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동서문학》2019년 가을호(31호) 시조 계간평
시조에서의 객관적 상관물과 감정이입
권 혁 모
“펄펄 나는 저 꾀꼬리 암수 서로 노니는데 / 외로운 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까 (扁扁黃鳥 雌雄相依 念我之獨 誰其與歸)” 우리나라 최초의 서정시로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에 실려 있는 「황조가黃鳥歌」이다. BC 17년에 유리왕은 왕비인 송 씨가 죽자 후실로 맞은 두 왕비 치희와 화희의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둘은 왕을 사이에 두고 애정 다툼이었다. 그 싸움이 날로 심해지는 어느 날 유리왕이 잠시 궁궐을 비우자, 화희의 질투에 못 견딘 치희는 짐을 싸서 돌아갔다. 사냥터에서 돌아온 유리왕은 그 자초지종을 듣고 곧장 치희를 쫓아가 다시 돌아갈 것을 설득했지만 허사였다. 뿌리치며 돌아서는 치희의 뒷모습이 너무 아름답고 슬퍼 하늘을 쳐다보았다. 바로 그때 한 쌍의 꾀꼬리가 날아오르며 부리를 맞대었다. 이때 다정한 꾀꼬리를 본 유리왕의 처량한 시이다. 꾀꼬리는 유리왕 자신이었으며, 암수가 입을 맞추며 노는 모습은 그의 달콤한 꿈이었던 것. 그런 사랑을 앞에 두고 슬퍼하는 모습을 ‘꾀꼬리’에게 감정이입한 것이다, “바람 빠르고 하늘은 높은데 원숭이 휘파람 슬프고 / 물가 맑고 모래 흰데 새는 날아 돌아오는구나 ~ (風急天高猿嘯哀 渚淸沙白鳥飛廻)” 시성詩聖 두보의 「고등登高」이라는 시이다. 그는 만년에 장강을 떠돌며 살게 되지만, 늘 가족을 그리며 도도히 흘러가는 장강 앞에서 자연의 무상함을 시로 달래고 있었다. 인용은 기起로 풍경을 묘사하는 부분이지만, 작가의 감정이 들어가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일반적인 풍경임에도 압축된 심상을 감지할 수 있다. 한시에서 바라본 객관적 상관물과 감정이입은 시를 더욱 탄탄한 서정의 경지에 올려두게 한다. 이 시의 압권은 이어지는 승承 부분이다. “끝도 없이 나뭇잎은 쓸쓸히 떨어지고, 다함없는 장강은 도도히 흘러라(無邊落木蕭蕭下 不盡長江滾滾來)” 운문(verse)과 산문(prose)이 다름은, 운문에 내포된 객관적 상관물客觀的相關物과 감정이입感情移入에 있다. 산문은 말하듯 자연스럽게 쓰인 줄글이며, 운문은 일정한 리듬에 의한 말하듯 노래하듯 쓰인 짧은 글이다. 운문의 갈래는 시대를 배경으로 나라마다 다르지만, 그 본래의 기능은 변함이 없다. 특히 엘리엇(Eliot, T. S.)이 처음 사용한 객관적 상관물은, 화자의 주관적인 정서를 자연물이나 사물 등 객관적인 객체를 통하여 독자가 그 정서를 느끼게 하는 다양한 소재를 말한다. 이것이 시상을 일으키기 위한 첫 번째의 요인으로, 어떤 특별한 정서를 위한 방증을 구조적으로 엮어내는 작업이다. 이러한 정황이나 사건이 일어난 서정 세계를 상징적으로 묶어내려는 기법이 운문이라는 시이다. 이 가운데 특히 시조는 압축된 언어의 마법이자 연금술과 같은, 우리나라 최고의 미학을 지닌 결정체이다. 짧은 글 속에서 확산되는 심상의 강렬한 이미지가 고스란히 한눈에 펼쳐 보이는 것이다. 현대시조가 추구하는 기법 또한 객관적 상관물의 유기적인 구성이며, 더욱 이것은 이미 관념화된 가치 체계를 벗어난 새로운 창작 유형에 가까울 때, 독자는 더욱 정서적 긴장(tension)을 느낄 수 있게 된다. 《한국동서문학》 여름호(Vol 30)에서 본 객관적 상관물과 감정이입은 화려했다. 화려하다는 말은 밝고 다채로워서 현란하다는 말보다는, 작품에서 한결 여유가 느껴지게 되어 아름답다는 편일 것이다.
