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2월 17일(토).
문암산 : 대구시 동구.
▣산행코스 : 미대동2정류장-등산로입구-바위지대-문암산-비일재-깔딱재-백안삼거리2정류장.
▣산행시작 : 미대동2정류장 09시 35분.
▣산행종료 : 백안삼거리2정류장 15시 34분.
▣전체거리 : 약 6.3km.
▣전체시간 : 05시간 59분.
▣운동시간 : 03시간 41분.
▣휴식시간 : 02시간 18분.
09 : 35 미대동2정류장 출발.
09 : 49 등산로입구.
10 : 06 바위지대.
10 : 56 문암산.
14 : 27 비일재.
14 : 58 깔딱재.
15 : 34 백안삼거리2정류장.
▲ 09시 15분 : 미대동2정류장 도착.
2020년 2월 23일 대구 청룡산을 시작으로 출발한 야등팀 <코로나19 극복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현재까지 대구 근교산을
모두 섭렵하고.. 미답산으로 유일하게 남아 있던 문암산을 오르기로 한다.
▲ 미대동 선현현양비(先賢顯揚碑).
옛 선현들의 삶을 통해 내일을 열어가는 지혜와 정신을 본받자는 차원에서 충절. 효행. 청렴의 상징으로 이지역 출신의
효자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선생(1705-1786)과... 청백리 괘편당(掛鞭堂) 이영(李榮)선생(1494-1563)과...
위국충절의 양전헌(兩傳軒) 채선견(蔡先見)선생(1574~1644)등.. 세분을 기리는 현양비이다.
오늘 마침.. 이곳이 문암산 산행들머리여서 동료들과의 미팅시간까지 15분 정도 남아서 기념비들을 살펴보았다.
▲ 미대동 3.1운동 기념비.
"채경식"은 1896년 11월 24일 경상북도 대구군 해북촌면 미대동(현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113번지)에서 아버지 채승원
(蔡昇源, 1867 ~ 1906. 10. 21)과 어머니 진주 강씨(1864 ~ ?) 사이의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1 운동 당시, 미대동 인천 채씨 문중 선비들과 조선 각 지방에서 발발한 만세운동에 호응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공산면 곳곳을 돌아다니며 격문을 살포, 주민들에게 독립운동 궐기를 호소하였다.
그해 4월 26일 밤 10시에는 권재갑 · 채갑원 · 채명원 · 채봉식 · 채송대 · 채학기 · 채희각 등 7명과 함께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미대동의 동쪽에 있는 여봉산(礪峰山)에 올라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그날 자진 해산하였다.
이 일로 인해 곧 팔공주재소의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되어 그해 5월 1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즉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루고.. 출옥 후 조용히 지내다가 1950년 11월 6일 별세하였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
▲ 미대동 6. 25및 월남참전 유공자 기념비.
▲ 이름모를 산하에 묻힌 주인 잃은 군화..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으로 이땅에 총성은 멎었지만..
7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는 전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휴전중인 나라에 살고 있다.
▲ 청백리 이영(李榮, 1494~1563)...본관은 영천으로 자는 현보(顯父), 호는 괘편당(掛鞭堂)이다.
1514년(중종 9) 21세에 무과에 합격하였다. 1545년(인종 1) 정평 부사로 치적(治績)이 크게 드러나 관찰사가 조정에 보고
하여 통정대부가 되었다. 1551년(명종 6)에 가선대부에 올라 회령 부사가 되었는데 치성(治聲)이 임금에게 들리게 되었다.
이때 조정에서 청렴한 관리 33인을 선발하였는데 퇴계 이황과 함께 이영도 포함되었다.
1553년(명종 8)에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이듬해인 1554년(명종 9)에 북병사(北兵使)로 여진족을 잘 다스렸다.
1555년(명종 10)에 병조참판으로 내직으로 들어올 때 명종 임금이 선전관을 보내어 행장(行裝)을 점검하게 하였는데
다만 헤진 이불 한 채만 있을 뿐이었다. 임금께서 “그대의 청백(淸白)은 가히 일월(日月)과 빛을 다투도다”라고 하였다.
1558년(명종 13)에 제주 목사가 되어 청렴하고 공평하게 잘 다스려 칭송을 받았다. 돌아올때 손에 들고 있던 말채찍 하나도
관(官)의 물건이라 하고 관청의 벽에 걸어두고 돌아왔다.이로써 괘편당(掛鞭堂)이라는 호(號)를 얻게 되었다.
저술로 『괘편당실기(掛鞭堂實紀)』가 있으며 1729년(영조 5) 백안동에 청백사에 제향 되었으나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고 복구되지 못했다.
▲ 09시 27분 : 다시 정류장으로 돌아와서 오늘 함께 할 회원님들과 미팅..
▲ 09시 35분 : 문암산을 향해서 출발..
▲ 동화천을 건너며 마주하는 문암산..
▲ 오늘 오르는 문암산은 야등팀 대구근교산 오르기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던 산으로.. 오늘을 끝으로 근교산 쫑~파티산행
이나 다름 없는 날이다.. 일요일이 아닌.. 토요일에 이루어진 산행이라서 참석이 저조하여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지만..
