둔갑한 사건이다. 조그마한 배려이지만 경로(敬老)로 대접받는 것 같아 상쾌한 마음으로 유람선에 오른다.
한려해상국립공원 거제도 해금강, 천 태 만상의 만물상이 금강산 해금강을 방불케 한다고 하여 거제해금강이라고 부른다. 사자바위 미륵바위 금관 바위 촛대바위를 비롯한 기암괴석들의 절경에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청하게 웃는다. 갈매기 떼와 눈인사도 주고받으며 해금강의 그로테스크한 풍광을 만끽하고 외도 보타니아를 향해 달린다. 꽃과 나무, 숲에서 바라보는 하늘과 바다의 조화가 그렇게 신비로울 수가 없다. 그러나 숨이 차서, 다리가 당겨서 함께 오르지 못한 친구들이 있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건강을 잃으면 전부를 잃게 된다는 말을 마음속 깊이 새기며 수국이 만발한 지심도를 포기하고 사량도로 바로 가기로 한다. 통영 가우치 선착장으로 바삐 핸들을 돌렸다. 승선 시간이 촉박하여 요금을 깎을 엄두도 못 냈는데 짓궂은 친구들은 왜 여기서는 뱃삯을 안 깎느냐고 놀려댄다. 오십 년 지기의 허물없는 농에 한바탕 웃고 간다.
사량도에 도착하자마자 먼저 숙소를 찾았다. 취사도 하지 않고 잠만 자고 가는 여행길엔 펜션보다는 향수가 묻어나는 민박이 좋다. 식당 민박집을 찾는다. 이왕 사 먹는 밥, 식사하는 조건을 걸면 방값을 대폭 줄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사량도 다리가 보이는 해변가 민박식당 2층에 짐을 풀었다. 파도 소리가 가깝게 들리고 바닷바람이 상큼하여 낭만적이었다.
잠깐동안의 휴식을 취한 후에 사량도의 자존심이라는 옥녀봉을 점령하였다. 해 질 녘 석양에 비추이는 옥녀봉과 가마봉의 능선이 구름 속으로 숨바꼭질을 한다. 황홀감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옥녀봉 오르는 길이 가파르고 아슬아슬하여 힘들었지만, 정상에 올라 땀방울에 젖는 희열은 그 무엇으로 감탄하랴. 힘에 부대껴 함께 오르지 못한 친구들의 얼굴이 아롱거려 황홀한 절경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지척에 있는 출렁다리를 가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던 마음이 못내 아쉬웠다. 해는 서산으로 기울고 옥녀봉 비탈길을 조심조심 내려와 해안선을 따라 사량도 일주 코스를 돌았다. 저 멀리에 옥녀봉 가마봉의 출렁다리가 하늘에 떠있다. 저 다리를 건너면 요단강으로 가는 걸까. 덧없이 살아온 인생길이 바람결에 출렁인다.
노을이 아름다운 해변, 민박집 야외벤치에 앉아 하루의 일정을 마무리한다. 매운탕을 끓어시는 민박집 할머니가 어디서 본 얼굴이다. “할머니, TV에 나오셨죠? ”예, 어떻게 알았어요?“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 한글을 깨우치고 중학교를 졸업했다고 하여 방송에 나오셨다고 한다. 그림 솜씨도 출중하여 상도 많이 타셨다며 환하게 웃는다. 텔레비전에 나올 만한 가치 있는 삶에 경의를 표하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파도 소리, 바람 소리 싱그러운 해변에서 보글보글 할미 표 매운탕에 소주 한잔의 낭만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게 되리라. 할머니의 당찬 인생을 한때의 포근했던 인연으로 가슴에 새긴다.
다음 날 아침, 통영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일찍 길을 나선다. 케이블카에서 바라본 남도의 절경은 마치 잘 그려진 한 폭의 동양화다. 화가가 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눈으로 채색하고 마음으로 감탄할 수밖에…….
통영의 명품 꿀 빵을 한 박스씩 손에 들고 이박 삼 일간의 거제도 여행을 마무리했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함께한 남도 여행, 고비마다 세월의 아픔이 있었지만, 의미 있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걸을 수 있고 오를 수 있고 볼 수 있을 때 여행길 많이 다녀야겠다는 각오를 다시금 가슴에 새긴다.
첫댓글 곽 작가님 께선 여행을 참으로 좋아하시는 군요. 여행을 좋아하시는 분은 마음이 풍요로운 분 들이라 알고 있습니다. 거제도에 그렇게 아름다운 곳들이 많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언제 한번 시간내어 가 볼까 합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건강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