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1126 / 예수님과 함께 품는 희망 (벧전1:3-9)
이청준 씨가 쓴 꽃씨 할머니라는 글에 보면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는 한 과부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결혼은 했으나 자녀도 낳지 못하고 남편마저 일찍 떠나보낸 탓에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하며 매일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 저에게는 왜 자녀를 주지 않으시고, 남편은 일찍 죽게 하시고, 왜 저는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처지인가요? 이제라도 하나님! 남은 생애만이라도 저도 뭔가 보람된 일, 가치 있는 일을 하게 해 주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할머니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셨습니다. ‘너는 생산의 능력은 없지만 대신 세상을 아름다운 꽃동산으로 만들 능력을 주겠다!’라고 하시며 할머니에게 꽃씨 주머니를 주셨습니다.
이후 할머니는 가는 곳마다 꽃씨를 뿌리고 다녔고 그 덕에 세상엔 이름은 모르지만 아름다운 들꽃들이 피어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씨는 뿌리는 곳에서 피어납니다. 또한 씨는 어떤 씨를 심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보여 주는 꽃이나 열매가 달라집니다.
무엇을 심어 무엇을 얻을 것인가?
돈, 명예, 권력, 힘 같은 것들은 세상을 살아 나가며 얻게 되는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심어야 인생에서 그런 것들을 꽃 피우고 열매로 거둘 수 있게 될까요?
현실적으로 그런 씨는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세상을 헤쳐 나가야 하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조차도 세상을 살며 심고 가꿔야 할 씨를 하나씩은 주셨습니다.
그게 어떤 씨일까요?
하나님이 주신다면 여러분에게는 어떤 씨를 주셨으면 좋겠습니까?
여러분이 무얼 기대하시든 그런 씨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주신 씨앗은 그 이름이 ‘희망’입니다.
너무 진부한 것 같다고 하시겠지만 씨는 심어야 피어나듯 희망의 씨앗도 심는 자만이 그 꽃과 열매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심지 않으면 평생 수고만 하다가 끝나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신 씨앗이 희망이라면 우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기에 당연히 하나님이 주신 희망의 씨를 뿌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때도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신자 불신자를 막론하고 희망은 누구에게나 좋은 것이고 누구나가 가져야 할 덕목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각 사람이 가지는 희망이 모두 다 하나님이 주시는 ‘희망의 씨’는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희망의 씨는 무엇이란 말인가요?
성경은 그걸 ‘소망’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굳이 구별하지 않고 희망을 노래하고 소망을 말하듯이 사전의 의미로만 보면 희망이나 소망은 비슷한 말입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좀 다릅니다. 세상이 희망을 말할 때라도 성경은 희망이 아니라 소망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신앙인에게 있어서 희망과 소망은 무엇이, 어떻게 다를까요?
희망에는 개인의 바람은 있지만 그것을 이루어 줄 대상이 없습니다. 반면에 소망은 개인의 바람과 함께 그것을 이루어 줄 대상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소망을 이뤄주실 대상이 되십니다.
실제로 헬라어로 소망은 ‘엘피스’라는 단어를 쓰는데, 히브리서 11:1절을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라고 할 때의 ‘바라는 것’ 역시 ‘엘피스’라는 단어를 씁니다.
이런 이유에서 소망이란 ‘믿음으로 바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소망을 다른 말로 하면 희망은 희망이지만 ‘예수님과 함께 품는 희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도에게 있을 시험이나 고난을 말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우리에게 소망이 있게 하셨다.
이 말씀은 인류의 구원사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있어 획기적으로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은 왜 이 땅에 오셔서 그 숱한 고초와 십자가의 죽음을 죽으셔야만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는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도 친히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죄 문제를 처리하심으로써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원 사역을 완성하셨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세상에 적용하는 삶을 살려고 하면 예수님의 고난과 관련하여 좀 더 실제적인 이유를 알아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과 죽으심이 그로 인해 우리가 구원받게 되었다는 것에 더하여 어떤 다른 이유가 있는가 하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과 오신 후에 ‘하나님이 달라지셨다’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변하셨다거나 다른 분처럼 바뀌셨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세상에 보여지는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관련하여 달라진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특성은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두 개의 큰 틀로 나타납니다. 공의는 ‘죄를 심판하심’이고, 사랑은 ‘죄를 용서하심’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가능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다면 하나님은 그를 심판하셔야 할까요? 용서하셔야 할까요?
