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정희승 | 날짜 : 09-04-10 11:37 조회 : 2082 |
| | | 고양이 (똥)
정희승
나의 첫 작품집이 나오자 강화도 장화리에 있는 레스토랑 조단을 찾아갔다. 소설가인 임희경 선생님이 운영하는 곳인데 내가 작가가 되려고 마음먹었을 때 선생님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책으로나마 답례를 하고 싶었다.
조단은 이름이 암시하듯 해넘이가 아름다운 곳이다. 그곳에 앉아 노을을 바라보고 있으면 반조(返照)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해가 넘어가면서 지나온 길을 마지막으로 되돌아본다는 뜻이라고 들었다. 조단(照丹)은 그 빛이 붉다는 의미이니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인가. 사는 것이 막막하게 느껴질 때 또는 고통스럽거나 슬프게 느껴질 때, 한번쯤 노을을 후경에 두고 노경에 접어든 주인 내외로부터 삶의 지혜를 들어볼 만한 곳이다.
선생님이 교회에서 돌아오시지 않아 풍으로 한쪽 다리가 불편하신 바깥어른이 카운터를 지키고 계셨다. 좋이 30분 이상을 기다려야 선생님을 뵐 수 있을 것 같았다. 홀 안에는 우리 내외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가하게 흘러나오는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어르신께서 불편한 몸을 이끌고 우리 자리로 오셨다. 기다리는 동안 말동무나 해주어야겠다고 마음먹으신 듯했다.
이런저런 의례적인 인사말이 끝나자 까치 이야기로 대화의 실마리를 풀어나가셨다. 창밖 뜰에는 까치 두 마리가 강중거리고 있었다.
“요즈음은 젊은 까치는 구태여 나무에 집을 짓지 않아. 둥지를 틀 만한 나무를 찾는 게 쉽지 않거든. 괜찮다 싶은 나무는 어김없이 이미 다른 녀석들이 차지하고 있으니까. 이제는 까치도 나름대로 꾀가 생겨서 나무가 아닌 땅 위에 둥지를 틀더라고. 여우 오소리가 없으니 뱀만 조심하면 알을 물어갈 짐승도 없거든. 까치도 세상이 많이 변했다는 것을 아나봐.”
어떤 책에도 나오지 않는 내용이었다. 집 주위를 산책하면서 직접 그런 둥지를 보신 듯했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이런 이야기는 다소곳이 경청해야 한다. 지레 자기 판단이 앞서면 안 된다. 저 까치들을 두고 하는 말씀일까? 나는 마당에서 뛰놀고 있는 까치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양이 똥에 얽힌 일화도 들려주셨다. 평소 고양이에 관심이 많은 터라 고양이 이야기가 나오자 귀가 번쩍 틔었다.
“이런 시골집에서는 고양이를 두는 게 현명한 처사가 아니야. 고양이가 쥐를 잡기만 하는 게 아니라 쥐를 끌어들이기도 하거든. 쥐들이 고양이 똥을 아주 좋아해. 향과 맛이 입맛에 맞아 아주 좋아한단 말이여. 고양이를 키우면 아이러니하게도 집에 쥐가 더 끓어. 그래서 우리 집에는 진즉부터 고양이를 키우지 않아.”
아닌게아니라 그곳에는 고양이가 없었다. 알다시피 고양이는 뒤가 아주 깨끗하고 깔끔한 동물이다. 자신이 싼 똥은 보이지 않게 반드시 모래나 흙을 파서 묻는 버릇이 있다. 그런 청결함 속에 그렇게 음흉한 계략이 도사리고 있다니,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나는 아직도 어떤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생물들의 진화과정을 곰곰 생각해보니 꽤 신빙성이 있어 보였다. 불현듯 은행나무 열매가 생각났다.
