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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4장 8-18절.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고치고 전도함
8절.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t Lystra a man was sitting who had no strength in his feet, lame from his mother's womb, who had never walked.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Καί τις ἀνὴρ ἀδύνατος ἐν Λύστροις τοῖς ποσὶν ἐκάθητο,
and certain man crippled in Lystra in the feet was sitting
‘앉아 있는데’(ἐκάθητο)는 미완료과거로서(was sitting) 계속 앉아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루스드라는 이고니온에서 남쪽으로 64km 떨어져 있고, 수리아로 가는 대로상에 있었고, 해발 1100m에 있었습니다.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χωλὸς ἐκ κοιλίας μητρὸς αὐτοῦ, ὃς οὐδέποτε περιεπάτησεν.
lamb from womb of mother of him, who never walked
직역하면 ‘그의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절름발이인데, 결코 걷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걸어본 적이 없는’에서 동사(περιεπάτησεν)는 부정과거로서(walked) 단연코 걷지 못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한글 번역에 ‘걸어본 적이 없다’고 한 것은 좋은 번역입니다.
베자(Beza) 사본에는 이 앉은뱅이가 바울의 설교를 듣기 전에 이미 유대교로 전향한 개종자(proselyte)였음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Baker
1. 사도행전 3장에서는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고쳤는데, 루스드라에서는 바울이 앉은뱅이를 고칩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는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 거지가 베드로에게 구걸하다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4장의 루스드라 앉은뱅이는 바울이 설교하는 것을 듣다가 믿음을 얻게 되어서 바울이 고쳐주었습니다.
마태복음 4장 23-25절에서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즉 천국 복음은 죄 용서와 병 고침과 영생 천국으로 구원해준다는 복음임을 입증해주시려고 그런 것입니다.
이처럼 육신의 치료도 좋지만, 예수님과 복음이 중요합니다.
9절.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New American Standard Bible: This man was listening to Paul as he spoke, who, when he had fixed his gaze on him and had seen that he had faith to be made well,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οὗτος ἤκουεν τοῦ Παύλου λαλοῦντος·
this (man) heard of the Paul speaking
‘말하는’(λαλοῦντος)는 현재분사이고(speaking), ‘듣거늘’(ἤκουεν)는 부정과거로서(heard) 확실히 잘 들은 것을 가리킵니다.
바울이 주목하여
ὃς ἀτενίσας αὐτῷ
who having looked intently at him
직역하면 ‘그가 그를 주목하여’란 뜻입니다.
‘주목하여’(ἀτενίσα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looked intently) 똑바로 쳐다보면서 주목한 것을 가리킵니다.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καὶ ἰδὼν ὅτι ἔχει πίστιν τοῦ σωθῆναι,
and having seen that he has faith to be healed
직역하면 ‘그가 구원받을 믿음 가진 것을 보고’란 뜻입니다.
‘구원받을’(σωθῆναι)은 부정과거 부정사형 수동태로서(to be healed) 확실히 구원받게 되는 것을 가리키고, 원형(σῴζω)은 ‘구원하다, 치료하다, 구출하다’(save, heal, rescue)는 뜻입니다.
영어성경에는 ‘치료받을’(to be healed)로 번역되었으나, 한글 성경에 ‘구원받을’(to be saved)로 번역한 것은 잘한 것입니다.
1.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육신이 멀쩡한 유대교인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대적하고 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육신이 앉은뱅이인 이 사람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들었습니다.
이처럼 로마서 10장 17절 말씀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 좋은 사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설교 시간에 잘 듣지 않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설교를 잘 듣지 않고, 고개 숙이고 딴짓하는 사람을 중직자로 세우면 안 됩니다.
이처럼 앉은뱅이가 바울의 설교를 잘 들으니까, 바울이 그 앉은뱅이를 주목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설교 잘 듣는 사람은 설교자가 보면 주목하게 됩니다.
2. 바울이 주목하여
베드로도 앉은뱅이를 고칠 때, <주목하여 보고, 우리를 바라보라>고 했습니다(행 3:4).
옛날 어른들이 공부할 때 책장이 뚫어질 정도로 주목하여 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무엇이든지 주목하여 볼 때,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학생이 선생님의 강의를 주목해서 들을 때, 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떠드는 학생들이 있으면 <주목, 주목> <주목해>라고 합니다.