감자꽃 필 무렵에 돌아가신 우리 엄마 마흔두 살 그 나이가 꽃 같은 나이인 것을 반 백 년 흐른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됐다
엄마 생각하며 감자를 심기로 했다 엄마의 가슴처럼 봉긋한 둑을 만들어 생살을 쪼갠 씨감자를 깊숙이 파묻었다
올 여름 피게 되는 감자꽃을 보게 되면 엄마의 얼굴 보듯이 찬찬히 살피면서 못 다 쓴 슬픈 사모곡 다시 한 번 써보리라 - 지성찬 「감자꽃 필 무렵」 전문
지성찬의 「감자꽃 필 무렵」은 애틋한 사모곡이다. 세월도 흐를 만큼 흘러 잊을 때도 되었건만, 삶의 끝자락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수구지심首丘之心이며 엄마를 향한 그리움인가? 감자는 가지과의 식물로 남아메리카가 원산이며, 6월에 보라색이나 흰색의 꽃을 피운다. 흰빛의 순결이거나 보랏빛 순정의 이미지를 지닌 감자꽃을 객관적 상관물로 제시하여 눈길을 끈다. ‘감자꽃=엄마’ 라는 등식을 통하여 엄마의 그리움을 두 가지 꽃 빛이 지닌 복선의 이미지로 환치시키고 있다. 첫수 초장은, 엄마가 돌아가신 바로 그때 피는 감자꽃에서 화자는 큰 위안을 받고 살아온 것을 직감할 수 있다. 마흔두 살의 꽃이 치환된(epiphor) 감자꽃이라는 객관적 상관물에서, 한 삶이 지나간 인고의 흔적을 바라보게 한다. 둘째 수는 씨감자를 묻는 과정으로 엄마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엄마 생각이 나 감자를 심으려 엄마 가슴인 양 봉긋한 둑을 만들었다. 거기에 생살을 쪼갠 씨감자를 넣는다니, 감자의 아픔을 화자 쪽으로 슬쩍 치환한다. 자신은 당시의 엄마보다 두 배나 더 살았을 백발에도 가슴속에는 오직 엄마뿐이던가. 그 젖가슴에서 생명의 새싹이 돋아나 다시 엄마가 피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핀 감자꽃처럼 파랗고 하얀 그리움을 만나려 한다. 비단 불가의 연기설緣起說이 아니라도, 시인이 제시하는 윤회의 한순간이 반전되어 되살아나게 하고 있다. 셋째 수는 극진한 기도이다. 밭에 씨감자를 넣어 꽃이 필 때까지 얼마나 큰 기다림이었을까? 그래서 만나게 되는 엄마라는 감자꽃을 이리저리 살피겠다는, 못다 쓴 사모곡은 어떤 무늬일까? 신은 이런 역설을 위해 생과 사를 갈라놓았는지 모른다. 초여름의 감자꽃은 아련한 그리움이자, 생감자의 아린 맛처럼 아픈 사연을 담아내기에 좋은 제재이다. 일제강점기에 창씨개명을 항의하는 뜻으로 지은 권태응 선생의 「감자꽃」이 보인다. “자주꽃 핀 건 / 자주 감자 / 파 보나 마나 / 자주 감자 // 하얀 꽃 핀 건 / 하얀 감자 / 파 보나 마나 / 하얀 감자”
그대 위한 가슴 한쪽 늘 비워 두었습니다 햇살 아래 설레다가 칼바람에 깎인대도 오늘도 뜨거운 심장, 그대를 품습니다
그리움의 몸집은 자꾸만 더 커져가서 기울어진 어깻죽지 이끼마저 무겁지만 이 삶은 그대를 향해 중심 잡고 섰습니다
마음은 발도 없이 당신께 달려갑니다 그 누구도 막지 못할 지도 밖의 길을 달려 그대 뜰 매화 빈 가지, 시詩꽃으로 핍니다 - 성국희 「토루소」 전문
토르소(torso)는 이탈리아어로 몸통에서 유래되었으며, 인체의 아름다움을 위해 머리와 팔, 다리 등을 없앤 조각품을 이르는 미술 용어이다. 이는 미美를 위하여 디테일보다는 생략을 추구하는 기법이다. 성국희의 「토르소」는 가슴 한쪽을 비워두는 것으로 시작한다. 인체의 소중한 부분인 가슴을 비워 두는 것은, 무엇을 채우고자 하는 의도임을 감지할 수 있다. 사진 작품에서도 그렇다. 그 사진이 폰카메라가 찍어주는 고정된 색상이 아니라, 유채색을 다 지운 흑백사진에서 떠올린다면, 어쩌면 먼셀 색상환 밖의 추억이라는 색깔들이 입혀질 수 있은 것과 같다. 즉, 유채색을 지운 자리에 추억 속의 정감이 스며있듯, 토르소는 이렇듯 비워서 채우고자 하는 역설의 대상물이다. 