낙엽이 지는 가을에 은행나무 밑에 앉아 책을 읽으며 우수에 젖어본 사람이라면 난처한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사방에서 달갑지 않게 구린내가 솔솔 풍겨오기 때문이다. 그 냄새를 맡으면 한마디로 고상한 생각이 싹 가신다. 은행나무는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얄궂은 면이 있다. 다른 열매와 달리 과육이 향기롭기는커녕 무척 구리다. 맛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행인(杏仁)이라는 씨도 독을 함유하고 있어 삶아 먹어야 별 탈이 없다. 은행나무는 짐승이나 인간의 비위를 맞추려고 구태여 안달하지 않는다. 그런 독창성이 중생대부터 지금까지 생존하게끔 하였는지도. 떨어진 열매를 보면 음식을 잘 소화하고 배설한 황금 똥 같다. 한마디로 쾌변이다. 은행나무는 그렇게 고약한 곳에 천연덕스럽게 하얀 씨앗을 묻어 놓았다. 그러니까 고양이 똥처럼 끝 속에 시작이 들어 있다는 말이다.
끝이면서 시작인 똥!
한참 생각에 잠겨 있는데 창밖에서 나비가 어른거렸다. 그 나비를 보시더니 아쉽게도 말머리를 돌려버리셨다.
“호랑나비야. 자태가 우아한 녀석이군. 저렇다니까. 저것 좀 봐. 나비는 어디에 앉을지 의중을 헤아릴 수 없어. 저렇게 늘 대중없이 난해한 궤적을 그리며 날거든. 그런데 새는 그렇지 않아. 어디로 갈지 금방 빤히 속셈이 들여다보이거든.”
그제야 어르신이 자연을 책으로 삼아 독서하는 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분에게는 삼라만상이 다 텍스트인 것 같았다. 혜안을 가져서인지 독서가 정심한 데가 있었다.
그때 선생님께서 돌아오셨다. 자연히 대화가 끊길 수밖에 없었다.
그날 선생님에게서 과분한 축하와 대접을 받았다.
돌아오는 길 내내 고양이 똥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이야기에는 그 외에도 내가 알 수 없는 큰 지혜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어떤 일을 해결하려고 고양이를 끌어들였다가 그로 인해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성가신 일에 부대낀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이를테면 그런 교훈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살면서 천천히 음미해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 임재문 | 09-04-10 13:33 | | 정희승 선생님 모처럼 유유 자적한 시간속에서 자연의 섭리를 깨달으신듯 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앞으로 자연을 벗삼아 그렇게 욕심 버리고 살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고맙습니다. | |
| | 정희승 | 09-04-11 18:21 | | 네, 모처럼 그런 셈이 되었습니다. 지금 제가 사는 아파트는 벚꽃축제 기간입니다. 요즈음 꽃들이 너무 좋습니다. 개나리 벚꽃 목련 명자꽃 살구꽃..... 오늘도 가만히 집에 진득하게 있지 못하고 몇 번을 나갔다 왔습니다. 자세히 보니 라일락 복사꽃도 피기 시작하더군요. 그곳 왕송호수 주변도 벚꽃이 한창이겠지요? | |
| | 임병식 | 09-04-10 19:41 | | 정선생님 작품을 읽고 요즘 까치가 땅에다 집을 짓는다는 새로운 사실과, 고양이 똥을 쥐가 좋아한다는 시실을 알았습니다. 두 사실 다 전혀 의외군요. 잘 읽었습니다. | |
| | 정희승 | 09-04-11 18:21 | | 저도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즈음 아내는 커피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습니다. 조그만 배전기를 사다가 틈만 나면 원두를 볶습니다. 지금 케냐AA 마시면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읽는 자료를 보니까 사향고양인가 하는 고양이에게 원두를 먹여 그 똥에서 커피를 추출하는데 맛이 일품이라고 하더군요. 백화점에서 고가로 판다고 합니다. 관심을 갖다보면 세상에는 참 신기한 게 많은 것 같습니다. | |
| | 이희순 | 09-04-10 21:54 | | 쥐를 잡아먹은 고양이 똥은 쥐의 잔해일진대, 그걸 쥐들이 밝힌다니 선뜻 믿기지 않습니다. 생뚱맞게 '자두연두(煮豆燃豆)'라는 사자성어가 어른거리는 까닭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 |