이처럼 설교를 듣는 청중은 설교자의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목사도 성도들에게 관심을 집중해서 주목해야 합니다.
그래서 잠언 27:23.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떼에 마음을 두라고 했습니다.
주목하고 집중해야 역사가 일어납니다.
교회 일도 그렇고, 사업하는 것이나 농사짓는 것도 주목하고 마음을 집중해야 합니다.
3. 구원 얻을 만한 믿음이 그 사람에게 있는 것을 보고
앉은뱅이는 바울의 설교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설교 말씀을 듣는 과정에서 믿음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생겼고, 예수님이 죽은 영혼을 살려주시고, 육신마저 고쳐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앉은뱅이 속에 들어가니까, 그 생명의 말씀이 능력이 되어서 창조적인 역사를 일으킨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0장 17절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히브리서 4장 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똑똑한 여자도 혼자서는 애기를 낳을 수 없고, 남자로부터 생명의 씨앗이 내 몸에 들어와야 임신을 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말씀의 씨앗이 마음속에 들어가야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이 자라면 능력이 생기고, 생명과 창조적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불이요, 방망이요, 바위를 부수는 능력이요, 생명이고, 치료하는 약이 됩니다.
예레미야 23:29.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이 말씀은 능력이 되어서, 청중의 마음속에서 근심과 슬픔과 두려움을 사라지게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청중의 마음에 믿음을 심어주고, 희망을 심어줍니다.
이처럼 말씀이 믿음을 일으켜서, 우리의 마음속에 능력을 갖게 되면, 기도하거나 축복기도 하거나 안수할 때, 말씀의 능력이 전달됩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요한복음 6장 63절 말씀처럼 영이요 생명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과 성령님이 능력입니다.
그래서 설교할 때 청중들은 그 영혼이 새 힘을 얻게 됩니다.
10절.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said with a loud voice, "Stand upright on your feet." And he leaped up and began to walk.
큰 소리로 이르되
εἶπεν μεγάλῃ φωνῇ
he said loud voice
‘이르되’(εἶπεν)는 부정과거로서(he said) 큰 소리로 단호하게 말한 것을 가리킵니다.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Ἀνάστηθι ἐπὶ τοὺς πόδας σου ὀρθός.
stand on the feet of you upright
‘일어서라’(Ἀνάστηθι)는 부정과거 명령형으로서(stand) 단호하게 벌떡 일어나라는 말입니다.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καὶ ἥλατο καὶ περιεπάτει.
and he sprang up and began to walk
‘일어나’(ἥλατο)는 부정과거로서(he sprang up) 벌떡 일어난 것을 가리키고, 원형(ἅλλομαι)은 ‘뛰어오르다, 튀어오르다’( leap, leap up; spring up)란 뜻입니다.
‘걷는지라’(περιεπάτει)는 미완료과거인데, 여기서는 기동(inceptive)의 미완료로서 ‘걷기 시작했다’(began to walk)는 뜻입니다.
1. 바울은 앉은뱅이에게서 구원 얻을 만한 믿음이 있음을 보고서는 큰 소리로 네 발로 일어서라고 외쳤습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가 굉장히 믿음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은 앉은뱅이가 구원 얻을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도, 바울처럼 선포하기를 주저합니다.
왜냐하면 의학적인 지식과 인간의 고정관념으로는 앉은뱅이가 걷는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믿음으로 앉은뱅이의 구원을 선포했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앉은뱅이에게 믿음으로 선포할 때는 인간의 이성과 지성을 초월한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이 믿음은 성령님을 믿을 것인가 이성과 경험을 믿을 것인가 갈등을 초월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32:27.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2. 바울이 큰 소리로 ‘일어나 걸어라’고 하자 앉은뱅이가 일어나 걸었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베드로의 경우는 앉은뱅이를 베드로가 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루스드라 앉은뱅이는 바울이 말로써 ‘일어나 걸어라’고 선포하지 앉은뱅이가 일어나 걸었습니다.
루스드라 앉은뱅이가 믿음이 더욱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루스드라의 앉은뱅이는 바울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생기고,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실상 성도들에게는 원천적으로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을 통해서 이 믿음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는 것입니다.
유명한 소설가 <임옥인>씨가 있습니다.
그분이 한 참 활동할 때 프랑스를 다녀와서 과로로 쓰러졌습니다.
뇌출혈이었고, 병원에서 더 이상 감당할 수가 없어서 집으로 후송이 되었습니다.
