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개요
王曰: 孤危若此 勢不能全 旣不能强 又不能弱 至使無辜之民 肝腦塗地 吾所不能忍也.
임금이 말하였다. "고립되고 위태로움이 이와 같아서 더는 나라를 보전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수도 없고 또한 약해질 수도 없으니 무고한 백성들의 간과 뇌가 길에 떨어지게 하는 것은 내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김부대왕- 신라 왕실과 조정에서 고려에 귀부를 논의하다.
경순왕이 태조께 귀순한 것은 비록 마지못해 한 일이지만 또한 칭찬할 만하다. 그때 만약 힘껏 싸우며 지키는 데 사력을 다하며 태조의 군사에게 항거하였다가 힘이 꺾이고 세력이 다하였다면, 반드시 그 종족(宗族)을 멸망시키고 무고한 백성들에게까지 해가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나라의 창고를 봉하고 군현(郡縣)을 기록하여 귀순하였으니, 고려 조정에 공을 세우고 백성들에게 덕을 베푼 것이 매우 컸다. 옛날에 전씨(錢氏)가 오월(吳越)의 땅을 송에 바친 일을 두고 소자첨(蘇子瞻)이 그를 충신(忠臣)이라 하였는데, 지금 신라의 공덕(功德)은 그것보다 한참 더 크다. 우리 태조께서 비빈(妃嬪)이 많고 그 자손 역시 번성하였지만, 현종(顯宗)은 신라의 외손으로 보위에 올랐으며 그 후에 왕통을 계승한 이는 모두 그의 자손이니, 어찌 음덕(陰德)의 응보가 아니겠는가.
《삼국사기》 권 제12신라본기 경순왕(敬順王) 신라의 멸망에 대한 논평.
신라의 제56대 군주이자 마지막 임금. 휘는 부(傅), 시호는 경순(敬順).
2. 생애
927년 11월,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의 수도 금성을 기습 침략하여 경애왕 박위응을 살해하고, 경애왕의 이종사촌 형제인 김부(金傅)를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하니 그가 바로 경순왕이다. 재위 기간은 927년부터 935년까지 8년간이다.
935년 12월(양력 936년 1월), 고려 태조에게 항복한 후 경순왕은 '정승'에 임명되고, 지위는 고려의 태자보다 높여졌으며, 녹봉으로 쌀 1,000석을 받고 신란궁(神鸞宮)을 하사받았다. 고려는 신라국을 폐지하여 경주(慶州)라 하고, 경주 지역을 식읍으로 주면서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에 임명했다.
975년 제5대 경종(景宗)은 경순왕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고, 장인이 된 그의 '정승' 지위를 '상보'로 승격시키면서 도성령[21]에 임명하고 식읍 2,000호를 늘려줬다. 이에 따라 경순왕의 최종 지위는 "추충신의숭덕수절공신(推忠愼義崇德守節功臣) 상보(尙父) 도성령(都省令) 상주국(上柱國) 낙랑군왕(樂浪郡王) 식읍 10,000호"가 되었다. 978년 음력 4월 사망했으며, 시호를 '경순'(敬順) 또는 '효애'(孝哀)라 했다.
3. 평가
신라의 마지막 임금으로서 무의미한 저항을 펼쳐 백성들을 희생시키지 않았다는 점에서 충분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만한 임금이다. 이미 망한 거나 다름없는 나라의 왕좌에 적국에 의해 끌어앉혀진 사람이니만큼, 나라에 망조가 든 것은 경순왕 본인의 책임이라고 볼 수도 없다. 여기서 "무의미한 저항"이란 곧 고려에 대한 저항이었지, 후백제에 대한 저항은 아니었다. 자신들을 무력으로 집어삼키려 했던 후백제에게는 어떻게든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 저항하면서 귀순 전까지 버텨냈다.
경애왕 시대에는 적어도 영남 동부에 대해선 지배력이 미치고 있었고, 진흥왕(제24대)과 문무왕(제30대) 때부터 역사가 내려오는 서라벌 방어 6기정들은 여전히 건재했다. 그러나 서라벌 함락 사건으로 이 부대들은 거진 해체 국면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으며, 영남 일대 잔존 호족들마저 후백제군에게 초토화되거나 고려에게 귀부하고 말았다. 그러니 경순왕 입장에선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최선을 다하였다.