| | 정희승 | 09-04-11 18:21 | | 자두연두(煮豆燃豆), 고개가 끄덕여지는 멋진 사자성어입니다. 다소 의미차이는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공통점이 있는 것도 같습니다. 저도 믿기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러는지 지금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면 그럴 것도 같아요. 답글 감사드립니다. | |
| | 최복희 | 09-04-11 07:19 | | 정희승 선생님! 유익하고 흥미있는 글이었습니다. 저도 자연 가까이 살고 있지만 그런 사실과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을 첨 알았습니다. 역시 관찰과 헤안이 부족하고 사색이 깊지 못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는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
| | 정희승 | 09-04-11 18:22 | | 자연과 가까이 사니까 자연을 텍스트로 삼아 많은 독서를 하고 계시겠지요. 요즈음 꽃들이 너무 좋아요. 책을 읽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사방에 미문 천지입니다. 한겨울 앙상한 가지를 보면 볼품이 없었는데, 그 행간에서 새싹이 움트고 꽃이 피는 것을 보면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참 좋은 계절입니다. 큰 독서 많이 하시고 좋은 글 많이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 |
| | 박원명화 | 09-04-11 10:55 | | 상식과 자연의 법칙이 묻어나는 좋은 수필을 읽고 나니 새삼 헤안의 눈이 번득임을 깨닫게 합니다. 한편의 글 속에서 작가의 섬세한 사색이 독자를 행복하게 하는 특별한 재주를 갖고 계신것 같습니다. | |
| | 정희승 | 09-04-11 18:28 | | 보다 젊은 감각으로 글을 쓰고 싶어 고양이를 소재로 택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긴 글이 되어버렸습니다. 마무리는 해야겠고 너무 긴 글을 모두 올리기도 그렇고 그래서 고양이3(귀)에 대한 이야기는 건너뛰고 바로 이글을 올렸습니다. 아무튼 너그럽게 좋게 읽어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 |
| | 이진화 | 09-04-11 21:52 | |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던데 눈에 잘 띄지도 않는 고양이 똥을 소재로 한 편의 수필을 써낸 정희승 선생님의 시선이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한국수필>에 연재되는 '컷이 있는 에세이'도 잘 읽고 있습니다. | |
| | 정희승 | 09-04-13 11:53 | | 벚꽃 축제를 열었던 아파트 중앙 대로를 깨끗하게 청소해두어 엊그제 일이 마치 꿈만 같습니다. 벚꽃이 분분히 날립니다. 경비 아저씨들이 꽃잎을 쓸고 또 씁니다. 화단에 살구꽃도 지고 파란 잎이 돋아나기 시작합니다. 따뜻한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월요일입니다. 즐거운 한주가 되기를 빌겠습니다. | |
| | 윤행원 | 09-04-13 15:22 | | 정희승 선생님, 사물을 관할하는 집중력이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까치와 고양이와 은행나무 열매....하나하나 마다 따뜻한 사랑과 숨결이 있습니다. 그리고 집 주위에 핀 봄꽃을 보고 감격스러워 하며 들락거리는 소박한 모습을 상상하고는 혼자서 웃었습니다. | |
| | 정희승 | 09-04-14 13:48 | | 네 자주 들락거리게 됩니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책도 읽고, 리라꽃도 향기에 취해 베사메무쵸를 한 가락 뽑고 싶습니다. 언덕에 핀 제비꽃 민들레도 고왔습니다. 황사도 심하지 않고 참 좋은 계절입니다. 상춘의 즐거움을 그윽한 시심으로 풀어보심도 좋을 듯합니다. 답글 감사드립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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