손발을 하나도 쓸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홍정길 목사와 하용조 목사가 임옥인 권사님에게 사랑을 받기 때문에, 찾아뵈었는데 마음 아파했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갔는데 누워 있어야 할 분이 앉아 있었답니다.
빨갛게 익은 감을 대접했답니다.
자기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이 누워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와서 자기를 위해서 기도해주었답니다.
그런데, 신유의 은사가 강한 자기의 친구가 찾아와서 잠깐 기도하고 “옥인아 일어나라” 그랬답니다.
그런데 자기는 그 말을 듣고 굉장히 화가 났답니다.
자기는 일어나고 싶은데 “자기가 능력이 있다고 나에게 그렇게 함부로 말할 수 있는가? 좀 안수도 하고 가까이 와서 무언가 해야 할 텐데. 그런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일어나라”고 하니까 마음에 굉장한 갈등이 많았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렇게 화낼 것이 아니더랍니다.
즉 이 때 사도행전 3장 사건이 생각나더랍니다.
그래서 혼자서 중얼중얼했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사람도 일어났는데 나라고 못할 것이 무엇인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서 걷자.”
그러면서 손을 한번 휘저었더니 손이 쑥 움직이더랍니다.
그래서 이쪽도 쑥 움직였는데 움직이더랍니다.
그 순간부터 눈물바다가 되었답니다.
계속해서 친구가 일어나서 벽을 짚으라는 것입니다.
‘돌아라’ 그래서 돌았답니다.
손 떼고 돌라고 해서 손 떼고 돌았답니다.
그때 그 현장에 대학교에 다니는 한 자매가 있었는데 기적이 일어난 현장을 보고 소리를 질렀답니다.
‘할렐루야’를 못하고 너무 무서워서 <악-> 하고 소리를 질렀답니다.
나중에 자기 친구한테 물어보았답니다.
“네가 들어오자마자 왜 그렇게 일어나라고 그랬느냐”고 물어보았답니다.
그랬더니 들어오자마자 네가 일어나는 환상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를 일으켜 세워주는 확신이 들어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11절.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New American Standard Bible: When the crowds saw what Paul had done, they raised their voice, saying in the Lycaonian language, "The gods have become like men and have come down to us."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οἵ τε ὄχλοι ἰδόντες ὃ ἐποίησεν Παῦλος
the and crowds having seen what did Paul
‘바울이 한’에서 동사(ἐποίησεν)는 부정과거로서(did) 바울이 행한 확실한 과거의 사실을 가리키고, ‘보고’(ἰδόντε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seen) 뚜렷하게 분명히 본 것을 가리킵니다.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ἐπῆραν τὴν φωνὴν αὐτῶν Λυκαονιστὶ, λέγοντες
lifted up the voice of them in Lycaonian, saying
직역하면 ‘루가오니아 말로 그들의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이란 뜻입니다.
‘(소리를) 높여’(ἐπῆραν)는 부정과거로서(lifted up) 큰 소리를 지르는 모습을 가리키고, ‘이르되’(λέγοντες)는 현재분사(saying)입니다.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Οἱ θεοὶ ὁμοιωθέντες ἀνθρώποις, κατέβησαν πρὸς ἡμᾶς,
the gods having become like men, came down to us
직역하면 ‘시들이 사람들같이 되어서, 우리에게로 내려왔다’는 뜻입니다.
‘같이 되어서’(ὁμοιωθέντες)는 부정과거 분사 수동태이고(having become like), 원형(ὁμοιόω)은 ‘--같이 만들다’(make like)는 뜻입니다.
‘내려오셨다’(κατέβησαν)는 부정과거입니다(came down).
1. 사람들이 급하면 어렸을 때 쓰는 사투리를 쓰게 됩니다.
그래서 루가오니아 사람들도 평상시에는 <코이네 헬라어>를 썼지만, 놀라운 일을 만나서는 어렸을 때 쓴 사투리 방언을 썼습니다.
2. 그러면서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는 것을 보고, 소리 지르면서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내려오셨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내려온다는 것은 헬라인들의 사상이었습니다.
헬라 사람들은 신이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난다는 말을 <에피파네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로마 황제들도 자신들이 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고대 애굽이나 베벨론 왕들도 자신을 신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을 신으로 숭배한 우상숭배입니다.
일본의 천황 숭배도 바로 인신 우상숭배였습니다.
