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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428
6월16일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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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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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O4JWRUiMV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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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죽는 것이 곧 사는 길입니다. 지는 것이 곧 이기는 길입니다!>
사악함과 교활함에 있어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왕비가 있었으니 사마리아 임금 아합의 아내 이제벨이었습니다. 부창부수(夫唱婦隨)라고 둘은 합세해서 힘없는 백성들을 괴롭혔습니다.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은 나봇이었습니다. 하필 나봇은 아합 임금 궁 바로 옆에 좋은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나봇이 싫다는데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아합은 나봇 소유의 포도밭을 팔라고 압력을 넣었습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소중한 유산이기에 이를 거부하자, 부부는 의기투합해서 간계를 꾸밉니다.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위해 요즘으로 치면 뒷골목 조폭들까지 동원하고,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을 만드는 참으로 악랄한 부부입니다. 마침내 그리도 원하던 포도밭을 손에 넣은 아합 임금은 회심의 미소를 짓지만, 그 기쁨은 잠시뿐입니다.
부부가 합심해서 저지른 악행은 수천년이 흘러도 계속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사악함과 권모술수가 철철 넘쳐흐르는 아합 임금과 이제벨 왕비 부부를 보니 한 비슷한 부부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군인으로서 충실해야 할 국방의 의무는 뒷전이고, 어수선한 정국을 틈타 탱크를 앞세워 정권을 잡으신 분, 만만한 재벌들 등쳐서 천문학적 재산을 축척한 분, 부정축재한 돈 회수하려니 29만원 밖에 없다는 분, 그분이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보다 훨씬 멋질뿐 더러, 대한민국 민주화의 아버지라고 칭찬하는 그 부인!
지금이라도 진정으로 참회하고 반성하면 참 좋을텐데, 그럴 기색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아합 임금과 이세벨 못지 않은 비참하고 가련한 독재자와 부인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텐데, 그들 후손들은 참으로 불쌍합니다.
세월이 흘렀지만 아합 왕과 이제벨 왕비가 풍기던 악취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눈에 즉시 포착된 것이 백성들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을뿐 악행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사악한 왕과 왕비요 끄나풀들이었습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습니다. 윗물이 탁하면 아랫물도 탁하기 마련입니다. 백성들의 지도자들이 악행과 타락의 전문가들이며 권모술수와 착취의 달인이다보니, 그런 분위기는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퍼져나갔습니다.
최상위층에서 강탈해가니, 피해를 본 그 다음 층에서는 아랫 층에 화풀이라도 하듯이 강탈해가고, 강탈당한 사람들은 울분은 못참고 폭력으로 대응을 하고...이런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를 눈여겨보신 예수님이셨기에 정반대의 가르침을 백성들에게 건네신 것입니다.
“악인들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오 복음 5장 39~42절)
예수님 말씀 언뜻 들으니 참으로 거부감이 느껴집니다. 뜨거운 피가 흐르는 인간으로서 그게 가능한 일일까? 하는 의구심도 듭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니 참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이며, 위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진리의 핵심은 언제나 수용하기가 참으로 힘듭니다. 그러나 기꺼이 수용하고 받아들일때, 그 순간부터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누릴 수 없는 대자유가 선물로 주어집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의 핵심 진리는 언제나 역설적입니다. 죽는 것이 곧 사는 길입니다. 지는 것이 곧 이기는 길입니다. 내려서는 것이 곧 올라가는 길입니다. 작아지는 것이 곧 커지는 길입니다.
오른뺨을 제대로 한대 맞고 나서 강펀치로 대응하지 않고 왼뺨을 내미는 일,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주는 일, 천 걸음을 가자는 사람에게 이천 걸음을 가주는 일,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함께 하신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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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할 수 있었는데 할 수 없었다고 믿었다면>
(유튜브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KGamowYXN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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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회사의 입사 시험문제에 다음과 같은 문제가 출제되었습니다.
당신은 폭우가 거세게 몰아치는 밤에 운전하고 있습니다. 마침 버스정류장을 지나는데 그곳에는 세 사람이 있습니다.
1. 죽어가고 있는 듯한 할머니
2. 당신의 생명을 구해준 의사
3. 당신이 꿈에 그리던 이상형
당신의 스포츠카에는 단 한 명만을 태울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태우겠습니까? 선택 후 설명하세요.
당신은 위독한 할머니를 태워 그의 목숨을 우선 구할 수도 있을 것이고, 의사를 태워 은혜를 갚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회가 지나고 나면 정말로 꿈에 그리던 이상형을 다시는 만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200명의 경쟁을 제치고 1등으로 채용된 사람이 써낸 답은 이렇습니다.
“할머니를 병원에 모셔 가도록 의사 선생님께 차 키를 드리죠. 그리고 난 내 이상형과 함께 버스를 기다릴 겁니다.”
할 수 있다고 믿으면 답이 보이고 할 수 없다고 믿으면 답이 보이지 않습니다. 위와 같은 문제를 맞힐 수 있는 사람은 분명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일 것입니다.
거짓말을 한 번도 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음란한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화를 절대 내지 않을 수 있을까요?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그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을까요? 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없다면 하라고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10살을 갓 넘은 마리아 고레티 성녀도 자신을 죽어가면서 자신을 수십 차례 찌른 청년을 용서하고 같이 천국에서 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할 수 있다고 믿으면 할 수 있고, 할 수 없다고 믿으면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셨기에 우리는 그런 마음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시카고에 사는 한 부자가 소아마비를 앓고 있는 아들을 고치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전문의인 로렌스 박사를 초빙했습니다. 로렌스 박사가 정성스레 이 아들을 치료하여 건강이 회복되었다는 소식이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습니다.
