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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섬을 거느리고
이 홍사
섬은 아팠다.
가슴에 든 섬이 아렸다.
고모의 제삿날이 오늘이란다.
고모가 이맘때쯤 돌아가셨나?
모르고 있었는데, 고종사촌 여동생이 낮에 친정에 다녀오면서 호박잎과 깻잎을 놓고 갔다. 어머니가 농사를 지은 것이라며, 가는 길에 들여다 주고 가라고 했다며 잠시 사무실에 들였기에, 고모의 제삿날이란 걸 알았다.
저녁에 제사를 모시는데 오전에 제수를 장만하다가 애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데리고, 다시 들어갈 거라고 했다.
고향인 해평면은 차로 불과 이십 분 거리, 강 건너에 있다. 사전에 연락도 없이 여동생이 사무실에 불쑥 들어올 적에 나는 선풍기를 틀어놓고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시집을 펴서 들고 있었다.
아픈 섬을 거느리고,
아주 오래전에 작자인, 수척한 서정의 사내라는 시인에게 직접 받은 시집인데, 소파 옆 탁자에 있던 그 시집이 손에 잡혀 다시 훑어보던 중이었다.
아픈 섬을 거느리고?
할머니에게 합당한 시어였다. 할머니는 아픈 섬을 거느리고 평생을 사셨다. 아픈 섬.
수척한 서정의 사내, 아니 고모.
고모 제삿날이라는 말에 잠시 숙연해졌다.
고모네 집과 우리 집은 좁은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있다.
매일 무슨 반찬으로 끼니를 때우는지 서로가 알 수 있으며 손님이나 누가 오면 금세 알고, 별미를 장만하면 어김없이 나눠 먹는다.
어릴 적에는 그랬다.
지금도 그러는지 모르겠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고모가 돌아가셨으니 좀 서원해진 점이야 있겠지. 지금 고모네 집에는 베트남 여자에게 장가를 든 고종사촌 동생이 아들 하나를 데리고 산다. 고향 집에는 어머니께서 살고 있는데,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가 아니다.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는 내가 군에 있을 적에, 가을에 추수하시다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당시에 나이가 마흔여섯이었으니 두 살이 더한 아버지께서 혼자서 살지를 못해 할머니의 종용에 못 이겨 여자를 들였는데, 그분이 지금의 어머니.
좀 복잡한 가계다.
아버지께선 새로 모신 어머니와 팔 년을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좀 오래 사셨으면 좋으련만 애석하게도 그렇게 아끼시던 새어머니를 남기고 돌아가셨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다른 곳으로 다시 시집을 갔으면 좋으련만, 새어머니는 갈 곳이 없어 그대로 눌러사시는데, 내 몫으로 굳었다. 기를댁, 돌아가신 어머니의 택호인데, 그 택호를 새어머니가 물려받아 지금은 동네 어른들 사이에서 기를댁이라 불리고 있다.
택호까지 물려받은 기를댁은 좀 건강하시면 좋으련만, 왜소한 체구에 매일 약으로 연명하신다. 아내는 거의 매일 약을 타다 드리고 반찬을 만들어 싸다 나르는 게 일이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유산을 분배하시는 과정에서 말씀하셨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는 형님의 몫이고 새어머니는 내가 책임을 지라고. 그런 말씀을 남기고 아버진 돌아가셨는데 나는 살짝 빠지고 새로운 기를댁은 아내의 몫으로 굳어버렸다.
고모의 제삿날이라니 할머니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는 문제다.
정말이지 할머니는 아픈 섬을 거느리고 사셨다. 고모는 귀가 먹었다.
들리지 않으니, 말을 배우질 못했다, 고모가 아주 어릴 적에 전쟁이 나서 피난을 갔던 모양인데 거기서 고모는 청각을 잃었다. 일테면 전쟁의 상흔인 셈인데, 전쟁이 나서 피난을 갔을 당시, 고모는 겨우 기어다닐 나이였다고 했다. 걷고 걸어서 청도의 무슨 하천으로 피난을 갔는데 지독히 더운 여름이라고 들었다. 피난민이 있는 하천에 아군인지 적군인지 비행기가 지나가며 포를 떨어트렸는데, 그 자리가 바로 고모가 모래밭을 기어다니던 자리였다. 포가 떨어지고 다 아이가 죽었다고 했는데 포연 속에서 아기가 울지도 못하고 놀라서 엉금엉금 기어서 나왔다고 했다. 할머니는 아이가 거기서 고막이 찢어졌노라고 했다.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처음엔 난리에 고막이 찢어진 줄 몰랐다고 했다. 말도 배우지 못한 어린아이니, 전쟁통에 그런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을 터. 나중에 말을 배우는데 보니 다른 사람의 입 모양을 보고 겨우 흉내를 내는 정도였다고 했다.