고려와 연합해서 후백제를 저지했던 것이나, 경애왕 때 병장기 만드는 시설과 숙련된 군인까지 통째로 날려버린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병력을 육성하여 고려와 연합해 후백제를 막아낸 걸 보면 확실히 조직력과 운영 능력 그리고 군사적 수완은 보통 이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즉, 견훤이 계획적으로 해체한 서라벌 방어 부대들을 어떻게든 가능한 선에서 다시 조직해냈다는 뜻이다.
고려에 투항할 때도 그나마 신라 왕실이 가장 가치가 높을 시점을 골라 투항했다. 고려는 930년 고창 전투에서 후백제를 상대로 승리하여 공산 전투의 치욕을 갚고 후삼국 통일의 승기를 잡은 반면, 후백제는 935년 견신검의 반란으로 부왕 견훤이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3개월만에 고려로 탈출하여 귀순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큰 혼란에 휩싸인 상황이었다. 경순왕은 이러한 한반도 정세를 명확히 파악하고 936년 고려에 항복하여 왕건에게 이왕삼각이라는 강력한 정통성을 주었으며, 그 대가로 서라벌인들의 일신을 보전하게 한다는 실리를 챙길 수 있었으니[24] 이를 보면 경순왕은 외교적인 안목 또한 대단했다고 볼 수 있다. 조금 결과론적인 얘기이기는 하지만 고려 초기 왕족들간의 권력 분쟁을 종결시키고 중시조가 된 국왕이 경순왕의 사촌누이인 신성왕후의 손자인 고려 현종이고, 그 이후 고려 왕들은 전원 그의 직계 후손인만큼 고려 왕들에게 신라 왕실의 혈통을 물려주는데 성공하기도 했고. 왕건은 강릉 쪽으로 진출할 길목에 고려 부대들을 박아두었는데, 이는 경순왕을 경계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렇게 다방면에서 잠재력을 보여준 경순왕은 후한의 헌제나 고려의 공양왕과도 같이 열심히 노력은 해봤으나 결국 현실적인 한계로 말미암아 망국을 피할 수 없었던 사례라 할 수 있으며, 때를 잘 만났다면 신라를 다시 일으켰을지 모른다는 아쉬움은 근거 없는 상상만은 아니라고도 볼 수 있다.
한국사를 통틀어서 망국의 군주들 중에서는 그나마 무탈한 여생을 보냈다. 신하들에게 암살당한 위만조선의 우거왕, 패망한 후 당나라로 끌려가 그곳에서 최후를 맞은 고구려의 보장왕과 백제의 의자왕 · 풍왕, 요나라로 끌려간 뒤 이후 역사적 기록에서 아예 사라져버린 발해의 대인선,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기록된 태봉의 궁예와 역시 비참한 최후를 맞았을 가능성이 매우 유력한 것으로 점쳐지는 후백제의 신검, 유배지 삼척에서 사사당한 데다가 자신의 일족들까지 학살당한 고려의 공양왕, 그리고 비록 본인은 편안한 여생을 보내기는 했어도 이민족 일본에게 무기력하게 나라를 빼앗기는 걸 지켜봐야 했던 대한제국의 순종 등과 대비해보면 더욱 그렇다. 일족이 신라의 진골귀족으로 편입되어 자식들과 손자도 신라의 중신을 지냈으며 증손자가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하고 이후에는 왕으로 추존까지 되는 대영웅이고 증손녀는 신라의 왕후가 되어 이후 신라 왕들에게 본인의 혈통을 물려준 금관가야의 구형왕 및 그래도 목숨과 어느 정도 세력을 부지한 채 달아나 다시 마한의 건마국에서 군주를 한 단군조선의 준왕 정도가 그나마 그와 비견될 만할 듯하다.