같은 마을에 사는 한 소년도 부잣집 아들과 같은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신문을 보고 로렌스 박사가 시카고에 머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년의 어머니는 돈이 많지 않았기에 자신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그 저명한 의사를 초대한다는 것은 꿈을 꿀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로렌스 박사는 산책하다가 갑자기 비를 만나 그 소년의 집에 잠시 들러 쉬기를 청했습니다. 로렌스 박사인 줄 몰랐던 소년의 어머니가 냉대하며 거절하여 병을 고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이 어머니는 자신이 쫓아 보낸 사람이 로렌스 박사였음을 알고 후회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사제로 불러주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거부하려 했던 가장 큰 이유는 혼자 살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할 수 없었다고 믿었다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사제가 되어보니 혼자 사는 것이 더 편한 것 같고 오히려 결혼해서 사는 것이 더 힘들어 보입니다.
주님께서 불러주시는 길에 반드시 할 수 있다는 믿음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할 수 없다고 믿었던 것들은 영원한 후회를 남깁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으면 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이 보이지만, 할 수 없다고 믿으면 주님께서 도와주시려 해도 알아보지 못하고 흘려보내고 맙니다.
사막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돌멩이를 주워 주머니에 넣는다면, 당신은 내일 기쁘면서 또 후회스러울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그 사람은 길에 떨어진 돌멩이 몇 개를 주워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다음날 주머니에 넣어 보니 그 돌멩이들이 다이아몬드, 루비, 사파이어 같은 보석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는 정말 어제의 그 목소리처럼 기쁘면서 후회스러웠습니다. 기쁜 것은 그 돌멩이들을 가져온 것이고, 후회스러운 것은 좀 더 많이 가져오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도 똑같을 것입니다.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만큼 기쁠 것이고, 할 수 없다고 믿었던 것들은 영원한 후회 거리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처럼 완전해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분 앞에서 어떠한 것들은 불가능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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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43-48 : 원수를 사랑하여라.
“원수를 사랑하여라.”(44절)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명령하신 것은 원수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이다. 원수가 남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자신에게서 나쁜 것을 없애 버리기 위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다. 미워한다는 것은 당사자는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을 수 있지만, 미워하는 사람은 영에 큰 해를 입는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한다. 스테파노가 순교할 때,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이를 보여 주었다(사도 7,60 참조)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불가능한 것을 법으로 제정하지 않으신다. 유대인들에게 많은 고난을 당했던 바오로도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1코린 4,12 참조).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라고만 하시지 않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45절) 이렇게 원수를 사랑할 때, 그분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받은 우리는 아드님이 주신 계명을 실천할 때 그분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 안에 새로이 태어남으로써 자녀들이 되며, 그분의 새로운 창조물이요 자녀로서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자녀로서의 권한을 받는다. 우리는 아드님과 같은 참 자녀들이 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를 자녀가 되는 권한으로 부르시는 것은 우리가 당신 모습과 닮은 모습이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45절) 여기서 해는 그분의 지혜를 뜻하며, 비는 진리의 가르침이 적셔주는 것을 뜻하고 있다. 이 지혜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우리의 몫이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46-47절)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 자체가 기쁨이기 때문에 보물을 지닌 것은 아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자기가 자기 본능을 넘어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큰 보물을 지닌 것이다. 하느님의 상속자는 행실로 하느님을 닮지 않는다면 완전한 상속자가 아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48절) 오늘 복음은 “모든 것은 선으로 완전해 진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다. 믿음은 분노가 앙갚음으로 바뀌는 것을 막을 뿐 아니라, 분노를 해를 입힌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부드럽게 바꾸어 놓기도 한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의 상속자들의 삶으로 부르시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모습을 보이도록 부르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버지의 선하심을 본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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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어떤 사람이 가시가 잔뜩 나 있는 나뭇가지를 손에 꽉 쥐고 있으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 지금 손이 너무 아파.” 가시나무를 손에서 놓으면 그만일 텐데, 그 사람은 아프면 아플수록 더 힘을 주어 그 나뭇가지를 손에 꽉 쥡니다. 이 사람이 아픈 이유는 가시나무 때문일까요, 가시나무를 쥐고 있기 때문일까요?
‘네가 어떻게 나에게 그런 모진 말을 할 수 있지?’, ‘네가 내 돈을 그렇게 떼먹다니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살다 보면 이런 생각들에 사로잡혀 마음에 큰 멍이 생긴 것처럼 아픔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심지어 이런 마음의 병이 몸에도 영향을 주어 몸이 망가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상처가 되었던 그 사건은 이미 지난 일입니다. 또 우리에게 상처를 주었던 원수 같은 그 사람은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여 우리가 아픈 이유는 그 사람이나 그 사건 때문이 아니라, 그 기억을 붙잡고 있는 우리 자신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견물생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물건을 보면 그것을 가지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좀 더 폭넓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원수의 모진 말에만 시선을 두면 아픈 마음이 생기고, 원수의 단점에만 시선을 두면 증오심이 생깁니다. 또 상처가 된 사건들만 바라보면 우울한 마음이 생기는 법입니다. 반면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건네주었던 격려를 떠올리면 용기가 생기고, 미운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의 장점에 시선을 두면 존경심이 생깁니다. 또 우리 삶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바라보면 마음속에 감사함이 넘쳐흐릅니다. 요컨대 원수를 사랑하려면 나의 시선을 달리해야 합니다.