고모는 그래도 초등학교를 나왔다. 당시에는 농아학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고향에 있는 일반초등학교에 다니며 선생님의 입 모양을 보고 글을 익혔다. 한쪽 감각이 상실하면 다른 쪽 감각이 발달하는 법, 고모는 눈치가 빨랐다. 듣지 못하는 장애가 아니라면 고모는 정말 잘 생겼다. 할아버지를 닮아서 하얀 피부에, 후리후리한 키에, 눈이 크고, 가만히 보면 정말 출중한 인물이다. 그런 고모에게 하늘은 옥에 티를 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모는 글씨가 달필이었다.
말로 하다가 답답하면 글로 필담을 나누는데, 글씨를 정말 잘 썼다. 나는 어릴 적에 할머니께 늘 듣고 자랐다. 고모가 그런 장애가 아니었다면, 군의원의 딸이니 공부를 더 시켰을 것이고, 못해도 학교 선생님은 되었을 거라는 할머니 말씀을.
학교 선생님이 되어 교단에서 칠판 글씨를 쓰는 고모를 가끔 상상하면 입맛이 씁쓰레했다. 고모는 아버지와 나이 차이가 꽤 난다. 일테면 늦둥이다. 할아버지는 아버지와 숙부님을 낳고 만주로 가서 거의 십 년을 계시다가 돌아와서 낳은 늦둥이가 바로 고모다.
착한 고모, 예쁜 고모, 알뜰한 고모, 부지런하고!
고모를 그렇게 수식하면 어딘가 모르게 자음과 모음이 아귀가 맞지 않은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완벽한 문장이다. 고모는 맞바람의 언덕에서 평생을 활공의 준비 자세로 서 있었다. 그러나 한 번도 날지 못했다.
고모! 날아요, 날개를 펼쳐봐요!
볼 적마다 안타까워 그렇게 응원했지만, 고모는 날지 않았다. 않은 게 아니라 날개를 펼치지 못했다.
고모가 시집을 가기 전에 내가 태어났다. 그런데 고모의 처녀 시절은 기억이 없고 고모가 시집을 갔다가 돌아온 기억이 고모에 대한 최초의 기억이다. 고모는 듣지 못하는 장애를 지녔기에 다리를 저는 장애인에게 시집을 갔다. 그리 멀지 않은 안계로 시집을 갔는데 그 고모부가 되는 사람은 절름발이였다. 훗날 내 기억으로는 아마도 소아마비를 앓아서 다리를 저는 모양새였는데 심하게 절었다.
고모는 시집을 갔다가 거의 한 달이 넘어서 도망쳐서 집으로 왔다. 고모에 대한 내 기억은 그날로부터 시작되었다. 도망쳐 온 이유에 대해서 아버지에게 뭐라고 했지만, 그 내용을 상세하게 알지 못했고 고모가 시집이란 곳에 가서 다락방에 갇혀서 지냈다는 사실만 어렴풋이 알았다.
왜 새색시를 다락방에 가둬?
어린 나는 심하게 궁금해서 고모에게 물었다. 그 물음에 고모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그냥 웃기만 했다. 고모가 도망쳐서 집으로 오고 대략 일주일 정도 있으니까, 그 새신랑이라는 절름발이가 찾아왔다. 혼자서 찾아온 게 아니라 친구인지 깡패인지 건장한 청년 셋을 대동하고 찾아왔다.
사랑채에 술상이 차려졌다.
손님맞이를 해야 하니까 당시로서는 당연한 일. 그때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숙부님이 집에 계셨다. 숙부님께서 그날 왜 집에 계셨는지. 숙부님은 대구에서 중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는데 그때가 방학이었는지 일요일이었는지 모르지만, 손님을 접대한다는 그 방에 계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할머니는 나에게 곧 사랑채에서 싸움이 일어날 것이니, 놀라지 말라고 나에게 귀뜸을 먼저 했다.
