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는 한국민족의 직계조상중의 하나다, 신채호는 한국민족을 부여족이라고 불렀다, 부여는 고조선의 후국으로서 늦게잡아도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후5세기까지 약 1000여년간 송화강 넌강유역을 중심으로 만주에서 크게 활동했다.
중국기록에 등장하는 부여는 산해경의 불여, 일주서의 부루, 사기의 부여, 논어주소의 부유등으로 표기된다. 당시 고대한자발음으로 볼때 이들의 공통발음은 짧은 소리로는 불, 긴 소리로는 부르,이다. 부르는 더 긴발음으로 부유,로도 발음된다. 부여는 기원후 4세기 전반까지는 동북아시아의 최대 선전국이었다.
예컨데 삼국지,위서,동이전 부여조는 그나라 사람들은 체격이크고 성질이 굳세서 용감하며 , 외국에나갈때는 비단옷,수놓은옷,모직옷을 즐겨입고,,,또 금과은으로 모자를 장식하였다고 기록했다. 부여의 통치조직은 중앙의 국왕아래 최고 귀족장으로서 마가, 우가,저가,구가등 여려가가 있어서 전국을 각각 동서남북의 사출도를나누어 통치했다.
개,돼지,소,말이 등장하는 한국민족의 윷놀이는 부여에서 유래한 민속이다. 가 제도와 고추가는 고구려에서도 신분제로 계승됐다.
부여의 고추가와 불가리아 고추불가제국 ==
신채호는 부여족의 특징은 정착지에 반드시 불자를 붙여 국호를 짓는데 일찍이 만리장성 부근으로 이동해 들어온 한 부여족 군단을 추적했지만, 그행방을 잃어버렸다고 기록했다. 어떤 계기인지는불명하나, 부여족의 일단이 4세기 말엽 서방으로 이동해 초원길을거쳐 중앙아시아의 카스피해와 흑해사이 캅카스 지방에 도착했다. 요동부터 카스피해까지 이어지는 밝안산(백두산) ~ 부여호~발칸산~ 발카시호~ 발칸산의 명칭벨트가 부여족의 초원길 이동을 시사해준다. 이지방은 비잔틴제국의 속지였다가 그에앞서 이동해온 동방민족인 아발족의 영향아래 있었다.
부여족은 5~ 7세기초까지 돈강양안과 북캅카스에 흩어져 정착했다. 서양사에서는 이때부터 부여족이 불가족으로 기록되어 나온다. 부여(불)의 가(加) 족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돈강하류, 흑해연안의 아발세력이 약화되자,635년 불가족족장 쿠브라트는 불가 부족연합을 결성해 아발 지배로부터 독립해 대 불가리아(Magna Bulgaria)를 건국했다. 그러나 7년만인 642년 쿠브라트칸은 사망했다.
쿠브라트의 다섯아들은 격심한 권력투쟁끝에 헤어졌는데 큰아들은 아버지의 자리에 쿠비불가국을 수립했다가 그 남부를 장악했던 하자르족의 지배아래 들어갔다. 넷재아들은 판노니아평원(지금의 헝가리) 을 찾아가 아발족에 복속하였다. 다섯째아들은 다뉴브강을 건너 비잔틴제국에 보호를 구했다가 결국 복속 하였다.
그러나 둘재아들과 셋째아들은 끝까지 외세에 복속하지않고 독립국가의 길을 걸었다. 둘째아들 코트라그는 북으로 이동하여 그들이 이름붙인 볼가(불가,volga)강과 카마(고마,kama)강의 합류지점에 고추불가국을 건설하였다. 코트라그의 고추불가국 명칭은 그들이 고추가임을 표시하여 그들이 부여족이라는 사실의 명확한 증거의 하나가 된다. 고추불가국은 7세기부터 14세기까지 이지역에 정착하여 번영하였다.
고추불가국에는 922년 바그다드의 사절단이도착하여 아랍세계와의 통상이 시작됐는데, 이사절단이 고추불가국을 볼가강의 명칭을따 볼가불가(volga Bulghar)라 부르면서 아랍세계에 그이름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고추불가족은 현재 타타르 자치공화국을 수립해 모여사는데 그언어의 문법구조는 한국어와 동일구조이고, 외양도 혼혈이덜돼 동양인(한국인)의 모습이다.
불가리아 소피아와 백제 사비성===
한편 셋째아들 아스파르흐가 이끈 불가족은 서방흑해 연안을 횡단해서 679년 다뉴브강을 건너 발칸반도에 도착했다. 비잔틴제국의 콘스탄티누스4세는 680년 군대를 급파하여 불가족의 퇴거를 명하였다. 이때 비잔틴 로마군의 연락장교가 불가족의 군영안에서 생활하면서 관찰을 기록하여, 불가족의 생활양식을 잘알수있게되었다. 불가족과 비잔틴제국 로마군사이의 협상이 결렬돼 681년 대결전을 펼친다.
