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일(韓師一)
[생원] 영조(英祖) 5년(1729) 기유(己酉) 식년시(式年試) [생원] 2등(二等) 3위(8/100)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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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계래(啓來)
생년 계묘(癸卯) 1663년 (현종 4).......강학 1601년생
합격연령 67세
본인본관 청주(淸州)
거주지 장수(長水)
[관련정보]
[이력사항]
선발인원 100명 [一等5‧二等25‧三等70]
전력 유학(幼學)
부모구존 영감하(永感下)
[가족사항]
[부(父)]
성명 : 한익삼(韓益三)
관직 : 학생(學生)
[안항(鴈行)]
형(兄) : 한상일(韓相一)
형(兄) : 한태일(韓台一)
[출전]
『기유식년사마방목(己酉式年司馬榜目)』(한국국학진흥원[영주 선성김씨 함집당(咸集堂[金宗灝]) 종택])
한경록(韓景祿)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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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중수(仲綏)
생년 1521(중종 16)
졸년 1593(선조 26)
시대 조선전기
본관 청주(淸州)
활동분야 문신 > 문신
[상세내용]
한경록(韓景祿)
1521년(중종 16)∼1593년(선조 26). 자는 중수(仲綏). 본관은 청주(淸州).
조선 중기의 부마로 의혜공주(懿惠公主)의 남편이다.
한경록은 한승권(韓承權)의 아들이며 한치인(韓致仁)의 현손이며 조계상(曺繼商)의 외손이다.
한경록은 부마의 신분으로 정치에 많은 관여를 하였다.
1545년(중종즉위)에 윤원형(尹元衡), 이기(李芑), 정순붕(鄭順朋) 등과 모의하여 형조판서 윤임(尹任) 등을 제거하는데 공을 세워 추성협익정난위사(推誠協翼定難衛社)로 공신으로 봉해졌다.
1545년(명종 즉위)에 추성협익정난위사공신(推誠協翼定難衛社功臣) 광덕대부(光德大夫) 청원군(淸原君)에 1547년(명종 2)에 추성협익정난위사공신(推誠協翼定難衛社功臣) 성록대부(成祿大夫)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으로 책봉되었다.
한경록은 이러한 공을 믿고 이기(李芑)와 당을 지어 악을 저질러 궁중에 있으면서 백사를 주관하니, 조정의 선비들이 다투어 서로 아부하였다고 한다.
또한 총애와 세력을 믿고 방탕하게 술마시고 여색에 음탕하여 못하는 짓이 없었다고 한다.
술을 금하고 있는 때 무뢰한 종친과 창기(娼妓)를 데리고 밤낮을 모르고 방자하게 술을 마시며 즐기는 등 행실이 매우 좋지 않았다. 한경록이 당시에 얼마나 좋지 않은 비판을 받았는지는 사관이 기록한 사론에 신랄하게 기록되어 있다.
사신은 논한다. ‘경록의 집이 벼락맞았다.’고 하지 않고 ‘벼락이 경록의 집을 쳤다.’고 한 것은 하늘이 그 집을 벼락으로 친 것임을 말한 것이다.
옛날 춘추(春秋) 때에 벼락이 이백(夷伯)의 사당을 쳤는데, 좌씨(左氏)가 ‘전씨(展氏)에게 남모르는 잘못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였다. 이제 경록은 방자하고 교만하여 제멋대로여서 그 악함은 전씨가 남모르는 잘못을 저지른 정도가 아니니, 하늘이 벌을 내린 것은 당연하다.
사헌부에서 여러 번 한경록을 탄핵을 하였으나 위사공신이며 왕실의 부마인 점 때문에 번번이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1582년(선조 15)에 사림을 배척하고 곤경에 빠뜨렸다는 이유로 탄핵되어 파직당하였다.
[참고문헌]璿源系譜紀略
한승권(韓承權)
[지방관] 조선전기 지방관 강원도(江原道) 춘천부사(春川府使) 1547[정미(丁未)] 11월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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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구분 문관
생년 미상(未詳) (미상)
졸년 미상(未詳) (미상)
시대 조선전기
왕대 명종(明宗)
본관 미상(未詳)
활동분야 관료
[관인정보]
관직명칭 춘천부사(春川府使)
관직등급 부사(府使)
부임년월 1547 [정미(丁未) 11월] 도임(到任: 근무지에 도착함)
교체년월 1548 [무신(戊申) 2월] 박체(駁遞: 대간에 탄핵받아 교체됨)
[도 정보]
도명칭 강원도(江原道)
[출전]
『강원도춘천부선생안(江原道春川府先生案)』(국립중앙도서관[한古朝57-가458])
한치인(韓致仁)
출생일 1421년(세종 3)
사망일 1477년(성종 8)
조선전기 공조참의, 호조참판, 판돈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아버지는 좌의정 한확(韓確)이며, 성종의 생모인 인수왕비(仁粹王妃)의 오빠이다.