공의의 하나님이시니 죄를 심판하시는 게 맞는데,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시니 죄를 용서하셔야 맞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하나님이 뭘 하시든 문제가 되고 말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공의를 앞세워 심판하시면 사람들은 분명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며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할 것이고. 사랑으로 용서하시면 사람들은 틀림없이 하나님은 공의로우신데 어찌 그럴 수 있느냐고 할 겁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옛 신파극의 대사처럼 공의를 택하자니 사랑이 울고, 사랑을 택하자니 공의가 울고. 그렇다고 못 본 체하고 모른 체 하며 넘어갈 수도 없는 게 인간에게 있는 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태초 이래로 항상 공의로우셨으며 동시에 사랑이셨다는 것엔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구약에 보면 하나님이 사람의 죄를 심판하시다 보니 결과만 놓고 보면 마치 하나님이 죄를 지은 사람을 심판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으로 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그땐 그랬던 하나님이 예수님이 오신 이후엔 달라지셨다는 겁니다. 공의의 하나님에서 사랑의 하나님으로 바뀌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이 달라지거나 바뀌신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만 놓고 보자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을 기점으로 하나님은 사람에게서 죄와 사람을 분리시키셨다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에게 있던 죄는 따로 떼어 내어 예수님에게 담당케 하셨고 그 덕분에 인간은 죄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언제라도 죄를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실 수 있게 되었고, 또한 언제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구원하실 수 있는 사랑의 하나님이 되신 겁니다.
이게 달라진 겁니다. 예수님 이전의 공의의 하나님이 예수님 이후엔 사랑의 하나님으로 내게 다가오신다는 점이 달라진 점이고 이런 달라진 점이 우리가 반드시 예수님을 믿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세상에서든 죽음 이후에든 예수님 없이 하나님 앞에 서면 누구든 예외 없이 공의의 하나님을 만나게 되지만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설 때면 누구라도 하나님을 언제든 사랑의 하나님으로만 만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의 ‘희망의 씨’는 세상에서 가지는 막연한 ‘희망 사항’이 아니라, ‘소망’ 즉 ‘예수님과 함께 품는 희망’이어야 하고, 이 말을 달리 표현하자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턴 어떤 형편에서든 늘 ‘예수님을 향한 소망’을 가지려 하시고, 매사에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인생의 모든 난관을 헤쳐 나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와 관련하여 시편 기자는 고백하기를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도 현실의 곤고함과 어려움으로 인해 지금은 눈물을 흘릴지라도 그런 중에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씨를 뿌리기만 하면 반드시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될 것이라는 사실만은 흔들림 없이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결국엔 기쁨의 단을 거두는 것.’ 이것이 우리가 언제든 예수님과 함께 품는 희망 즉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기에 여러분이라면 세상을 사는 동안 어떤 형편에 처해 살게 되든지 간에 예수님이 모든 것의 희망이 되심을 믿으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믿으신다면 또한 알아야 할 것이 소망 즉 예수님과 함께 품는 희망을 가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방법입니다.
예전에 어느 여집사님이 건망증을 걱정하며 기도해 달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얘기 도중 건망증 증상을 예로 드시는데 하루는 저녁 밥상 다 차려 놓고 식구들 밥을 푸려고 밥통을 열었더니 쌀과 물은 있는데 밥은 없더랍니다. 알고 보니 쌀을 씻어 밥통에 넣는 것까진 했는데 그만 깜빡하고 밥통 코드를 전기 콘센트에 꽂지를 않았다는 겁니다.
집사님을 위해 기도해 드린 후에 당시 집사님이 얘기했던 증상을 통해 언뜻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는 교훈이 있었습니다.
집 안에 전기 콘센트가 있고 아무리 좋은 밥통이 있다고 해도 밥통의 코드가 전기 콘센트에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밥은 지어지지 않습니다.
그렇듯이 하나님의 능력과 우리의 삶을 연결시켜 주는 코드가 믿음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함께’라는 말은 다른 표현으로는 “예수님과 연결”이라는 말로도 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 희망을 품기 위해서라면 예수님과 믿음으로 연결되어야만 가능한데 우리가 그런 믿음을 가지려면 어떻게 믿어야 할까요?
의외로 간단합니다. 한 번 따라 하세요. “주여! 믿습니다!”