4. 설화에서
경순왕은 민간에서 자주 '신'으로 모셔지는 왕 중 한 명이다. 그 이유는 그가 고려의 태조에게 항복한 것이 괜히 저항했다가 백성들에게 유혈사태가 일어나게 하는 것보다 백성들을 다치지 않게 하려는 자비심에서 우러나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 망국의 왕이라는 한을 품고 있다는 것 자체가 무속적으로 신으로 섬겨지기 좋은 요소 중 하나기도 하다. 일제강점기까지도 각지에 경순왕을 모시는 사당이 많이 남아 있었으며, 경상도와 충북 일대, 경기도 일부 지역에 경순왕 사당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도 시골을 돌아다니다 보면 경순왕 사당과 이를 모시는 무당들이 가끔 보인다. 무속이나 민간 설화에서는 《삼국유사》와 마찬가지로 '김부대왕'으로 모시는 경우가 많으며, 그 아들인 마의태자와 동일시되기도 한다.
설화에서 나타나는 경순왕, 김부대왕의 모습을 살펴보면, 마을을 지키는 서낭신이나 조상신의 형태로 자주 묘사되며, 미륵불상 관련 설화도 있는데, 특이하게도 경순왕은 문무왕처럼 호국룡 설화 역시 자주 나타난다.
예를 들어 형산강에 전해지는 설화에 따르면 경주와 포항의 경계 지역에는 형산과 제산이 있는데, 과거에는 그 두 산이 하나로 합쳐져 있었고 남천, 기계천 등에서 나오는 물로 지금의 안강읍 지역에 큰 호수가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물난리가 잦아 치수가 어려웠는데, 이를 위해서는 용으로 승천하여 그 산을 갈라야 했다. 그 때문에 왕이 기도를 드려 승천을 했는데, 이 때 용이 되기 위한 조건이 바로 누군가가 승천한 왕을 용으로 불러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때 승천한 왕이 뱀처럼 보여 사람들이 모두 다 큰 뱀이라고 불렀으나, 유금이라는 이름의 어린 아이 한 명만이 뱀이 아니라 용으로 불러주었고, 그제서야 용으로 승천할 수 있었다. 그 덕택에 산이 갈라지고 물이 빠져 나가게 되었으며, 물이 빠져 나간 뒤에 생긴 들판을 그 어린 아이의 이름을 빌어 '유금'이라고 불렀다. 현재 지명으로 강동면 유금리가 존재하는데, 유금이라는 명칭이 여기서 유래되었다.
동시에 왜구들을 퇴치하기도 한다. 원래 울릉도 근처에는 여러 섬들이 많았는데, 왜구가 터를 잡고 활동하였다고 한다. 이에 경순왕은 자신이 죽어 용이 되어 이를 없애버리겠다고 했다. 그리고 용이 된 경순왕은 왜구들이 터를 잡은 섬들을 쳐서 없앴다. 그러던 중 울릉도를 파괴하려고 하자 하늘에서 울릉도는 한반도의 수구맥이니 치지 말라고 해서 울릉도를 빼고 모두 박살냈다고 한다. 실제로 울릉도 주변에 해산[28]이 꽤나 자리잡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실제 있었던 지진 등의 자연 현상에 대한 설명일지도 모른다.
5. 대중매체에서
경순왕의 정확한 출생일은 불명이지만 신라 왕 재위 시점에는 20대~30대 정도일 가능성이 높은데도 왕위 계승권 1순위인 김씨라는 설정 때문인지 대중매체에서 중노년의 나이로 묘사되는 재현 오류가 자주 일어난다.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배우 신귀식이 연기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버티려고 해도 하도 심각한 상황이라 결국 나라를 고려에 바친 군주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견훤의 서라벌 침공 때 견훤을 도와준 신라의 유염과 김응겸이 "김씨 왕가의 가장 큰 어른이다"라며 그를 새 왕으로 권하였고 마지못해 따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견훤이 서라벌을 떠난 뒤 공산 전투 이후 바로 "우리 동맹국은 고려지 백제는 아니오. 내가 비록 중신들의 권유로 이 자리에 올랐지만 이 황좌를 탐낸 적은 한 번도 없소이다"라며 그를 왕으로 만들어준 견훤에게 협조했던 유염과 김응겸을 역적이라고 비난하면서 처형하는 모습이 그나마 진정한 왕 같은 강단있는 모습을 보여준 장면.