12절.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nd they began calling Barnabas, Zeus, and Paul, Hermes, because he was the chief speaker.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헤르메스라 하더라.
ἐκάλουν τε τὸν Βαρνάβαν Δία, τὸν δὲ Παῦλον Ἑρμῆν,
They began calling then the Barnabas Zeus, the and Paul Hermes
‘하더라’(ἐκάλουν)는 미완료과거이고, 기동(inceptive)의 미완료로서(They began calling) 부르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ἐπειδὴ αὐτὸς ἦν ὁ ἡγούμενος τοῦ λόγου.
because he he was the (one) leading of the speaker
직역하면 ‘그는 말하는 것을 인도하는 자였으므로’란 뜻입니다.
‘인도하는’(ἡγούμενος)은 현재분사이고(leading), ‘그는 자였으므로’(αὐτὸς ἦν)에서 ‘그는’(αὐτὸς: he)이 강조되어 있고, 동사(ἦν)는 미완료과거로서(was) 계속 말하는 것을 인도하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1. 바나바를 <쓰쓰>라고 말했는데, 쓰쓰는 <제우스>신을 가리킵니다.
헬라인들의 ‘제일 신’을 말합니다.
바나바가 선교대의 대장이므로, 제우스 신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을 <허메>라 했는데, 이 <허메>는 제우스신의 대변인인 <헤르메스> 신을 가리킵니다. 로마에서는 이 헤르메스를 <머큐리> 라고도 했습니다.
설교는 바울이 했으므로, 바울은 대변인인 <허메> 신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헬라의 12신을 보면, 서로 싸우고 문란한 성관계를 하는 것들을 봅니다.
예를 들어서 제우스 신의 아내는 헤라입니다.
그리고 아프로디테 여신은 로마의 비너스로서 사랑의 여신입니다.
그래서 이 헬라의 12신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신에 불과합니다.
13절.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New American Standard Bible: The priest of Zeus, whose temple was just outside the city, brought oxen and garlands to the gates, and wanted to offer sacrifice with the crowds.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ὅ τε ἱερεὺς τοῦ Διὸς τοῦ ὄντος πρὸ τῆς πόλεως,
the and priest of the Zeus of the being just outside the city
직역하면 ‘시외에 있는 제우스 제사장들이’란 뜻입니다.
‘있는’(ὄντος)은 현재분사로서(being) 제우스 신전이 시외에 있어서 그 제사장이 도성 밖에 계속 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ταύρους καὶ στέμματα ἐπὶ τοὺς πυλῶνας ἐνέγκας,
oxen and wreaths to the gates having brought
직역하면 ‘소와 화환들을 대문들로 가지고 와서’란 뜻입니다.
‘가지고 와서’(ἐνέγκα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brought) 급하게 가지고 온 것을 가리키고, 원형(φέρω)은 ‘가지고 가다, 나르다, 인도하다’(carry, bear, bring; lead)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σὺν τοῖς ὄχλοις ἤθελεν θύειν.
with the crowds was desiring to sacrifice
‘제사하고자 하니’(ἤθελεν θύειν)에서 뒤의 동사는 현재 부정사형 동사이고(to sacrifice), 앞의 동사(ἤθελεν)는 미완료과거인데, 원망(願望)의 미완료과거(desiderative impf)로서 제사하기를 바랬다는 뜻입니다.
1. 루가오니아 지방의 루스드라 성 사람들이 자기들의 사투리로 말하는 것을 듣고, 바울과 바나바는 알아듣지 못했는데, 그 사람들이 성 밖으로 나가서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사하려고 제사장들과 함께 소와 화환을 가지고 대문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제우스 신전의 제사장들이 대문 앞에서 사람들과 함께 바울과 바나바에게 제사하려고 했습니다.
2.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는 신의 대접을 받는 것이 얼마나 최고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그래서 많은 황제들이 신으로 대접을 받으려고 했고, 지금 많은 이단 교주들도 신으로 대접을 받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교회에서는 목사가 신적인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신적 대접은 곧 망할 징조입니다.
14절.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ut when the apostles Barnabas and Paul heard of it, they tore their robes and rushed out into the crowd, crying out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ἀκούσαντες δὲ οἱ ἀπόστολοι Βαρνάβας καὶ Παῦλος,
having heard but the apostles Barnabas and Paul
직역하면 ‘그러나 사도들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란 뜻입니다.