가시나무를 당장 손에서 놓는다고 아픔이 곧바로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상처를 낫게 하는 첫걸음입니다. 그 첫발을 떼고 인내하십시오. 그러다 보면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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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원수를 사랑하여라.>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3-48)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율법은 레위기 19장 18절에 있습니다. 그러나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는 율법은 구약성경에 없습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을 지적하신 말씀으로 생각됩니다.) 유대인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민족들을 ‘원수’로 생각했고, 또 구약성경의 전체 흐름이 우상 숭배를 미워하는 것이기 때문에,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유대인들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 사고방식이 구약성경의 가르침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구약성경에도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과 비슷한 율법이 있습니다. “길을 잃고 헤매는 너희 원수의 소나 나귀와 마주칠 경우, 너희는 그것을 임자에게 데려다 주어야 한다. 너희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에 눌려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을 경우, 내버려 두지 말고 그와 함께 나귀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탈출 23,4-5) 유대인들은 원수라고 해도 동족이 곤경에 처해 있는 것을 보았을 때에는 이 율법대로 실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민족 사람이 그런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을 보았을 때에는 어떻게 했을까? 아마도 율법주의자들은 외면하고 그냥 지나쳤을 것이고, 율법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1) 탈출기에서 말하는 ‘원수’는 원한 관계에 있는 개인의 사적인 원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원수’는 사적이든지 공적이든지 간에 “내가 원수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이웃이고 형제입니다. 그래서 ‘원수’는 없습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원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너희는 이웃을 사랑하여라.”입니다. (“원수 같은 사람이라도 너의 이웃이고 형제이니 그를 사랑하여라.”) 종교와 신앙이 달라도, 우리 교회를 박해해도, 적도 아니고 원수도 아닙니다. 사랑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2)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하여라.”는 “좋아하여라.”가 아니라, “하느님 뜻의 실현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을 나타냅니다. 박해자들의 회개를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도 구원받기를 기도하고, 그들도 구원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그것이 그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의 회개와 구원을 바라시기 때문이고,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회개시키기 위해서 잘해 줄 수도 있고, 꾸짖거나 타이를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원수 같은 사람에 대한 사랑은 ‘좋아하는 감정’에 속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일입니다.)
3) 우리는 흔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원수’는 악인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자신은 선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원수 같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을 선인이 악인에게 사랑을 베풀어주는 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누가 감히 하느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선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다른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악인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에서 ‘한 사람’일 뿐입니다. 원수 같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선인이 악인에게 사랑을 베풀어주는 일이 아니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누가 선인이고 누가 악인인지는 우리가 판단할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판단하실 일입니다.
4)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계명은 “편 가르기를 하지 마라.” 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참 사랑’에는 울타리도 없고, 편 가르기도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루카복음 10장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은 울타리가 없는 ‘참 사랑’을 실천한 사람으로서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원수 관계였고, 서로 접촉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착한 사마리아인’은 강도당한 사람이 어디에 속한 사람인가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만 보았고, 도와주었습니다. (이야기 속에서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전후 상황을 볼 때 강도당한 사람은 분명히 유대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 강도당한 사람을 도와준 사람을 사마리아인으로 설정하신 것도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의 갈등을 염두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같은 편’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미워하고 싫어하고, 배척하고 차별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인간 세상의 현실입니다. 요즘에 ‘인종 차별’과 ‘민족 차별’이 언론에 자주 보도되고 있는데, 그런 일은 하느님의 사랑을 거스르는 ‘큰 죄’입니다. 같은 편끼리만 사랑하는 것은 죄인들이나 하는 짓, 즉 죄를 짓는 일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5)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사랑’과 같은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과 대등한 위치에 올라서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가 되라는 뜻입니다.)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하고, 편 가르기를 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는 것이 ‘완전한 사랑’입니다. 만일에 원수 같은 사람은 사랑하지 않고, 자기편에 속한 사람만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불완전한 사랑’이고, 불완전한 사랑으로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없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신앙생활은 모두 헛일이 되어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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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결자해지(結者解之), 사필귀정(事必歸正),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류가 공동체를 이루고, 문화와 문명을 발전시키면서 지켜왔던 원칙이며, 질서입니다. 동양도, 서양도, 종교도 이런 원칙을 지켜왔습니다. 그래야만 약한 사람도 존중 받을 수 있고, 강한 사람은 겸손 할 수 있습니다. 문제를 일으켜놓고 타인에게 책임을 미루는 사람에게는 결자해지를 이야기합니다. 공상과 망상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뿌리지 않고 얻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사필귀정을 이야기합니다. 지금의 상황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불가에서는 이를 연기(緣起)라고 합니다. 세상의 모든 현상은 인연과 업보의 결과 다시 말해 인과응보라고 이야기합니다.
천주교회에는 사대교리(四大敎理)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것(天主存在),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라는 것(三位一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는 다는 것(降生救贖) 그리고 선한 이에게는 상을 주고, 악한 이에게는 벌을 준다는 것(賞善罰惡)입니다. 성서는 선을 행한 이에게,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이에게 축복을 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땅을 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자녀를 주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노아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아브라함은 늙은 나이에 아들을 얻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욥은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악을 행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던 이에게 벌을 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만했던 아담은 낙원에서 쫓겨났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던 바벨탑은 무너졌습니다.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던 아합 왕은 벌을 받았습니다. 구약의 역사는 상선벌악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자해지, 사필귀정, 인과응보’를 뛰어넘는 새로운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인류가 지켜왔던 삶의 원칙과 질서를 넘어서는 새로운 원칙과 질서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신앙이고, 이것이 우리가 따르는 새로운 질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으실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의 삶을 살라고 하셨습니다. 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라고 하셨습니다.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주라고 하셨습니다.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옳고 그름의 인연을 끊어 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때 비로소 새 하늘과 새 땅을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곳에서 하느님 나라가 시작된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마음에 담아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름답지만 우리의 것으로 만들기에는 너무 어려운 일들일까요?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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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완전한 사랑>
마태오 5,43-48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완전한 사랑>
사랑하고픈 상대를
고르지 않는 사랑
사랑하지 못할 까닭이
막을 수 없는 사랑
사랑에 대한 보답에
얽매이지 않는 사랑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방해할 수 없는 사랑
그리하여 다만 사랑
그리하여 오직 사랑
그러기에 이룰 수 없는 사랑
그렇지만 이루고픈 사랑
그럼에도 이루어야 할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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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찬미예수님
이번 주는 저에게 여느 때처럼 바쁘지만 또 한편으로는 행복한 주이기도 합니다. 다름 아닌 이번 학기 마지막 수업이 있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신종 코로나로 인한 온라인 수업에 정신없이 지내왔지만 그래도 이제 방학을 앞두고 있다는 것이 커다란 안도감을 줍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학생 때는 교수님들도 이렇게 방학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사실, 윤리라는 과목은 가르치기 쉽지 않은 과목입니다. 다른 과목들처럼 개념들만 딱딱 골라내 설명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게 가르치다보면 우리가 실생활에서 마주치는 실천적인 부분들과 다소 간극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윤리적 규범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다보면 평범한 상황에선 유효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모호한 경우가 생깁니다.
