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 광복절이다. 2021년은 광복 76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다, 이번 라이딩은 나라를 뒤찾기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의 숭고한 뜻을 되새기며,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 자리한 한말 의병장 이인영 선생의 생가를 찾아 떠나는 길이다. 여정의 시작은 경강선 여주역이다. 여주시는 경기도 동남부에 자리한 고장으로 강원도와 충청북도에 맞닿아 있으며, 세종대왕릉을 비롯해 수많은 역사문화유적을 품고 있다. 대열잔차 전사들은 자전거에 태극기를 달고 이인영 선생의 생가를 향하여 힘차게 출발하였다.
영월근린공원, 신륵사를 거처 금당천과 상교천을 따라가다가 상교1길로 들어서면 이인영 선생 생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19세기 말에 지어진 목조 초가인 이곳은 한일 의병사의 중심에 섰던 한 인물의 삶이 시작된 곳이다. 이인영(1867-1909) 선생은 학문이 깊은 유학자로 일찍부터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며, 많은 문인들이 그를 따랐다고 한다. 그러나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선비의 길에만 머물지 않고 붓 대신 칼을 들었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국권이 흔들리자 유인석, 이강년 등과 함께 여주에서 의병 500명을 규합했다.
그리고 춘천과 양구 등지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우며 국권을 지키기 위한 항쟁에 나섰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일본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고종황제마저 폐위되자 이인영 선생은 다시 의병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원주에서 관동창의군 대장으로 활동하여 일본군과 수차례 교전을 벌였고, 흩어져 싸우는 의병들을 하나의 대오로 결집해야한다는 뜻을 품었다. 선생은 일본군이 서울을 장악하고 있는 한 국권을 회복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제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던 의병들을 하나로 모아 서울을 탈환한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1907년 11월, 선생은 13도창의군 총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전국에서 모여든 약 1만 명의 의병을 이끌고 서울을 향한 진공작전을 감행했다. 그러나 의병들은 무기와 탄약이 턱없이 부족했고, 서로 다른 의병진을 통합하여 지휘할 체계도 충분하지 못했다. 결국 서울 탈환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당시 각지의 의병들이 다방면에서 동시에 진격하여 일본군의 전력을 분산시키는 전략을 구사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역사는 결과만으로 평가할 수 없는 법이다. 비록 서울을 탈환하지는 못했지만 ,
전국의 의병들이 하나의 깃발 아래 모여 국권 회복을 위해 서울을 향해 진격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이듬해 부친상을 당한 이인영 선생은 허위에게 지휘권을 넘겨주고 문경으로 돌아갔다. 이후 상주에 은신하던 중 1909년 6월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고, 경성감옥에서 처형되어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13도창의군의 13도는 당시 조선의 전국 13도를 뜻하고, 창의는 의로운 뜻을 세워 의병을 일으킨다는 의미다. 비록 그들이 서울 탈환 작전은 실패했지만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되찾겠다는 의병들의 거대한 뜻은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니었다.
그 숭고한 정신은 훗날 독립운동의 밑거름이 되었고, 이인영 선생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생가를 둘러본 뒤 잠시 묵념하며 선생의 뜻을 되새겼다. 마음 속으로 선생께 깊은 경의를 표하고 다음 목적지인 고달사지(高達寺址)로 향했다. 상고마을회관을 지나 고달사로에 접어들자 우두산 자락에 자리한 고달사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때 고려시대의 고찰로 번성했던 고달사는 이제 사라지고 넓은 절터만 남아있지만, 곳곳에 남아있는 문화유산은 그 옛날의 영화와 역사를 묵묵히 증언하고 있다. 고달사지에는 국보 제4호인 고달사지승탑을 비롯해 원종대사 혜진탑, 석불좌 등 귀중한 문화재가 남아 있다.
고달사는 본래 봉황암이라는 이름으로 764년 창건된 것으로 전해진다. 고려시대에는 왕실의 비호를 받으며 크게 번성했고, 혜진대사가 주석하면서 사찰의 규모가 확대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때 어떤 이유로 폐사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임진왜란 당시 병화를 입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뿐이다. 한때 수많은 승려와 신도들로 북적였을 거대한 사찰이 이제는 돌과 터만 남긴 채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졌다는 사실이 못내 아쉽다. 고달사지를 뒤로하고 우두산 자락의 고갯길을 넘었다. 약 1km에 이르는 오르막은 경사가 제법 가팔라 페달을 밟는 다리에 힘이 들어간다.
힘겹게 고개를 넘으니 블루헤런골프장 인근으로 이어진다. 이곳에는 단종이 유배길에 물을 마셨다는 전설이 깃든 어수정(御水井)이 있다. 단종이 이곳에서 물을 마시고 우두산 고갯길을 넘어 고달사를 거쳐 원주 방향으로 향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또한 인근에는 효종의 부마 원몽린과 숙경공주의 합장묘가 있어 이 일대가 오랜 세월 역사의 현장이었음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한다. 역사의 현장을 누비다 보니 어느새 허기가 몰려왔다. 가당에 들러 능이소고기무국과 제육볶음으로 든든하게 배를 채웠다. 라이딩 중 만나는 식사는 단순한 한끼가 아니다.
함께 페달을 밟은 동료들과 정겹게 이야기 나누며 잠시 쉬어가는 시간이야말로 라이딩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배를 든든히 채운 뒤 한천 둑길을 따라 여주보로 향했다. 한천 둑길은 전형적인 시골 풍경을 간직하고 있어 마치 어린 시절 고향길을 달리는 듯한 정겨움이 느껴진다. 여주보에 올라서자 시야가 탁 트인다.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떠 있고,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과 넓게 펼쳐진 들판, 산자락이 어우러져 한 폭의 풍경화를 만들어낸다. 잠시 자전거를 세우고 풍경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 달려온 길을 되돌아본다. 영릉로를 따라선왕동고개를 넘고 효종왕릉 교차로를 지나 세종대왕릉입구에 도착했다.
세종대왕릉에서 세종대왕릉역까지는 약 5,2km의 걷는 길이 조성되어 있어 아기자기한 마을길과 농로, 산길이 이어진다. 오후 3시 30분경 세종대왕릉에 도착했다. 약 40km의 라이딩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태극기를 달고 달리는 동안 광복의 의미와 나라의 소중함을 그 어느 때보다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결코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겼다. 선열들의 숭고한 뜻을 가슴에 새기며, 자유대한민국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되새긴 뜻깊은 라이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