손님들하고 왜 싸워?
아이야! 그런 일이 있단다.
할머니 말마따나 사랑채에서 싸움이 벌어진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건넌방에서 소리로 파악하니 술상이 날아간 모양. 사발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고 아버지와 몸집이 좋은 숙부님이 고모부라는 작자를 잡고 아랫도리를 벗겼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하고 아버지는 잠시 기절했다고 들었다. 몸싸움으로 바지를 벗기고 확인한 건 지금 생각하니 남근이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성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겨우 새끼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보드라운 살점이 붙어있었다고 했다.
싸움은 그걸로 끝이었다.
데려온 건장한 청년들은 고개를 숙이고 마당을 나가는 것을, 내 어린 기억으로 안채 마루에 걸터앉아 보았다. 당시에 그게 유행이었는지 건장한 청년들은 발목까지 내려오는 외투를 입고 있었다. 아마도 겨울이었던 모양이다.
고자에다 의처증이래.
할머니가 말했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으며 결혼생활의 중대한 결격사유가 되는지 당시에 나는 몰랐다. 그 싸움을 하는 동안, 이웃집에 피신해 있었던가? 그 건장한 깡패들이 가고 고모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고모라는 실체가 내 기억 속으로 온전하게 들어앉았다. 뭔지 모르지만, 그렇게 쳐들어온 손님들은 나쁜 사람이고 고모는 좋은 사람이라 인식이 내 어린 마음에 생긴 걸까? 어린 나는 고모를 불렀다.
고모가 돌아보면 고모를 가리키며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고, 골목을 가리키며 새끼손가락을 세워 보였는데 고모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게 재미가 있어서 하루에도 몇 번씩 그런 손가락 움직임을 고모에게 보였다. 그럴 때마다 고모는 내 머리를 고운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날부터 고모는 어머니를 도와 집안일을 했다.
그리고 몇 해가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고모부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이 집으로 들어와서 뒷방에 살기 시작했다. 결혼식이라는 이름의 잔치는 생략되었고, 그냥 들어와서 살았다. 고모를 데려가거나 따로 살림을 나지 않고 우리 집 뒷방에서 같이 살았다.
할머니 결혼식에 잔치는 안 해?
그게 무척 궁금했던 모양이다.
아이야! 본래 잔치는 안 하는 거란다.
그리고 내가 학교에 들어갈 무렵 뒷방에서 아이가 태어났다. 고종사촌 여동생이었다. 외가에서 태어났다고 외숙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리고 얼마 후, 바로 이웃에 집이 비자 아버지는 할머니와 상의해서 그 집을 사서 고모의 세 식구를 따로 살게 살림을 내주었다. 살림이 나고도 고모부는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함께 지었다.
우리 동네는 황 씨 집성촌이다.
온 동네가 누런 황 씨 집성촌! 우리 황 씨들은 동네에 몇 집 되지 않는 다른 성씨를 투고 ‘타성받이’ 라고 부를 정도의 집성촌인데 항렬이 낮은 나는 골목을 나서면 전부가 아재고 할배였다.
종갓집 차손이라 항렬이 낮은 건 당연한 이치인데, 동네에서 박 씨라고는 고모부뿐이었다. 박 서방! 동네 박 서방이 되었다. 고모부가 오갈 데가 없는 고아라는 점과 술을 많이 마신다는 점을 제외하면 나무랄 데가 없는 사람이라고 할머니는 말했지만, 다른 이들은 그런 점을 제외하면 고모에게 장가를 오겠느냐고 빈정대기도 했다. 고모부는 한 번 술을 마시면 이틀이고 사흘이고 들에 나가지 않고 늘어져 누워 있었다. 몸을 가눌 수 없을 지경으로 마셨다.
아픈 섬을 거느리고.