사실 드라마에서처럼 즉위하자마자 견훤에게 협조한 세력들을 처단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경순왕 초기 고려는 그 공산 전투에서 왕건이 한달 가량이나 실종됐다가 혼자 겨우 살아서 도망쳐나오고 휘하의 장수 여덞과 본대 병력을 모조리 잃으며 고창 전투 이전까지 후백제에 주도권을 완전히 내준 상태였기 때문. 따라서 극중에서처럼 즉위하자마자 친 후백제 신하들을 숙청하면 당연히 한창 기세등등하던 견훤이 그대로 놔두지 않고 다시 서라벌로 와서 책임을 크게 물었을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이참에 신라를 후백제에 합병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극의 전개를 위해 시기를 앞당긴 것이며, 후백제와 모의하여 경애왕을 끌어내리고 그에 따라 공산 전투가 벌어지게 하는 유염과 김응겸의 작중 역할이 끝났으므로 퇴장시킨 것이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그 외에는 대부분 고려에게 나라를 바치는 것을 논의하는 장면으로 나온다. 그 과정에서 고려에게 나라를 바치려는 아버지의 행동에 반대하는 아들 마의태자와 갈등을 빚는 장면도 덤. 고려에 항복을 결정하는 마지막 대전 회의에서 "차라리 전 백성과 신하에게 자결을 요구하라"라며 반대를 하는 마의태자에게 "신라를 망친 것은 백성과 신료들의 죄가 아니라 황실의 죄이니 이제 와서 백성이나 신료들에게 목숨을 바치라고 할 수는 없다"며 고려에 항복하는 장면은 명장면. 견훤이 왕건에게 투항한 이후로는 경순왕까지 3명이 한 자리에 3자 대면을 하는 장면도 있다.
2002년 KBS 드라마 <제국의 아침>에서는 성우 겸 배우 이도련이 연기하였다. 다만 작품이 다르고 담당하는 배우가 달라져서 그런지 캐릭터 묘사도 조금 더 괄괄하고 강단 있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다만 큰 어르신이라는 상징성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오지만 극중의 비중은 "지방 세력가 A" 를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그 상징성과 위엄 때문에 존재감은 상당하며, 신명왕후의 사위이다보니 그와 대립하는 장화왕후와 왕규에게 경계를 받기도 한다.
6. 기타
조선 왕조 말기에 들어와 후처 낙랑공주 왕씨 소생들인 경주 김씨 일문들에 의해 세워진 '신라경순왕전비'(新羅敬順王殿碑)에 정비 죽방부인을 전비(前妃) 박씨로, 낙랑공주를 후비(後妃) 왕씨라 기록하고, 공주 왕씨(公主 王氏)는 누락하고 있는데, 사실 낙랑공주는 신라가 멸망한 뒤에 시집왔으니 신라의 왕후는 아니다. 다만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한 이후 그 지위가 정승공(正承公) 및 낙랑군왕(樂浪郡王)이라는 작위에 봉작되었기 때문에 낙랑공주는 신라 국왕의 왕후가 아닌 고려의 제후왕인 낙랑군왕의 왕비가 된다.
한국사 역대 임금 중에서는 조선 후기의 영조와 더불어 대단히 장수했다. 비록 신라 국왕으로서의 재위기는 8년에 불과하나 고려 제후로서는 42년 동안 봉임되었으며, 고려 제5대 대왕인 경종의 치세기간인 978년에 사망해 천수를 모두 누렸다.
1934년 간행된 《신라삼성연원보》는 그의 첫째 부인으로 송희부인(松稀夫人) 석씨(昔氏)를 등장시켜 슬하에 14남 3녀를 두었다고 하는데, 역사학계와 신라계 김씨들은 위보로 간주하고 있다.출처
먼 옛날 진평왕(제26대)이 옥황상제에게서 받았다는 천사옥대를 고려에 항복한 직후인 937년에 창고에서 꺼내 태조 왕건에게 바쳤다. 중국의 전국옥새처럼 신라에서 일종의 천명을 상징하는 물건이란 의미가 있었던 듯 하다.
W0OIQn1
어진의 눈썹 모양이 상당히 특이한데, 당나라 시대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양식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혹은 불화에 가깝게 여러 차례 이모되면서 불화의 전형적인 표현 양식을 띠었을 수도 있다.