예를 들면 오늘의 복음 즉, 원수 사랑에 대한 계명이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오늘 강론 안에서 학기 중에 받았던 한 학생의 질문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교수님. 이웃 사랑에 관한 강의를 들으면서 흉악범에 대한 용서에 관한 질문이 생겼습니다. 흉악범들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오히려 피해자를 조롱하는 일들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있기에 계속되는 ‘사형제 논란’이 야기된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래도 하느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용서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어떻게 설명해 주는 것이 좋을까요?”
이러한 질문은 누구나 한 번쯤 가져보았을 법한 질문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라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은 지나치게 가혹하고 지키기 어려운 계명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짐은, 내가 받은 피해에 대한 배상을 포기하고 상대방의 잘못을 잊어버려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생겨납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예수님은, 그리고 교회는 그렇게 잔인하고 무책임하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이 원수 사랑의 가르침에는 반전이 있는 셈입니다.
윤리 신학자인 베르나르드 헤링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원수들의 회개에 필요하거나 적어도 유용할 경우 사랑이라는 높은 이상을 글자 그대로 실천하려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그러나’ 참는 것이 오히려 오만과 비타협을 굳혀줄 뿐이라면 참을 필요가 없으며 또 참아주어서도 안 된다.”
이러한 가르침도 있습니다. “가해자가 진심으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배상하려고 한다면 적극적으로 그와 화해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가해자가 자기의 행동이 잘못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한 용서는 불가능하다. 가해자가 자기의 잘못을 진심으로 인정하지 않는 한 어떠한 용서의 방법도 없다.”
실제로 역사 안에서 악행을 저지른 히틀러와 같은 사람을 보십시오. 그러한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며 정의롭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실제 예수님의 행적에서도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오 5장 39절에서,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원수 사랑을 강조하십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18장 23절에서는 당신의 뺨을 치는 성전 경비병에게 다른 모습을 보이십니다. “내가 잘못 이야기 하였다면 그 잘못의 증거를 대 보아라. 그러나 내가 옳게 이야기하였다면 왜 나를 치느냐?”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며 아마도 신자분들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당연히 다음과 같은 질문도 떠오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오늘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용서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용서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아페시스(aphesis)는 “떠나가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용서라는 말은 상대의 오류 혹은 잘못이 “떠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상대에게 잘못이 있다면 피해자는 법을 발동해서라도 원수의 죄가 떠나가도록 법적인 제재를 가해야 합니다. 또한 피해를 입었을 때 손해에 대한 배상을 요구함으로써 그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그의 죄가 떠나가게 하도록, 나아가 같은 피해자가 생겨나지 않도록, 그리고 올바른 정의가 구현되게 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입니다.
아마도 마음이 더욱 편해지셨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사실,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병주고 약주고인 것 같지만 일종의 조건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첫째, 가해자의 죄가 떠나가도록 하기 위한 애정으로 법적인 행위를 취해야지 그것이 증오심이나 복수심 때문이어서는 안됩니다. 복수심이 정의에 대한 사랑을 가장할 수 있으므로 항상 유의해야 합니다. 둘째, 피해자는 상대가 진정한 화해를 요청한다면 반드시 호의적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셋째, 가해자가 무지에서 그런 행동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이것은 상대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해력과 인내심을 가지고 고려해야 할 일입니다. 넷째, 어떠한 경우에라도 인간은 스스로에게 타인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랑의 은혜가 주어지길, 그리고 그 원수가 회개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을 염두에 두면 예수님의 행적이 새롭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와 같이 인간을 벌하시는 하느님의 모습도 이해가 됩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미워하지 인간을 미워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죄를 저지른 인간에게 벌이 주어지는 이유는 그의 죄가 한시라도 빨리 “떠나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가르침에 이어,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용서는 단순하게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닌,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것을 통해서도 가능합니다. 다만 여기에는 나 역시 그와 같은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겸손함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어느 정도 원수 사랑에 관한 오해가 풀렸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것은 여전히 정말 쉽지 않은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용서를 위한 한 가지 힌트를 오늘의 복음 환호송에서 들려주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만약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다면 용서를 행해야 한다는 의무감보다 스스로가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을 상기하십시오. 그리고 그 사랑에 마땅히 보답해야 한다고 결심하시면 조금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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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하느님의 정의는 무섭습니다. 나봇의 피를 흘리면서 포도밭을 차지한 아합 임금과 이제벨 왕비에게 내린 하느님의 처벌은 ‘동태 복수법’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엘리야를 통해 아합 임금에게 말씀하십니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던 바로 그 자리에서 개들이 네 피도 핥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제벨에게 말씀하십니다. “개들이 이즈르엘 들판에서 이제벨을 뜯어 먹을 것이다.”
그러나 회개하여 단식하는 아합 임금에게 하느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십니다. 그에게 내리려던 재앙을 거두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완전하신 하느님을 섬기는 자녀들이 다다라야 할 사랑의 기준을 제시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악인과 선인을 구별하지 않으시고 은총의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을 본받아 용서하는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인간은 불완전합니다.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미운 사람을 만날 때, 우리는 외면하고 피하고 싶습니다. 인간의 감정은 사랑할 대상에게 한계와 조건을 설정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묻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느님처럼 절대적인 사랑을 이웃에게 베풀 수 있습니까?