이웃으로 이사를 하고부터 할머니는 고모의 살림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정말 아픔 섬을 거느리고 사셨다. 고모는 할머니에게 아픈 섬이었다. 종일 고모네 아기를 봐주고 고모네 집에서 일하시다가 때가 되면 밥은 집에 와서 자셨다. 할머니는 밤잠도 설치셨다. 사랑채에 누워 풋잠을 자다가 고모네 집에서 아기 울음이 들리면 밤중이고 새벽이고 얼른 가셨다. 고모부는 술을 자시고 주무셨고 고모는 귀가 들리지 않기에 아기가 울면 그 방에서는 아무도 모른다.
그 점을 염려하시고 평생을 선잠을 주무셨다.
고모를 너무 편애하니까 돌아가신 어머니와의 갈등이 없을 수 없었다. 동네에 잔치가 생겨 갔다가 음식을 싸 오면 집으로 오시지 않고 고모네로 가서 아이들에게 먹였다. 할머니는 모든 주파수가 고모네 집에 맞추어져 있었다. 우리 집은 종갓집이다. 쇠락한 종갓집에 해당할 정도로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제사가 많은데 제삿날이면 고모가 와서 거들었다. 고모는 부엌에서 어머니와 제수 장만을 하고 있는데 할머니는 만든 음식을 고모네로 가져가 아이들을 먹이기에 바빴다. 그렇다고 크게 살림이 축나는 건 아니지만, 어머니는 못마땅했다. 고모부가 남의 집 머슴을 살고 고모가 품을 팔아 전답을 장만할 때 할머니는 기뻐서 며칠간 잠을 설칠 정도로 좋아하셨다. 고모는 딸 둘에 아들 둘을 두었다. 그 아이들은 모두 할머니가 업어서 키웠다. 고모가 들일을 나가면 아이들은 당연히 할머니 몫이었다. 어린 외손을 업고 들로 고모를 찾아가서 젖을 먹이는 일까지 했다. 할머니는 우리 형제들이 아픈 데는 관심이 없었다. 고모네 아이들이 아프면 며칠이고 잠을 설쳤다.
돌아가신 어머니에게는 그게 늘 못마땅했다.
어머니가 불만을 토로하면, 너는 어째서 병신 자식이 없노? 싸움 끝에는 그런 심한 말까지 했다. 어머니에게 자식이면 할머니의 손자, 손녀가 되는데 그런 말을 서슴없이 퍼부었다. 그런 말을 어린 내가 들어도 섬찟했다.
어머니가 젊어서 돌아가시고 새어머니가 들어와도 마찬가지였다. 새어머니도 며칠을 살아보니 그게 눈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그런 갈등이 생기면 누구의 편에도 서지 못했다. 여동생이고 어머니의 일이라 입을 다물고 계셨지만, 어지간히 속이 상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할머니 정도가 얼마나 심했기에 동네 친척들이 딸만 자식이냐고, 너무 편애한다고 말을 건네면 할머니는 이성을 잃을 정도로 괘씸하게 여기셨다. 자식으로 병신이 없어서 이 찢어지는 심정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고모부가 할머니를 고맙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술에 취하면 할머니께 막말하고 급기야 아버지, 종손이라 동네에서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아버지께 대들기까지 했다. 고모부 술 때문에 집안이 온전할 날이 없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새어머니와 할머니의 갈등은 더 심해졌다.
새어머니는 할머니가 고모를 너무 편애해서 속이 상해서 아버지가 병을 얻었다고 퍼부었고, 할머니는 박복한 년이 들어와서 집안이 기운 것이라 했다. 그렇게 고부간의 다툼에서 나는 누구의 편에도 서지 못했다. 그렇게 싸우고도 한솥밥을 먹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태인가 있다가 고모부가 병석에 누웠다. 아버지와 나이 차이가 있으니, 아버지보다 더 젊어서 자리를 보전하게 된 것이었다. 예상대로, 술병이었다. 병원에 다녔지만, 간이 회생하지 못할 정도로 기울어졌다는 진단을 받았다. 할머니는 고모를 과부로 만들지 않기 위해 백방으로 약을 구하러 다니셨다. 고모부를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고모를 위해서 약을 구하러 다녔다.
그러나 고모부라는 배는 복원력을 상실할 만큼 기울어졌다. 백약이 무효였다. 고모부가 죽자, 할머니는 우리의 종갓집 선산발치에 묻어주길 원했다.
그 너른 산에 서너 평만 하면 되는데.