성국희의 작품에 ‘가슴’의 내포(intension)는 단순하지 않다. 가슴은 생명의 상징이자 사랑의 요람이다. 삶의 강렬한 욕구는 물론 인간이 누리는 이성과 감성의 원천이기도 하다. 그런 정감情感적인 객관적 상관물을 감각적 이미지로 떠올려 놓았다. 「토르소」 첫수는 단순한 비움이 아니다. “가슴 한쪽”은 ① 두 가슴 중 한쪽의 가슴 이거나, ② 두 가슴 가운데의 어디쯤 등 다의적인 해석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서정성의 공간을 확보하였다. 어떤 의미에서든 화자의 가슴 한쪽은 그리운 이가 존재하는 소중한 자리로 비워 둔 것이다. 둘째 수는 남은 한쪽 가슴이 감당해야 하는 그리움이다. 그리움이 얼마나 크면 기울어진 어깻죽지로 살아야만 하는지, 온통 ‘그대’라고 하는 간절한 삶이 존재의 이유를 되묻게 하고 있다. 셋째 수는 간절한 소망이다. 발이 없어도, 지도 밖이라는 또 다른 세상에서도 달려가, 사랑하는 이의 뜰 매화 빈 가지에 시 꽃으로 피겠다는 순애보가 마음을 적시게 한다. 「토르소」는 참 구조적이다. ‘비워둔 가슴에 사랑하는 이가 들어와 있고 → 감당할 수 없는 그리움의 삶은 → 사랑하는 이에게 달려가 시 꽃이 된다’는 의미망은, ‘토르소’라고 하는 미완성 혹은 상실된 형상과 이미지 간섭을 이루어 시조의 공간을 확보하였다. 우리는 자신을 가장 완전하다고 생각하지만, 완전에 다가갈 뿐이다. 토르소가 생략이라는 기법을 통한 미美의 추구하듯, 사람 또한 빈 곳이 너무 많아서 아름다운 삶의 무늬가 채워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눈앞에 길 있으매 걷지 않을 수 없고
그대 알아버린 맘 거두어들일 수 없어
두 발이 부르트도록 구름 영봉을 넘네 - 김일연 「차마고도」 전문
차마고도는 중국의 차와 티베트의 말을 교환하기 위한 중국과 티베트, 네팔, 인도 등지를 잇는 험준한 산길이다. 설산을 따라가는 좁은 길을 통해 차와 말 외에도 생활필수품의 교역을 위한 애환이 깔려 있다. 우리가 동경하는 차마고도에서 시인이 그 길을 걸으며 생각해 낸 것은 무엇일까? 김일연의 「차마고도」는 마치 책을 열 듯, 이쪽과 저쪽이라는 두 장의 그리움을 양쪽에 펼쳐 두며 심상의 전환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앞에 펼쳐진 길은 깎아지른 절벽에 금방 돌무더기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길이며, 시선을 돌리면 아득한 높이에서 만년설을 얹은 고봉들, 절벽 아래로는 도저히 내려다볼 수 없는 곳에 굽이쳐 흐르는 계곡물, 짐을 가득 실은 말과 사람이 겨우 다니는 그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티베트 사람에게는 숙명적인 생업의 길이지만, 시인에게는 ‘그대’라는 중의衆意의 대상을 어깨에 메고 넘는 길이다. 결국 눈앞에 펼쳐진 길은 받아들여만 하는 운명이었고, 걷지 않을 수 없음은 필연이었다. 이미 그대를 알아버린 마음이 운명이라면 거두어들일 수 없음도 필연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하여 “두 발이 부르트도록 구름 영봉을 넘네”라는 종장은 화자의 모습이되, 안개꽃처럼 피어나는 구름 영봉이 화자의 이상향으로 다가오게 하였는지 모른다. 두 발은 육신을 견인하고, 마음 세계는 구름 영봉이 이끌게 하나 보다. 구름인 듯 만년설인 듯 얹은 고산준령 앞에선 한 사람의 모습, 김일연에게 구름 영봉을 넘는 것은 한 인간의 나약한 발품이 아니라, 마음속 깊이 간직된 ‘사랑’과 ‘그리움’이었으며, 애틋한 ‘삶’이었을 것이다. 지난날의 여행길, 동티베트 ‘차마고도’를 끼고 온종일 달렸던 차창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였던 이유도 겹쳐진다.