자신의 약점과 죄악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 인간의 증오를 넘어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한 사람은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매달려 계시면서 원수를 사랑하시는 표양을 보여 주십니다. 제자인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몸소 보여 주시니 우리가 다른 길을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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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이상화 사도요한 신부님]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전에 신학생 때 공부를 하는데 이런 의문이 든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정말 공부를 잘하고, 완전히 이해한 사람일까’ 그래서 제가 존경하는 분께 물어봤지요. ‘어떤 사람이 그런 사람이죠?’
전 그 물음을 던지면서 속으로 생각해 봤습니다. ‘아마 다방면으로 책을 읽고 이해한 사람일 거야’ 뭐 이런 생각을 했는데 그분이 그러더군요.
‘진짜 공부를 잘하고 진짜 자신이 공부한 것에 대해서 완전히 이해한 사람은 자신이 지금 무엇은 알고 있고, 무엇은 확실히 모르고 있는지 아는 사람이야’
처음에 그 대답을 듣고 좀 어리둥절했습니다. 그렇지만 조금 생각해 보니 그 답이 정답이었습니다. 정말 완전히 이해한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알고 또 무엇은 확실히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뭘 모르는 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질문을 하고 배우겠습니까?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면 막연하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 완전한 사람이 돼야지, 원수도 사랑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지. 그렇지만 그건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 생각은 한때고 시간이 지나면 난 또 그 원수를 미워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건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 입니다. 상처받은 나만 생각하고 ‘사랑해야지, 사랑해야지’ 그런다고 사랑할 수 있는게 아닙니다.
정말 알아야 하는 것은 사랑해야 할 그 원수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상황에서 나를 미워하는지, 그 사람은 왜 그렇게 나를 괴롭히는지 그걸 알아야 합니다. 그걸 전혀 모르고 있다면 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완전한 사람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 완전히 원수에 대해서 알아보고 내가 원수에 대해서 과연 무엇은 알고 무엇은 모르고 있는지 관심을 가지는 것이 완전한 사람이 되는 방법입니다. 주님 뜻대로 완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다시 한번 노력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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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지영 사무엘 신부님]
<원수까지도 받아들이는 사랑>
프랑스 시인 알프레드 뮈세는 ‘5월의 밤’이라는 시로 유명하다. 이 아름다운 시 속에는 어미새 펠리칸이 등장한다.
어미새 펠리칸은 갓 낳은 굶주린 새끼새들을 해변에 놓아두고 먹이를 구하러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오랜 여행에도 어미새는 단 한줌의 먹이도 구하지 못하고 되돌아오고 만다.
여행에 지친 어미새 펠리칸이 저녁 안개 속에서 갈대 숲으로 돌아올 때 굶주린 새끼떼들은 어미새에게 몰려간다.
그러자 어미새는 목을 흔들면서 늘어진 날개 속으로 새끼들을 포옹한다. 다음 순간 어미새는 해변에 누운 채 자신의 심장을 새끼들의 먹이로 내놓는다. 어미새의 심장과 내장이 새끼들의 입으로 사라지기도 전에 어미새는 숨을 거두고 만다.
자신의 심장과 생명을 내주면서까지 또 하나의 생명을 살아가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바로 그러했다. 당신의 모든 것을 모든 이에게 아낌없이, 남김없이 내주신 한없는 사랑. 그래서 성 토마스는 ‘성체찬미’에서 ‘주 예수, 사랑 깊은 펠리칸이여’라고 기도했는지 모른다.
원수까지도 받아들이는 사랑,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이도 포용하는 사랑의 위대함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나에게 원수는 누구이며, 이방인은 누구인가? 사랑하기에도 부족한 나날인데 어리석게도 이웃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일에 내 힘을 전부 쏟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자.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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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0mL를 담을 수 있는 컵이 있습니다. 이 컵에 500mL의 물을 담을 수 있을까요?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가 생각한 만큼의 사랑만을 담을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의 크기가 200mL를 담을 수밖에 없는데 그 이상 되는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가 있겠습니까? 서로 사귀는 남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자는 어느 날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데이트 비용을 자기가 더 많이 내는 것 같고, 각종 기념일도 나만 기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은 여자 친구에게 충실하기 위해 다른 사람도 거의 만나지 않는데, 여자 친구는 다른 친구 만나는 것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계속 만나고는 있지만 억울하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둘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랑 크기가 작으면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부정적인 마음이 계속 일어나면서 사랑할 대상으로가 아니라, 내게 피해를 주는 대상으로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사랑을 어떻게 온전히 받아들일 수가 있을까요? 주님의 그 큰 사랑을 받아들이려면 당연히 그 사랑을 받아들일 내 마음을 키워야 합니다. 속 좁은 모습이 아니라, 넓은 마음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원수 사랑’이라는 명령을 하신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상대가 친구든 원수든, 믿는 이든 믿지 않는 이든, 어려움에 부닥친 이에게 선을 베풀라고 하십니다. 원수가 사랑을 받는 것은 자격이 있는 자라서가 아닙니다.
그보다 우리는 아무도 미워해야 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나쁜 것을 없애버리기 위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원수를 미워해도 그에게 아무런 해도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미워하게 되면 내 영혼에는 커다란 해가 가게 됩니다. 사랑의 마음이 줄어들어서 주님의 그 큰 사랑을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데만 머무르지 말고 기도까지 해야 한다는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하시지요.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 마음의 사랑 크기가 커지게 됩니다. 이렇게 사랑의 크기가 커지는 사람이 당연히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주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먼저 내 마음의 크기를 키우십시오.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큰 사랑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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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있는 삶>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 갇혀서 직접 삶과 죽음을 함께 경험한 바를 기반으로 ‘로고 테라피’라는 정신이론을 만든 빅터 프랭클 박사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세 가지 방향을 말합니다.
첫째,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통해서.
둘째,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셋째, 삶에 대한 태도를 통해서.