그래도 화창한 날씨 만큼이나.. 발걸음은 가볍다.
▲ 미대동 넓은들 너머로.. 2023년 12월 31일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자랑스런 팔공의 지맥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 반사경이 달려 있는 농로 끝지점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 09시 48분 : 구암생수농장앞..
▲ 얼마전까지만 해도 문암산 들머리가 구암생수농장 마당을 가로질러 가도록 되었지만 지금은 막아놓아서 돌아간다.
▲ 구암생수농장에서 8~90m를 무량사쪽으로 이동하면..
▲ 09시 49분 : 좌측으로 문암산 들머리가 있다.
▲ 임도 비슷한 길을 따라서 구암농장마당 뒷지점까지 가서.. 철탑이 보이는 오른쪽 능선으로 진행하면..
▲ 초반부터 오름을 꽤나 가파르게 오르면.. 바위지대 능선이다..
▲ 짧은 바위구간을 지나면..
▲ 전형적인 육산으로 바뀌고.. 비교적 등산객이 잘 찾지 않는 코스라.. 멧돼지들이 마음놓고 헤집고 다니며 뒤집어 놓은
낙엽으로 길의 윤곽이 희미하지만.. 그래도 자세히 살펴보면.. 흔적은 보인다..
▲ 주능선에 올라서면.. 길의 윤곽도 뚜렷하고 생각보다 가시숲길이 아닌.. 난이도 중급수준의 오름이 이어 진다.
▲ 급한 오름을 한차례 치고 오르면.. 쉼터 역할을 하는 전망바위를 만난다.
▲ 차를 타고 다닐때는 좁은 골짜기로 보였던 미대동 들판이 위에서 내려다 보니 꽤나 너르고.. 맞은편으로는 팔공산의
비로봉과 마주하지만.. 나무들에 가려 조망은 별로다.
▲ 오늘도 홍여사님의 매직배낭에서 설 다과와 먹거리가 침샘을 자극한다. 쌍화차 완전 굿~...이었습니다.
▲ 10시 56분 : 조망은 없지만 잘 정리된 문암산..
▲ 세월이 묻어나는 김문암님의 정상 표지판..
문암산(文巖山)은 공산댐 우측의 절벽 바위가 흡사 대문처럼 생겼다하여 문암산으로 전해지고 공산과 마주하고 있는
산으로 돌산으로 전체적으로 암석으로 되어 있지만 산림이 매우 울창한 편이다.
문암산을 기산(箕山)이라고도 부르며 문암산의 숲은 경상북도 보호림으로 지정되어 있다.문암산은 인천채씨 종산이다.
문암산에 숲이 울창하게 된 유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인천채씨 집안에서는 소년 참사(少年慘死)가 자주 일어났다.
동화사 승려가 인천채씨 집안 사람들에게 문암산에 나무를 심으면 참사를 면할 수 있다고 말해 주었고,
이때부터 인천채씨 40여 세대가 가마니.. 보따리.. 봉지 등에 흙을 담아암산(巖山)에 깔고 그 위에다 나무를 심었다.
그 후에 나무가 잘 자라나 문암산에는 산림이 울창해졌으며 소년참사도 없어졌다고 한다.
▲ 김문암님에게 보낼 인증샷..ㅎㅎ~
▲ 문암산에서 깔딱재로 가는 내림길이 급하게 내려 꽂힌다.
▲ 11시 43분 : 야등팀의 밥자리는 언제나 옳다.. 조고문님의 35도 데낄라가 "대끼리"다..
▲ 하산길의 햇볕좋은 곳에서.. 칼슘대사 촉진을 위해 비타민D를 피부로 섭취.. 거기에 웃음 한바가지는 덤이다.
▲ 14시 27분 : 비일재..
문암산길은 조망이 거의 없는 길이다.. 유일하게 조망이 되는 곳이다.
▲ 14시 58분 : 깔딱재..
여기서 직진하면 환성산 길이다. 하산은 좌측으로..
▲ 2021년 5월 2일.. 야등팀이 올라 왔던 길을 오늘은 내려간다. 그때는 소나무에 한입버섯이 많이 보였는데 오늘은 없다.
▲ 마을길에 내려서고..
▲ 동화천 건너에는 토요일 오전 근무를 마치고 나들이를 나온 젊은 청춘들의 차들이 주차장을 가득 메운다.
▲ 한옥 카페 "브리니" 젊은이들로 완전 호황이다. 요즘 말로 "핫" 한 곳이다.
▲ 15시 34분 : 백안삼거리 산행종료..
다른 지역의 국립공원에 가면.. 우리지역에는 없기에 언제나 부러웠던 국립공원 명판.. 이제는 자랑스럽다.
▲ 화창한 날씨가 좋았고...
조망은 없었지만 울창한 소나무 숲과 햇살이 좋았고...
그 무엇보다.. 사람이 좋았기에... 모든게 좋았던 행복의 하루였던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