1444년(세종 26) 문음(門蔭)으로 세자시강원우세마(世子侍講院右洗馬)에 임용되고, 이후 공조정랑을 거쳐 1455년(세조 1) 예빈소윤에 올랐다.
1462년 공조참의로 승진하였고, 1467년에는 서성군(西城君)에 봉하여졌다.
1469년(예종 1) 호조참판에 임명되고, 성종즉위 후인 1471년(성종 2)에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녹훈되었으며, 이듬해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이르렀다.
고모가 명나라 선종(宣宗)의 후궁이 된 인연으로 1472년 정조사(正朝使), 1474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뒤에 판돈녕부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공안(恭安)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치인(韓致仁))]
한확(韓確)
[중앙관] 조선전기 중앙관 좌의정(左議政)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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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자유(子柔)
시호(諡號) 양절(襄節)
문무구분 문관
생년 경진(庚辰) 1400년(정종 2)
졸년 병자(丙子) 1456년(세조 2) 9월 11일
시대 조선전기
왕대 단종(端宗)
본관 청주(淸州)
활동분야 관료
항목 좌의정(左議政)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전기 판중추원사, 좌찬성,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유(子柔), 호는 간이재(簡易齋).
한방신(韓方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한영(韓寧)이고, 아버지는 지순창군사(知淳昌郡事) 한영정(韓永矴)이며, 어머니는 김영렬(金英烈)의 딸이다. 덕종의 비(妃) 소혜왕후[昭惠王后, 인수대비(仁粹大妃)]의 아버지로, 성종의 외할아버지이다.
1417년(태종 17) 진헌부사(進獻副使)가 되어 노구산(盧龜山) 등과 같이 명나라 성조(成祖)의 후궁으로 선발된 황씨(黃氏)와 누나를 호송하였다. 누나가 여비(麗妃)로 책봉되자 명나라의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에 제수되었다.
1418년 세종이 즉위하자 승습사(承襲使)로 명나라에 들어갔고, 1419년(세종 1) 1월 명나라의 책봉사(冊封使)가 되어 부사인 홍로시승(鴻臚寺丞) 유천(劉泉)과 함께 귀환하였다.
1420년 1월 광록시소경으로서 예조참판 하연(河演)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태종 이래 추진했던 금과 은의 공물면제를 허락받고 귀국하였다.
1424년 명나라 성조가 북정(北征) 중 유목천(楡木川)에서 죽자 여비도 자결하였다. 그러자 명나라에서는 또 그의 누이동생을 선종(宣宗)의 후궁으로 간선하였다. 그래서 1429년 조종생(趙從生)과 함께 진헌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명나라 사신이 입국할 때마다 선위사(宣慰使)로 파견되어 접대하였다.
1435년 행중추원부사·지중추원사 등을 거쳐, 1438년 중추원사, 1439년 판한성부사·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440년 병조판서·함길도도관찰사등을 지내고, 1443년 동지중추원사로 의금부제조를 겸하였다.
1446년까지 이조판서를 역임하면서 인사에 공정을 기해 자못 명망이 있었다.
1446년 판중추원사가 되고, 이듬해 평안도도관찰사 겸 평양윤으로 파견되고, 1448년에는 병마절도사까지도 겸임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년) 판중추원사를 지내고, 이듬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52년(단종 즉위년) 좌찬성이 된 뒤, 1453년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도와 정난공신 1등에 책록되고, 서성부원군(西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455년(세조1) 좌의정이 되고, 좌익공신 1등에 올라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다시 봉해졌다.
1456년 사은 겸 주청사로 명나라에 가서 세조의 왕위 찬탈을 양위라고 설득하였다.
귀국 도중 사하포(沙河浦)에서 졸하였다. 누나와 누이동생이 명나라 성조와 선종의 총애를 받음을 계기로 현달했지만, 넓은 도량과 온순하면서도 대범한 성품으로 상하의 신망이 있었다. 또한 명나라 황실과의 유대와 공정하고 결단성 있는 정사로 외교와 내치에 크게 공헌하였다. 1470년(성종 1)에 세조묘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양절(襄節)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확(韓確))]
[중앙관] 조선전기 중앙관 이조판서(吏曹判書)
[중앙관] 조선전기 중앙관 병조판서(兵曹判書)
[지방관] 조선전기 지방관 함경도(咸鏡道)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
[지방관] 조선전기 지방관 평안도(平安道)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1447[정묘(丁卯)]
[관인정보]
제수년월 1453 [계유(癸酉)] 좌찬성(左贊成) 배(拜)
[품관 정보]
품관 정1품
[과거 정보]
과거 음서(蔭敍)로 등용(登用)
[관력 정보]
관직 좌의정(左議政)
[가족 관계]
부 한영저(韓永{石+宁})
조부 한녕(韓寧)
증조부 한방신(韓方信)
숙부 한상경(韓尙敬)
[비고]
비고 공신(功臣) 2회[二勳]
미등제이배(未登第而拜: 대과에 급제하지 못했으나 임명)
국구배상(國舅拜相: 임금의 장인으로 재상이 됨)
[출전]
『청선고(淸選考)』(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K2-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