애써 맘을 안 닦아도 저절로 비더라네
내 죽으면 따르리란 그 여자가 먼저 뜨고
벗들도 가을 잎처럼 제 곁을 다 떠난지라
마침내 나목으로 빈들에 선 고요한 날
깃털처럼 가벼운 시간들이 흘러가고
기쁨도 슬픔도 가신 하늘 한 장 피더라네 - 정해송 「백수白手의 계절」 전문
정해송의 「백수白手의 계절」을 읽으며 잔잔한 응원을 보낸다. 세월이 가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 가고 있는 것 아닌가? 젊은 날은 온갖 욕심에서 비롯된 애증의 관계망 속에서 자신을 잊고 살아왔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세월과 함께 저절로 비우게 되는 그 숙명 앞에서, 우리는 그것을 허무라고 하였던가? 허무라고 하기엔 인생의 가치가 너무도 소중한 것이기에, 정해송은 이런저런 삶의 아픔을 관조하고 있다. 첫째 수는 차라리 나만 남은 외로움이 아니라, 남은 삶을 위한 시련이다. 남은 자의 두려움과 걱정이 숨어있다. “내 죽으면 따르리라”는 순리에 상반된 모순(?)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종장은 ‘가을 잎’으로 대치된 객관적 상관물을 통하여 쓸쓸함을 달래고 있다. 둘째 수는 ‘비움’에 대한 무상無想이다. 잎과 꽃이 피어서 천하를 물들이다가 드디어 나목으로 우뚝 선 빈들은 얼마나 깊은 정적일까. 그러한 깃털 같은 인고의 시간들이 얼마나 부질없었을까? 그래서 산다는 건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하였던가? 한때 기쁨과 슬픔으로 가득 찼던 하늘, 그런 것 모두 다 떠나보내고 드디어 꽃으로 피어나는 한 송이를 하늘을 선물 받았다. 육신은 가을을 건어 겨울로 가는데, 시인의 마음은 언제나 봄 하늘 앞에 서 있는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백수의 계절’ 앞에서 잠시 우리는 또 무엇을 꽃피우며 살다 가야 하는가? 인간 존재의 이유를 생각나게 하고 있다.
숲속길 쉼터 지나 담 낮은 마당집엔 A 백목련 두 그루와 노부부가 사는데요 A 간간이 밭은기침 소리 시큰하게 핍니다 B
가쁜 맘 다독이는덴 목련 차가 좋다지요 A 꽃잎이 잠을 깨고 날숨을 쉬기 전에 A 할머닌 제를 올리듯 꽃자리 거두십니다 A
웬일인지 오늘은 마당이 소란하고요 B 천진한 송이송이 휘파람 만발하더니 B 봄 건너 환한 조등이 A 붉게 피는중입니다 A - 서성자 「휘파람 만발하더니」 전문
서성자의 「휘파람 만발하더니」는 와트만지에 그려진 한 폭의 수채화이다. 객관적 상관물로 설정된 ‘숲속 길’, ‘마당집’, ‘백목련’, ‘목련 차’, ‘환한 조등’ 등 일련의 시어가 화자가 의도하는 풍경화 같은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백목련 두 그루와 노부부를 대비, 그리고 죽음 알리는 ‘환한 조등’과 생명의 상징인 ‘붉게 피는’의 이미지 충돌이 극적인 상황으로 대치되어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그리고 각 장 A의 시각적 이미지와 B의 청각적 이미지가 고리로 연결되어 시상을 일으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휘파람 만발하더니」는 무결점이다. 3수 1편 어느 부분을 살펴 고치려 해도 더할 곳, 뺄 곳이 없는 완성이다. 그리고 총 9장에서의 전구와 후구는 인과관계에 의한 화답이었으며, 감각적 이미지 연상 기능을 최대한 살려 관념을 구체화하고 있다.