이 세 가지 방향을 목적으로 삼고 꾸준히 나아갈 때 삶의 의미가 생겨나고, 그 과정에서 행복, 돈, 지위, 명예와 같은 것들을 부수적으로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할 때를 보십시오.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틀어지고, 내 삶에 충실할 수 없기에 의미를 찾지 못했던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의미 없는 삶을 살고 있다면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늘 깨달음을 주십니다. 이것이 내 삶의 의미이며, 지금을 사는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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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온전한, 완전한, 원숙한 삶>
-사랑밖엔 길이 없다-
“내 영혼은 밤에도 당신을 사모하오며, 아침에도 내 마음 당신을 그리나이다.”(이사26,9)
엊저녁 서편의 저녁 노을은 참 곱고 아름다웠습니다. 세상을 위무慰撫하는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듯 곱고 아름다운 저녁 노을로 표현됨을 봅니다. 요즘 은은하고 그윽한 밤꽃 향기가 한창입니다. 흡사 존재의 향기, 사랑의 향기같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 사랑의 향기를 발하는 이들을 만나면 마음이 참 평온해 집니다.
어제는 거의 한달마다 고백성사차 오신 수녀님이 고목에 새 순이 돋은 분재를 선물했습니다. 말그대로 사랑의 선물입니다. 시를 사랑하고 쓰시는 분이라 선물도 시처럼 품격이 있습니다. 사랑은 생명입니다. 날마다 끊임없이 사랑을 숨쉬며 먹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영원히 빛나는 한마디 말은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의 정의입니다. 사람의 궁극 목표는 하느님을 닮아 성인이 되는 것이요, 답은 사랑뿐이 없습니다. 사랑하라 선물로 주어진 각자 고유의 유일회적 인생입니다. 결국 영적 성장과 성숙도 사랑의 성장과 성숙을 뜻합니다. 몸은 노쇠해가도 내적 사랑의 마음의 성장과 성숙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할 때 닮습니다. 사랑할 때 예뻐집니다. 사랑할 때 아름답습니다. 인생 虛無와 무지無知에 대한 답도 사랑뿐입니다. 사랑의 빛이 허무와 무지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텅 빈 허무를 텅 빈 충만으로 바꾸는 사랑입니다. 제 졸저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 표지 안쪽의 글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그대로 옮깁니다.
“사랑은 구체적이다.
사랑은 추상명사가 아닌 실행해야 하는 동사다.
우리 몸은 사랑하라고 있는 ‘사랑의 도구’다.
멀리 밖에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함께 있는
가족과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서로 사랑하라고 주신 선물이다.
작은 행동으로의 사랑이다.
작은 사랑의 실천이 감동을 주어
마음을 치유하고, 정화하고, 충만하게 한다.
사랑은 우리의 모든 것이다.
사랑이 있을 때 빛나는 인생이지만
사랑이 사라지면 어두운 인생이다.
사랑하며 살아갈 때 비로소 사람이다.”
지금 읽어도 구구절절 공감이 갑니다. 사랑뿐이 답이 없습니다. 사랑뿐이 길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1.성내지 마라, 2.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3.아내를 소박하지 마라, 4.맹세하지 마라, 5.보복하지 마라는 다섯가지 대당명제에 이은 마지막 6.원수를 사랑하여라’입니다. 여섯 대당명제의 최종 결론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평생과제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참으로 사랑이 익어 성숙成熟해 갈수록 둥글게 익어가는 가을 열매들처럼 원숙圓熟한 사람, 완전完全한 사람, 온전穩全한 사람이 됩니다. 과연 사랑으로 둥글게 익어가고 있는 원숙하고 아름다운 삶인지요.
사랑의 절정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요,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원수요 박해하는 자들이지 나름대로 까닭이 있을 것이며, 하느님 눈엔 사랑스런 자녀들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 무지로 인한 원수짓이요 박해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무지의 죄, 무지의 악, 무지의 병에 휘말려 사는 어리석은 눈먼 중생衆生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미워할 것은 무지無知의 죄罪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원수를 사랑할 수 뿐이 없고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할 수뿐이 없습니다. 원수를 미워하다보면 원수를 닮아 괴물이 되고 내가 먼저 파괴됩니다. 내 본연의 존엄한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도 이 길뿐이 없습니다. 참으로 무지의 악, 무지의 죄의 전형적 인간이 탐욕에 눈먼 제1독서 열왕기 상권의 아합입니다. 무죄한 나봇을 살해한 아합의 죄의 결과는 얼마나 끔찍하고 처절한지요. 엘리야 예언자들 통한 하느님의 준엄한 선고입니다.
“주님이 말한다. 살인을 하고 땅마저 차지하려느냐? 주님이 말한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던 바로 그 자리에서 개들이 네 피도 핥을 것이다.”
“나 이제 너에게 재앙을 내리겠다”에 이어 계속 전개되는 구체적 벌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무지의 죄의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지 우리에게 주는 충격적 가르침이 이 말씀을 듣는 우리 청자聽者들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죄는 순간의 쾌락을 줄지 몰라도 괴롭고 아픈 후유증은 평생입니다. 아합의 구체적 죄의 나열입니다. 순전히 하느님을 잊고 나를 잊은 무지로 인한 죄입니다.
‘아합처럼 아내 이제벨의 충동질에 넘어가 자신을 팔면서까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른 자는 일찍이 없었다. 아합은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라인들이 한 그대로 우상들을 따르며 참으로 역겨운 짓을 저질렀다.’
