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종의 삶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비움’(空)이다. 이세종은 예수를 믿은 후에, 자신의 이름을 이공(李公)이 아니라, 이공(李空)이라 불러주길 원했습니다.5) 즉 이세종은 예수를 믿고 이 세상에 대해서 ‘공(空)’을 쳐버렸다고 말했다.6) 이공(李空)에서 공은 ‘비움’, 즉 ‘케노시스’(κεηόσίς)이다.7) 이세종이 40여세 때에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63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까지 그의 20여년간의 신앙생활은 ‘케노시스’ 그 자체였다.
이세종이 예수를 믿고 회심한 과정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들이 있다. 엄두섭에 의하면, 이세종이 마을에서 제일 부자가 되었지만, 자식이 없자 소문난 무당을 불러다가 집에서 굿을 했다. 그래도 자식이 생기지 않자, 무당은 천태산 중턱에 산당을 지라고 했다. 당시 이세종은 무당의 말을 신처럼 믿었기에, 명당자리에 3층으로 산당을 짓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 목수가 가끔 찬송가를 부르는 소리를 곁에서 들었고, 그 목수에게서 처음으로 신약성경을 빌려서 보았다고 한다.8)
이세종이 누군가의 전도에 의해서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 아니다. 그는 어디선가 성경책을 얻어서 읽다가, 스스로 깨달음을 얻고 종교적 회심을 했다. 이세종은 성경을 통해서 그간 자신이 산당에 드리는 제사가 헛수고이며, 참 하나님이 아닌 잡신에게 드리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산당에 꾸며 놓았던 모든 것들을 불사르고 예수를 믿기로 결심한 것이다.
회심한 이세종의 삶은 비움, 곧 케노시스 그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래 케노시스 이론은 19세기 중엽 독일 신학자들에 의해서 형성되었다.9) 그 대표적인 학자가 토마시우스(G. Thomasius)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인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Christi Person und Werk)에서 케노시스 이론을 보다 체계화시켰다. 토마시우스는 그리스도의 양성론이 위격적 연합이라는 개념만 가지고는 그리스도께서 하나의 온전한 인격체로 구성되어 있음을 밝히지 못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즉 그는 그리스도가 실제의 인성을 가지고 계심을 충분히 정당화시킬 수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케노시스의 개념을 제안하였다.10)
토마시우스는 ‘케노시스’라는 개념으로 그리스도의 온전하신 사람됨과 그의 하나님 되심을 논증하였다. 그리고 당시 기독론에 대한 과학적 회의주의와 인본주의적 해석에 대응하였다. 토마시우스는 성육신의 사건을 성자가 인간의 본성을 취함과 동시에 그분의 자기 비우심의 사건으로 보았다. 성자 하나님께서 케노시스라는 행동을 통해서 육신이 되시고 완전한 인간이 되실 수 있었다.11) 즉 성자는 케노시스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갖게 되었다.
케노시스 기독론은 성자 하나님께서 자신을 비우시면서 완전한 인간이 되게 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성자의 하나님 되심이 멈추어진 것은 아니다. 성자의 신성이 손상됨이 없이 온전한 사람이 되신 것이다.12) 그래서 케노시스 기독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변호하면서 동시에 참된 인성도 확보하는 통로를 제공한 셈이다.
필자는 여기서 케노시스 기독교에 대한 학문적 논증에 깊이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다만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논증하는 케노시스에 초점을 두고, 이세종의 비움의 영성을 논하고자 한다. 그럼 구체적으로 케노시스가 언급되고 있는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9절까지의 말씀을 살펴보자.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갖길 권면했다.13) 사도 바울이 왜 성도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14)을 갖기를 권면했는가?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을 가지신 분이다. 그런 예수가 하나님과 동등 됨을 내려놓으시고 인간의 몸을 취한 것이다. 즉 신이신 그리스도가 인성을 지닌 사람이 된 것이다. 이 과정을 바울은 ‘케노시스’로 해석하고 있다.
여기서 “자기를 비워”라는 말은 ‘헤아우톤 에케노센’(ἑαυτὸν ἐκένωσεν)이다. ‘헤아우톤’은 재귀 대명사로서 ‘그 스스로’, ‘그 자신 혹은 그 자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헤아우톤은 그리스도가 갖는 영광, 혹은 그리스도의 독자적인 권위의 행사, 신성, 하나님과의 동등됨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15)
그러나 ‘자기를 비워’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지닌 신성이나 본질자체를 완전히 버렸다는 말이 아니다. 여기서 “비워”로 번역된 헬라어 ‘에케노센’의 원형 ‘케노오’(κενόω)는 ‘비우다’, ‘공허하게 만들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가 본래 지니고 있던 영광스러운 지위를 잠시 내려놓은 것을 말한다.16) 즉 신성의 본질은 동일하시지만, 주님이 자신의 존재방식을 변화시켰다.17)
7절 말씀을 문법적으로 볼 때, “자기를 비워”(헤아우톤 에케노센)가 주문장이고, “종의 형체를 가지사”와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는 보조문장(분사)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 있어서 자기 비움의 결과는 종의 형제를 가진 것으로 사람들과 같이 된 것이다. 결국 ‘케노시스’는 완전한 신성을 지닌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임하심을 뜻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케노시스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보여주신 것은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자기 비움이 완성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또 하나 우리가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이 있다. 그리스도교의 비움이 불교적 비움과 다르다는 점이다. 언어적 의미로 서로 비슷하나, 내용적 의미가 전혀 다르다. 우리의 비움은 자기부정을 통한 하나님의 영의 충만이다. 곧 완전한 비움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영이 내 삶의 주인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가 말한 비움은 돈오(頓悟), 즉 자각이며 깨달음이다. 스스로 무함을 자각하며, 관조적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불교의 비움은 자기 초월과 해탈의 경지로 이르는 과정이며, 철저한 자기수행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비움은 자기 부정을 통해서 내 안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18)
이세종은 철저히 자기 비움의 삶을 살았다. 그의 자기 비움은 자기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즉 그는 철저한 자기 비움의 정신으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그리스도 예수를 닮아가는 삶을 살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