안 된다!
그렇게 반대를 피력한 건 바로 나였다.
살아서 평생을 아버지 속을 썩이고 살았는데 죽어서까지 그곳에 따라간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었다. 내 말에 할머니가 상당히 서운해했지만, 안되는 것은 안 된다. 당시에는 나도 머리가 굵었다. 할머니야 돌아가시면 그만이지만 나중에 산소관리를 누가 하냐? 먼 훗날을 생각해서도 그건 안 되는 문제다. 고종사촌 동생들이 있지만, 떡잎을 보니 산소관리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라 내가 주선해서 공원묘지를 샀다. 고모가 나중에 갈 자리까지 사고 그리로 모셨다. 그 일은 전적으로 내가 나섰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건 잘한 일이다.
고모부가 죽자, 고모는 활공의 자세로 서 있는 상태에서 날개를 펼쳤다. 공부를 더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고모는 귀가 들리지 않으니, 텔레비전을 보아도 알아듣지 못한다. 고모는 시골에서 자라서 수화를 익히지 못했다. 정정하자. 고모는 공부를 더 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세상을 알고 싶었던 모양이다.
당시에 그 동네에서 신문을 구독하면 이틀이 지나서 우체부가 배달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고모는 신문을 정기구독했다. 정치, 문화, 경제를 알고 싶었는지 혼자서 농사를 지으면서 틈틈이 신문을 보았다.
신문을 보다가 의문이 일면 메모를 해두었다가 내가 가면 묻곤 했다.
보통 사사로운 이야기야 알아듣지만, 복잡한 이야기는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그리는 필담이 소통의 방법이었다. 고모는 들일을 마치고 들어오면 신문을 가십이나 광고까지 꼼꼼하게 읽는지. 언제 가서 보니 세계문학 대전집을 사려니 너무 비싸서 시내까지 가서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고 있었다. 그걸 기화로 외국 문학이 그렇게 재미를 들였는지, 시골에서 어떻게 구했는지 오에 겐자부로와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까지 독파했다. 생각하니 고모의 독서량은 나를 능가했다. 가끔 고향에 가면 고모는 어느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기도 했다.
지방지 신문도 이틀이 지나야 우체부가 던져놓는 시골이었지만, 고모는 문화생활을 멈추지 않았다. 고모는 더 이상 농사나 짓는 촌부가 아니었다. 매일 유영하며 놀던 곳이 아닌, 더 넓고, 물빛이 다른 바다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고모는 책을 거의 시내 도서관에서 빌려다 보았다. 오로지 산 책이라면 국어대사전뿐이었다. 그 국어대사전은 나달나달해질 정도로 끼고 살았다.
고모부 다음으로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야 아흔이 다 되어서 천수를 누리고 가셨지만, 고모로서는 지팡이를 잃은 격이었다.
대실댁이 딸을 두고 우째 눈을 감았노?
동네 사람들은 할머니의 명복을 그런 말로 빌었다. 아픈 섬을 거느리고 살던 대륙이 사라졌다. 원래 부모가 죽으면 잘 사는 자식들은 별로 울지 않는다. 애절하고 절절하게 우는 자식은 형제 중에서 살기 힘든 딸이다. 그러나 천수를 누려서인지 고모는 그다지 울지 않았다.
이미 고모는 딸이 출가해서 외손이지만 손자를 보고 있던 나이였다. 고모의 근심이라면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보다 아들이라고 둘이 있는 것이 늘 사고를 치는 것이었다. 고모는 항상 아들을 보고, 제 아버지를 닮았다고 했다. 내 눈에도 그 점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술을 많이 마시고 행동이 재바르지 못한 점, 부지런한 면은 없고 시키는 일을 마지못해 건성으로 하는 건 고모부를 빼다 박았다. 고모는 서방 복이 없으면 자식 복도 없다고 말했다. 누구에게 들은 말이 아니라 책에서 읽은 말일 것이다.
고모는 아들이지만, 총애하지 않는 눈치였다.
아이들을 보는 눈에 항상 객관적인 잣대를 들이대고 있었다.
고종사촌 중에서 작은놈 천호는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가출을 자주 했다. 결국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일찌감치 연애해서 아이를 낳았다. 지금 생각하니 그건 잘한 일이다. 그러나 큰 놈, 천수는 마흔이 다 되도록 장가를 가지 못했다.