역시 오늘날도 많은 무지의 죄인들을 통해 반복되는 악행들입니다. 주님 대신 우상을 따르며 역겨운 짓을 하지는 않는지 늘 ‘주님의 눈’을 의식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니 이런 무지의 원수들이나 박해자들을 사랑하고 기도하며 이들을 하느님의 처분에 맡기는 것입니다. 무지를 무력화無力化하고 원수나 박해자들을 살리는, 또 내 존엄한 품위를 지키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래야 비로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자녀답게’사는 삶, 얼마나 품위 있고 아름다운 삶인지요. 그러니 하늘 우리 아버지를 부단히 닮는 것입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무차별의 대자대비大慈大悲, 공평무사公平無私하신 우리 하늘 아버지를 닮으라는 것입니다. 인종, 국적, 종교, 문화, 언어 모두를 초월하여 모두가 아버지 품안에 있는 자녀들임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유유상종類類相從,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끼리끼리 패거리 사랑이라면 무슨 상을 받을 수 있겠는지요? 이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우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는지요? 이 또한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하늘 아버지를 닮아 누구에게나 자비롭고 너그럽고 따뜻하고 부드럽고 겸손, 겸허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숭고한 평생과제입니다.
참으로 한 번 참사람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라고 주어진 참 고귀한 선물인생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사랑의 하느님을 닮아갈 때 비로소 무지와 허무로부터 해방되어 참 자비롭고 지혜로운 삶, 참 자유롭고 행복한 삶, 온전하고 완전한 삶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날로 당신을 닮아 사랑으로 익어가는 원숙하고 온전한 삶으로 이끌어 주시며 우리 모두에게 당신의 유일한 소원을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5,4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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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나도 다른 사람의 원수가 될 수 있다>
살아가면서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래서 나는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말합니다. 사실 상처를 주는 사람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나와 관련이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상처가 되지 않고 쉽게 잊어버립니다. 아주 가까이 있기에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아내가 될 수 있고 남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식이 될 수도 있으며 부모나 이웃, 절친한 친구, 동료가 될 수 있습니다. 상처를 풀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르면 미움이 쌓이고 마음의 병이 되고 결국은 원수가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 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5,44-45). 고 말씀하셨습니다. 미움을 사랑으로 정복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는 원수와 박해하는 사람, 악인과 선인,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이 따로 없습니다. 다 내 자식이요,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베푸십니다. 오로지 사랑만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원수를 만드는 것은 바로 나입니다. 사랑으로 충만하다면 원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그러니 상처를 받을 수 있는 연약함을 지녔고, 그렇기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처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것도 아니고, 혹 아픔이 이미 시작되었다면 그 아픔을 오래 가지고 있지 않아야 합니다. 더러운 것이 내 몸에 들어왔는데 왜 그것을 끌어안고 있습니까? 내보내야지요. 상처를 준 그 무엇이 내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인식하면 내 보내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 원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깊이 보면 우리 자신들이 다른 사람의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가끔 신자들의 기도소리를 들어보면 ‘세상에 못된 사람이 너무 많은데 회개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이러저러한 상태를 낱낱이 고발하는 식으로 얘기해 놓고는 ‘그러니 고쳐주십시오’. 하는 식입니다. ‘자기는 아무런 잘못도 없고 회개할 이유도 없는데 남들이 잘못해서 이지경이 되었으니 그들을 좀 어떻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다른 사람도 나도 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이고,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지녔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리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이미 원수가 없습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하느님만을 바라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나도 다른 사람의 원수이니 오늘은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간직하여 모두가 사랑해야 할 사람으로 보인다면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로부터 온갖 멸시를 받고 죄인취급을 받았던 세리들도 서로를 사랑하며 서로 상대방을 헐뜯지는 않았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들 사이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우애를 베푸는 것은 아주 보편적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랑해야할 소명이 있을 뿐입니다. “성인은 착한 사람을 착하게 대하고 착하지 않은 사람 또한 착하게 대하니 이는 덕이 오직 착하기 때문이다.”(노자49장) “사랑은 사랑일 뿐, 상대에 따라서 달라지거나 있다가 없다가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이현주)
그러므로 지금의 처지에 안주하지 말고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하느님의 완전함을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많이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많이 행하십시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5,5)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요? 원수사랑!이죠. 그렇다면 가장 아름다운 사랑은? 당연히 원수사랑!이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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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아버지처럼 사랑하라고 이르십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
원수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개인차가 있을 겁니다. 대개는 나와, 내가 사랑하는 이들, 내게 소중한 이들의 목숨을 빼앗거나 상해를 입힌 사람을 가리키지요. 하지만 이념과 사상이 달라서 서로 맞서고 대적하는 이들을 원수의 범주에 넣기도 합니다.
"이 내 원수! 또 나를 찾아왔소?"(1열왕 21,20)
제1독서에서 아합 임금이 엘리야에게 외칩니다. 엘리야는 나봇의 일로 분노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러 위험을 무릅쓰고 아합 임금 앞에 섰지요. 아합은 무장을 하지도 않고 폭력을 쓸 이유도 없는 엘리야를 왜 원수라 부를까요?
원수의 범위에는 사사건건 나를 공격하고 상처 입히는 이들은 물론, 나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도 포함됩니다. 내 생각이나 계획과 대립각을 세우고 엇나가는 이, 내 어둠과 죄악에 대해 직언을 하는 이, 결국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도 넓게 보면 적이고 원수일 수 있습니다.
"아합은 이 말을 듣자 제 옷을 찢고 자루옷을 걸치고 단식에 들어갔다."(1열왕 21,27)
나봇에게 저지른 극악무도한 범죄에 대해 하느님께서 상응하는 징벌을 내리시리라는 예언자의 전언에 아합은 당장 태도를 바꿉니다. 옷을 찢고 자루옷을 걸치고 단식을 하는 것은 회개와 참회의 전형적 행동입니다. 바라 마지않던 포도원을 차지한 기개 따위는 눈씻고 찾아 볼래야 찾을 수 없습니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아합 임금이 원수라 칭할 정도로 성가시고 불편한 존재인 엘리야의 말을 들었다는 점이고, 그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믿었다는 점입니다. 원수라 여겼던 존재에게서 자기 성장의 단서를 발견했다고 한다면 너무 거창할까요...