어진이 남아있지만 경순왕을 상보로 삼은 제서는 경순왕의 외모에 대해 영특한 기상은 하늘을 업신여길 만한 외모였다고 한다.출처
신라의 마지막 국왕이라서 나라가 망한 책임을 물을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신라는 견훤이 경애왕을 살해하고 아직 신라에게 충성을 바치던 경남북 일대 호족 세력들을 초토화한 시기에 돌이킬 수 없이 끝장나 있었다. 경북 서북부 일대가 그나마 죽음을 무릅쓰고 끝까지 저항했지만 그 지역 호족들이 믿고 바라던 주군은 이미 왕건이었지 경순왕은 아니었다. 따라서 경순왕이 할 수 있는 정치적 선택은 항복을 왕건과 견훤중 누구에게 하느냐 또 언제 항복할 것이냐 뿐이었다. 경순왕은 그 상황에서도 견훤이 왕건을 한참 정신 못 차리게 밀어붙이던 시기에는 최대한 견훤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노력했는데 이는 정말 대단한 판단력과 자제력이 아닐 수 없다. 최대한 상황에 따라 적절히 판단하여 서라벌의 백성과 신료들을 보전한 훌륭한 임금으로서, 평화롭거나 나름 신라가 여력이 있었을 때 즉위했더라면 명군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고 볼 수 있으며, 사실 통상적인 의미는 아니지만 경순왕의 치적만 보면 명군이라고 볼 여지도 충분히 있다. 게다가 후기 신라 왕들의 최대 약점인 수명마저도 무려 81세로 타고난 양반이라 정말로 조건이 아쉬운 명군이였다는것은 억측만은 아닐 것이다.
7.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삼국사기》 <경순왕 본기>
一年冬十一月 경순왕이 즉위하다. 이름은 부(傅)이고, 문성대왕의 후손이며, 이찬 효종의 아들이다
一年冬十一月 전왕의 시호를 경애라 하고 장사지내다
一年冬十一月 아버지 이찬 효종을 추존하고, 어머니를 왕태후로 삼다
一年冬十二月 견훤이 들에 쌓아놓은 곡식을 태우다
二年春一月 김상이 흥종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하다
二年夏五月 유문이 견훤에게 항복하다
二年夏六月 지진이 일어나다
二年秋八月 견훤이 왕충에게 쫓겨나다
二年秋八月 견훤이 대목군의 벼를 베어가다
二年冬十月 견훤이 무곡성을 함락시키다
三年夏六月 천축국 삼장 마후라가 고려에 오다
三年秋七月 견훤에 맞서 출정한 홍술이 전사하다
三年秋七月 순주 장군 원봉이 견훤에게 항복하다
三年冬十月 견훤이 가은현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하다
四年春一月 선필이 고려에 항복하다
四年春一月 태조가 고창군에서 견훤을 크게 이기다
四年春二月 태조가 승리 보고를 하자, 왕이 만나기를 청하다
四年秋九月 동쪽 바닷가의 주군이 태조에게 항복하다
五年春二月 태조가 왕을 찾아가다
五年秋八月 태조가 왕과 신료들에게 물품을 보내주다
六年春一月 지진이 일어나다
六年夏四月 김불과 이유를 당에 보내 조공하다
七年 당 명종이 고려에 책명을 주다
八年秋九月 노인성이 보이다
八年秋九月 운주 내의 30여 군현이 태조에게 항복하다
十八年冬十月 항복을 반대하던 왕자가 개골산에 들어가다
十八年冬十一月 태조가 거처를 마련해 주고, 장녀 낙랑 공주를 왕에게 시집보내다 → 신라의 멸망
十八年冬十二月 왕을 정승공으로 봉하고, 신라를 경주로 고쳐 식읍으로 삼다.
十八年 태조가 왕과 혼인 관계를 맺다
高麗 景宗 四年 경순왕이 죽다. 시호를 경순(敬順)(또는 효애(孝哀)라고도 한다.)이라 하였다
이하, 경순왕과 상관없지만 삼국사기 경순왕 항목에 추가로 적혀 있는 기록이다.
신라사의 시대 구분
高麗 仁宗 二十三年 논하여 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