천수는 고모의 부탁으로 군에서 제대하자, 중장비 업자인 내가 데려다 중장비를 가르쳐 중장비 기사로 만들었다. 기사로 만들어 한참 동안 내가 데리고 있었다. 그 녀석을 데리고 있으면서 정말 속이 많이 썩었다. 월급을 주면 이틀이고 사흘이고 무단결근이다. 그런 날 일은 잡아놓았는데 기사가 나타나지 않으니, 장비를 내보낼 수가 없었다. 현장에서는 인부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독촉 전화에 시달리다 하는 수없이 내가 직접 중장비를 끌고 뒤늦게 현장에 투입한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아버지께서 고모부가 술을 자시고 사흘이고 나흘이고 퍼져 누워 있는 바람에 속을 태웠는데 이젠 그 녀석이 내 속을 태우는구나. 지금 돌이켜도 생각하기 싫다. 그런 것까지 대물림한다는 사실이 너무 싫었다.
녀석으로 인해 속을 태워보니 옛날에 아버지께서 속이 이렇게 탔겠구나, 부엌 아궁이의 부지깽이도 바쁘게 혼자서 움직인다는 농번기에 사흘이고 나흘이고 퍼져 누워 있었으니, 아버지께서 속병을 키우는데 고모부가 일조한 게 틀림이 없다고 생각하니 녀석이 싫었다. 내보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고모를 찾아갔다.
찾아간 그 시간 고모는 독서에 심취해 있었다. 나는 제목도 알지 못하는 영미문학 서적이었다.
돋보기를 벗는 고모에게 말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건 필담으로 했다.
이렇고 이러니 천수를 도저히 데리고 있질 못하겠다고. 다른 기사들마저 버릇 버리겠으니, 다른 회사로 보내서 버르장머리를 고쳐놓아야 한다고.
고모는 그런 면에서는 말이 통했다.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시각을 분명히 지녔다. 절대로 자식이라고 편애하지 않았다. 마음 잘 먹었다고 했다. 그동안 가르쳐서 기사로 키워 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라고 했다.
당시에는 중장비 기사가 귀해서 그만두면, 다음날 바로 자리를 알아볼 수가 있던 시절이었다. 당시에 나는 사무실 옆에 기사들 숙소를 정해놓고 있었다. 승용차가 보편화되지 않은 시절이었으니 아침 일찍 현장에 나가려면 그런 시스템을 갖추어야만 했다.
녀석은 숙소에서 짐을 쌌다.
좁은 바닥에 특수직이니, 어느 기사는 어떻고, 어느 기사는 어떻다는 소문이 나서 다 알게 마련이다. 회사야 다르지만, 기사들끼리는 유대관계가 형성되어 누가 그만두면 바로 소문이 나서 일자리 섭외가 들어온다. 그러나 녀석에겐 그런 섭외가 없었다. 괜히 소개해 주었다가 나중에 차주로부터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게 마련이라 모두 몸을 사리는 눈치였다.
이 좁은 바닥에 자리가 없자 녀석은 다른 도시로 옮겨가서 자리를 잡은 모양이었다. 그곳으로 가서도 소문을 들으니 제 버릇 개에게 못 주고 있었던 모양이다. 고모가 걱정하는 건 혼기를 놓쳤으니, 몽달귀신으로 늙지 않을까 그게 걱정이었다.
키가 작고, 앞머리가 살짝 대머리에 돈이 없는 늙은 총각에게 시집올 여자는 없었다. 그건 고모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우리 집안에야 대머리가 없지만, 그런 건 친탁을 했다. 고모는 나쁜 건 모두 친탁을 한 녀석이라고 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쁘다고 했지만, 고모는 아니었다. 정확히 객관적인 판단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고모가 나를 불렀다. 일종의 SOS였다.
고모에게서 특명이 내려졌다.
베트남 여자를 찾으라는 것이었다. 어차피 고모는 한국 며느리를 보아도 말도 통하지 않을 터인데 베트남 여자라도 상관없다는 것이었다. 결혼지참금을 주어야 한다면 필요한 돈은 고모가 주겠노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말해 베트남 여자를 사 오자는 말이었다. 그동안 녀석이 모은 돈은 0이었다. 중장비 기사 십오 년이면 상당한 액수의 돈을 벌었지만, 유흥비로 탕진하고 지닌 건, 무일푼!