"그가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으니"(1열왕 21,29)
결국 하느님은 자신을 낮춘 아합 임금의 태도를 보시고 내리시려던 벌을 유예하십니다. 그 태도에서 통회의 마음을 보신 겁니다. 나봇의 억울한 죽음을 생각하면 당장 두 쪽을 내어 처단해도 시원찮을 악인이지만, 아합 역시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피조물이지요.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예수님의 자상한 당부입니다. 우리가 당장 나를 힘들게 하는 원수에게 집착해 하느님 자녀라는 본질을 놓치지 않길 바라시는 마음에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인간 실존을 잘 아시는 그분은 원수 사랑이 감정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그리 쉽지 않다는 걸 모르시지 않기에 우격다짐하듯 강요하지는 않으시지요. 그저 너희 아버지처럼, 너희가 사랑하고 또 너희를 사랑하는 그 아버지처럼 되어 보라고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경계가 없습니다. 구분하고 나눠서 일부분만 사랑한다면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의 원천이신 하느님께서 그러실 수 없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때 사랑입니다. 공정하고 정의롭고 치우침 없는 사랑, 나를 낮추고 너를 높이는 사랑, 나를 죽여 너를 살리는 사랑입니다. 이에 반하는 것은 편애와 집착이고 자기애와 욕정, 애욕과 과시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혹 원수로 여겨지는 이가 있습니까? 그이 때문에 힘드시죠? 그를 포함해 온 세상 모든 피조물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뜨겁고 진실하게, 담백하고 순수하게 아버지의 사랑을 닮아보려 애써 봅시다. 그 자체로 이미 우리는 아버지 사랑 안에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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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기도는 당신 삶의 확대경이다.
하느님의 선물을 확대해서 잘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당신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에 무한히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당신이 얼마나 가엾은 존재인지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이유는 하느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모든 것을 당신의 마음에서 떨쳐버릴 때까지 주님의 능력으로 그것들과 끈기 있게 투쟁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당신의 삶이 하느님의 확실한 걸작으로 변화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기도에 진보하려면 할수록 자신이 죄인임을 느끼게 된다. 이는 확대경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망하지는 말 것이다. 곧 기도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은 변화하는 것이라는 말을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투쟁하기 시작하면 이미 변화되어 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에서
♣기도가 확대경이기에 기도를 통해 자아를 인식하게 되며 그 자아란 하느님 앞에 죄인에 불과한 가엾은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오직 하느님의 자비만이 나를 나 되게 하며, 나의 비참한 존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 기도의 핵심인 것입니다.
따라서 내 삶의 확대경인 기도를 통해 자아를 인식하고 정화되어야 합니다. 그런 나를 통해 하느님을 알게 되고 참 자아를 하느님 앞에 대령하여 자신을 내려놓게 되는 것이 바로 하느님과 합일하는 기도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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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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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마지막 여섯 번째의 새로운 의로움으로, ‘완전한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마태 5,45)
사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라는 <레위기> 19장 18절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사랑해야 할 대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복음>에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14)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웃과 원수를 구분해서 처우를 달리 해온 그동안의 관행을 완전히 뒤엎어, 이웃이나 원수를 가리지 않고 똑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원수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 아니며, 또 우리 자신에게서 미움이라는 것을 없애기 위한 것도 아니며, 혹은 단지 사랑에 한계를 두지 말라는 것만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호의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부족한 이를 부족한 채로, 원수를 원수인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가 나를 미워하지 않게 되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는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가 부족하기에 바로 그 이유로 더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가 사랑이 더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죄인이기에 처벌받아야 하기보다, 죄인이기에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듯이 말입니다.
동시에, 이는 자기 자신만 구원받아야 할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구원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우쳐줍니다. 자기 자신만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사랑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다음에 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덧붙이셨습니다. 사랑은 애당초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스테파노가 돌을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사도 7,60), 사도 바오로가 고난을 겪으면서도 유대인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1코린 4,12) 말입니다.
지금 나의 기도가 가장 필요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지금 나를 가장 힘들어하는 사람, 또 내가 가장 힘들어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나 이웃만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자기에게 잘 해주고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라고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지금 나의 사랑이 가장 필요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지금 나를 가장 힘들어하는 사람, 또 내가 가장 힘들어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아닐까요? 사실, 친구를 사랑하는 사람은 죄는 짓지 않을지 몰라도, 의로움을 행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친구가 아닌 원수를 사랑할 때라야, 의로움을 행하게 됩니다. 악을 피하는 것을 넘어 선을 행할 때라야, 비로소 완전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의로움이 무엇인지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단지 죄짓지 않고 무난하게 살기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베푸는 데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사랑이 우리를 하느님과의 의로운 관계로 이끄십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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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주님!
되갚지 않을 뿐 아니라, 억울한 고통도 기꺼이 지게 하소서.
미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받아들여 사랑하고, 사랑할 뿐 아니라, 기도하게 하소서.
죄짓지 않을 뿐 아니라 죄인을 용서하고, 용서할 뿐 아니라 선을 베풀게 하소서.
개방할 뿐 아니라 받아들여 수용하고, 수용할 뿐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변형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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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9mMnj_v1O00&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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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 44)
사람의 원수는
언제나
사람으로
다가옵니다.
한때는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조차
원수로 다가옵니다.
우리자신또한
누군가에게 분명
원수가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우리 관계의
아픈 뒷모습을
보게 됩니다.
원망과 원한에
허우적대는
우리들 삶입니다.
원수를
미워하고
증오하며
우리들 또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어떤 순간도
사랑의 하느님을
밀어낼 순 없습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은
원수를 사랑하는
삶 안에 있습니다.
생생한
하느님 사랑이
우리들 삶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에게
사랑과 용서를
구합니다.
우리를
붙잡고 있는
미움과 증오
분노와 분개에서
자유롭게 하길
기도드립니다.
원수에게
우리가 주어야
할 것은 다름아닌
하느님을 향하는
사랑뿐임을
다시 배웁니다.
우리를 용서하고
사랑하듯이
원수를 이해하고
기도하는 예수 성심
성월의 부서지는
마음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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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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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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