첫 차 타고 어머니는 터미널에 내리시고 북받친 잦은 기침에 아랫도리 흥건하다
한의원 대기실에 할머니 서넛 마주앉아 눈가에 글썽이는 저승꽃을 바라볼 때 그것은 어떤 말보다 차라리 기도 같다
번호표 꼭 쥔 손이 바지춤을 올린다 정강이 흰 뼈와 푸르른 날의 골다공증 눈칫밥 쪽잠의 생이 주춤주춤 저문다 - 강은미 「팔순의 대파」 전문
강은미의 「팔순의 대파」는 한 폭의 한국화이거나 빛바랜 흑백 사진이다. 젊은이가 모여야 할 시골이지만 이젠 노부부들만 살고 있다. 자식들 다 떠나보내고 새 둥지처럼 남은 이들마저 떠날 날 눈앞에 와 있다. 아침부터 가르랑대는 구식 전화기는 부모님의 안부를 묻는 전화 발신음이었나 보다. 첫차에서 막 내리시는 어머니의 시각적 이미지에 겹친 기침 소리라는 청각적 이미지가 전환 관계로 이어져 시상詩想의 공간을 확대하고 있다. 한의원 대기실에 마주 앉은 할머니들, 죽음이라는 문턱이 눈앞에 와 있는 애처로운 모습이 차라리 기도라면 그 무늬는 어떤 것일까? 누구나 가고 싶지 않은, 그러나 꼭 가야만 하는 곳이 저승 아닌가? 그런 저승에 가까운 반점을 굳이 ‘저승꽃’이라며 위무慰撫하고 있다. 그리고 ‘번호표’는 결코 잃어서는 아니 될, 자신을 확인하는 절대의 표였나 보다. 그 손으로 바지춤을 올리면 이제는 골다공증이 된 하얀 뼈가 보인다. 이것이 ‘팔순’이라는 ‘대파’인가? 살아 있음에도 살아있지 않는 죄스러움(?) 앞으로 ‘눈칫밥’과 ‘쪽잠’을 긍정해야 하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강은미의 「팔순의 대파」는 우리들대책 없는 존재의 이유에 대한 아픈 질문인가 보다.
새봄은 다시 왔어도 내 살갗엔 닿지 않았다
쉬쉬 얼음새꽃 잔설도 어색하게 바람이 누설까지도 모른척해야 했다
밟히는 건 눈 속의 꽃들만이 아니다
무심코 내뱉은 말 무심하지 못했다 바람의 말 한마디도 비밀에 부쳤다 - 장영춘 「비밀의 화원」 전문
장영춘의 「비밀의 화원」에서 화자의 단정한 삶이 보인다. 이른 봄 눈 속에서 피어난 어름새꽃을 활유화 한 첫째 수에서, 눈 속에 성역을 만들어 고결한 모습으로 피어난 꽃이 있다면, 둘째 수에서는 화자의 수행이 보인다. 눈 속의 작은 꽃이 누구의 신발에 밟히듯, 우리가 무심코 내뱉은 말 또한 다른 이의 가슴을 무참히 짓밟게 된다는 메시지를 암시적으로 던진다. 이른 봄 산과 들의 눈 속에 핀 어름새꽃이 비밀의 화원을 만들어 고고하게 살아간다면, 화자 역시 비밀의 화원에서 곱게 살아가고자 하는 성결聖潔한 마음가짐이 감동으로 다가온다. 시, 특히 현대시조는 강렬한 교시적 메시지가 아니라, 풀꽃과 같은 은유의 이미지를 담아내는 몸부림이라고 한다면 장영춘의 「비밀의 화원」을 두고 말함일 것이다.
《한국동서문학》 지난 여름호는 풍성했다. 객관적 상관물과 감정이입을 통하여 이미지를 펼치고 엮는 가운데 서정성을 확보한 작품군이 보인다. 현대시조는 부질없는 영탄으로 흐느적거리는 배설이 아니며, 알 수 없는 부호의 비문非文이 아니라, 시조라는 운문 영역의 온전한 정체성을 확인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