고모의 특명이 떨어지자, 백방으로 수소문을 해서 여자를 찾았다. 정보망을 펼치니, 국제결혼 정보회사를 통하지 않고 여자를 찾을 수가 있었다. 언니가 한국으로 시집을 와서 따라 들어와 공장에 다니던 베트남 처녀였다.
고종사촌 동생과 나이 차이는 좀 있지만 그런 걸 따질 입장이 결코 아니었다.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하기로 하고 일단 집으로 데리고 왔다. 언니가 한국에 와서 사는 걸 보고 베트남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국인과 결혼하고 싶어 하던 처녀다. 녀석은 그때부터 집에서 출퇴근했다. 도시가 팽창되어 고향이 도시의 변두리가 되어서 강에 다리가 놓였고, 녀석은 승용차를 가지고 있으니, 출퇴근에 그다지 어려움이 없었다.
고모는 안방을 며느리에게 내주고 작은방으로 물러났다.
인간이라는 기계는 정말 희한하지, 그렇게 여자를 붙여주었더니 곧 아이가 태어났다. 자동으로 아들을 낳았는데, 고모도 고모지만, 동네 노인들이 더 좋아했다.
동네 노인들은 어떻게 손꼽아 계산했는지, 십칠 년 만에 골목에서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반가워했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 아이들로 와글거리던 골목이 텅 비어 적막이 감돌았는데 이제야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는 것이다.
아내가 있고 아이가 태어났으니 정신을 차릴 줄 알았는데 녀석은 어느 정도 지나자 또 술타령이었다. 신혼 초에는 퇴근하면 곧바로 집으로 향하던 녀석이 색시와 아이도 시들해진 모양이었다. 그런 일이 빈번 하자, 베트남 처녀가, 아니 이제 제수씨라고 하자. 그 제수씨가 두 번이나 아이를 버리고 집을 나가서 자기 언니네로 갔다.
베트남 제수씨의 입장에 서서 바라보면 시어머니와는 말이 통하지 않지, 남편은 매일 술타령이지, 무슨 재미를 붙이고 살겠는가?
나는 처음으로 녀석을 불러 호되게 나무랐다.
너 같으면 무슨 재미로 살겠나?
베트남 여지도 사람이다. 일이 없는 날이면 데리고 나가서 이마트에 쇼핑도 좀 하고 계곡이나 유원지로 데리고 다니면서 바람도 좀 쐬어주라고 나무람 끝에 알아듣게 타이르기까지 했다.
고모가 바라는 바도 그것이었다.
녀석은 입으로만 알았다고 했다. 그때만 모면하면 그뿐이다. 녀석은 늘 그렇게 살았다. 내 입으로 할 말은 아니지만 어쩌면 제 아버지를 그런 면에서는 그렇게 닮았는지.
세월은 나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고모도 늙었다. 내 나이 환갑 언저리니, 고모는 노인으로 보일 정도로 늙었다. 요즘 노인들도 허리가 굽는 사람이 없는데 고모는 들일을 많이 해서 허리가 굽었다. 장애인에다 허리가 굽으니, 정부에서 네발이 달린 전동오토바이가 지원되어 고모 앞으로 한 대가 배당되었다. 정부에서 그런 걸 지원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언젠가 들어가니 고모는 그 전동오토바이를 타고 들에 다니곤 했다. 조작 방법도 간단하고, 참 편리해 보였다. 고모에게 얼마를 주고 샀느냐고 물으니, 정부에서 지원으로 받았는데 아주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고 했다. 요즘은 들길도 다 포장이 되어서 들에 다니기에 그만이라고 했다. 하지만 위험한 물건이라고 생각했다. 고모는 귀가 들리지 않으니, 전동오토바이를 타고 들길을 가다가 뒤에서 차가 와도 모른다. 그러니 남들보다 더 위험한 물건임에는 틀림이 없다.
고모가 전동오토바이 뒤에 낫과 호미를 싣고 또 들일을 하다가 잠시 그늘에서 읽을 책을 싣고 다니는 것을 보면 그 전동오토바이는 고모를 위해서 태어난 물건인 듯했다. 고모는 들일을 하면서도 책을 놓지 않았다.