불가족 아스파르흐칸은 결전을 앞두고 하늘을향해 조상신 단군(Tangun/tangur)에게 승전을 기원하는 제천의식을 행했다고 로마군 연락장교는 기록했다. 불가족은 681년의 대결전에서 승리하고 정착하여 그해에 불가리아 왕국을 건국했다.
국호 불가리아는 불가족의땅 (Bul+garia)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고대 불가리아 제1제국(681~1018)이다. 불가족은 귀족이돼 보야(BOYAR,부여의 발음인 부유의 모음조화에따른변음)라고 불렸으며, 슬라브족을 농민으로삼아 다스렸다. 불가리아 제1제국 귀족의 보야 호칭도 그들이 부여족임을 알려준다.
불가리아 제1제국은 9세기초에 판노니아평원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대국이 되어서, 서쪽으로 프랑크제국과 국영을 접하게 됐다. 니케포로스1세의 비잔틴제국은 이를 허용하지않고 809년 불가리아를 공격했다가 불가리아황제 크룸(krum)칸에게 역습당해 참패했다. 크룸칸은 비잔틴로마군의 요새 사르디카를 점령했으며, 811년에는 산맥고개에서 매복했다가 로마군을 대파해 비잔틴황제 니케포로스1세가 전사했다.
대승한 불가리아의 크룸칸은 지금의 발칸반도 대부분에서 로마군을 추방하고 수도를 사르디카로 옮겨 이름을 소비(또는 사비,지금의 소피아)로 정했으며, 소비의 동산에올라 조상신 단군에게 승전의 제천제사를올리고, 산이름을 발칸산(밝안산,밝산,백산,고대한민족이 제천의식을행한산)으로 정하였다.
서울북악산처럼 발칸산은 수도 소피아에 붙어있는 높지않은 산이었으며, 크룸칸의 제천유적도 일부 남아 있었다. 발칸산에서 발칸산맥, 발칸반도의 명칭이 나왔다. 이것도 불가리아 제1제국의 지배층이 부여족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부여족은 어디를 가나 나라를 세울때는 서울을 사비,소비라고 부르는 관습이 있었다. 예컨데 부여족의 일파가 세운 백제가 하남위례성을잃고 남쪽으로 천도해 지금의 부여에 수도를 정했을때 백제성왕은 538년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고 수도이름을 사비로 정했다. 소비와 사비는 호환된다.
불가리아의 크룸칸이 수도를 소비라고 호칭한것도 불가족이 부여족이라는 중요한 증거의 하나이다.
몽고반점을 간직한 불가리아인의 비밀==
불가리아황제 크룸칸은 814년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려다가 병사했다. 패전으로 매우 취약해진 비잔틴 제국은 위기에서 구출됐다. 뒤를 이은 불가리아의칸은 비잔틴제국과의 평화를 추구해 긴평화의 시대가 오고, 불가리아의 보리스칸은 864년에는 그리스정교를 수용하여 기독교국가가됐다.
불가리아 제1제국은 11세기들어 약화되어 이번에는 도리어 비잔틴제국의 공격을받고 그속주로 떨어졌다. 그사이 소수불가족과 다수 슬라브족사이의 혼혈로 외형은 슬라브족모습을 더 많이 갖게 되었다. 불가리아는 12세기후반 다시 독립하여 불가리아 제2제국(1186~1330)을 수립했다.
그러나 제2제국의 지배층을 이미 슬라브화하여 제1제국 지배층과는 다른 모습을 갖게됐다. 그러나 불가리아 제1제국은 동방에서온 부여족이 세운국가이다. 부여족은 불가리아 주민에게 독립과역사로 남아있고, 발칸산,발칸산맥,발칸반도,소비등 다수의 지명으로 남아 있으며 불가리아 말 문법구조로 남아있고, 문화와 생활양식의 전통(정월달집놀이, 굿거리등)으로 남아 있으며, 또 갓난아기 엉덩이의반점(몽고반점)으로도 남아 있다.
현재 백인세계에서 갓난아기의 반점이 나오는 민족은 오직 불가리아인뿐이다. 그원인은 불가리아인의 원조상이 부여족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불가리아와 유럽역사학자들은현재 원 불가족이 어디서왔는지 알수없다고 단념하고, 5세기 흑해지방 마그나 불가리아를 그기원으로 삼아 역사를 쓴다.
필자는 바로 그이전의 원불가족이 동방의 부여족임을 처음으로 밝히고 강조하는 것이다.
==신용하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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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간에서 우주를 재패[再覇]하는 그날까지 원문보기 글쓴이: 해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