그러면 됩니다. 속으로든 겉으로든 ‘주여 믿습니다’라는 이 한마디가 예수님의 능력과 우리의 삶을 연결해 줍니다.
실제적인 적용을 위해 제 개인적인 경험을 소개하자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게 뭘까요?
요한복음 5;24절을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라고 하셨으며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17절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한 것으로 보아 우리가 ‘믿습니다’라고 할 때는 예수님이 나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믿어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주여! 믿습니다!”라고 할 때는 앞에 제가 늘 묵상하는 요한복음 14:1절 말씀 즉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를 고백하고 나서 뒤에 “주여! 믿습니다!”를 덧붙입니다.
“성경 말씀” 플러스(+) “주여! 믿습니다!”
이렇게 하는 걸 저는 ‘약식 기도’라는 저만의 명칭으로 부릅니다만, 바라기는 여러분도 여러분 각자의 약식 기도를 드림으로써 매 순간 예수님과 연결되어 예수님과 함께 품는 희망을 통해 예수님이 역사하시는 응답을 누리는 삶을 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때 “주여! 믿습니다!” 앞에 붙이는 말씀은 뭐가 돼도 좋습니다. 예를 들어 “믿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여길지어다. 주여! 믿습니다!” 또는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니. 주여! 믿습니다!”처럼. 여러분이라면 얼마든지 다양하게 하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문제는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 했고 성경 말씀에도 너희가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했으니 “주여! 믿습니다!”가 됐든 ‘약식 기도’가 됐든 직접 ‘해보는 자’만이 그 결과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아는 게’ 아니라 ‘해보는 것’입니다.
세상사 그 무엇이든 하나님이 막으시면 사람이 아무리 애를 쓰고 안달해도 막힙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여시면 어느 누가 막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우연이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우연도 지나고 보면 믿음 안에서는 필연적이었던 것이 되는 것이기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늘 필연만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만 믿는 한은 필연적으로 결국엔 소망한 대로의 길이 열릴 것입니다.
1994년에 심한 가뭄이 우리나라 전역을 휩쓸 때였습니다. 전 국민이 애가 탔고 군 인력이 지원되고 살수차에 소방헬기까지 동원되어 물을 공급해 보았지만, 땅은 계속 갈라져 갔고 한 해 농사 다 망친 줄 알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억수 같은 비가 쏟아졌습니다. 그러자 각종 장비며 군 병력까지 동원했어도 해결하지 못한 가뭄을 단 30분 내린 비가 해결했습니다.
다들 한시름 놨다 하던 차에 다음날 신문에는 ‘어제 내린 비는 5조 원의 가치가 있었다!’라고 하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우연이라고, 혹은 기적이라고들 말했지만 우린 이미 압니다. 실상 하나님은 마음만 먹으시면 순식간에 5조 원까지도 쏟아부으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우연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이제부터는 정식 기도든 약식 기도든 늘 하나님과 연결하는 믿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품는 희망을 안고 일상을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때론 능력이 없고 보잘것없는 나의 모습이라고 할지라도 믿음 안에서의 소망마저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힘은 작은 힘처럼 보여도 결코 작지 않습니다.
엘리자베스 노벨이란 사람이 쓴 ‘조금’이라는 동시를 보면 ‘설탕을 조금만 써도 음식의 맛을 낼 수 있습니다. 비누를 조금 써도 몸을 깨끗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햇볕이 조금 비춰도 새싹이 힘차게 자라날 수 있습니다. 연필이 조금 남아도 아름다운 글 한 편을 쓸 수 있습니다. 양초가 조금 남아도 주위에 환한 빛을 밝힐 수 있습니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저는 이 시에 이런 문장을 더해봤습니다. ‘믿음은 조금만 있어도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할 수 있다.’
그러니 절대로 능력이 안 된다거나 가진 것이 없다고 내 입으로 말하지 마세요. 절대로 어렵다고 나 스스로가 인정하진 마세요. 하나님은 숫자나 물질을 통해서 일하시지 않고 믿음과 소망을 통해 일하십니다. 따라서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환경이나 형편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믿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예수님과 함께 품고, 함께 만들어 갈 소망을 주셨습니다.
이 소망을 하나님이 주셨으니 그 소망대로 하나님이 이루어지게 하실 것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부턴 언제 어디서든 “주여! 믿습니다!”라는 고백을 통해 늘 예수님과 연결되어 예수님이 행하시는 필연과 기적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