고모는 남들과 소통은 안 되고 책을 통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었다. 그게 고모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책을 많이 읽으면 눈에 힘이 실리고 빛난다. 고모의 눈은 다른 촌부들의 그것과 달랐다.
사고가 나던, 그날 저녁도 고모는 책을 읽고 있었던가 보다. 늦게까지 고종사촌 동생이 돌아오지 않고 베트남 며느리는 거실에서 아이를 재우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기다리는 며느리가 측은했든지, 고모는 아들을 찾아 나섰다. 녀석은 일을 마치고 집에 오다가 면 소재지에서 친구들과 술추렴을 하는 모양이다. 도회의 변두리이니 음주단속이 없는 길이란 걸 알고 시장통에서 매일 술을 마신다는 걸 고모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다른 사람 같으면 핸드폰으로 빨리 들어오라고 전화하는 게 가능했겠지만, 고모는 그런 전화를 할 수가 없었다.
고모는 직접 찾아 나섰던 모양이다.
그때가 시간이 새벽 두 시였다.
다음 날, 아침 일곱 시에 일을 나갈 녀석이 그 시간까지 술을 마시고 있었다는 걸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고모는 전동오토바이를 타고 면 소재지로 찾아 나가는 길이었고, 녀석을 술을 마시고 차를 끌고 들어오던 길이었다.
그 순간을 상상하면 전율이 인다.
마을에서 한길로 나가는 입구, 급커브 농로에서 술에 취한 녀석은 전동오토바이를 탄 고모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모양. 전동오토바이가 날아가고 고모는 더 멀리 수로를 넘어서 남의 논바닥까지, 일흔두 살의 생애와 함께 날아갔다.
그 소식을 새벽 다섯 시가 넘어서 들었다.
병원으로 달려가 자초지종 이야기를 듣고 그때까지 술이 덜 깬 녀석의 따귀를 후려쳤다. 그 사고는 지방 신문의 가십 기사로 실렸다.
녀석은 가해자이자 최대의 피해자였다. 녀석에게 처벌이 내리면 베트남 며느리가 가버릴 것이고 가정이 파탄 난다. 비록 고모는 죽었지만, 가정이라는 울타리는 지켜야 했다.
고모의 장례보다 먼저 형님과 빈소에 마주 앉아서 그 점을 냉정하게 모색했다.
장례를 지르고 동네에 다니면서 탄원서를 받자.
녀석을 장애인인 모친이 혼자 사는 것이 마음에 걸려, 봉양하느라 시골에서 출퇴근하는, 천하에 없는 효자로 만들어야 했다.
장례를 치르고 고종사촌 여동생과 탄원서를 받으러 다녔다. 그게 고모를 위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 녀석이 형사 처벌받아 구속되면 고모의 집안이 산산조각 나고 파편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 그게 내 주장이었고, 형님과 고종사촌 여동생도 내 뜻에 순순히 따랐다.
혹시 탄원서가 무용지물, 효력이 없을지 몰라서 그 녀석은 모르게, 친구 변호사를 주선해서 탄원서를 넣어 사회봉사 두어 달 하고 운전 면허가 취소되는 걸로 사건을 종결지었다.
그게 벌써 사 년 전의 일이다.
동생이 제삿날이라는 걸 알려주고 갔는데 고모를 기리다 보니 마음이 심란하다.
들고 있던 시집을 건성으로 넘기고 있었지만, 활자가 그냥 눈을 밟고 지나갔다. 몰랐으면 모르되 알았으니, 저녁에 고모 제사에 잠시 다녀와야 하겠다. 제주인 녀석이 제사를 어떻게 모시는지, 정종이나 한 병 사 들고 다녀와야 할 일.
무슨 책을 내가 보고 있었지?
펼쳐서 든 시집을 접어서 표지를 다시 보았다.
아픈 섬을 거느리고.
표지에 세로로 적힌 표제를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제목의 활자가 드디어 살아서 꿈틀거린다.
아픈 섬?
할머니뿐만 아니라 내게도 거느린 아픈 섬이 있다는 생각이 슬며시 밀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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