‘듣고’(ἀκούσαντε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heard) 확실히 들은 과거의 사실을 가리킵니다.
옷을 찢고
διαρρήξαντες τὰ ἱμάτια ἑαυτῶν
having torn down the garments of them
‘찢고’(διαρρήξαντε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torn down) 자기들의 옷을 확 찢어버리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ἐξεπήδησαν εἰς τὸν ὄχλον, κράζοντες
rushed out into the crowd, crying out
‘뛰어 들어가서’(ἐξεπήδησαν)는 부정과거로서(rushed out) 급하게 뛰어 들어가는 모습을 가리키고, ‘소리 질러’(κράζοντες)는 현재분사로서(crying out) 생생하게 소리 지르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1. 바울과 바나바는 자기들에게 제사하려고 하는 것을 보자마자, 자기들의 옷을 찢었습니다.
구약에서도 옷을 찢는 경우는 부모가 돌아가시거나 하나님을 모독할 때, 극도의 슬픔과 분노를 나타낼 때 옷을 찢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과거에 부모가 돌아가시면,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 통곡을 했습니다.
7-8센티 정도 옷을 찢는다고 합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짐승에게 찢겨 죽었다는 피 묻은 옷을 보고 옷을 찢고 슬퍼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베냐민의 자루에서 요셉의 은잔이 발견되었을 때 모두 옷을 찢었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이 모든 왕자들을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옷을 찢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산헤립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편지를 읽고 옷을 찢고, 성전에 가서 기도했습니다.
15절.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nd saying, "Men, why are you doing these things? We are also men of the same nature as you, and preach the gospel to you that you should turn from these vain things to a living God, WHO MADE THE HEAVEN AND THE EARTH AND THE SEA AND ALL THAT IS IN THEM.
이르되
καὶ λέγοντες
and saying
‘이르되’(λέγοντες)는 현재분사로서(saying) 말하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Ἄνδρες, τί ταῦτα ποιεῖτε;
men, why these things do you?
직역하면 ‘사람들이여, 어찌하여 너희가 이런 일들을 하느냐’는 뜻입니다.
‘하느냐’(ποιεῖτε)는 현재형입니다(do you).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καὶ ἡμεῖς ὁμοιοπαθεῖς ἐσμεν ὑμῖν ἄνθρωποι,
and we of like nature are with you men
‘같은 성정을 가진’(ὁμοιοπαθεῖς)이란 ‘동일한 감정과 느낌을 가진’(having similar passions and feelings)이란 뜻이고, ‘사람이라’에서 동사(ἐσμεν)는 현재형입니다(are).
‘우리’(ἡμεῖς)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εὐαγγελιζόμενοι ὑμᾶς
proclaiming the gospel to you
직역하면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εὐαγγελιζόμενοι)은 현재분사로서(proclaiming the gospel) 지금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ἀπὸ τούτων τῶν ματαίων ἐπιστρέφειν ἐπὶ θεὸν ζῶντα,
from these of the vanities to turn to God living
직역하면 ‘헛된 이것들로부터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란 뜻입니다.
‘돌아오라고’(ἐπιστρέφειν)는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turn) 단호하게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ὃς ἐποίησεν τὸν οὐρανὸν καὶ τὴν γῆν καὶ τὴν θάλασσαν καὶ πάντα τὰ ἐν αὐτοῖς·
who made the heaven and the earth and the sea and all the things in them
직역하면 ‘---지으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복음을 전한다’란 뜻입니다.
‘지으시고’(ἐποίησεν) 부정과거로서(made) 과거에 지으신 확실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1.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바울과 바나바는 자기들을 신으로 제사하려는 사람들에게 우리도 당신들과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야고보서 5장 17절에는 엘리야도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다른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선언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모든 인간은 신이 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히틀러나 김일성이나 모든 인류의 독재자들은 다 신이 되려고 했던 것입니다.
가정에서 아버지가 신이 되려고 하고, 회사에서는 사장이 신이 되려고 하고, 교회에서는 목사나 장로가 신이 되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섬기려고 오셨고, 사람을 지배하려고 오시지 않았어요.
그러나 우리는 사람을 노예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인간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신이 아니라 너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인간이다. 그러니 우리를 섬기지 말아라.’
참으로 멋있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섬기지 말라고 했으니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루스드라의 앉은뱅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이 생겨서 벌떡 일어난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믿음을 갖고, 놀라운 은혜들을 체험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